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녕

덤프버전 :



파일:이장녕.jpg

이명
이장영(李章榮, 李長榮)

백우(白于)
본관
연안 이씨[2]
출생
1881년 5월 20일
충청도 목천현 읍내면 남화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3]
사망
1932년 1월 24일 (향년 50세)
중국 만주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81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독립군으로 활동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동녕은 그의 8촌 삼종형(三從兄)이다.[4]

2. 생애[편집]


1881년 5월 20일 충청도 목천현 읍내면 남화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에서 아버지 이병칠(李炳七)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던 숙부 이병삼(李炳三)에 입양되었으며, 읍내면 동리[5], 읍내면 서당리[6] 등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한성부 동서 숭교방 성균관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거주했으며, 1900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로 선출되었다. 그 뒤 1902년 7월 6일 육군 보병 참위(參尉)에 임명되었고, 1903년 3월 25일 대한제국군 친위대 제1대대에 견습차 파견되었다가 그해 9월 20일 졸업했다. 졸업 후 육군 부위에 올랐고, 1905년 4월 25일에는 대한제국군 평양 진위대 소속 징상대(徵上隊) 제2대대에서 견습생으로 파견되었다.[7]

1906년 7월 19일 징상대 제4대대에 보임되었다가 소대장이 되었고, 육군 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의 체결로 그해 8월 대한제국군 해산이 이뤄지자, 미련없이 고향에 내려갔다가 그해 11월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3개월간의 여정 끝에 중국에 도착한 이장녕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이회영 등 동포들이 망명해오자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또한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교관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년에 걸쳐 독립군 사관 양성에 힘을 썼다.

1919년 8월 7일 대종교 교단과 신민회 주도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을 때, 서일, 김좌진, 조성환 등과 함께 핵심적으로 참여했다. 대한군정부는 그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바꿨는데, 이 단체가 바로 북로군정서이다. 이때 이장녕은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에 취임했다.

이때 이장녕은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에 취임하여, 단기속성 사관학교를 부속으로 세우고 이범석과 함께 교관을 맡기도 한다. 한편으로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가 긴밀한 관계를 맺을 때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10월에는 북로사령부 참모관에 취임했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전력을 보존한 독립군들은 밀산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이동녕은 참모장,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이장녕은 참모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세력이 큰 피해를 입자 중국으로 돌아와 길림성 오상현(五常縣) 남채교촌(藍彩橋村)[8]으로 피신했으며, 1923년 11월 편강렬 등이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자 참모에 취임했다가 이듬해인 1924년 11월 의성단이 정의부(正義府)에 통합되자 곧 탈퇴했다. 1926년에는 이범윤과 김좌진 등이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자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밖에 길림선인자치회(吉林鮮人自治會)에서는 문화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 뒤 1930년 홍진, 신숙, 홍범도, 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감찰로 재직했고, 이듬해인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2년 1월 24일 만주에서 돌연 마적에게 자신과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했다.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3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53~54p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09:10:30에 나무위키 이장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연원부원군 이광정의 후손이다.[2] 태자첨사공파-삼척공파(三陟公派)[1] 25세 녕(寧) 항렬.[3]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당시 원호처에 제출한 독립운동 공적 심사서, 『독립운동약전』 등이 그 근거이다.#[4] #[5] 193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출판한 용의조선인명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동리'가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8촌 삼종형 이동녕의 출생지가 바로 동리 79-2번지로, 현재 이동녕선생생가지로 남아 있다.[6]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목천면 서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광복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순국』 1993년 11월호에서는 장남 이의복(李義復)과 차남 이의명(李義明)의 제적등본상에 기재된 본적, 1972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은상에게 보낸 이의복의 진술서, 그밖의 후손 및 문중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근거로 '천원군 목천면 서리 90번지'를 이장녕의 출생지로 봤다.#[7] 대한제국관원이력서[8]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시 우창시(五常市) 란차이차오촌(蘭彩橋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