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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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재훈
출생
1981년 2월 22일 (43세)
경기도 안양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가족
2남 중 둘째 / 결혼 후 아내, 아들
소속
CJ 엔투스공군 ACECJ 엔투스
종족
프로토스, 테란[1]
ID
fOru
별명
옵드라의 아버지, 한량토스[2], 아빠곰, 파파곰[3], 샤이닝 토스

1. 개요
2. 개인 기록
3. 전적
4. 프로게이머 경력
5. 코치 경력
6. 근황
7.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스타크래프트와 리그 오브 레전드 코치.


2. 개인 기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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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2회
3회
4회
5회
WCGC 2000
GoRush
박태민

WCG 2001
BoxeR
임요환

WCG 2002
BoxeR
임요환

WCG 2003
기록 말소[1]
WCG 2004
XellOs
서지훈

6회
7회
8회
9회
10회
WCG 2005
fOru
이재훈

WCG 2006
iloveoov
최연성

WCG 2007
Stork
송병구

WCG 2008
기록 말소[2]
WCG 2009
Jaedong
이제동

11회
12회
13회
14회
15회
WCG 2010
FlaSh
이영호

WCG 2011
Mvp
정종현
[3]
WCG 2012
PartinG
원이삭

WCG 2013
Soulkey
김민철

WCG 2019
Maru
조성주
[4]
[1] 이용범(Ogogo)의 특수 절도 혐의로 인한 영구 제명으로 인해 기록이 말소되었다.
[2] 박찬수(Practice)의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한 영구 제명으로 인해 기록이 말소되었다.
[3] 스타크래프트 2로 종목 변경.
[4] 정식 종목이 아닌 초청 종목이다.






3. 전적[편집]


이재훈의 스타1 양대 개인리그 A매치 통산 전적
방송사
온게임넷 A매치 총 전적
MBC게임 A매치 총 전적
양대 개인리그 합산 전적
vs 테란
26전 16승 10패 (61.5%)
15전 9승 6패 (60.0%)
41전 25승 16패 (61.0%)
vs 저그
22전 4승 18패 (18.2%)
10전 5승 5패 (50.0%)
32전 9승 23패 (28.1%)
vs 프로토스
10전 4승 6패 (40.0%)
4전 2승 2패 (50.0%)
14전 6승 8패 (42.9%)
총 전적
58전 24승 34패 (41.4%)
29전 16승 13패 (55.2%)
87전 40승 47패 (46.0%)


4. 프로게이머 경력[편집]


1999년에 데뷔한 1세대 게이머다. 원래는 복수 종족 선택 유저였으나 프로토스로 종변.

각 종족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 GO 시절 팀원들의 올라운드 스파링 파트너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전상욱박태민이 T1으로 이적한 후 부진에 빠진 이유에 대해서도 이재훈과 스파링을 못해서 그렇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5]

컨디션이 나쁘지 않을 땐 교전 자체를 굉장히 깔끔하게 하는, 컨트롤이 좋은 선수였다. 특히 옵저버와 드라군을 매우 간결하게 잘 다뤘으며 대규모 교전에서도 하이템플러 활용 등에서 잔손질 없이 깔끔하게 승리를 거둬 승리하는 것이 주요 패턴. 다만 멘탈이 망가지는 순간 컨트롤이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잦았고, 후반 집중력이 그리 좋지 않은 탓에 초반 교전에 대패해 후반만 바라보고 엎어진 테란에게 어영부영 자주 패해 한량토스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한 팀플레이에서 테란을 선택해 경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머큐리 제로에서의 팀플 경기였다.

