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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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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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0.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2000
2009



보유 기록
KBO 통산 최다 대타 홈런
20개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46번
이상대
(1989~1990)

이재주
(1992)


이종호
(1995.5.11.~1995)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7번
김경기
(1990~1992)

이재주
(1993~2001)


프랭클린
(2002.7.26.~2003)
KIA 타이거즈 등번호 62번
최명환
(2002)

이재주
(2002)


박재홍
(2003~2004)
KIA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신동주
(2001~2002)

이재주
(2003~2009)


고우석
(2010)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98w69157.jpg

이재주
李在珠 | Lee Jae-Ju

출생
1973년 12월 25일 (50세)
강원도 강릉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노암초 - 경포중 - 강릉고
신체
188cm, 102kg
포지션
포수1루수, 지명타자[1]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2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2~2001)
KIA 타이거즈 (2002~2009)
응원가
김추자 - 무인도[2][3]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의 야구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2.1. 태평양-현대 시절[편집]


파일:/pds/201002/04/70/c0098370_4b6a706ea70d3.jpg
데뷔 초창기 1994~95시절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모습.[4] 은퇴 직전년도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이질감이 느껴진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815200658437G.jpg
현대 유니콘스 시절. 포수였다는 증거 1

원래 포지션은 포수였다. 야구선수로는 드문 강원도 출신으로 노암초등학교, 경포중학교, 강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역 연고 팀[5]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러나 태평양 돌핀스에는 이미 김동기라는 확고한 주전 포수가 있었고, 몇 년 간 김동기의 백업 포수로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태평양이 현대그룹에 인수되고 김동기가 은퇴하자 주전으로 발돋움하나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장광호, 김상국으로 포수를 돌려막던 현대 유니콘스가 현금 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박경완을 영입하며 다시 백업 신세. 1997년도에 72타석에서 무려 7홈런[6]을 칠 정도로 장타력은 좋았지만 수비가 좋지 못하여 결국 박경완의 영입 후 현대에서는 완전한 대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2002 시즌이 시작 직전 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된다. 사실 KIA에서도 대타보다는 백업 포수를 기대하며 데려왔는데..


2.2.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323163947432.jpg
KIA 타이거즈 시절. 포수였다는 증거 2 사진 속 김상현과 몇 년 뒤 같은 팀에서 뛰게 된다 너 좀 이리와봐라

이재주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KIA 이적 이후인데 2003년부터 주로 대타로 출장했고, 2004년에는 개인 최다 대타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하는 등 백업 멤버로 쏠쏠하게 활약한다. 그 이후로도 대타 혹은 김상훈의 백업 포수로 나와주다가, 2006년 풀 타임 4번타자가 된다. 당시 서정환 감독은 자신의 눈밖에 난 마해영LG 트윈스로 트레이드하고 4번 타자로 이재주를 점찍어놓은 상태였다. 팀에 좋은 선수가 없어 기회가 주어진것이다.

2006 시즌 성적은 115게임에 출장해서 0.284 13홈런 59타점. 4번 타자 치고는 타점이 부족했지만[7] 3번 장성호와 함께 KIA의 눈물나는 타선을 이끌어갔다. 타 시즌이면 중심타선의 지명타자로써 부족해 보이는 성적이나 사실 2006 시즌은 13개 치고 홈런 공동 11위일 정도로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이라 준수한 성적이다. 타점도 리그 16위이고.[8] [9]

2007 시즌도 개막 이후 지명타자로 쭉 나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5월에 최희섭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서 주전 자리를 뺏겼고, 다시 원래 자리인 대타로 돌아오게 된다. 시즌 성적은 90게임 출장 0.259 5홈런 36타점. 시즌 후에 FA를 신청했으나 수비 포지션이 없는 나이든 대타요원을 원하는 팀은 없어 미아 위기에 봉착했고, 결국 협상 마감 직전 원소속팀 KIA와 계약금 없이 1년 8천만원에 계약하게 된다. 전년도 연봉이 1억이었는데 FA 계약을 하고도 오히려 연봉이 20% 삭감된 것. FA 미아가 되어 계약을 못한 선수는 있어도 계약을 했는데 연봉이 삭감된 것은 이재주가 유일하다. 이렇다보니 이재주가 FA를 한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후 12년이 지나 2020년 김태군이 FA계약을 했으나 연봉이 삭감되며 두번째 사례가 되었다. 여튼 드문 케이스.

