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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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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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은찬(李殷瓚)
이명
이언찬(李諺瓚), 이헌찬(李憲瓚)

여해(汝海)
생몰'
1878년 ~ 1909년 6월 16일 (향년 30~31세)
출생지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
본관
전주 이씨
사망지
서대문 형무소
매장지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천주교 공동묘지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2.1. 을미의병
2.2. 정미의병
2.3.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
2.4. 최후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을미의병[편집]


1878년경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종의 10남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며, 대사헌 이탁의 8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석하이고 동생은 이은호지만 성장과정이나 학통은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다. 1896년 음력 2월, 이은찬은 을미사변단발령에 반발하여 국모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이기찬(李起燦),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 모집 격문을 발송하고 금릉(金陵)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한 뒤 대구 진격을 준비했지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조동호와 함께 사로잡혔다.

2.2. 정미의병[편집]


이후 풀려나서 고향에서 은거하던 이은찬은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그해 9월 이구채(李球采)와 함께 해산군인 8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불러모아 원주에서 거병했다. 이후 그는 경북 문경에 은거하고 있던 경기도 여주 출신의 유생 이인영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관동창의대를 결성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서 거병한 허위 의병대가 원주에 이르자, 그는 허위와 함께 전국의병연합부대 결성을 추진했다.

1907년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편성해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했다.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 따르면, 이 결성은 이은찬의 지략으로 이뤄진 것이었으며 각 군의 장령(將領) 임명도 모두 그가 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13도 창의군은 1907년 12월부터 2달여 동안 서울로 진군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선봉대가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밀려난 데다 창의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잃어버린 나라는 3년 뒤에도 찾을 수 있지만 부친의 3년상은 미룰 수 없다"며 귀향하고, 의병부대 상호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이은찬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허위를 중심으로 조인환(曺仁煥), 왕회종, 김진묵, 김수민金秀敏), 박종한(朴宗漢)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임진강 연합의병'을 재결성했다.

임진강 연합 의병은 1908년 4월 21일 전국에 의병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했고, 5월에는 통감부 폐지, 외교권 반환 등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재차 서울 진격 작전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 등을 동원해 공세를 개시했고, 허위가 그해 6월 11일 체포되었고 이은찬의 의병부대에서도 임운명(林雲明) 등 120명의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에 투항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이에 임진강 연합의병부대는 각지로 흩어져서 각기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펼치며 일제에 맞섰고, 이은찬 또한 의진을 정비한 뒤 경기북부 연합의병의 결성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이은찬은 그해 10월 김귀손을 선봉장, 윤인순을 우군장, 정용대를 좌군장, 이계복을 군량장으로 하는 경기북부 연합의병 원수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후 경기북부 연합의병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각 부대는 제각기 독립부대로 활동하다가 때때로 대규모 연합작전을 펼쳤다. 또한 이은찬은 1908년 10월과 11월에 포천, 영평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량을 확보하는데 주력했으며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함으로써 민심 확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에 대해 일제는 <폭도일기>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은찬은) 국가적 지상(志想)을 갖고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민심을 수람하였다. 시사(時事)에 탁(托)하여 정의를 운위(云爲)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영합할 뿐 아니라 군자양식(軍資粮食)의 징발도 직접 세민(細民)으로부터 주구(誅求)하는 행동을 피하고 각 면장 등에게 통지하여 징집시켰다. 또 음식물 기타 구입 물품의 대금도 부하를 경계하여 모두 그 지불을 게을리하지 않고, 혹은 군표(軍票) 등 유사의 징표로써 미곡에 대신하고 후일 그 대금의 지불을 약속함으로써 되도록 인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의 폭도(의병)는 물론 지방의 인민도 그 덕을 감사하고, 이(이은찬)를 부르기를 대장 또는 각하의 칭호로 하고, 완미(頑迷)한 사인(士人)은 기뻐 그를 영접하고 그 행동을 비밀로 할 뿐 아니라 보초가 되어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 행동을 통고함이 오히려 당연히 진력해야 할 의무로 오해하여 그 행동을 후원하니 여하히 이(이은찬)가 민심을 농락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2.3.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편집]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2월부터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12월 2일 포천군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의 병력과 배치 등을 탐문한 뒤 다음날 포천헌병분견소에 격문을 보내고 가평으로 이동했다. 포천헌병분견소는 격문을 받고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로 구성된 합동 토벌대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12월 4일 오후 연합의병부대가 가평군 상면 서파동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했다. 이때 이은찬은 일본군의 추격 상황을 파악하고 서파동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후방과 좌우 상기슭에 의병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매복시켰다.

이윽고 일본군 토벌대가 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통해 매복 위치까지 접근하자, 연합의병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이로 인해 2시간 만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채 패퇴했고, 연합의병부대는 적 구원대가 오기 전에 신속히 철수했다. 일제는 <폭도일기>에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대오(隊伍)를 정제(整齊)하고 내습하여 일일이 (이은찬의) 동령지휘(動令指揮)에 따라 사격하는데 그 행동이 엄정하고 모(侮)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저들에 주목하고 그 토벌에 밤낮 고심하고 있으나 변환출몰 하면서 공격하고 사라짐은 놀랄 만큼 신속한 것이었다.


