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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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훈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여담으로 이 일러스트의 원본 파일명이 wind.jpg다. 바람의 아들에 걸맞는 적절한 파일 네이밍.

1. 프로 경력
1.1. KBO를 평정한 야구천재
1.2.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1.2.1. 무엇이 문제였나?
1.3. 국내 복귀 이후
1.3.1. 2009 시즌
1.3.2. 2010 시즌
1.4. 2011 시즌
1.4.1. 포스트시즌
1.5. 은퇴
2. 국가대표 경력


1. 프로 경력[편집]



1.1. KBO를 평정한 야구천재[편집]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투수는 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이종범은 10승 투수 2명과도 바꾸지 않는다.

-김응용 해태 타이거즈 전 감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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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 - 이종범 - 박진만 - 강정호로 이어지는 KBO 최고 유격수 계보의 한 축으로 광주일고[2]와 건국대[3][4][5]를 졸업하고 1993년에 1차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계약금 7천만원을 받고 입단하였다.[6]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가 될 재목으로 주목받았으며,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지에서도 스카우트를 하려 했지만 동기 선수들도 같이 받아주기로 약속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1989학번)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방송에서 밝힌 건국대 입학 이야기

여담으로 사실은 왼손잡이였다고 한다. 우투우타가 된 것은 당시에 왼손 글러브가 없었고 타격은 오른손으로 던지니까 당연히 오른쪽에서 쳐야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오른손으로 치는 당구는 300~400이지만 왼손으로 칠 때는 1000(!)이라고 한다. 야구선수 당구대회에 출전한 좌타 이종범 만약 본인이 우투좌타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우투좌타를 하지 않은 아쉬움이 커서인지 아들에게 한 유일한 조언이 왼손으로 치라는 것이었다.

데뷔 시즌부터 타율 0.280, 득점 1위, 안타, 도루 2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7], 한국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도루 3개(최다), 총 7개(한국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1993년은 양준혁, 박충식, 이상훈, 구대성, 이대진 등 나중에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이 많이 나온 해로 유명했던지라, 신인왕은 양준혁이 가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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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4년,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릴 거라는 언론을 엿먹이기라도 하듯, 0.393이라는 괴물같은 타율을 기록했다. 백인천의 0.412에 이은 역대 2위 기록. 또한 196안타[8][9], 84도루를 달성했는데 이때의 84도루는 지금까지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낸 만큼 정규시즌 MVP는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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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4할에 도전하는 타자들의 타율 변화 양상은 시즌 초에 타율을 최대한 올려놓고 조금씩 깎아 먹으면서 시즌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보이는데 94년 이종범은 시즌 초부터 8월 말까지 타율이 꾸준히 상승하는 흠좀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중에 말하길 94년 당시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 3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하려고 했다고... 흠좀무. 이 때 조정 OPS가 2002년 이승엽보다는 낮고, 92년 장종훈보다 높다. wRC+를 보면 94 이종범은 2010 이대호보다 높다. [10] 게다가 도루지표인 wSB은 역대 1위다. 거기다 이게 다 유격수로써 낸 성적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

'꿈의 타율' 4할을 넘나들며 한 시즌에 84개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놀라웠던 주루 능력과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완전히 빠지는 듯한 공을 낚아 내는 수비 능력[11]까지. 한마디로, 1번 타자로 나와서 안타치고 홈런치고 도루하면서 명수비까지 하는 괴물. 특히 84개라는 무지막지한 도루 개수는 21세기가 온 뒤로도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당시의 도루는 무관심도루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허수는 있는 주장도 있다.[12] 어쨌든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선수의 대표는 이종범이라 할 수 있겠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종범은 4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한 이유가 생고기를 먹고 탈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한때 3할 8푼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경기 중 사고(?)를 내지 않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발언.

물론 1996년의 박재홍의 등장 이전까진 장타보다는 주로 도루쪽에 비중이 컸지만[13] 박재홍의 30-30 도전에 고무받아 1996년부터 장타에도 집중하고, 그 결과 1997년에는 천하의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29개까지 기록했을 당시 이종범이 홈런 1위 고지를 밟고 있었는데, 8월까지 이종범은 홈런 29개에 타율 3할 5푼대의 끝판왕이었다. 하지만 후반기에 체력이 떨어져서 타율도 까먹고 홈런도 9월 15일에 겨우 하나 추가하며 30-30 클럽 가입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1997년 시즌 홈런왕은 32개를 친 이승엽이 2개 차이로 가져가게 된다. 한편 이 30개라는 홈런 개수 덕인지, 94년보다 97년의 이종범이 더 5툴 플레이어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들을 보면 오히려 이종범의 커리어하이는 97년이 아니라 94년이다. 97년은 장타를 의식한 나머지, 장타율빼고는 오히려 전년도들보다 약간 못 한 모습을 보여주며 볼삼비가 약간 오른게 보인다. 2009년 시즌에는 4할 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94년에 대해 견제가 심하면 안타를 치기 힘들다고 말하며 "나는 어차피 볼넷으로 출루해도 도루를 해버렸기 때문에 심한 견제는 없었다."라고 자기 입으로 밝힌 적이 있다(...). 이종범이 왜 무서운 선수였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 93~97년까지 홈런 순위는 4-4-9-3-2위였고 도루 순위는 2-1-6-1-1로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했을 뻔한 유이한 선수이다.[14] [15]