2008 시즌 역시 최희섭의 존재로 대타로만 활약할 듯 싶었으나, 최희섭의 부상으로 이용규 빼면 아무것도 없는 KIA 타선의 4번타자로 복귀했다. 이 시즌에 87게임에 출장해서 0.276 12홈런 58타점을 기록했는데, 풀타임 출장했으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09 시즌엔 최희섭이 부활하고, 김상현과 나지완이 중심타선에 자리를 잡아서 이재주의 자리는 없어졌다. 지명타자 자리에 홍세완이 있고, KIA의 대표타자 장성호 조차 주전에서 밀려 1루/ 좌익수/지명/대타로 한 타석이라도 더 나오려하던 시즌이라 이재주는 타석에 서는것 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51게임에 출전해 0.194 4홈런 21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이 시즌엔 통산 대타홈런 20호째를 쏘아올리며 당분간 리그에서 깨지기 힘든 기록을 만들었다. 4개의 홈런만을 쳤지만 8월 1위 다툼을 하던 SK전에서 경기 초반 대타투입의 강수 속에서 쓰리런을 쏘아올려 기선을 제압해 승리에 기여하는 등 저조한 스탯에 비해서는 영양가가 있는 활약을 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선 부진했으며, 시즌 종료 후 방출당했다. 사실 부인이 출산을 앞두고 있던 터라 아무리 프로가 비정하다고 해도 너무한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새로운 팀을 물색하고 있다가 넥센과 접촉했고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갑자기 이재주가 계약을 취소하였고 이후 이적 소식이 들리지 않으며 사실상 은퇴 상태. 방출된 이유가 코치들과의 불화 및 팀 케미스트리 저해라는 소문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구단들 입장에서는 나이도 많고 배트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고, 사실상 수비 포지션이 없는 이재주를 계속 데리고 있기보다는 어린 유망주를 키우는게 합리적이다. 게다가 말년병장 포스까지 뿜어주니..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선호하는 타격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떨어지는 볼에 삼진을 많이 당하는 유형의 타자이다. 그러나 전성기에는 볼삼비가 1에 가까울 정도로 선구안이 나쁜 타자는 아니었다.

이재주가 야구계에 남긴 가장 큰 기록은 바로 대타 홈런 기록. 1990년대에도 일발장타력이 있고 대타 홈런을 잘치는 선수로 소개되었다. 프로 통산 대타홈런이 20개로 KBO 통산 1위.[10] 2위 기록은 9개(최동수, 최훈재, 전대영)로 그 위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세계 기록은 1970년대 일본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대타 전문으로 활약한 다카이 야스히로의 27개이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록은 2011년 시즌 중 워싱턴 내셔널즈에서 은퇴한 맷 스테어스의 23개.

일본 센트럴리그나 미국 내셔널리그에서는 대타요원도 꽤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지만, 지명타자제도가 있는 리그는 애초에 대타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고 프로야구가 포지션 분업화로 인해 날로 로스터가 빡빡해지는 추세인지라 2010년대 이후로는 예전처럼 장타력은 뛰어나지만 아예 수비 포지션이 없어 수비에선 교체가 불가피해 로스터를 2명 이상 잡아먹게 되는 이재주같은 선수를 대타로 두기보다는 장타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대타로 나선 후에도 교체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비에 투입할 수 있는 선수를 더 선호하는 것이 트렌드이고, 대타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주로 왕년의 강타자가 말년에 지타에서도 밀렸을 때 은퇴 전까지 몇 년 거쳐가거나, 부상이 다 낫지 않은 강타자가 잠시 자리하거나, 신인급 유망주들의 시험대로 쓰이거나 하는 등등 어쨌든 정규직이 아닌 임시보직이기 때문에 애초에 젊고 잘 치면 대타로 투입하지 않고 주전으로 투입한다. 그러나 충분히 방망이가 되면서도 포수로서 수비력이 떨어져서 박경완, 장광호김상국에게 밀렸던 현대 시절과, 1루 자리에 장성호가 건재하던 상황에서 주전 지명타자로 자리잡으려던 찰나 최희섭이라는 거포가 갑자기 복귀하는 등 팀 사정과 맞물려 전문 대타요원으로 선수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간 이재주가 지명타자 있는 리그에서는 비교적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향후 오랫동안 깨지기 힘들 기록이다. 이승엽의 56홈런보다 더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 여담[편집]


