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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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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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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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김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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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일제강점기 및 미군정 경기도지사




이인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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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안양시 갑)
선거구 분리
이택돈[A]
윤국노[A]

제13-14대
이인제
[1]

선거구 개편
권수창[2]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논산시·금산군)
제15대
김범명

제16대
이인제


선거구 개편
이인제[B]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선거구 개편
이인제[B]

제17-19대
이인제


제20-21대
김종민






대한민국 제10대 노동부장관
제29대 경기도지사
이인제
李仁濟 | Lee In-je


출생
1948년 12월 11일 (75세)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부창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부창동)
자택
서울특별시 은평구
본관
전주 이씨[1]
현직
사단법인 한반도통일연구원 이사장
사단법인 세계인공지능바둑연맹 총재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고문
재임기간
제10대 노동부장관
1993년 2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제29대 경기도지사
1995년 7월 1일 ~ 1997년 9월 18일[2]
링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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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부인
김은숙(1949년)
자녀
장녀 이명주(1979년), 차녀 이진화(1980년)
신체
163cm, 68kg, B형[1]
학력
논산백석국민학교[2] (졸업)
논산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무종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3, 14, 16, 17, 18, 19
약력
제21회 사법시험 합격
제11기 사법연수원 수료
대전지방법원 판사
제13대 국회의원 (경기도 안양시 갑 / 통일민주당)
통일민주당 대변인
통일민주당 원내부총무
민주자유당 국책연구원 부원장
민주자유당 제3정책조정위원장
제13대 국회 후반기 윤리특별위원회 간사
제14대 국회의원 (경기도 안양시 갑 / 민주자유당)
제10대 노동부장관 (문민정부)
제14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간사
제29대 경기도지사 (민선 1기 /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3]
국민신당 상임고문
국민신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새천년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제16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논산시·금산군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4]
제17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총재 권한대행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제18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무소속)
제19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자유선진당)
자유선진당 비상대책위원장
선진통일당 대표
새누리당 최고위원
자유한국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5]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자유한국당 논산시·계룡시·금산군 당협위원장
한국UN봉사단 제4대 총재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국민의힘 상임고문

1. 개요
3. 친박 여부
3.1. 친박으로 보는 견해
3.2. 친박으로 보기 어렵다(혹은 애매하다)는 견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7. 여담
8. 저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6선 국회의원[10]을 지냈다.

판사 출신 노동인권 변호사에서 최연소 노동부장관경기도지사를 역임,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왔으며 특히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연고지 몰표 없이 19.20%를 득표하였다. 또한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제16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도 위력을 과시하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으로 변경하여 새누리당과의 합당을 주선하는 등, 나름 충청권 정치 거물이었다. YS에게 발탁되어 DJ에게 갔다 JP를 거쳐 이후 다시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되는 등 좌우 가리지 않는 당적 변경을 하고도 1988년부터 2018년까지 30년 정치인생을 존속한 인물이다.[11] '정치 철새'를 넘어서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긍정/부정 양면으로 쓰인다.[12]


2. 일생 및 당적 변경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인제/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친박 여부[편집]


결론만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 당시 친박계에 속한 건 맞지만, 그냥 당 내 주류 계파에 휩쓸려 따라갔을 뿐, 박근혜를 정치적으로 따랐다고 보기 무리가 있다.


3.1. 친박으로 보는 견해[편집]


이인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상황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의 공동대표로 머무를 만큼 보통 친박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또한 위안부 협의에 대한 의견으로 여론이 매우 나쁘며 국정 교과서에 대해서도 그리 반대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 참가했다. 일단 이인제가 역대 인터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했던 말들을 볼 때는 대통령이 무너지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13]고 생각한 듯. 그렇다고 친박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친박으로 분류하는 건 과거에 어땠냐보다 지금 어떠냐가 더 중요하다. 예컨대 유승민은 한때 친박이었지만, 지금 그를 친박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이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인제를 친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2019년 12월, 당직자 출신으로 김무성 대표의 부실장을 맡은 장성철씨의 인터뷰에 의하면 청와대에서 만들어 내린 살생부에 친박중진의원이 여럿 있었는데 무려 친박 9인회의 일원이었던 서청원, 그리고 이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살생부는 엎어지면서 무사히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박근혜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다. 일단 청와대에서는 박근혜의 뜻에 동조하며 거수기 노릇을 했기 때문에 친박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친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들에 대해 '신(新)박' 이라는 표현도 간간이 언론에서 찾아볼 수는 있다.