이렇게 데뷔이후 맹활약한 이종범의 4.5년[16]은 KBO 역사상 야수로는 압도적인 시즌이었는데, 93년부터 97년까지 5시즌동안의 기록은 클래식 스탯만 따져도 .332(1위) 713안타(1위) 106홈런(2위) 315타점(5위) 310도루(1위) 1170루타(2위) OPS .954(2위) 로, 사실상 야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선수였다. 세부스탯 역시 어마어마했는데, 4.5년간 sWAR 42.15(1위), wRC+ 176.8(2위) wOBA .423(2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4.5년간 쌓아올린 sWAR 42.15는 2위인 양준혁과 상당한 차이가 나며[17], 여타 이름있는 선수들의 통산sWAR을 가볍게 추월하는 수치였다.[18]

그리고 포스트시즌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93년 말고도 96~97년 해태의 통합 2연패 주역 중 하나였으며, 97년에는 고비 때마다 홈런을 쳐내는 맹활약으로 2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93년부터 97년까지 이종범은 포스트 시즌에서 .273, 3홈런(2위) 10타점(4위) 13도루(1위) 36루타(2위) 14득점(1위) sWAR 1.19(1위)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과시했다.

이렇게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세번째 우승을 거머쥔 후 본인의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당시 해태의 사정과 맞물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4억 5천만엔의 금액으로 현금트레이드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19]


1.2.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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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데뷔 후 첫 달은 맹활약을 펼치면서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다. 당시 일본 야구관에 있어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핵으로 타격은 약해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3할을 넘나드는 타격과 부상 전 기준 팀내 홈런 3위안에 드는 생각 외로 뛰어난 장타력, 거기에 특유의 빠른 발로 도루 리그1위를 기록하면서 주니치 팬들 뿐 아니라 일본야구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수비쪽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유격수는 뛰어난 수비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 외로 비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첫째 이유는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가 이미 탈세로 시즌 아웃이라 대체 유격수가 없었고 둘째는 시즌 초에 보여준 좋지 못한 수비력이 본실력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즌 초의 타격성적이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는 리그가 바뀌었음에도 공격력이 나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면서 수비쪽도 본실력이 나올것이라 생각하며 그의 활약을 지속적으로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부상 전 올스타전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 유격수와 2배이상 차이나는 득표까지 받았을 정도.

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기 시작했을 뿐더러[20] 상당수의 견제성 사구로 인해 성적도 떨어지고 있었다.[21] 6월 초 들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이종범은 6월 중순에 타격감을 조금씩 회복해가며 부상 직전인 22일까지 홈런을 포함한 7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감을 다시 찾아가나 싶더니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의 몸쪽 공을 무리하게 스윙하려다 공이 오른쪽 팔꿈치에 맞으면서 골절상을 입게 되고 남은 시즌을 거의 날리고 시즌 막바지에야 가까스로 복귀하게 된다. 안타깝게 그 부상 이후로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98년 시즌 최종성적은 67게임에 출전해 .283의 타율과 10홈런 18도루 OPS .873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성적으로 보이나 당시 주니치에서는 상당한 공격지표를 기록했다. 팀의 주전 중에 타율이 이종범보다 나은 선수는 .285를 기록한 세키가와밖에 없었으며, 홈런 수 역시 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야마자키 27개, 고메즈 26개에 이은 3위를 기록. 도루는 시즌 2위를 기록했으며 WAR 역시 60게임 남짓한 기간 동안 2.9를 기록했던만큼,[22] 60게임동안 기록한 성적이라는 점에서 용병임을 감안해도 그렇게까지 책잡힐 성적은 아니었다. 이러한 타격 성적 때문에 이후 99년에도 호시노가 외야수로까지 컨버전시키면서, 2할3푼대의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서도 400타석 넘게 출전시킬 정도로 이종범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

98년 팔꿈치 골절 후 시즌 막판에 컴백하면서부터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 99년에는 시범경기에서만 4개의 데드볼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정규시즌에 들어서는 .238의 타율과 9홈런 24도루라는 기록을 거두며 리그 2위를 기록한 도루부분을 제외하면 이종범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처참한 타격성적을 기록했다. 에러까지 7개를 기록하면서 외야수비 또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23]이 당시 주니치가 리그 우승을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고 묻어갔다.[24] 또한 99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조성민, 선동열과 함께 일본 올스타 대표로 출전, 총 5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며, 1회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

2000년에는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 2군에서 본즈 놀이를 했었다. 새 용병 데이비드 닐슨(등록명 딩고)이 시즌 초반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하자 바로 1군에 콜업되어 잠깐이긴 했지만 98년 전반기같은 맹활약으로 팀의 10연승에 기여했다. 호시노감독도 이 때 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했을 정도. 연승이 끝난 이후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으나 8월 중순까지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분전하였고, 외야수비 역시 시즌 동안 실책 3개로 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타율은 막판에 힘이 빠진 탓에 .275로 마무리했지만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율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올라간 것으로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25]

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던 이종범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분노 폭발. 급기야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했고#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라는 처참한 부진을 보이며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해 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었다.[26]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다.

