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태 묘 출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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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부인이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내와 뱃속 아이를 남겨둔 채 요절한 그를 그리며 쓴 간찰이다.
선조 19년(1586) 음력 6월 1일 안동에 살던 어느 여자가 남긴 편지로 문학사, 여성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높다. 또한 이응태의 가문인 고성 이씨 문중에는 수백여 년간 문중 인물들이 썼던 수많은 친필 간찰들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중 이응태와 관련된 여러 편지들과 함께 대조하여 당시 경상도 지역 사회문화생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이다.
필사본이 아닌 친필 원본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기 때문에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중국 국영 TV에서도 관련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미라 상태로 무덤에서 출토된 이응태의 할머니 일선 문씨(一善 文氏) 문계창(文繼昌)의 딸이나 그 외 가족들과는 달리 이응태 부인의 본명이나 기록은 전혀 남지 않았고, 부인이 묻힌 묘 역시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6년 뒤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나 그의 아들이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2. 발견[편집]
1998년 4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서 안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발굴팀에 의해 무연고 묘지를 발굴하던 중 발견되었다.
당시 안동시 정상동에서는 택지 개발[1] 이 한창이었고, 이때 개발 구역 내에 있는 선산의 대대적인 묘지 이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동대학교 측도 만일의 발견에 대비해 관련 유물 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한 문중이 조상의 묘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한 무연고 묘지를 발견한다. 이후 고성 이씨 집안의 묘임을 확인하고 고성 이씨 문중들에게 이를 알렸다. 이윽고 묘지의 이장과 함께 발굴에 들어갔으며, 75점의 유물과 함께 이 이응태 묘 출토 편지가 발견되었다. 해당 무덤의 피장자는 이응태라는 자로 밝혀졌으며 그의 추정 신장은 185cm로 거구였다.
3. 내용[편집]
- 편지에서 이응태 부인이 배고 있던 아이의 이름 '워늬(원이)'가 등장한다. 고성이씨세보 1권 참판공파 962쪽에 이응태의 무녀독남으로 '이성회(李誠會)'가 등재되어 있는데,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원이'는 정황상 태명인 듯하다.
- 아내가 남편 이응태를 '자내(자네)'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엔 순우리말 '자네'가 상대를 동등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높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8][9]
- '샹해'에서 '샹'은 常이며, 'ᄎᆞᄉᆡᆼ'은 此生, 즉 '이승'을 뜻한다.
4. 매체[편집]
- 〈미투리〉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적이 있다.
- 〈원이엄마〉라는 제목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네이버 뉴스 : 뮤직씨어터 '원이엄마', 대구뮤지컬페스티벌서 특별상
- 2018년 3월 10일 천상의 컬렉션에 방영되었다.
- 2020년 7월 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편지를 다루었다.
- 소설가 조두진은 이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능소화: 4백년 전에 부친 편지〉를 집필했다.
5. 외부 링크[편집]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응태 묘 출토 복식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응태 묘 출토 미투리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에서 세계인을 울린 450년 전의 사랑이야기
- 두산백과: 이응태 묘 출토 복식
- 두산백과: 이응태 묘 출토 미투리
-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420년 전의 편지
- 네이버 지식백과: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 원이 엄마 이야기
-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원이 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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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안동지방법원 안동지원과 대구지방경찰청 안동지검이 위치한 주택 지구.[2] 출처1, 출처2. 원문에는 띄어쓰기가 없지만 가독성을 위하여 띄어쓰기가 임의로 사용되었다.[3] 임세권 안동대 사학과 교수의 번역을 참고해 가독성과 원문의 느낌을 높이는 쪽으로 편집했다.[4] 해당 문구는 뒷면에 적혀 있다.[5]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려 적혀 있다. 원문에서는 줄이 3줄 뿐이지만 본 문서에서는 가독성을 위해 5줄로 나누었다.[6] 위아래가 뒤집혀 적혔다.[7] 1586년, 선조 19년[8] 현대 국어에서도 '자네'는 친구처럼 동등한 관계에서 쓰일 수 있지만 더 이상 상대를 높이는 데 쓰이지는 않고, 주로 아랫사람에게 쓰인다. 한때는 소벌도리 등의 인명에서 '공(公)'의 의미를 지닌 존칭 접미사로 사용되었던 '-돌이'가 현대 국어에서는 더 이상 존칭으로 쓰이지 않으며, 원래는 일반적인 명사였던 '계집', '놈' 등의 단어가 이제는 해당 대상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전락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순우리말보다 한자어를 더 품위 있고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9] 이 묘와 편지에 관하여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아내가 남편보다 손윗사람이었다고 잘못 해석하였는데, 이는 뒷면에 있던 "샹ᄇᆡᆨ"(현대어로는 상서=올림)이라는 문구를 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편지로부터 100여년 전 남편이 아내에게 쓴 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에서도 '샹ᄇᆡᆨ'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므로 이것 하나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을 수 있으나, 여하튼 당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둘이 서로 상호 존중의 관계였다면 모를까 아내가 남편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