이우정(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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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 여성특별위원장
신설

제14대 전반기
이우정


제14대 후반기
문희상




이우정
李愚貞 | Lee Woo-jung


파일:external/people.phinf.naver.net/chosun_400020761.jpg

출생
1923년 8월 1일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現 포천시)
사망
2002년 5월 30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전주 이씨
학력
신북공립보통학교 (전학)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졸업)
경기고등여학교 (중퇴)
조선신학원 (신학 / 졸업)
토론토 대학교 엠마누엘 칼리지 과정 (수료)
종교
기독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4
경력
한국신학대학교 교수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 회장
여신학자협의회 회장
WCC세계선교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초대 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고문
신민주연합당 수석최고위원
민주당 여성위원회 위원장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5번 / 민주당)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수석대표
통일부 통일자문회의 통일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신학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교수 출신 정치인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2. 생애[편집]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현 포천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12대손이었으나, 11대조 복평군이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후계로 입적되어 법적으로는 용성대군의 12대손이 되었다.

이우정의 집이 바로 용성대군의 종가(宗家)였기에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할아버지는 신소설의 선구자인 개화지식인 이해조로, 당시 기준으로는 진보적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지만,[1] 이우정이 불과 4세 때 사망하였다. 그리고 가문의 종주가 된 아버지 이학주는 이해조와 반대로 아주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기에[2] 이우정은 어머니가 상당히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이우정이 전근대적 가족 제도의 문제점과 여성인권의 개선을 인식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1934년에 포천에서 경성부 도렴동[3]으로 일가족이 이사하였고, 신북공립보통학교[4]에서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5]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경기고등여학교[6]에 입학하였다.

경기고녀를 졸업하자 아버지가 사주단지를 들고 와 결혼하라고 종용하였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해 숨어있는 동안 기독교를 처음 접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이후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엠마누엘 칼리지 과정을 졸업하였다. 조선신학원에서 진보 성향 목사인 김재준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부모님을 모두 일찍 여의어서 오빠들과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냈다. 둘째 오빠 이우경은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6.25 전쟁납북당해 광산에서 노역을 하다 사망하였고 큰오빠는 페인트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역시 전쟁 때 인민군에게 압수당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1953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70년까지 재직하면서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하였다. 1953년 김재준 목사가 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뒤 세운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 서울지역 청계천 등 영세 공장단지 여공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작업장의 비위생과 사고 위험 요인을 목격하였고 이후 노동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기억록] 이하나, 이우정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직접 낭독하였다. 이것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한국방송공사의 편파방송에 항의하여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7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양김 단일화를 성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90년 보안사 사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관련 기사.

1991년 신민주연합당 창당에 참여하여 수석최고위원을 맡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5번)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3차 토론회에 권영자[7], 한명숙[8], 윤정옥[9]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3.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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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김시대〉의 이우정[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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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조의 소설들을 보면 여성인권을 주제로 다룬 것들이 많다.[2] 이학주는 평소에 아버지의 진보적인 성향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3]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 세종문화회관 뒷편.[4] 현재 신북초등학교.[5] 현재 덕수초등학교.[6] 현재 경기여자고등학교.[7] 당시 한국여성개발원 원장.[8] 당시 한국여성민우회 대표.[9] 당시 민주당 의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회장.[10] 출처: SBS 〈삼김시대〉 12회, 1998.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