여담으로 SK 와이번스의 일본인 투수 가도쿠라 겐과는 주니치 시절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카도쿠라가 원정 경기가 끝난 뒤에 이종범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진출 후 20여년이 지난 후 새삼 주니치 팬덤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2019 WBSC 프리미어 12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린 이정후가 이종범의 아들인데다, 2018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주니치의 역대급 마무리였던 선동열과 함께 코칭스태프로 다시 한번 페어를 이루었고, 19년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0년 주니치에서 이종범과 한솥밥을 먹었던 데이비드 닐슨이었기 때문. 거기에 2019년 11월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 되면서 올드팬들에게 계속해서 언급되기도 했다. 이종범이 주니치에서 뛰던 당시 리그 우승도 한데다 데뷔 초 나름의 임팩트도 있었고 20년이 지난 덕인지 올드 주니치팬들에겐 고메즈, 선동열, 이상훈과 함께[27] 90년대의 추억의 용병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28]

1.2.1. 무엇이 문제였나?[편집]


이종범의 일본진출 실패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유였는지 분석해보자면, 그 정도가 크던 적던 부상이 부진의 가장 큰 이유가 된건 사실이며, 그 근거로 부상 회복 이후에도 타석에서 몸쪽 공을 공략하지 못한 채 심각한 부진을 보이며 추락하고 만다. 이종범은 국내 시절부터 원래 몸쪽으로 오는 코스의 볼을 당겨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부상 전에는 일본 투수의 몸쪽공을 어느정도 잘 대처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98년 4월 중순부터 잦아진 사구들로 인해 부상 이후 몸쪽 공 대처가 예전만 못해지며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 든 일본투수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다만 복귀 이후 이종범의 부진을 모두 완벽하게 부상 탓으로 돌리는건 부상 탓이 없었다고 하는 것 만큼 무리가 있다. 부상 전 이종범도 체력적 약점과 변화구 대응 능력의 약점이 분석당해 성적이 하향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까지 강점이던 당겨치기가 몸쪽공 대처능력이 떨어진 후엔 되려 독이 되어 애매한 땅볼과 펜스 앞 플라이를 양산하곤 했다. 더불어 하필 홈구장이었던 나고야 돔잠실 야구장 못지 않게 외야가 넓기로 유명한,[29] 일본 프로야구 구장에서도 매우 투수친화적인 구장이었던 것도 몰아치는 타격에 능했던 이종범의 부진이 깊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30][31] 그럼에도 과거 작은 무등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았던 해태시절처럼 크게 당겨치는 팔로스윙을 부상 후에도 고집을 했었으니 99년과 같은 성적을 기록한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32]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팔꿈치 골절을 입힌 가와지리의 볼이 강속구 고의 빈볼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와지리는 언더핸드 투수에 직구 구속이 130초반대인 투수로 던진 볼은 변화구였고 헛스윙 판정에 스트라이크였다. 무엇보다 우타자의 왼쪽 팔꿈치면 모를까,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노려서 빈볼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공이 유도미사일이 아닌 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 어쨌든 반일감정을 이용해 선동하는 찌라시들과 부화뇌동하는 팬들 덕택에 가와지리에 대한 국내에 평가가 굉장히 안 좋아졌는데 가와지리는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대동하고 병원까지 찾아가 이종범 선수에게 사죄까지 했다. 이종범이 오히려 안절부절 못할 정도의 진실한 사과였고, 박동희의 칼럼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이종범은 처음으로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출처[33][34]하지만 어이없게도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서는 이 변화구를 150km짜리 강속구로 포장했고 방송분에서는 이종범도 이에 동조하며 자신의 부진이 주변의 차별과 압박 탓인양 돌리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이때 반응으로 김성근이나 선동열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이종범이 일본에서 배운 것도 없고 반감만 키워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종범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의 2군 시절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고, WBC 결승타 후 일본 진출 실패에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점도 있다고 했다. 은퇴 후 강연에서도 본인이 당시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했었다는 말도 했었다.# 또한 일본 야구 진출 후 불만을 드러낸 부분은 이종범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선동렬도 첫해에 부진할 때는 스트라이크존에서 불만을 토로했고 국내로 복귀한 정민태, 정민철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차별여부는 알수 없으나, 당하는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게 사실이다.[35]다만 국내 구단들의 용병에 대한 시선이나 대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리그로의 이적에는 용병으로써 어느정도 적응에 대한 의무감이 생기는건 어쩔 수가 없다. 해외 진출한 국내 선수들 중 성공한 케이스와 실패한 케이스로 나뉘는 척도도 보통 한국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리그의 사정이나 본인의 기량에 대해 얼마만큼 사색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6] 그래도 이와는 별개로 일본 야구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일설에 따르면 호시노와의 마찰 때문에 외야수로 강제 전향당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듯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시노는 이종범을 구타하고 방송에서 대놓고 이종범을 폄하하기도 했다. 