3.2. 친박으로 보기 어렵다(혹은 애매하다)는 견해[편집]


이인제를 친박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친박이라는 표현은 박근혜가 2002년~2004년 무렵부터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면서 박근혜 주변에 모이기 시작한 정치 집단을 지칭한다. 특히 2007년~2008년 사이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양대 유력 정치인으로써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하고,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 대부분이 친박과 친이의 양대 계파로 재편성 되면서[14] 명확해진 개념이다. 이 점에서 보면 박근혜가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인 1997년에 신한국당을 떠나 친이/친박 대립이 격렬하던 시기에는 광야를 떠돌다가 친박계가 친이계를 당권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한 2012년에 이르러서야 새누리당에 복귀한 이인제는 친박/친이 구도에 낄 자리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 이후 탄핵 반대 입장을 보인 김문수나 홍준표 역시 종종 친박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쪽은 오히려 친이계에 속했다.[15]

다만, 친박 특유의 가혹한 당내숙청 때문에 친이계를 당권 경쟁에서 완전히 몰아낸 뒤 친박 내부에서도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 차례로 배제당하면서 박근혜 실각 시점에서는 오히려 본래 친박계의 쌍벽이던 유승민/김무성이 반(反)박의 거두가 되고, 이미 숙청당해서 견제권 밖이던 친이계 중 일부나 친박도 친이도 아니던 이인제 등 유력 정치인들이 고만고만한 쪼렙 정치인 외에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친박 세력으로 진입한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박근혜 실각 이후 들어온 인물을 분류하여 뭔가 신박한 호칭을 붙여 재분류하면 모를까, 친박이라는 표현이 기존에 사용되던 의미를 생각하면 이들을 친박으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16]

한국 현대 정치사(특히 보수 정당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은 친박을 단순히 '박근혜 편을 드는 정치인들' 정도로 이해하고 "친박으로 분류하는 건 과거에 어땠냐보다 지금 어떠냐가 더 중요하다." 면서 박근혜 편을 드니 친박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계기로 탄생한 특정한 계파를 지칭하는 표현이며, 친박, 탈박, 쪽박, 반박, 진박, 잔박, 돌박, 멀박 운운하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 역시 이 '계파'의 변화를 통해 보수정파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친박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정치사(특히 보수정치사)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고, 이러다 보니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다양한 편인데 이를 '특정한 대상을 부르는 특정한 표현'의 의미 이상으로 확장시킬 경우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17]. 무엇보다도 그의 당적 변천사를 생각해본다면, 이인제에게 계파는 큰 의미가 없다. 쉽게 말해 친박이 몰락한 지금은 또 다른 계파로 언급될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는 것.

실제로 이인제는 홍준표가 당권을 잡을 당시 충남지사 공천을 받았으며, 20대 대선 경선 당시 홍준표를 지지하는 등 상호 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범친홍이라는 평도 나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제의 계파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중론.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 - 1990
창당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18]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97
탈당[19]

[[국민신당(대한민국)|
파일: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7 - 1998
창당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8 - 2000
합당[20]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2
합당[21]

[[무소속|
무소속
]]

2002
탈당[22]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02 - 2005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5 - 2006
탈당[23]

[[국민중심당|
파일:국민중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6 - 200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07
탈당[24]

[[민주당(2005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복당

파일:중도통합민주당 남색 글씨.svg

2007
합당[25]

[[민주당(2007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당명 변경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26]

[[무소속|
무소속
]]

2008 - 2011
탈당[27]

2011
입당

2011 - 2012
합당[28]

2012
당명 변경

2012 - 2017
합당[29]

2017 - 2020
당명 변경

2020
합당[30]