이재훈을 대표하는 특징은 연습실 본좌, 불운, 그리고 새가슴이다. 2001년 3번의 스타리그 예선에서 모두 최종예선에서 탈락하고부터 그의 불운이 시작되었다. 먼저 스타리그는 01년부터 한 번 떨어지면 지옥이라는 PSL을 무려 10번 중 9번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중에서 본선 진출은 단 2회. 나머지 7번은 듀얼, 최종전, 1위 결정전에서 1승, 한끗 차이로 수차례 탈락할 만큼 오프라인 무대에서는 인연이 없었다. 참조 또한 반대편 MBC게임에서는 KPGA 2차리그 8강 진출 이후 오랫동안 본선에 오르지 못했고 아예 하부리그인 서바이버 본선에 오른 것도 9번 중 두 번. 그 중 한 번은 5차 마이너리그에서 최종 라운드까지 통과하여 MSL 본선에 올랐지만 8차 서바이버 리그에서는 2라운드에서 박지호를 만나 세트스코어 0:2로 패하며 다시는 MSL 본선 무대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방송경기에서 캐스터가 "아 이재훈 선수 마우스 세팅이 좀 이상한가 보네요? 마우스가 휘휘 헛돌아요" 이런 말까지 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그의 마지막 스타리그 본선 무대가 된 올림푸스배 스타리그의 경우 본선 진출이 너무 기뻐 예선 통과자한테 주는 이름표를 계속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닥치고 옵드라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기와 정석에 과하게 편향된 평면적인 전략[6] 때문으로, 엄청난 준비를 하고 오는 스타리그와 MSL에서는 카운터 빌드에 저격당하기 딱 좋은 스타일인 것이다. 이 당시에 프로리그라도 활성화되어 있었으면 그가 빛날 기회가 더 있었을지도. 그도 그럴것이 이후 염보성처럼 기본기 위주만으로 활동해 프로리그에서는 활약했지만 개인리그에서는 죽을 쒔던 후배 선수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습실 본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처럼 기본기에 의존하고 상대의 전략이나 맵, 심리전 등 소프트웨어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못하는 게이머들의 경우 방송경기에서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7]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머리로 한다는 명언이 괜히 있는게 아닌 것. 실제로 그의 마지막 스타리그 본선 경기도 임요환이 "이재훈은 무조건 옵드라를 쓸 것"이라 생각하고 초단위로 빌드를 짜온 터라 임요환 입장에서 최악인 기요틴 대각선 위치였음에도 바카닉을 제대로 못 막고 졌다.[8] 또한 전설의 50게이트 패배 경기 또한 지금 시점에서 보면 프로 레벨에서는 질 수가 없는 경기를 역전당한 것이다.[9] 그래서 그런지 준비보다 기본기 위주로 출전하는 WCG에서는 대표팀 승선을 두 차례나 했다. 어떻게 보면 선수들 색깔이 뚜렷한 스타1 프로토스 역사상 유일하게 양산형 프로토스라고 불릴만한 선수.[10]

저그전의 경우 역대급 저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방송경기 승률이 좋지 않았지만, 통산 승률은 50% 안팎으로 토스치고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토스전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특정 유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통산전적

전체적으로는 평소에 보여주는 실력은 테란전을 빼면 뛰어나지 못한 편이나, 간혹 가다 S급 선수들에게 무지막지한 실력을 보여주며 상대를 패닉에 빠뜨리는 다크호스 정도의 이미지. 뜬금없이 본좌포스의 최연성을 두들겨 팬다거나, 박성준을 셧아웃 시키거나, 임요환을 관광 보내거나. 특히 이윤열은 전성기 당시에도 줄곧 이겼으며, 팀리그 결승전, 올림푸스배 16강 등 중요한 고비에서 낚아내는 등 어느 정도 천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후배인 진영화도 롤러코스터를 잘 타는 경기력으로 유명하지만, 이쪽은 잘할 때와 못할 때가 확연히 차이나는 롤러코스터의 끝판왕 격이었다. 이 극심한 롤코 기질 때문에 개인리그에서는 늘 죽을 쒔고, 프로리그 및 팀리그에서도 기복이 심한 편이었으나, 삘받으면 대테란전이 아님에도 에이스급 선수들을 압살해버리는 충공깽스러운 경기력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진영화가 기복이 심하긴 해도 꾸준히 성적을 내줬고 역상성 종족에다 토스전에 강한 김명운이영한을 상대로[11] 낙승[12]하고 결승까지 갔던, 결승에서도 준우승 하기는 했지만 막 갓모드가 개화한 이영호를 상대로 나름 선전했던 경기력임을 감안하면 이재훈의 그것은 진영화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난다. 진영화는 애시당초 드래프트 세대의 프로토스들에서 육룡을 제외한 이들 중 최우선에 놓일 선수였다. 반면 이재훈은[13] 안기효, 김성제 정도의 선수였다.[14][다만]