그래서 감독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물론 외국인선수가 성적이 안 나오면 감독과 사이가 나빠지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 정민태와 하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호시노와 이종범의 야구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이종범의 단적인 일본 성적만 놓고 보면 이건 넌센스에 가까운 해석이다. 오히려 호시노는 주니치 시절 이종범의 한국시절 모습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중장거리 호타준족 성향의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고,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이종범을 데려왔다.[37] 되려 99년과 같이 2할 3푼대의 타율에 수비도 좋지 않고 출루율도 특별히 높지 않은데다 주루도 평균보다 조금 높은 정도에 그치는, 고액연봉의 외야수를 자기 스타일의 선수라고 할 감독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해태를 지휘하던 김응룡의 스타선수를 방임하던 스타일에서 야구를 하던 이종범에게 이것 저것 간섭하려드는 호시노의 스타일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은 가능하다.[38]실제로 김응룡감독은 주니치에서 부진하고 있던 이종범에 대해 "저 녀석은 냅둬야 잘 하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허나 그냥 놔두고 주전으로, 그것도 유격수로 쓰기에는 당시의 이종범은 호시노 감독의 기준에선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내야 수비를 매우 중요시 하는 호시노 스타일상 실책이 상당히 많았고[39][40] 무엇보다 수비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유격수 자리에서 이종범의 가장 고질적인 유격수 수비의 문제점인 기본기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 외야수 전향은 어떻게 보면 이종범을 주전으로 쓰기 위한 주니치 코칭스탭의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이종범의 실책 수는 그 전 KBO 시절에도 상당한 수였고,[41] 당시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수비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터 분석으로 소문난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종범의 데이터를 받은 후 리그 수준과 실책 수를 참고하지 않고 무작정 유격수에 박았을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이미 시즌 초 부터 주니치는 후쿠도메 코스케가 올라올 때까지만 쿠지 테루요시와 이종범을 임시로 유격수로 돌려 쓴 후 빠른 발과 어깨를 이용한 외야수로의 컨버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입단 초 국내 언론에 소개된 입단 기사에서도 호시노는 처음부터 이종범을 유격수로 쓰기보다 외야수로 전환시킬 생각이 컸었다.출처출처2 어찌되었건 결국 이종범은 수비시 정면 타구와 송구의 정확도에 약점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팔꿈치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동년 한신 타이거스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수비형 유격수 쿠지 테루요시[42]한테 주전 유격수 자리를 내주게된 후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기에 이른다.[43] 물론 본인은 '외야수 전향 이후 내 야구가 바뀌었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일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한국에서는 고등학생 때 부터 주목받던 슈퍼스타였던 그가 일본에서는 평범한 기량을 가진 평범한 선수로 대우 받게되자 생기게 된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호시노가 이종범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는 차별대우가 아니라 자신이 일본선수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대우한 것[44]. 물론 구타를 한 게 올바른 코치로써의 방침인가에 대한 도덕적 이의제기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다른 일본 선수와 차별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반박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이종범이 부진한 성적을 기록해도 플래툰이나 교체요원으로 쓰지 않고 풀타임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비시즌중 한국에 가는 대신 가을 훈련을 하자는 감독 권유를 뿌리친 것은 이종범 본인이었다. 다만 외국인선수는 가을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원칙.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이종범의 성적은 당장 퇴출을 먹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성적이었기 때문에 좋은 뜻으로 훈련을 통해 문제점을 교정하려고 제안한 코칭 스탭이 불쾌해 하는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이종범과 호시노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역시 주니치를 거쳤던 선동열은 밥값을 했고 2군에 떨어졌다고 이종범처럼 다른 선수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당연히 호시노 감독과의 사이도 좋았다. 선동렬은 호시노가 작고할 때까지 스승으로 모셨고 자기가 못한걸 어설프게 변명하지 말라고 이종범에게 한 소리한 적도 있다. 이상훈의 경우 역시 팀원들과 원만한 사이로 지냈고, 적응면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 첫해는 선발 용병으로 데려갔으나 선발 첫 7경기 동안 방어율 6.28을 기록하면서 선발에서 강판되고 WAR 음수를 기록하는 등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이후 철치부심하여 99년 95이닝 동안 평자책 2.83을 기록하는 등 불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극복해 낸 것과는 차이를 볼 수 있다.