2020 - 현재
당명 변경


  • 피닉제의 명성답게 답게 민주당계 정당군소정당, 충청권 지역정당, 보수 정당을 넘나들며 온갖 당적을 가졌지만 의외로 보수 정당 중 가장 장수한 정당인 한나라당[31]의 당적은 없다.[32]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갑

29,325 (32.59%)
당선 (1위)
초선[33]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39,232 (35.82%)
재선[34]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1,264,914 (40.56%)
초선[35]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4,925,591 (19.20%)
낙선 (3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금산

66,957 (65.37%)
당선 (1위)
3선[36]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계룡·금산

42,242 (44.85%)
4선[37]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60,707 (0.68%)
낙선 (6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계룡·금산

23,595 (27.67%)
당선 (1위)
5선[38][39][40]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40,076 (42.36%)
6선[41]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44,165 (42.55%)
낙선 (2위)
[42]
201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345,577 (35.10%)



  • 피닉제의 명성답게 여기저기 난잡한 당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보수 정당민주당계 정당마저도 여러 번 넘나들었다. 7선을 바라보면서 단 한 번도 같은 정당에서 연달아 총선에 출마한 적이 없다. 또한 총선 이전에 당장 저 무수한 선거 이력 중 같은 정당명으로 출마한 것은 14대 총선과 1회 지선뿐이다.

  • 대선 외의 선거에서는 불패의 정치인이었으나 끝내 20대 총선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새누리당을 장악한 친박이 박살나는 가운데 친박 행보를 보였지만 특정 계파에 얽매이지는 않는 이인제에게 큰 타격이 되지는 않으리라 보는 관측이 많았고, 실제로 후속 정당인 자유한국당홍준표 대표 체제에서 원로로서 그럭저럭 입지를 다지면서 7회 지선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충청남도지사 후보로 전략 공천되었지만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에게 30% 가량 뒤처지면서 낙선하여 정치 생명이 사실상 끝나게 된다.[43]


6. 이인제계[편집]





7. 여담[편집]


  • 국정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무게감있는 목소리에 호소력 있는 연설 능력으로 2000년대 이후에는 연륜을 쌓으며 TV 토론으로 자신의 인상을 바꿀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이인제를 그저 매체를 통해 철새 정치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2007년 대선토론회에서도 그 미미한 존재감과 지지율 속에서도 TV 토론평가는 늘 2~3위권이었다.(1위가 못 된 이유는 역시 존재감 탓.)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이해찬과 함께 5공 세력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경력이 있다. 이인제 전 의원이 성실하지 않다는 비판을 많이 받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스마트하다는 데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말하는 편이다. 이해찬이나 유시민도 이인제가 법머리가 좋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홍준표 역시 '당적 변경이 잦긴 했지만 실력은 걸출하신 분'이라 평했다.

  • 젊은 시절에는, 하단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처럼 성실함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일부 유권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전년도인 1996년에 주류 언론을 통해 타서전[44] 논란이 이는 상황을 보았을 정치인이 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책에 나온 내용을 묻는 말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 2007년 대선에는 TV토론에서 유권자들의 점수를 확실히 얻을 만큼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좀 때늦은 감이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인제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2002년 대권 후보 경선에 나섰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이인제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이 대선 후보로 나서게 할 수는 없다는 그의 확고한 논리는 이후 손학규를 비토할 때에도 그대로 쓰였다. 당시 이인제는 민주당 내 최유력 대권 주자로서 야당의 이회창과 함께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느닷없이 노풍이 불었고 노무현이 경선에서 승리하게 된다.

  • 사회주의[45]-보수주의의 유럽식 좌우 정치구도가 아닌 자유주의-보수주의의 미국식 구도(이른바 보수 양당제[46])를 지향한다.#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민주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사회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무리수를 보인다. 다만 이인제는 화려한 당적 생활에서도 보이듯 노무현 전 대통령 포함 좌우 대통령 모두 존경한다는 식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 잦은 당적 변경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과거 변호사 시절에는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해준 적도 있다. 탤런트 서인석의 지인도 그 중 한 명이며, 나중에 서인석이 찾아가 수임료를 건네자 "무료 변론해준다고 한 번 말했으면 그걸로 된 건데 왜 돈을 가져오느냐?"는 말로 단호하게 거부하며 돌려보냈다고. 이런 인연 때문에 현재까지도 서인석이 선거유세를 같이 지원해줄 정도로 절친하다.

