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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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원대
李元大[* 호적상 이름이다. 본명은 李大로 표기한다.]


파일:이원대(독립운동가).png

1936년 1월 27일 모 경찰서 고등형사과에서 복사한 사진.
소학교 졸업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명
공문덕(孔文德), 마덕산(馬德山)
자 / 호
달문(達文) / 덕산(德山)
본관
경주 이씨
출생
1911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운산마을)[1]#
사망
1943년 6월 17일 (향년 31세)
중화민국 베이징시
학력
백학학원 (수료)
자천공립보통학교[2] (졸업 / 1회)
영천공립농업보습학교[3] (중퇴)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선영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및 공작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11년 12월 29일, 이원대는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동 운산마을)의 부농가에서 아버지 이중호(李重鎬)와 어머니 정오동(鄭梧桐)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백학학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22년 자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편입하여 1928년 1회로 졸업했다. 이후 영천공립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을 수료한 뒤 중퇴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어릴 적부터 정의롭고 외골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그는 줄곧 성인이 되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를 다졌었는데, 마침 친한 사이인 안병철의 권유를 받고 고향 친구인 이진영과 함께 1933년 8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안병철(安炳喆)은 중국에서 조선혁명군 간부 1기로 졸업한 인물인데 동기로 이육사가 있었다. 그는 2기 학생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공작원이었기에 정의롭고 의협심이 넘치는 이원대를 보고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이렇게 의열단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운 간부학교에 들어가 6개월동안 군사학, 철학, 정치학 등을 배웠다. 그 후 김구의 부탁을 받고 졸업을 앞둔 채로 14명의 동기와 한인 특별반에 입교했다. 한인특별반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했던 단체였다.

한인특별반까지 마친 이원대는 특파공작원이 되어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 중국과 협력하여 정탐, 암살, 시설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김원봉이 개편된 조선의용대에 청년장교들을 편성할 때 이원대도 초급장교로 거기에 포함되어 한중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데 참여했다.

이원대는 5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마전 전투를 벌였고 그는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역으로 포위하여 타격을 입히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히고, 베이징시에 있던 일본군 헌병대 본부에서 석 달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 뒤 전쟁통에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앓다가 1943년 6월 17일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사후 1977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30~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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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진영은 이웃 마을인 운산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조병진조재복은 이웃 마을인 월지마을 출신이다.[2]자천초등학교.[3]영천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