1.3. 국내 복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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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퇴단 후 삼성 김응용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님과 함께 야구하던 시절이 그립다. 감독님 밑에서 야구 하고 싶다." 라고 의사를 밝혔으나, 김응용감독의 설득과 주니치 입단할 당시 해태에서 임의탈퇴가 되어 해태로 밖에 복귀를 할수 없어서 2001년 8월 1일, 해태에서 KIA로 모기업이 바뀐 타이거즈에 연봉 3억 5천+엔터프라이즈 1대를 받는 조건으로 복귀하지만, 포지션은 유격수나 외야수가 아닌 타격에 집중하기 위해 3루수로 복귀한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으나, 꾸준히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축이 된다. 93-97 시즌의 이종범의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이후에 부진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01-05 시즌까지는 3할, 10~20개의 홈런, 30~50도루를 안팎을 꾸준히 찍어주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1년 복귀하자마자 불과 45경기에 .344 11홈런 7도루 sWAR 2.54를 기록했으며, 2002년과 2003년에 2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 2004년은 100득점으로 득점 1위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건재함을 알렸다. 이 시기 이종범의 타격 기록은 동시기의 이병규, 박재홍등과 비교해도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4.5시즌 동안 이종범의 성적은 .299 72홈런 162도루(1위) 633안타 sWAR 23.94(3위)를 기록하면서 리그에서 여전히 정상급의 선수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2002년부터 일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위협구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그 여파로 한동안 일명 '검투사 헬멧'을 쓰고 타격에 나서기도 했으며[45], 2004시즌부터는 뱃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그 시즌 .260의 낮은 타율을 기록, 이 때부터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배트를 짧게 쥐는 스윙으로 바꾸며 2005년에 3할을 다시 치게 되지만 장타력은 급격히 하락,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한 시즌 두 자릿수 홈런과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리그에서 정상급 외야수였던 이종범은 2006년 3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차출되어 타율(.400)과 안타(10개) 1위를 차지하며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는 등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팀의 4강 진출에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후 WBC 후유증 및 노쇠화가 찾아오며 두 시즌동안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시즌을 보냈다. 2006년에는 팀의 포스트시즌이 걸린 9월달에 활약하면서 포스트시즈 진출을 이끌었지만, 최악의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 2007시즌에는 커리어 처음 0.174라는 1할 타율을 찍으면서 시즌이 끝나고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은퇴를 종용받았다. [46] 이때 그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은퇴가 왜 명예로운가?'였다. 이후 2008시즌 .284의 타율을 기록,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하게 되고, 2009 시즌 백업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신적 지주로서 팀을 이끌며 타이거즈에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다시 부상. KIA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이끌게 된다.

전성기 시절처럼 80도루를 하지는 못했지만, 주루 플레이는 리그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수비수의 태그를 피해 들어가는 슬라이딩은 최고. 문제는 이게 너무 고급 플레이라서, 심판이 태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웃을 시켜버린다는 것.그럼 의미 없는거 아냐?이창열의 감각적인 도루. 이걸 가르쳐준 사람이 이종범 당시 주루코치로 추정된다.[47]

'천재'라 불리던 그 당시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한계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이거즈 팬들은 격려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1.3.1. 2009 시즌[편집]



최악의 한 해를 보낸 2007년 시즌 이후 이종범은 팀으로부터 꾸준하게 은퇴 또는 플레잉 코치직을 권유받았지만 결국 다시 선수로서 계약해서 2008년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2009년 시즌에도 예비 멤버로 뛸 수 있었다.

사실상 스타팅 엔트리에 들기 힘들거라고 예상되었지만, 채종범, 이용규 등 외야 쪽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줄부상 때문에 KIA는 이종범이 은퇴했으면 큰일날 뻔한 상황에 직면했다.(...)

팀의 리더격인 인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익수를 보면서 간염을 앓고 있는 김원섭까지 누워버릴 때는 중견수도 도맡아 하고 시즌 중반에는 똥망한 기아 타선에서 2할 후반대 타율을 유지하며 팀내 수위타자로 올라서기까지 하면서 팀에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다시 한번 자신을 각인시켰다.

5월 500도루에서 단 한 개만 남겨둔 상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도루를 해 봤자 축하할 분위기도 아니고 되도록이면 장례가 끝난 뒤 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결국 6월 5일 광주 삼성전에서 500도루를 달성했다. 전준호에 이은 두번째. 전준호가 그랬듯이, 500도루 성공 직후 베이스를 뽑아서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후 김상현의 볼넷에 이은 최희섭의 1루타로 '1000득점'도 달성. 장종훈, 전준호, 양준혁에 이은 역대 4번째 기록이다. 6월 28일에는 개인통산 300 2루타를 찍었다. 이것도 장종훈, 양준혁, 장성호에 이은 4번째 기록.

9월 11일 금요일에는 류현진을 상대로 통산 20호 1회초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48] 특히 이 날의 선두 홈런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의 통산 100승을 이끌어주었기에 더더욱 의미 있는 홈런이었다.

