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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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편집]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소설 작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862년 7월 27일 ~ 1916년 11월 1일. 호는 국초(菊初). 경기도 음죽(陰竹)(현재의 장호원) 출생.
광복 이후 한국 국사와 국어교과서에서는 이인직을 최초의 신소설을 쓴 선각자로만 가르쳐왔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했지만 1990년대 국어교과서에서는 《혈의 누》를 기재하면서 작가 소개에 작품과 별개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걸 서술하기도 했다.
2. 일생[편집]
1862년(철종 13년) 7월 27일에 경기도 음죽현 동면 거물리(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노탑2리 거머리마을)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관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도쿄정치학교의 청강생으로 입학한 1900년(광무 4년) 이전까지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유학 시절 우수한 성적을 기록해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종군하면서부터 출세길이 열린다. 전쟁 후 일본 통감부의 추천으로 실세 이완용과 인연을 맺어 이완용의 통역관으로 들어간 것. 이 때부터 친일 행적이 시작됐다.
이후 이완용의 추천으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게 되았고,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신소설의 집필에 들어갔다. 1906년(광무 10년) 《만세보》에 〈혈의 누〉 등 친일소설을 연재하고,[3] 1908년(융희 2년)에는 원각사라는 서양식 신파극 극장을 만들어 친일희곡 〈은세계〉를 상연했다. 이 공(?) 때문인지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성균관 대사성직을 임명받아 죽기 전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4]
1916년 11월에 신경병으로 사망했다. 언제 입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신종교인 천리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916년에 사망했을 때에도 천리교 예법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3. 유학[편집]
작품 내적으로 주인공의 미국 유학 부분은 "화성돈(워싱턴의 음역)에서 선진 사상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한 마디로 대충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해조의 작품을 비롯해 당시 신소설 대부분의 작품에서 유학을 가는 장면은 이런 식으로 묘사된다.[5]
당시 유학이라는 개념은 선진국에 갔으니 당연히 선진 문물을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단순한 사고였고, 따라서 유학해서 배우는 신학문의 실체와 그 구체적인 실천 과정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당시 집필하던 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신소설에서의 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수사적 장치처럼 행위의 구조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6] 고전 소설에서 광대, 왕, 사또, 포도대장이 그 이름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작중에서 맡듯이. 사실 이런 부분은 근대소설인 이광수도 마찬가지라서, 무정에서도 유학이 이런 식으로 다이제스트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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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25세 직(稙) 항렬.[3] 상편은 만세보에 연재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은 1913년 2월부터 6월까지 6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4] 그러나 낭비가 심했는지 생활은 가난했다. 자전소설인 1912년 《빈선랑의 일미인》(가난한 조선 남자의 일본인 아내) 에서는 돈이 없어 사기를 쳐서 돈을 벌 목적으로 옛친구를 만나고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즉 이인직은 일본식 저택을 지어서 살고 있었는데 이를 유지할 비용이 없었던 듯하다.[5] 이해조의 《구의 산》, 《춘외춘》, 《화의 혈》, 최찬식의 《안의 성》 등. 당시 유학 장면이 나오는 신소설 치고 그 세부 행적을 자세히 묘사하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6] 《한국현대문학사 1》, 권영민, 2002, 민음사,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