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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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정호
2. 영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정호



1.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정호[편집]





성명
이정호(李貞浩)
생몰
1913년 3월 1일 ~ ?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봉덕동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이정호는 1913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봉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을 졸업했고, 1935년에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과 화남지부장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1938년 봄에 우한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 계통의 정당이 연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담했으며, 1941년 5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해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에 소속되었다.

1942년 5월,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에 통합되었을 때, 이정호는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김약산(金若山) 휘하의 조원에 편입되어 상위(上尉)로 복무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제1지대 정훈조(政訓組)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또한 1942년 10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11월에 개최된 제 35회 의정원 회의에서 김약산, 김상덕,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외교대표 파견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이 수정 통과되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은 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노력했다.

1943년 3월 20일 외무부 총무과장에 보임되었고 1943년 경 조소앙, 신익희, 엄항섭 등과 함께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3년 1월 20일에 한국청년회 학술부장에 취임하고 청년들이 혁명 자질을 양성하고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44년 6월 1일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을 맡아 7월 27일까지 재임하며 주중 미국대사관에 특파되어 일본군에 대한 염전사상 주입과 일본군 내의 한인 사병 모집을 위해 한문전단(漢文傳單) 작성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정호는 8.15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광복군 제3지대 북경지구 특파공작원으로 활동하여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사병의 탈출 공작을 수행했다가 광복을 맞이하자 조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이후 그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이정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영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정호[편집]



성명
이정호(李廷浩)
이명
안릉정호(安陵庭浩)
생몰
1896년 11월 22일 ~ 1952년 5월 18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신평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신평리
추서
건국포장

이정호는 1896년 11월 22일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8월경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서 흠치교(吽哆敎) 8인조 교도에 가입했다. 흠치교는 유교, 불교, 도교를 종합하여 신화일심(神化一心), 인의상생(仁義相生), 거병해원(去病解怨), 수천선경(修天仙境)의 네 강령을 교리로 삼은 종교로,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수행했지만 실제로는 조선독립운동을 추구하는 단체였다. 그들은 국권회복운동 전개를 결의하고 치성비를 납부했으며, 교도를 모집해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정호는 같은 해 영덕군 병곡면 각리동에 거주하는 남교양(南敎養)외 3명에게 입교를 권유하는 한편 교도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다가 1921년경에 체포되었고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52년 5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이정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