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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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대십국시대의 10국(十國) 중에 하나인 남당(南唐)의 제3대 황제. 마지막 황제이기 때문에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2. 생애[편집]
남중국의 패권을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주의 대두로 위축되던 남당의 황제가 된 그는, 이제 조광윤이 세력을 확대해오자 겁먹어 국호를 당 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왕호를 황제에서 국주(國主)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천하를 갈라서 다스리면 안 되냐"는 이러한 애원[1] 에 "내 침대에 외간 남자가 코를 골며(他人鼾睡) 자는데 그냥 놔둘 수 있겠냐"며 그대로 남당을 정복해버렸다.
결국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위명후(違命侯)[2] 로 책봉되고 망국의 군주로 살다가 태종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시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얼마나 극악한 독극물을 썼는지 온몸이 우그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폴더폰 마냥 어깨와 엉덩이가 붙어버렸다고 한다.[3] 다만 그냥 비참한 죽음이었다고 보기 뭣한 것이, 그는 남당 제일의 명장으로 건국 때부터 나라를 섬긴 임인조(林仁肇)를 송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독살한 바 있었다.[4]
황제로서의 능력은 꽝으로, 국정을 제대로 살피는 것보다는 문학 작품을 짓고 부르는 데 더 열중했다.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1류였지만, 황제로서는 3류라는 평가조차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취미생활 좀 하겠다고 백성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는지 이욱이 사망했다고 하자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5]
원 부인인 소혜황후 주아황과 결혼해서 10년을 살았는데, 부인이 병석에 눕자 이를 간호하러 온 동생인 주여영과 눈이 맞아 부인이 죽은 후 동생과 재혼했다(자매의 터울은 정확히 14년이라고). 그래서 언니를 흔히 '대주후'(大周后)라고 했고, 동생을 '소주후'(小周后)라고 했다. 소주후의 운명은 망국과 함께 비참해지는데, 야사에 따르면 송 태종이 자주 소주후를 궁궐에 불러 겁탈했다고 한다. 이를 안 이욱이 분노하자, 그 때문에 송 태종이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사의 진실 여부는 차지하고, 부인인 소주후는 이욱이 독살된 후, 곧 세상을 떠난다.
3. 예술가[편집]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고, 예술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로 또 함께 이름이 높다. 남당의 수도인 금릉성이 포위된 마당에도 문학 작품을 짓고 노래부르는 데 열중할 지경이었으니…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화(書畫)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이였다.
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어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당대 서적에서도 황제로 태어나지 않고 문학가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와는 반대로 송휘종은 예술활동 한다고 벌인 일들이 너무 커서 정강의 변 이후 고종이 재건한 송 황실, 즉 남송은 송 황실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 원망 때문에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불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 중 '사(詞)'[6] 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 되는 송사(宋詞)에도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전기에는 황제로 기세등등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화려하고 로맨스 있는 문학을, 후기에는 망국의 군주로 유폐 생활을 해야 했기에 절절하고 감성있는 문학을 창작했는데 인간의 흥하고 쇠함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이욱의 작품은 후기작을 최고품으로 치며, 전기작도 고급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아래가 바로 문제가 된 우미인(虞美人)[7] 이라는 사(詞)이자 이욱이 후기에 지은 문학이다.[8]
절절하기 그지없다. 잘 나가던 시절에 지은 시 일곡주(一斛珠)와 비교해보자.봄꽃과 가을 달 언제 다하려나(春花秋月何時了)
지난 일 얼마나 그리운지(往事知多少)
작은 누대 어젯밤 또 봄바람이 불었는데(小樓昨夜又東風)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차마 옛 땅으로 고개 돌릴 수 없었네(故國不堪回首月明中)
조각한 난간 옥으로 깎은 섬돌 아직도 있으련만(雕欄玉砌應猶在)
아름답던 얼굴만 세월 따라 변했구나(只是朱顔改)
그대에게 묻노니 품은 수심 얼마인고(問君能有幾多愁)
봄 강물 동쪽으로 흐르는 만큼이라네(恰似一江春水向東流)
신기하게도 글을 쓸 때 붓이 아닌 비단을 김밥 말듯 말아서 글씨를 썼다고 한다. 아래 나오는 어필이 영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로 쓰는 일 자체가 매우 힘들다.아침 단장 막 마치고(晚妝初過)
침단향을 은은히 발랐네(沈檀輕注些兒個)
임을 향해 붉은 혀 살포시 드러내고(向人微露丁香顆)
한 곡조 맑은 가락 읊조림에(一曲清歌)
앵두 입술 잠시 벌어진다(暫引櫻桃破)
비단 소매 촉촉이 적시니 옅은 홍색 비끼고(羅袖裛殘殷色可)
잔은 깊은데 감긴 겉옷 좋은 술에 더럽혀 있네(杯深旋被香醪涴)
비단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니 교태로운 모습 한없어라(繡床斜憑嬌無那)
붉은 실을 씹다가는(爛嚼紅茸)
웃으며 임을 향하여 뱉네(笑向檀郎唾)
이욱의 어필
入其國,其教可知也。其為人也(예기·경해)
4. 둘러보기[편집]
[1] 중국에서 국호(國號)는 1자, 군호(郡號)는 2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국호를 두 글자로 하고 왕호를 가치중립적인 어휘로 바꾼 건 '개기지 않겠습니다. 제발 봐주십시오!' 라는 나름의 절박한 하소연인 것.[2] '위반하다' 할 때 그 위 자다. 즉 천명에 어긋났다는 비난투의 작호인 것(…)[3] 스트리크닌(Strychnine)의 작용으로 보인다.[4] 임인조는 송 태종도 두려워하던 명장으로,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남당에서 송에 보낸 사신에게 송 태종이 앞으로 임인조가 투항하여 거처할 곳이라는 집을 보여주어 사신이 이욱에게 임인조를 제거하라고 진언하게 된다. 이욱이 임인조를 죽이니 그의 군단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어, 이욱은 송군이 쳐들어오자 막을 군대가 없게 된다.[5] 같은 예술가 스타일의 송휘종은 당대에도 심각한 비판과 경멸을 받았던 걸 보면, 이욱은 나라를 잃어도 싼 인성의 소유자는 아닌 게 확실하다.[6] 한문 문체의 명칭. 중국 당대에 발생하여 송대에 성행하였던 시와는 형식과 풍격이 다른 운문이다. 중국 근세에 유행하던 서정시.[7] 詞牌(사패)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상 A라는 제목을 가진 곡조에 전혀 다른 노랫말을 붙였기 때문에 내용은 링크된 우미인과 아무 상관이 없다.[8] 등려군의 표준중국어 노래 幾多愁(얼마나 큰 걱정인지)로 각색되어 불리기도 한다. 들어보기. 幾多는 광동어에서도 '얼마'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며 표준중국어의 多少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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