물론 예상 외의 성적을 내기도 했는데, 박성준을 두 번이나 셧아웃 시켜 서바이버 리그, WCG 광탈로 내 몰아 버린 것과[15] WCG 금메달 획득. 결승에서 나도현을 꺾고 올라온 러시아 선수(Androide)를 꺾고 우승했는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하고 있다(...). 여튼 그로 인해 최초의 WCG 프로토스 우승자라는 타이틀과 본인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동시에 달게 되었으며, 이는 KeSPA 공인대회 최고령 우승자에 해당되는 기록[16][17]으로 이를 통해 당시 프로토스 KeSPA 랭킹 1위까지 등극했다.

투싼 팀리그 승자조 결승에서 T1을 상대로 3킬(성학승, 이창훈, 박정길)을 해내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이 활약 덕분에 결승에서는 박용욱을 저지할 대장으로 지목되어 7세트에 출전했으나[18] 아쉽게 패배해 준우승에 머물렀다.[19] 하지만 다음 팀리그인 MBC무비스배 결승전에서는 팬택 앤 큐리텔 큐리어스를 상대로 막내곰이었던 마재윤이 3킬하고 이윤열에게 패퇴하자 직접 나서서 아들이었던 자의 복수를 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2007년 공군 ACE에 입대해 2009년 제대했다. 본인은 선수생활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CJ 엔투스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플레잉 코치로 전환했다.[20]

아발론 MSL 2009에서 새로 도입한 about player 코멘트란에 최연성과 함께 센스넘치는 코멘트들을 올리며 간간히 시청자들을 웃겨 주었다.

이후 계속해서 스타리그와 MSL 서바이버 예선의 문을 두드리며 코치와 프로게이머로써의 생활을 병행했지만 역시 그것도 쉬운일은 아닌지 계속해서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2010년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2빅파일 MSL 서바이버 예선에도 참가했지만 역시 1라운드 탈락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23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5라운드 CJ:화승전에 출전, 1세트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이제동을 맞아서 마지막 은퇴 경기를 가졌고 동시에 이번 경기를 하면서 임요환이 가지고 있던 최고령 공식전 출전 기록보다 41일 앞서는 기록을 세웠다. 결과는 패배. 경기가 끝난 이후 은퇴식을 가졌다. 이로써 12년간의 프로게이머 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5. 코치 경력[편집]


현재는 CJ 프론트의 리그 오브 레전드 밀어주기에 힘입어 LOL 게임단 코치를 맡고 있는 중. 그러나 CJ가 기존의 팀원을 정리하고 아주부 팀원들과 강현종 감독까지 영입하면서 그 역시 밴픽친목질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듯한 모습이 LOL 클럽 마스터즈에서 보였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CJ는 기존 CJ 선수들의 처분과 더불어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2013년 3월 26일 강현종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입단 이후 여러가지 조언들을 아끼지 않은 모양. 선수경험이 있는 코치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자세나 멘탈부분, 그리고 CJ내부의 상황까지 자세하게 알려줘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014년 12월 16일 CJ와의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게임 조언도 중요하지만 심리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팀 레전드를 쉽게 놓아준건 팬들에게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이로써 앞서 팀을 떠난 서지훈과 더불어, 마지막 G.O. 출신의 맥이 끊어지게 된 것 역시 안타까운 점.


6. 근황[편집]


2011년 12월 1일, 결혼 발표가 나왔다. 예정일은 1월. 또한 신부가 미스코리아 뺨치는 미모의 변호사라는 것에 여러 E스포츠 팬들의 축하와 함께 질투를 만만치 않게 받았다나. 우승 못하면 어떠냐 미인만 얻으면 그만이지[21]

이후 변형태가 방송에서 언급하기론 집안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며 강민의 인터뷰에서 4년 전에 부인이 청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함께 내려가 사무실 일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7. 기타[편집]


DC 스갤의 옵드라라는 팬이 그린, 발로 그린듯 한데 본인이랑 똑같은 그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팀원들이 이재훈 본인에게 똑같다면서 저걸 보여줬다고 하나, "하나도 안 똑같은데 뭐가 똑같은지 모르겠다." 라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리얼스토리 프로게이머에선 파파곰이라는 별명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 옵드라의 파파곰 그림
그림1.
그림2.
그림3.