  • 마구마구에서는 초상권 문제로 인해 본명이 아닌 이건주라는 가명으로 뜬다.
  • 별명은 중남미 사람을 연상케하는 외모로 인해 멕시칸 용병, 재주리게스 혹은 재주스패로우였다. 그 외에도 저 중남미스러운 느낌이 에로배우스럽다고 해서 에로배우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역시 재주리게스가 가장 널리 불리는 별명이었다.사실 이재주+로드리게스카더라
  • 호세 리마가 기아에서 용병으로 뛴 시절에 이재주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무등구장 덕아웃 기둥에 붙여놨다. 그 이름도 유명한 재주스패로우.[11]
  • 은퇴 후에는 광주 운암동에서 당구장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 편의점에서 킨더 초콜릿을 찾았다는 한 디시 갤러의 인증이 있다. 링크
  • 2020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용병 살라디노와 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나이도 있고, 옛날 야구 시대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가 KIA 타이거즈에 있을때는 2000년대 후반까지도 구타가 있었다고 한다. 박경태의 썰에 의하면 9시 출발인데, 숙소에서 술 한 잔 한 덕에 늦잠을 자버려 집합 장소에 9시 30분에 도착했고, 자신의 룸메이트 또한 새벽에 나가서 안 들어왔다는 말까지 전해지자 이재주가 집합을 걸고 바로 줄빠따를 쳤다고 한다. 이후 2008년이 되어서 팀 야유회를 할때 그때 맞았던 후배들을 불러서 그때는 미안했다며 상황설명을 해주며 술을 따라주고 풀었다고 한다.[12][13]
  • 이재주 선수가 평택시 송탄에 있는 복싱센터를 다녔다라는 19년도 게시물이 있다. 링크 하지만 게시물의 댓글을 확인하면, 20년도에 건강상의 문제로 쉬고있다고 한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92
태평양
11
12
.250
3
0
0
0
3
1
0
1
0
3
.308
.250
1993
66
180
.267
48
14
0
4
17
16
0
17
1
44
.330
.411
1994
23
41
.146
6
0
0
2
5
7
0
7
2
21
.300
.293
1995
5
4
.000
0
0
0
0
0
0
0
1
0
1
.200
.0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97
현대
37
66
.212
14
3
0
7
15
10
0
5
0
30
.264
.576
1998
39
36
.194
7
0
0
2
5
2
0
9
1
15
.362
.361
1999
9
15
.067
1
0
0
0
0
0
0
1
0
4
.125
.067
2000
76
114
.193
22
5
0
3
14
14
0
14
3
33
.298
.316
2001
45
79
.228
18
2
2
4
14
9
0
6
0
29
.282
.45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02
KIA
26
33
.152
5
0
0
2
5
2
0
3
0
16
.222
.333
2003
103
257
.280
72
8
0
11
42
29
1
29
1
56
.353
.440
2004
119
250
.256
64
16
1
8
39
34
0
40
6
51
.369
.424
2005
79
124
.250
31
8
0
5
19
10
0
22
2
32
.372
.435
2006
115
377
.284
107
26
0
13
59
38
1
52
2
78
.370
.456
2007
90
243
.259
63
13
0
4
36
19
0
34
0
47
.344
.374
2008
87
261
.276
72
15
0
12
58
37
2
45
3
49
.382
.471
2009
51
108
.194
21
1
1
4
21
11
0
20
4
32
.338
.333
KBO 통산
(17시즌)
981
2200
.252
554
111
4
82
355
239
4
306
25
541
.347
.418

6. 관련 문서[편집]


[1] 사실 대타로 나올때 가장 무서운 타자다.[2] KIA의 이재주~ KIA의 이재주~ 오오오오오~ 오오오오~[3] 이 응원가는 2009년 시즌 끝난 뒤 사실상 은퇴 후, 2010년부터 한기주에게 넘어갔다.[4] 저 유니폼은 1994~95년도 유니폼, 이전의 태평양 유니폼은 녹색+노란색이었다.[5] 당시만 해도 광역연고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태평양 돌핀스의 연고권은 인천, 경기, 강원. 이후 경기-강원 지역은 현대가 인천을 떠난 후 새로 인천에 들어온 SK 와이번스의 광역권 연고지가 되었다가 2007년 KBO가 도시연고제를 시행하며 연고지가 아니게 되었다.[6] 그해 타율이 .212였는데, 순장타율이 3할6푼에 달했다.[7] 다만 이 때는 타점 1위인 이대호가 90타점도 안 될 정도로 투고타저였다.[8] 2006년은 대표적인 투고타저 시즌으로 손꼽힌다. 시즌 종료 후 아시안게임에서 도하참사가 일어나 다음해에 마운드의 높이와 공인구를 손보게 되었다.[9] wRC+ 기준 2006년 타자 중 10위이다. 팀을 지탱했던 3인 중 장성호가 5위, 이용규가 15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팀의 중심타자로써 매우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라는 평을 받을 수 있다.[10] 2000년에만 해도 임수혁 보다 대타홈런이 적었다.[11] 파일:/pds/201002/04/70/c0098370_4b6a6c58ccc1a.jpg[12] 박경태 말로는 그땐 자신도 22살이고 맞을짓을 한게 맞다고 넘어갔지만, 프로선수들끼리 집합걸고 빠따를 치는 일은 지금 했다가는 바로 매장당할 일이다. 당장에 프로시절도 아닌 고교시절에 학폭 미투로 훅간 선수들을 생각해보자.[13] 이재주가 후배들에게 사과를 한 야유회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그리고 8구단 시절 군기와 규율이 가장 강하던 팀이 해태였는데 구타, 집합은 일상다반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타이거즈의 야수조가 군기가 빡센 것이고 금발 염색하고 다닌 최향남이나 신인 시절 놀아재끼던 임창용, 경기 전날 술 먹고 다니던 선동열의 사례에서 보이듯 투수조의 군기는 그렇게 쎄지 않았다고 한다. 투수조의 군기는 LG 트윈스가 타이거즈보다 더 빡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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