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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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성리학자·역사학자·시인·화가이다.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본관은 경주.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차남으로 경주 이씨(慶州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고려 최고 관직인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A] , 우정승(右政丞)[7]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하며 4차례 집정(執政)하였고, 5차례 공신(功臣)에 책록되었고, 김해후(金海侯),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생애[편집]
1301년 15세의 나이로 국자감시[8] 에 1등으로 합격했고, 같은 해 문과[9] 에 합격하였다. 이때 지공거였던 권부(權溥)의 눈에 띄어 그의 딸과 혼인하였고, 1303년 17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관직의 길에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권씨와 사별하고 박거실의 딸과 재혼했고, 이후 박씨마저 사별해 서중린의 딸과 3번째로 혼인하였다.
1314년 당시 상왕이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건너가 만권당(萬卷堂)에 머무르면서 원나라 유학 생활이 시작된다. 만권당에서 원나라의 유명한 한족 문인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학문의 견문을 넓혔고 이로써 원나라 내륙까지 다닌 얼마 안 되는 고려인이 된다. 1316년 충선왕을 대신해 사천성의 명산인 아미산을 유람하였고, 1318년 충선왕이 절강성의 보타사에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1320년 충선왕은 이제현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옮겨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칭호를 하사하였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함으로써 강남[燕吳][10] 에서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였으며, 황제에게 주청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또한 입성책동(立省策動)이 일어나자 원나라 도성(都省)에 상소를 올려 이를 저지하였다.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되자 사면을 청하였고 결국 감숙성의 도스마(朶思麻, 타사마)로 유배지를 옮기게 하였다. 1323년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까지 다녀왔다. 이 때 겪은 경험이 만권당에서 맺은 교우와 마찬가지로 이제현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밀직사사(密直司使)를 더하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다시 첨의평리 정당문학(僉議評理 政堂文學)으로 옮기고 김해군(金海君)으로 봉해졌다. 1325년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1336년 삼중대광 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올랐다.
1339년 충혜왕이 조적(曹頔)의 난으로 인해 원나라에 붙잡혀 갈 때 다시 복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이 활동으로 인해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고려시대 3대 문학비평서로 평가받는 역옹패설(보물 제1893호)을 저술하게 되었다. 1342년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수종공신(隨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고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데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충목왕 사후 원나라에 있던 왕기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351년 원나라 순제에 의해 충정왕이 폐위되고 왕기가 고려 국왕 공민왕으로 봉해졌다.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공민왕은 그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진사대부들의 수장격인 이제현을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A] 에 임명하였다. 이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임명된 이제현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 배전(裴佺)과 박수명(朴守命)을 정동행성에 하옥하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로,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11] 를 각산(角山)으로 유배 보냈으며,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한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좌천시켰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어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이제현의 조치가 적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신뢰하고 안도하였다. 공민왕의 귀국 후, 왕을 수행한 조일신(趙日新)이 그 공을 내세우며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이제현을 시기하였는데 이에 이제현은 거듭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치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해주었다. 다시 세 번 더 사직을 청하여 드디어 치사(致仕)하였는데 덕분에 1352년 조일신의 반란 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조일신이 처형된 후 왕은 이제현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삼아 정국을 수습하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1353년 정월 우정승을 사임한 후 동년 5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다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선발하였다. 다시 우정승이 되었으나 사임하자 김해후(金海侯)로 봉해졌고 문하시중으로 바꿔 임명되었다. 1356년 기철을 숙청하는 반원 운동이 벌어지자 문하시중이 되어서 사태를 수습하다가 1357년 치사하였다. 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1367년 7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鷄林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이제현은 별세하였다. 동년 10월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12] 의 선영에 장사 지냈고, 1376년 10월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가계[13][편집]
이제현은 경주 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며, 경주 이씨의 중조(中祖)로 대접받는다.