이후 양주군 별래면으로 이동한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는 12월 19일과 20일에 걸쳐 퇴계원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교전하고 다시 포천으로 돌아왔다. 이에 일본군은 용산쉽대와 경성헌병대를 급파해 포천 지역에 경비 전화를 가설하여 그의 습격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했다. 이은찬은 1909년 1월 4일 2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포천 지역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봇대를 쓰러뜨린 뒤,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1월 7일에도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다른 부대로 하여금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게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이에 일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본격적인 토벌 작전에 착수했다. 강원도 금성수비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일본군이 토벌 작전을 개시, 이은찬의 연합의병부대를 추격했다. 이와 함께 1월 14일에 포천헌병분견소의 병력이 증원되었고, 1월 16일엔 포천군 관아에 보병 제13연대의 일부 병력을 주둔시켜 이은찬의 활동 근거지에 대한 경비를 한층 강화했다. 하지만 이은찬은 이에 굴하지 않고 1월 15일 밤에 300여 병력으로 포천군 내촌면 내리와 가산면을 기습 공격하고 양주로 다시 빠진 뒤 양주에서 김봉수(金鳳洙) 의병장과 함께 그동안 소모된 군자금 및 군량미를 보충하면서 10일간의 전투준비 기간을 가졌다.

1909년 1월 25일, 이은찬은 17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해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했다. 그리고 1월 26일, 28일에 의병부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연천군 적성면과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잇달아 공격했다. 또한 그는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대비해 연합의병부대를 분리 분산시켜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윤인순을 양주, 파주 방면으로, 정용대를 영평, 가평 방면으로 산개했고, 자신은 직계부대를 이끌고 1월 30일 포천 송우리를 거쳐 2월 3일 일동에 도착하여 주둔했다.

영평헌병분견소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했지만, 2월 4일 포천군 이동면 중진리에서 기습을 받고 패퇴했다. 2월 5일, 이은찬의 의병부대는 이동명 노곡리의 솔밭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추격하고 있던 영평헌병분견소와 포천헌병분견소 합동토벌대를 기습 공격해 패퇴시켰다. 이렇듯 이은찬의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2월부터 3개월간 포천, 가평, 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2월 상순에 이르러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고 사상자가 속출해 전투인력이 감소되자, 그는 전력보충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는 먼저 군자금 조달 방안으로 우편물 탈취계획을 세웠다. 재무서에 납부된 세금이 우편물과 함께 서울로 우송될 때 도중에서 습격하여 탈취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각 면, 동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세금을 모두 의병에게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또 그는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그 결과 그의 의병부대는 1909년 1월보다 100명 증가한 250명으로 늘어났다.

경기북부 연합 의병부대는 1909년 2월 20일 포천 가산면 용단동에서 일본군 수비대, 순사대와 교전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재개했다. 그는 이전에 분리했던 정용대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2월 25일 양주군 광적면에 잠입했다. 이때 미즈노 순사대가 이은찬의 연합의병부대가 위치한 곳을 탐지하고 하다 순사대와 합동으로 추격했다. 이은찬은 광적면, 백석면, 주내면 경계의 도락산 고지에 100여 명의 의병을 배치하고 산기슭 솔밭 사이에 정예 의병 40여 명의 매복시켜 협공 채비를 차렸다. 합동순사대가 매복 위치로 접근하자, 의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고 때때로 대포를 발사해 적을 공격하여 수십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 후 이은찬은 다시 윤인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무장대오를 확대 편성한 뒤 양주 두일리에 잠시 머물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양주 경찰서 소속 정찰대는 2월 27일 양주헌병분견소에 연락하여 합동으로 추격했다. 이은찬은 이를 피해 이동하다가 광적면 덕도리에서 고양헌병분견소 헌병들과 맞닥뜨려 교전했으나 양주헌병대와 경찰대까지 도착하여 합세하자 어쩔 수 없이 포천군과 인접한 주내면으로 퇴각했다. 이후 이은찬의 의병부대는 양주군 주내면으로 이동해 원잠리에 잠복했지만 3월 2일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 순사들이 기습해오자 탄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포천 방면으로 퇴각했다.

이후 이은찬은 어떻게든 군대의 역량을 보전하기 위해 애썼지만 3월 4일 포천군 무림리 전투와 3월 6일 양주군 현암리 전투에서 군,경 합동토벌대에게 패하여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자 어쩔 수 없이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를 해산시켰다.

2.4. 최후[편집]


이은찬은 의병대를 해산시킨 뒤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친일 밀정 박노천, 신좌균 등은 과거 이은찬의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이은찬을 서울로 유인했다. 이들의 함정에 빠진 그는 3월 31일 박노천, 신좌균을 만나기 위해 용산역으로 갔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성지방법정에 회부된 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당당했다.

내가 너희(일본인)들과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나의 거의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을 생각하랴.


1909년 5월 10일,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一枝李樹作爲船)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欲濟蒼生泊海邊)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빠졌으니(寸功未就身先溺)

누가 동양의 만년 평화를 기약하리오.(誰算東洋樂萬年)


1909년 6월 27일, 이은찬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31세. 그의 유해는 부하 박찬문이 거두어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묘소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은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