2014년 3월 12일 롤챔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샤이박상면 선수가 "이재훈 코치님이 임신 때문에 경기장에 못 오셨다. 순산하시길 바란다." 라고 말해 소소한 파문을 일으켰다.

파일:이재훈독방.png

GO가 CJ 엔투스로 창단한지 얼마 안 돼 파이터포럼 기사로 "이재훈 숙소에 독실 요구한 사연"이란 기사 하나 때문에 당시 스갤과 스타 관련 커뮤니티, 기사 댓글로 오지게 욕을 먹고 얼마 안돼 독실을 포기했다고 한다. 뭐 게임지의 가십기사야 반쯤은 걸러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프리카TV에서 GO, CJ 출신 BJ들의 증언에 따르면 2017년 6월 경 방송에서 박태민의 경우 나는 그때 이적을 한뒤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재훈이 형하고 오래 지내봤기에 재훈이 형 성격상 독실을 요구했을 것 같다는 견해를 드러냈으며 조병세의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텐데 말 안하고 끙끙 앓는 것보다 재훈이 형처럼 화끈하게 한 번 요구하고 오지게 까이는게 더 남자답다(...)며 옹호하는 의견을 냈다. 사실 이것도 특별대우를 요구했다기보다는 그냥 타고난 성격 자체가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하는 타입[22]이라서 그렇다.. GO가 CJ로 창단되며 관심이 몰려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갤 등 스타 커뮤니티들의 화력이 정점이던 시절이라 이런 가십기사 하나가 오해와 과장을 낳은 모양이다.

스타 뒷담화에서 조규남 감독이 힘든 시절[23]에도 담배를 사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준 선수라고 밝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연습하다가 혼자 묵묵하게 숙소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거나, 조규남 감독이 무리한 지출을 한다 싶으면 몰래 뒤에서 이러시면 안 되지 않냐는 등의 조언도 할만큼 팀내에서 큰 형 역할을 잘 했다고 한다. 당시 그렇게 힘든 상황임을 감안하면 인성도 좋았던 것 같다.