- 조부 : 이핵(李翮) -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14]
- 조모 : 김해 김씨
- 아버지 : 이진(李瑱, 1244~1321) - 검교첨의정승[15]
- 어머니 : 진한국대부인 박씨[63] , 박인육(朴仁育)[64] 의 딸
- 형 : 이관(李琯) - 이암공파[16] 파조
- 형수 : 합천 이씨, 이신손(李信孫)[17] 의 딸
- 초배 : 길창국부인[43] 권씨(權氏, 1288~1332), 권부(權溥)[44] 의 딸 - 3남 4녀[45]
- 장남 : 이서종(李瑞種) - 종부시부령 증 문하시랑[18]
- 자부 : 풍산 홍씨, 홍유(洪侑)[22] 의 딸
- 자부 : 김씨(金氏)
- 손자 : 이원익(李元益) - 대사성[23]
- 차남 : 이달존(李達尊, 1313~1340) -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24]
- 자부 : 남포 백씨[29] , 백이정(白頤正)[30] 의 딸
- 3남 : ?(요절)
- 장녀 : 경주 이씨, 임덕수(任德壽)[36] 에게 출가
- 차녀 : 경주 이씨, 이계손(李係孫)[40] 에게 출가
- 3녀 : 의화택주 이씨[41] , 김희조(金希祖)[42] 에게 출가
- 4녀 : 경주 이씨(요절)
- 계배 : 수춘국부인 박씨[53] , 박거실(朴居實)[54] 의 딸 - 1남 3녀
- 삼배 : 서원군부인 서씨[59] , 서중린(徐仲麟)[60] 의 딸
- 측실
- 제 : 이지정(李之正) - 호군공파[62] 파조
- 제부 : ?
4. 기타[편집]
- 유학에 있어서 안향 - 6군자(이진, 권부, 백이정, 우탁, 이조년, 신천)[65] - 이제현 - 이색 - 정몽주로 이어지는 고려 성리학 계보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고, 성리학의 수용 및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66] 조선조에서 편찬된 <고려사>에 유교에 대해서 공론만 떠드는 수준밖에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성리학의 틀에 매몰된 다소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한 후 "원나라에 와있는 인물들 모두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데 지금 나의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수치이다."라고 한탄하면서 원나라로 불러들인 인물이 이제현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러한 비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조선조 명상(名相) 류성룡(柳成龍)이 '이제현은 덕(德)·공(功)·언(言)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 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儒家)적 인물이다.'라고까지 평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현은 만권당(萬卷堂)에서 요수(姚燧),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등 당대 최고의 문인·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적 역량이 더욱 깊어졌다.
- 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서 이를 바탕으로 사학(史學)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익재난고>와 <역옹패설>이 있다. 그 밖에도 전해지지 않는 저서로는 백문보, 이충달과 함께 편찬했다는 <사략(史略)>이 있는데 이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에 입각해서 저술한 고려사 편년체 통사 사서로 판단되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들어 있는 이제현의 논찬을 통해 어느 정도 특징을 알 수 있다.
- 그가 지은 사리화(沙里花)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시로도 유명하다.
黃 雀 何 方 來 去 飛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一 年 農 事 不 曾 知
한 해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鰥 翁 獨 自 耕 耘 了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耗 盡 田 中 禾 黍 爲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 고려사에 있는 그의 열전을 보면 그가 충선왕과 나누었던 대화나 각종 상소들이 자세하게 올라와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 이제현을 실제로 본 원나라 사람들은 이제현의 외모에 대하여 '이제현은 훤칠한 키에 우람한 덩치를 가졌다. 그런데 그런 몸뚱이보다 간이 더 큰 사람이다.'라고 평했다.[67]
- 공민왕 대 후반 정권을 장악한 신돈(辛旽)이 지공거(知貢擧) 문제로 이제현의 문생들을 참소하였는데, 이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제현과 그 주변 인물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악의적으로 한 말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제현은 지공거로서 최용갑(崔龍甲), 백문보(白文寶), 이곡(李穀), 윤택(尹澤), 안보(安輔), 이색(李穡), 정추(鄭樞), 권중화(權仲和) 등을 선발하였고, 이제현의 문생들은 모두 고려 말 정치·사상을 서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인물들이다.
- 이제현이 신돈을 비판하였던 일도 <고려사>에 전하는데 공민왕에게 "신돈의 골상이 옛날의 흉악한 자들과 같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충언을 올렸다고 한다. 이에 원한을 품은 신돈은 이제현을 헐뜯었지만 연로한 탓에 별다른 처벌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신돈을 반역 혐의로 처형시킨 뒤 공민왕은 미리 앞을 내다본 이제현의 식견에 감탄했다고 한다.