10월 16일 한국시리즈 1경기에서는 3타수 2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기아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첫 안타는 1:2로 뒤지던 2사 만루상황에서 터진 역전 2타점 적시타였고 두 번째 안타는 3:3 동점에서 달아나는 적시타로 베테랑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09시즌 타율은 0.273으로 타율 자체는 2008시즌보다 오히려 떨어졌지만 타율 외의 기록들은 2008시즌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 또한 영양가가 많은 타격을 보여주며 부활을 알렸다.


1.3.2. 2010 시즌[편집]


시범경기에서 2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용규가 부진할 때 1번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두산과의 4차전 경기에서는 팀의 대 두산전 연패를 끊는 홈런을 치기도. 이 홈런으로 광주구장 최다 홈런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이후 대 롯데전에서는 NCK포가 동반침묵하며 3번타자로도 나섰다. 체력에 대한 염려도 있고 2010년 들어서는 시범경기부터 너무 빨리 페이스를 끌어올린 탓인지 타격에서 부진이 이어지고 있고 외야 수비범위도 많이 좁아졌다. 물론 40대 선수가 아직까지 외야 수비를 보는것도 대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씩 터트려주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기아의 외야진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 설마 그래서 은퇴를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5월 23일 광주 넥센전에서 9회말 13-3으로 크게 이기고 있는 와중에 안치홍을 대신해서 3년만에 2루수 대수비로 출장하며 KIA 타이거즈 갤러리를 폭발시켰다. 어차피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데다가 안치홍도 쉬게 해줄 겸 광주구장 관중을 대상으로 한 팬서비스로 보인다.

6월 8일 드디어 1700안타 고지를 달성했다. 이는 역대 6번째이다.
그리고 7월 9일 광주 한화전에서 한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특히 이날은 기아의 16연패를 끊은 날이라서 더욱 감동적이다..

올스타 브레이크 즈음해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선발 출전하지 않았지만 선발 출전한 8월 1일 SK와의 경기에서는 결승타와 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활약, 2년만에 드디어 김광현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8월 14일 무등경기장에서 치뤄진 롯데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타구를 잡으려다 펜스에 부딪혀 병원에 실려갔다. 쓰레기같은 구단 지정병원에서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진단을 내렸지만 재검사 결과 갈비뼈에 실금이 발견되어 시즌 아웃이 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가 나지는 않았지만 양준혁의 트위터에 의하면 성구회의 4번째 회원이 되었다. 성구회는 기록의 50% 이상을 KBO에서 기록하면 해외 기록을 입회 조건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12월 24일, 연봉 2억6000만원에서 7000만원(26.9%) 깎인 1억9000만원에 재계약했다.


1.4. 2011 시즌[편집]



출발이 매우 처참했다. 타율 2할대를 못 지키고 있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 게다가 딱히 출루율도 좋지 않았다. 초반의 상태로서는 시즌 끝나고 KIA 쪽에서 은퇴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싶었으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살아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6월 1일에는 LG전에서 선발 출장, 4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백업이 된 고참 선수로서의 역할과 은퇴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 팬이라면 한 번 볼만 하다. 인터뷰를 한 이순철 해설위원이 해태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급 공손히 손을 모으는 장면이 재미있다.

6월 2일에는 LG전에서 6-0으로 앞선 2사 1,2루 상황에서 신종길 대신 대타로 나왔다. 이때 원정온 기아팬들이 응원가 떼창을 시전했다.[49] 이 응원가 떼창으로 이종범이 기아에서 어떤 존재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한명재 캐스터가 던진 한마디, "기아팬들이 종범신을 부릅니다." 응원가 떼창은 1분 1초부터 나온다.


6월 4일 문학 SK전 5회초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게리 글로버를 상대로 2-0으로 앞서나가는 솔로 홈런을 작렬시켰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한 고효준의 초구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솔로 홈런을 치며 팀의 승리에 공헌했다. 이로 인해 일주일동안 3번의 인터뷰. 오오 노장의 힘.

7월 8일 대 LG전에서 6회 1사 1,2루서 좌전 안타를 때렸는데 그게 결승타가 되었다! 거기에 강우 콜드게임이 선언되어 기아는 1위에 등극! 하지만 다음날인 7월 9일 LG에게 져 다시 2위(...)

8월 2일 대 두산전에서 5타수 4안타로 대활약. 2점 적시타, 안타, 삼진, 안타, 삼진으로 노장의 빛을 발했다. 기아 선수들 중 경기에서 최고 활약. 마지막 타석에서는 엎어지는 몸개그까지 선보였다.

2011년 8월 8일 현재 74경기에 출전, 167타수 47안타(2루타 10개, 3루타 1개, 홈런 3개). 22득점 18타점 15볼넷 29삼진. 타율 0.281에 출루율 0.342, OPS 0.75042세라는 나이를 감안할때 엄청난 성적. 특히 후반기 들어 9경기 연속 선발 출장하며 타율 0.367을 찍으며 기아 공격을 이끌고 있다. 다시 말하는 그의 나이는 42세(...)

부상병동이 되어버린 타이거즈에서 2번타자의 부재로 이용규 이후 타선이 엉망이었는데 이용규가 못치는 날엔 자기가 테이블 세터 역할에 충실하고있다.