[1] 그 유명한 머큐리 팀플레이 무승부 사건 당시 박신영과 함께 출전해 도진광+임정호 팀을 상대했는데, 주종족인 토스가 아닌 테란을 선택했다. 결과는 드라군 두 마리 때문에 건물 다 띄웠고 결국 무승부.[2] 별명이 생긴 시기에는 유유자적한 플레이로도 이긴다는(특히 vs 테란) 좋은 의미였으나 이윤열과의 50게이트 사건 이후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3] GO시절 곰 3부자 시리즈에서 따온 별명.[4] 러시아인, 당시 테란 선수.[5] 다만 전상욱은 프로 커리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T1으로 이적한 이후에 전성기를 맞았다. GO 시절은 개인리그 진출도 거의 못 했었고. 박태민의 경우는 개인방송에서 밝히길 GO와 T1의 연습방식이 달랐던 점이 컸다고 했으며, 당시 T1에서 거의 유일한 저그 개인전 카드로 혹사당한 점도 부진의 원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6] 연습할 때는 옵드라만 써도 90%대 승률을 찍어서 다른 빌드를 쓸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기본기가 무시무시했다는 뜻이지만, 프로리그도 아니고 개인리그는 기본기만으로 호성적을 내기 힘들다는 것이 숱하게 증명되어 왔으며, 무엇보다 이재훈이 전성기였던 시절에는 프로리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7] 연습실 본좌(흔히 연습실 본좌라고 불리는 선수들은 개인리그에서 아예 존재감이 미미한 이들만을 칭한다)라고 불릴 정도로 대회에서 부진하지는 않더라도 연습실보다 대회에서 월등히 못하는 유형의 선수들은 이런 유형이 많다. 대표적으로 허영무(진에어 스타리그 2011 이전 한정), 김명운 등이 있다.[8] 다만 이는 1년 전 16강 비프로스트에서 임요환의 바이오닉 러쉬를 막고 탈락시킨 경험도 방심하는데 영향을 줬을 것이다.[9] 당시 이윤열의 앞마당을 2번이나 실패하게 만들어서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리버/템플러 견제, 아비터, 캐리어 등 끝낼 수 있는 카드는 많았다. 하지만 다수의 멀티로 200을 진작 채우고도 고테크 유닛을 쓰지 않고 게이트만 50개까지 늘린 채 비효율적인 질드라 어택땅만을 감행하여 테란의 1멀티 한방병력 진출을 허용했고, 불리해지자 템플러, 아비터 등을 쓰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 차후 밝히기로는 그 맵을 방송 경기에서야 처음 해봤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했으며, 그러다보니 이윤열의 섬 멀티의 존재를 몰랐다고 말했다.[10] 실제로 MBC게임 팀리그 통산 다승 10위다.[11] 김명운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역대 저그들 중 프로토스 안 잡아먹었던 선수는 손에 꼽히고 이영한은 워낙 프로토스전으로 유명하지만 특히 이 대회에서 김택용과 송병구를 다전제에서 탈락시키고 4강에 진출했던 것인만큼 프로토스전 기량이 올라왔던 상태였다.[12] 김명운 상대로 2:0 승, 이영한 상대로 3:1 승. 그 상성차 크다는 저프전 다전제에서 풀세트도 안 간 거면 낙승 맞다.[13] 그가 가진 유일한 유의미한 커리어인 WCG 금메달의 위상을 어디까지 쳐주느냐에 대한 것이다.[14] 이 3명은 전부 8강 리거인데, 안기효가 8강 3회, 이재훈이 8강 2회, 김성제가 8강 1회다.[다만] WCG가 그때까진 공인리그에 속해 위상이 있었으므로, 개인리그에 한해서는 둘보다는 윗급이 맞을 듯하다.[15] 박성준은 2017년에 강민의 개인방송에 출연하여 다른 팀이었음에도 이재훈이 연습을 많이 도와줘서 친분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재훈이 토스전에 엄청나게 강한 박성준을 잘 상대했던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저 당시 박성준의 토스전은 승률과 무관하게 현재 세간의 인식만큼 고평가받는 편이 아니었지만, 저 시절의 박성준은 박태민과 함께 양박으로서 저그의 투탑이었음에도 공식전 성적이 좋지 못했던 이재훈이 관광을 보내버렸다는 점 때문에 주목받았던 것이다.[16] 애초에 1999년에 데뷔한 거의 초창기 게이머인데다가, 당시 데뷔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편이 아니었다. 거의 고대 프로게이머 취급받던 쌈장 이기석이 1살 형으로, 생일로 따지면 반년도 채 차이나지 않는다.[17] 양대리그만으로 한정하면 마지막 스타리그의 우승자 허영무가 최고령 우승 기록이다.[18] 이 때 엔트리에 남아 있던 선수는 이재훈과 마재윤이었다. 당시 마재윤은 KTF 상대로 선봉올킬을 해내며 떠오르는 신예였으나 결승전 무대의 중압감 및 이재훈의 T1 상대 좋은 전적 등을 고려해 조규남 감독은 이재훈을 선택했다.[19] 박용욱의 견제를 막아내고 오히려 역으로 견제를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지만 박용욱의 집요함과 매끄러운 드라군 운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결국 마무리박 명경기의 희생자로 남고 말았다.[20] 시큰둥했다기보다는 조규남 감독의 설득이 컸을지도 모르겠다.[21] 팀 단위 리그로 따지면 이재훈도 팀리그 우승 3회, 프로리그 우승 1회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승한 WCG도 당시까진 OSL, MSL과 같은 공인개인리그였고.[22] 2006년에 방영한 리얼스토리 프로게이머 CJ편 3회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좋으며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불안하다고 본인이 말했다.[23] CJ의 스폰싱을 얻기 전까지 팀은 내내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그나마 한 차례 스폰서 후원을 해줬던 슈마일렉트론은 사기꾼한테 크게 데여 기업 자체가 증발하는 바람에...


군포중학교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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