- 토지 제도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로 연구한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 자신도 문관임에도 이제까지 고려 문관들의 탁상공론의 원흉을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 제도로 꼽았으며 문관과거제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 공민왕의 2비 혜비 이씨가 이제현의 딸로 공민왕이 시해당한 뒤에 공민왕의 5비인 신비 염씨와 함께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후비들은 공민왕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 이제현의 차녀는 공조전서 문창공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을 갔는데 아들(이제현의 외손자)이 연안 이씨 통례문부사공파중의 소윤공파 파조인 삼사좌사 이척(李隲)이다.
-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 때 유모가 졸고 있는 사이에 우물에 빠질 뻔한 적이 있는데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의 호통소리에 잠에서 깬 유모에 의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유모가 사당에서 이제현의 초상을 보고 꿈 속의 노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68][69]
5.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송재호가 연기했다. 염제신, 이인복과 셋이 세트로 몰려다니며 늘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지만 행동으로 옮기는데에는 다소 소극적인 유약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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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다. 이제현이 33세가 되던 1319년(충선왕 6)에 충선왕과 더불어 원나라에 방문했을 때 원나라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리고 석학이었던 탕병룡이 찬문을 지었으며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올 때 이 초상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원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되찾았고, 1364년에 고려에서 다시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와 이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감회를 느끼며 시도 지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엄지손가락이 삐져나와 있기도 하다. 상세한 내용은 이제현 초상 문서 참조.[2] 율리우스력 1288년 1월 28일.[3] 경진(庚辰)일.[4] 율리우스력 1367년 8월 24일.[5] 계묘(癸卯)일.[6] 고려사, 경주이씨대동보를 기본으로 작성하였고 안동권씨 성화보를 보조로 하였다.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서종의 자녀, 임덕수의 자녀의 경우에 적용하였다. 성화보에는 이달존의 차남이 이학림, 3남이 이수림으로 되어 있어 경주이씨대동보와 대립되나 이는 차용하지 않았다.[A] A B 도첨의정승 겸 권단정동성사. 정승(政丞)은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던 도첨의사사의 수장인 도첨의정승을 의미한다.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다. 명목상 고려왕이 겸임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즉위한 후 고려로 귀국할 때까지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제현을 도첨의정승에 임명하고 권단정동성사의 직책을 주어 사실상 왕권(王權)을 섭정(攝政)하게 한 것이다.[7] 2차례 우정승을 역임하였다. 당시에는 상우(尙右) 원칙을 취해 우정승이 좌정승보다 높은 최고 관직이었다. 참고로 이후 관제 개편으로 최고 관직으로 문하시중을 두었고, 문하시중은 다시 문하좌시중과 문하우시중으로 개편되는데 이때는 상좌(尙左) 원칙을 취해 문하좌시중이 문하우시중보다 높은 최고 관직이었다.[8]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의 전 단계인 예비고시로서 국자감(國子監)에서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진사과(進士科), 사마시(司馬試), 성균관시(成均館試) 등으로도 불렸다.[9]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의미한다. 동당시(東堂試)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10] 고려사 원문에 燕吳로 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글 번역에 강남으로 되어 있음.[11] 충정왕 대의 권력자였던 모후 희비의 오빠이다.[12] 현재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 일대.[13] 고려사, 경주이씨대동보를 기본으로 작성하였고 안동권씨 성화보를 보조로 하였다.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서종의 자녀, 임덕수의 자녀의 경우에 적용하였다. 성화보에는 이달존의 차남이 이학림, 3남이 이수림으로 되어 있어 경주이씨대동보와 대립되나 이는 차용하지 않았다.[14] 門下評理 贈尙書左僕射.[15] 檢校僉議政丞.[16] 怡庵公派.[17] 찬성(贊成). 상서(尙書) 이순목(李淳牧)의 아들이다. 