9월 18일 시즌 LG와의 19차전 마지막 홈경기에서 3회말 2번째 타석에서 본인의 2루타에서 이어지는 김상현의 적시타로 통산 3번째 1100득점을 달성하였다. 이 전의 두명은 양준혁과 전준호. 모두 성구회 멤버이다.


1.4.1. 포스트시즌[편집]


2011년 10월 9일 문학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 10회초 1사 1루에 대타로 출장해 유격수앞 병살타로 물러났다. 여담으로 1루쪽에서도 SK를 응원하던 타팀팬도 이종범의 등장때 같이 환호성을 질렀으나 그것은 아마 성지를 느꼈던 거일지도... 2011년 10월 12일 무등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 삼진으로 물러났다. 여담으로 그의 응원가 "이종범 이종범 안타 이종범" 에서 첫번째가 끝나고 두번째 반복이 시작될 무렵 루킹삼진이 되자 하나같이 응원이 멎었다 그리고 2012년 3월 31일 은퇴의사를 밝힘으로서 이 타석이 그의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이종범이 은퇴경기를 따로 가지지 않고 은퇴식만 가지기로 하면서 KIA팬들은 아쉬움을 표하였다.


1.5. 은퇴[편집]


2015년 현재 역시 스타치고 좋은 감독 될수 없다더니 술친구 허재와 고대후배 홍명보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2012년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훈련 성과를 보였고 시범경기에서도 12타수 4안타를 치는등 나름대로 활약을 해서 최고령 현역선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2012년 3월 31일, 한화와의 시범경기 종료후 은퇴를 선언했다. 이순철 수석코치가 이종범을 불러 개막엔트리에 들지 못할것이라고 밝혔고, 이에 이종범은 갑작스런 은퇴를 선언하였다. 노장임에도 현역 선수로써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던만큼 이종범 본인도 아쉬웠던 것. 한때 코치진 및 구단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통해서 논란의 불씨를 잠재웠다. 이후 4월 5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혀 결국 현역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수의 여론은 또 이렇게 선동열이순철은 한명의 레전드를 보내는구나 하고 두 코칭 스태프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은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은 이종범 본인이었다. 팀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궂은 일도 도맡아 하려고 했었던 것이고, 미팅을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의 은퇴 선언 배경에는 '타이거즈 색이 약했던' 조범현 감독 체계에서 '타이거즈의 색이 강한' 선동열 감독 체계로 바뀌며 타이거즈 프랜차이즈로써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종범의 역할이 없어진 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범현 감독 하에서는 전성기를 한창 지난 노장임에도 팀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이종범이 중용되어 경쟁을 통해서도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감독 체계에서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이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비슷한 성적을 내는 젊은 선수들을 더 출장시키려는 입장과 충돌하면서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은퇴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내용을 자세히 곱씹어보자. 본문에 반하는 여론의 총체는 불암콩콩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런데 이종범의 은퇴식 한달 뒤 6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선동열 감독이 이종범에게 은퇴를 권유하는 것과 달리 또 다른 노장 최향남을 영입을 한 것에 대해서 이종범은 야수이고 최향남은 투수이기 때문에 최향남의 복귀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대 투수 출신인 선동열 감독의 야수와 투수를 바라보는 시각 차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50][51]

2015년 12월 MBC SPORTS+ 구구절절에서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2012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 보호선수 명단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다른 팀이 '제발 좀 나를 데리고 갔으면 쓰겠더라(?)[52]'면서 간절했으나 결국 이종범을 데리고 가는 팀은 없었고 그래서 다음에 바로 은퇴했다고 말했다.

2012 시즌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이종범의 은퇴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결과적으로 이종범의 갑작스런 은퇴는 KIA 선수단 운영에 독이 되고 말았다. 이종범의 기량은 예전같지 않았고 다른 젊은 선수들에게 밀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팀 선수단에서 여전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에게 직접 조언을 해줄 수 있고 다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리더형 고참선수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최희섭, 이범호의 이탈이나 젊은 선수들의 기량 저하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KIA에게는 큰 공백이 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과거 삼성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선동열이 총대 메고 고참을 은퇴시키고 젊은 선수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KIA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셈. 게다가 아주 멀리까지 본다면, 2017년 고졸 신인왕을 달성한 이정후도 키움(2017년 무렵의 넥센)에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53]

기자회견에서 이종범은 SK 김원형처럼 따로 은퇴경기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시즌 중후반 은퇴식을 가지기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단에서는 플레잉 코치, 코치 연수 및 연봉 보전 등을 보장하려 했지만 은퇴식과 영구결번을 제외하고 구단의 제안을 사양을 하였고, 현재는 휴식기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돌아올 것임을 언급하면서 지도자로써의 진로를 암시하였다. 사업가나 해설가로써의 진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한편 은퇴 발표 이후 음악 전공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한다.