  •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전두환 노태우 사면 공약을 내세워 논란을 빚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김대중 후보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추진하던 터라 이인제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지만...[47]# #


  • 글씨체가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엽다. # 다만 이 글씨는 여비서가 대신 쓰다 생긴 일이라는 소리도 있다. 실제로 이인제가 쓴 다른 글을 보면 다소 평범한 글씨체를 보여준다.#

  • 대만 정치인 쑹추위와 정치 인생이 비슷한 면이 있다. 중화권 언론에서도 쑹추위와 이인제를 놓고 비슷하다고 한 기사가 있었다. 다만, 쑹추위는 자기가 친민당을 만들고 거기서 옮겨다니지는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 일본 정치인 중에선 오자와 이치로와 비슷한 면이 있다. 여당과 야당을 옮겨다니며 연명한 행적이 이인제와 흡사하다. 단, 이인제와는 달리 낙선한 적은 없다.[48]

  • 호남고속철도 공주역이 이인제 전 의원의 압력으로 인해 위치가 이상해졌다는 논란이 있지만 사실 이는 오송역과 청주시의 압박 때문으로 이인제 의원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역 위치가 정해진 후에 좀 더 남쪽으로 내려서 짓자고 했을 뿐. 공주역/문제점 문서 참조.

  •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49]


  • 19대 대선 TV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서, 제15대 대선 당시 후보들의 동성애 관련 발언이 재조명 되었는데, 15대 대선에 나온 후보들(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권영길)의 동성애 관련 노선은 역대 대선에 나왔던 후보들을 통틀어서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스탠스였다. 이인제는 당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해 하나의 신성한 인격체로 바라봐야한다.'[50]는 요지로 말한 바 있다. "동의하지 않으나 이단시해서도 안된다"고 답한 DJ나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적 자연인의 영역은 지켜져야한다고 답한 이회창보다도 더 온건적인 발언. 19대 대선에서 동성애 논쟁을 부추긴 후보가 같은 당의 홍준표 후보였음을 생각하면 의외라고 할만하다.[51]

  • 하지만 위의 인터뷰 내용과 달리 2018년 충청남도지사 선거 당시에는 충청남도 인권조례 폐지 공약을 내걸며 "동성연애를 조장하는 인권 조례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토론회에서 경쟁자인 양승조 후보가 위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며 비판하자 "동성애자를 학대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반대한다, 인권으로 포장해서 교육하고 조장하면서 양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했다. #

  • 그의 고종사촌 동생 중에서 모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은 똑같이 생겼지만 목소리는 다르다.

  • 노무현 관련 다큐멘터리인 노무현입니다에서도 등장한다. 새천년민주당 경선과정이 주 내용인 만큼 다른 인물보다도 비중있게 나오며 네거티브, 경선 불복설 등이 자세히 다뤄진다.

  • 쌉니다 천리마마트에도 이름이 언급됐다! 2부 41화에서 정복동이 왠 점쟁이에게 '책사로 영입하고 싶은 사람이 ?'라는 질문을 받고서 조금도 고민없이 이인제라고 답했던 것인데,[52] 이를 본 네티즌들은 정복동조차 인정한(? 이인제를 찬양하는 리플들을 남겼다.

  • 2018년 5월 15일, 외부자들에 출연하여 공자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14년 동안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노나라로 돌아왔듯이, 자신도 원래 정당으로 돌아오는데 15년 2개월이 걸린 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발언을 하였다

  • 박씨유대기의 등장인물 이니제의 이름은 작가가 그의 이름을 방송에서 보고 살짝 비틀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속성이 불사이다 보니 이름만이 아니라 모티브 자체가 이인제 아니냐는 말도 있다.