족보에는 이순목이 이존순(李存淳)으로 오기되어 있다.[18] 宗溥寺副令 贈門下侍郞.[19] 鷄林君.[20] 횡성 조씨(橫城 趙氏). 횡성군(橫城君).[21] 합천 이씨(陜川 李氏). 부사(府使). 이름의 樀의 좌변은 木이 아니라 衤또는 禾로 되어 있다.[22] 대제학(大提學). 부친은 도첨의사인 지제고(都僉議舍人 知制誥) 홍간(洪侃).[23] 大司成.[24] 典理摠郎 寶文閣直提學 知製敎.[25] 郡事.[26] 翰林學士.[27] 少府尹.[28] 행주 기씨(幸州 奇氏). 개성윤(開城尹). 부친은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 기철(奇撤).[29] 藍浦 白氏.[30] 첨의평리(僉議評理)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상당군(上黨君)에 .[31] 기거랑(起居郞).[32] 반남 박씨(潘南 朴氏).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33] 회덕 황씨(懷德 黃氏). 삼사좌윤(三司左尹)을 거쳐 상서(尙書)를 지냈다.[34] 判事.[35] 郞將.[36] 풍천 임씨(豊川 任氏).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부친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37] 경주 이씨 족보에는 이극(李隙)으로 기록되어 있다. 척(隲)을 극(隙)으로 오기한 듯하다.[38] 三司左使.[39] 判典醫監事. 경주 이씨 족보에는 전의감정(典醫監正)으로 기록되어 있다.[40] 연안 이씨(延安 李氏). 공조전서(工曹典書).[41] 義和宅主 李氏.[42] 언양 김씨.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부친은 좌정승(左政丞)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륜(金倫).[43] 吉昌國夫人.[44] 안동 권씨. 첨의정승(僉議政丞).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45] 이제현 묘지명에는 2남 3녀로 되어 있으나, 부인 권씨 묘지명에는 3남 4녀로 되어 있고 아들 1명과 딸 1명은 어려서 요절하였다고 한다.[46] 判事.[47] 牧使.[48] 正郞.[49] 영해 박씨(寧海 朴氏).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부친은 판서(判書) 박원계(朴元桂).[50] 郡守.[51] 진천 송씨(鎭川 宋氏).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부친은 찬성 송지백(宋之伯).[52] 공민왕 제2비.[53] 壽春國夫人 朴氏.[54] 춘천 박씨(春川 朴氏). 사복시정(司僕寺正).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 元氏) 원관(元瓘)의 딸이다. 부친은 대언(代言) 박경(朴瓊)이고, 박경은 판사(判事) 박충좌(朴忠佐)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 족보와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권지이(卷之二)에는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춘천 박씨 족보는 푸른색 부분만 일치하고, 고려사, 함양 박씨 족보(?)는 붉은색 부분만 일치하고 있다. 등과록전편에는 박거실(朴居實)의 아들 박희문(朴希文)의 등과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1#2, 춘천 박씨 족보에는 박거실의 자녀가 1남 3녀로 아들은 박의공(朴義公)이고 맏사위가 이제현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박충좌(1287~1349)는 이제현과 동년배로 이제현과 함께 백이정(1247~1323)의 문하생이었고 연경의 만권당에서도 함께 한 사이였으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55] 郎將.[56] 縣監.[57] 中郎將.[58] 광주(광산) 김씨(光州(光山) 金氏). 전서(典書). 부친은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리(金光利).[59] 瑞原郡夫人 徐氏.[60] 평당 서씨(平當 徐氏). 지서주사(知徐州事).[61] 1375년(우왕 1) 이색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에 측실 소생의 두 딸이 있으며 장녀는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과 동문선(東文選) 권126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62] 護軍公派.[63] 辰韓國大夫人 朴氏. 월성 박씨(月城 朴氏). 신라(新羅) 제7대 국왕 일성왕(逸聖王) 계열의 월성 박씨(月城 朴氏)와 제5대 국왕 파사왕(婆娑王) 계열의 경주 박씨(慶州 朴氏)는 구별된다. 과거에는 월성 박씨를 경주 박씨로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월성 박씨로만 부르고 있다. 월성 박씨의 시조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제54대 국왕 경명왕(景明王)의 8남이다. 경명왕의 아들 8대군이 각각 본관을 나눌 때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다.[64] 월성 박씨(月城 朴氏)의 중시조.[65] 안향의 대표적인 여섯 제자이다. 이제현은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사위, 백이정의 제자이다.[66] 조선시대에 문묘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67] 출처[68] 이항복은 이제현의 사촌형제인 상서공 이과(李薖)의 후손이라 직계손은 아니다. 이제현은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이고 이과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이다.[69] 이 일화는 초롱이의 옛날여행 이항복 편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