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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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GBDEFNISVUWJWFNCDPBW4UM4E.jpg

이명
이우필(李祐弼)

춘산(春山)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
(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사망
1945년 11월 28일[2] (60세)
황해도 벽성군 청단
학력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가족
아버지 이기초(이계초)[3]
아들 이만영, 이회영[4], 이준영
며느리 오혜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4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서 태어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민회에 참가했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고향 의주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내무비서국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8월 미국회의원단이 한국을 시찰 할 때 안창호, 여운형, 여운홍, 손두환등과 함께 접대,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1922년 10월 김구, 손정도, 양기하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이사, 경리부장, 이사장을 역암했다. 1923년 교민단단장 겸 인성학교 교장으로 인권옹호, 독립운동가 자제 교육을 담당했으며 도서관 신축, 보습과 설립등에 활동을 했다. 그뒤 교민단 회계검사원, 임시정부 내무총장등을 역임했다.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1절 기념식을 하자 사회자를 맡아 무궁화를 선창했으며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한문의 사장을 맡았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다. 또한 한때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는데 상당히 쉽게 풀려나 밀정으로 의심받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당시 체포,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거물에게 불과 3년 형이 선고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이 이유필이 변절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고 결국 이유필은 억울하게도 임시정부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일제의 기밀문서에서 "이유필을 처벌하지 않고 석방해 이를 이용하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친일논란이 해소되었다.

8.15 광복 후에는 고향 의주군에서 거주하다가 북한 지역에 소련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으로 월남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11월 28일 황해도 청단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 30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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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산 이유필 연구>(이현희, 1994)에 의하면 평리공파 39세손이라고 한다. 중시조 39세라는 의미로 보인다.[2]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1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3] <춘산 이유필 연구>(이현희, 1994)에 의하면 이기초(李基初) 또는 이계초(李啓初)라고 한다.[4] 우당 이회영과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