  • 중년 시절 은근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외모가 닮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단순히 닮았다 정도가 아니라 16대 대선 당시에 박정희를 닮은 외모는 이인제의 인기에 상당한 플러스 요소였고, 그 반작용으로 심지어 97년 당시 MBC 단막극 환상여행에서 '독재자의 외모를 본뜬 정치인이 사실은 독재자의 복제인간이었다'라는 세태풍자성 저격 작품을 방영하기도 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 정책 결과에 대해서는 북한이 핵을 갖게 되었다고 비판하지만, 시도와 그에 대한 의의는 의외로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햇볕 정책은 대책없이 퍼주기에 불과하다면 국민의 정부의 햇볕 정책은 북한 정부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고 북한에 기회를 준 것이라 함으로써 두 정부의 행보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53]


  • 바른정당계, 새보계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듯하다. 의외로 박근혜 탄핵 때도 당을 옮기지 않고 자유한국당에 잔류하였고, 20대 대선을 앞둔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홍준표를 지지하였으며, 8회 지선을 앞둔 경기도지사 경선에서도 김은혜를 지지했다.[55] 최근에는 이준석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여러 차례 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8. 저서[편집]


파일:출발선에 다시 서서.png

파일:한라에서 백두를 보네.png

파일:통일은 경제다.jpg


9. 둘러보기[편집]














[1] 익안대군파 16대손, 시조 39세손 ○제(○濟) 항렬.[2]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3] 보좌관비서들이 관리한다.[사용중] [4] 현재는 운영을 안한다.[5] 충남관련된 계정이다.[6] 현재 운영을 안한다.[7] 2018년 5월 9일에 유튜브 운영을 사용하지 않는다.[8] 이인제의 세상이야기 계정이다.[9] 현재는 정지 먹었다.[10] 경기도 안양시 갑 재선 +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4선.[11] 30년 이상 정치를 한 인물은 흔하지만, 15대 대선과 19대 대선까지 20년 간 정치 격변에 크든 작든 하나의 세력으로서 명함을 올렸다는 점이 기가 막힌 점이다. 일례로, 19대 대선의 당선자 문재인 대통령은 97년 당시만 해도 현직 정치인이 아닌 전직 의원 노무현의 핵심 동료였으며, 2018년 그의 은퇴 선거를 장식한 상대인 양승조 도지사는 97년 당시 갓 사법연수원을 수료한지 1년 된 변호사였으며 첫 의회 입성은 이인제가 이미 유력 대권후보에서 한 발 멀어진 2004년이었다.[12] 이인제 본인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긍정적으로 봐서 대통령 후보 경선 슬로건으로도 쓴다.[13] 탄핵 반대 측에서 주장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그들은 대통령이 없어지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 무너졌다. 이때도 이때도 그랬다. 사실상 무너진 6.29 선언,노무현 대통령 탄핵때도 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앞의 세개의 일은 외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14] 이전까지의 친박/친이가 한나라당 내 계파 중에서 두드러지는 2개 세력이었다면, 이 시기 이후에는 한나라당(이후 새누리당)이 친이와 친박으로 양분되었다고 봐야 한다.[15] 정확히 말하면 김문수는 이재오와 함께 학생운동 출신으로 친이계의 핵심인사이자 당 내에서 대표적인 반(反)박계였으나 이재오와 달리 이후 친박으로 갈아탄 케이스고, 이에 비해 홍준표는 명확한 친이계 인사라기보다는 친이계에 가까운 중도파로서 일종의 범 친이계 인사로 여겨지던 편이다. 홍준표는 한때 박근혜와 척을 지기도 했으니.[16] 예를 들어 유승민의 정치적 행보를 설명할 때는 한때 친박(원조 친박)이었지만 박근혜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탈박'이나 '멀박'이 되고, 박근혜와의 대립각이 거세지면서 박근혜에게 찍힌 '찍박'이 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무렵에는 '진박'과 대립했다고 설명한다. 한때 친박이었지만 지금은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졌으니 친박이 아니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17]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이 선거에서 대선에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홍준표를 찍었다면 그 사람은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저 사람은 해당 정당의 당원이다" 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해당 정당의 당원이던 사람이 이제 더 이상 그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탈당계를 제출하지 않아서) 그 사람의 이름이 당원 명단에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당의 당원이다. 당원은 단순히 지지자가 아니라 '정당의 당원명부에 이름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친박 역시 단순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특정한 계파'를 의미한다.[18]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9] 대선 경선 불복으로 인한 탈당.[20]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 합당.[21]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2] 대선 경선 불복으로 인한 탈당.[23] 국민중심당 창당을 위한 탈당.[24] 민주당에서 대선 출마를 하기 위한 탈당.[25]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26]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27]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28]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29]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30]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31] 한나라당과 같은 법인인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당적은 있었다.[32] 사실 그가 독자 출마하자 표가 급했던 신한국당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이 탄생했으며,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편되며 충청권 정당의 입지가 사라지니까 합당하며 보수정당으로 돌아온 것이니 이인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줄곧 '반한나라당 보수'가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그것이 어떤 당이든간에.[33] 1990년 3당 합당, 1990.1.22 민주자유당 창당 합류[34] 1995.6.7 사퇴 (경기도지사 출마)[35] 1997.9.13 탈당, 1997.9.18 사퇴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36] 2002.12.1 탈당, 2002.12.3 자유민주연합 입당[37] 2005.12.7 탈당, 2006.1.27 국민중심당 창당 합류, 2007.5.11 탈당, 민주당 입당,2008.2.17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2008.3.17 탈당 (공천불복)[38] 18대 국회 최저득표율 당선[39] 이 당시 논산·계룡·금산 선거구에선 한나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무소속이 출마한 5파전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러 후보로 표심이 분산되는 효과가 일어났고 결국 30%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이 된 것이다.[40] 2011.9.8 자유선진당 입당[41] 2012.11.16 새누리당과 합당[42] 대선 이외의 선거에서 첫 낙선.[43] 다만, 이때는 박근혜 정부의 탄핵 건과 문재인 정부의 허니문 기간으로 인해 TK를 제외하면 전국적으로 보수 정당이 극도로 불리했던 시기였다. 당장 PK 지역의 광역자치단체장(경남지사, 부산시장, 울산시장)만 해도 민주당이 모조리 쓸어갔다.[44]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할 자서전을, 남이 창작 요소까지 넣어가며 대필하는 걸 빗댄 말. 소재를 굳이 자서전에 한정지어 기사를 낸 것이지만, 언론사에서 정치-경제-외교 란에 실을 기사를 통해, 각자 지지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조언하곤 했던 걸 감안하면, 이듬해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정치인들을 향한 간접적인 충고이기도 하였다.[45] 여기서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만이 아닌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46] 다만 이 보수 양당제라는 표현 자체가 많은 진보적 스펙트럼 중 사회주의만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일부 학자들이 쓰는 표현일 뿐이긴 하다. 애초에 공화vs왕정 시절엔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명백한 진보적 가치였다.[47] 이인제 pk다지기[48] 허나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지역구 낙선을 경험하며 석패율제로 겨우 당선되었다.[49] 허나 재미있는 게 이인제는 홍준표 캠프 소속이었다. 알다시피 홍준표는 사형제 부활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인이다.[50] "동성애는 아주 미묘한 문제다. 사회에 저항하고 자신의 성아이덴티티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이 과연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타난 것처럼 동성애자를 하나의 신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다."#[51] 작금의 한국 보수정당은 YS가 집권하던 1990년대보다 되레 우경화된 측면이 있다.[52] 작품 내에서는 이인재라고 나왔다.[53] 이와 비슷한 논조의 주장을 홍사덕 전 의원도 한 바 있었다.[54] 캐셔, 판촉, 미화팀.[55] 알다시피 경선 당시 김은혜의 상대는 유승민이었고, 여론조사에서는 유승민이 압승했으나(다만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윤석열-홍준표 간 차이보다는 격차가 줄어들었다.) 당원투표에서 여론조사보다도 더한 차이로 참패하는 바람에 결국 김은혜에게 경기도지사 후보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 당시 이인제, 김문수 등 원로들도 대부분 김은혜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