2012년 4월 30일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고양 원더스의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가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감독도 문은 열려있다고 긍정적으로 반응해 고양 원더스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김응룡 밑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이제 김성근 밑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게되는 이종범의 차후 지도자 행보에 대한 관심도 커진 상황. 기아팬들은 김성근 감독의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타이거즈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안 받은게 천만다행이다. 전수받을게 따로있지....

2012년 5월 26일 무등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른다. 이날 은퇴식에서 시구자로 마운드에 오른다.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 소화 경력이 있는데, 이로써 본인이나 팬들은 시구로 아쉬움을 달랠 듯 하다. 참고로 시타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정후가 했는데, 치기 좋게 제대로 공을 못 던졌다고 아버지를 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시구 장나라가 생각난다. 유명한 사건이니 이하 내용은 생략

선수 시절 화려한 전성기와 암흑기, 그리고 고난과 좌절을 견뎌내면서 커리어를 지켜왔던 이종범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은퇴식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진 선수가 이종범 선수의 아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2년 7월 20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일 레전드 매치에 출전하였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주루플레이와 호수비 등을 보여주었으며, 이날 활약에 힘입어 MVP로 선정되었다. 경기는 한국 OB가 5:0으로 승리하였다.

2. 국가대표 경력[편집]



2.1. 2002 부산 아시안 게임[편집]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야구대표팀 주장 및 외야수로 선발되어 5경기에서 타율 0.353(17타수 6안타) 3타점 4득점 2도루로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아들 이정후 역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성공하면서 한국 야구 사상 첫 부자(父子)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2.2.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2006년 3월, 제 1회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주장 및 외야수로 차출되었다. 이종범은 대회 도중 감기몸살에 걸리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쾌조의 타격감을 자랑하며 타율(.400)과 안타(10개) 1위를 차지하며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큰 경기에 강한 이종범의 진가가 여실히 드러났던 대회.


특히 이 대회에서 이종범은 4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에서 다시 만난 일본을 상대로 8회 1사 2, 3루에서 일본 대표팀의 마무리 후지카와 큐지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쳐내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 2루타를 친 장면은 지금도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만한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54][55]

다만 이종범 본인은 WBC 대표팀 차출이전 시즌이던 05년에 풀타임 3할을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감이 나쁘지 않았으나, 차출 이후 노쇠화가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 06년과 07년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은퇴위기에 몰렸으나 08년에서야 겨우 재기하게 된다.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부침에 빠진 프로야구 인기를 다시 일깨운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정작 자신의 커리어에 독으로 다가온 아이러니한 케이스.[56]


[1] 이종범의 대단함과 동시에 김응용 감독의 정확한 눈을 볼 수 있는 발언. 실제로 이종범의 일본진출전 5년간 WAR을 평균을 내 보면 연평균 10정도인데, 평범하게 승수를 쌓을 경우 10승 전후를 기록할 수준의 2~3선발급 투수는 일반적으로 대략 적게는 2에서 많게는 4정도를 기록한다. 진짜로 10승 투수 2명보다 가치가 뛰어났던 것. WAR은 존재도 하지 않았고 OPS조차 잘 모르던 그 시절, 김응용은 세이버 스탯도 없이 이종범의 실제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괜히 명장이 아닌 것.[2] 이종범은 이미 서림초등학교와 충장중학교를 우승으로 이끌 만큼 어린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였으며, 청룡기에서 역전 2루타를 때리며 광주일고를 39년만에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참고로 어린시절부터 그와 가까이 지내던 나이가 2살 많은 형이 있는데, 노력하기를 정말 싫어했었다. 그 형이 바로 SK 와이번스의 감독인 염경엽.[3] 1989년 대학 야구를 호령하던 국가대표 에이스 박동희는 3월 봄철연맹전에서 한 타자에게 2개의 홈런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 타자는 건국대 1학년 유격수 이종범이었다. 박동희의 고려대 동기인 이병훈 해설위원의 말에 따르면, 선동열 이후 최고의 선수라 평가 받던 박동희는 그날 멘붕이 와서 술을 엄청 마셨다고 한다.[4] 한국의 박동희와 일본의 노모 히데오의 맞대결로 기억되는 1989년 9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MVP는 건국대 1학년 이종범이었다. 당시에 이종범은 일본대표팀의 '토네이도' 노모 히데오로부터 4타수 2안타 2도루를 뽑아내는 활약을 펼쳐 공동우승을 이끌어 냈다.[5] 92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결승전에서 건국대와 고려대가 만나 연장 11회 접전 끝에 건국대가 9-6으로 이겨 우승했다. 대회가 끝나고 최우수선수가 된 이종범은 타격상과 함께 홈런상을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종범이 처음에 가기로 한 대학이 고려대였다는 것이다. 고대에서 이종범의 친구들도 받아줬다면,...[6] 참고로 2016년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된 아들의 계약금이 2억원이다. 즉 이종범 본인의 말대로 아빠보다 1억 3천 더 받았네... 수준인 셈. 여담으로 해태 타이거즈가 이종범과 협상할 당시 억대 계약금을 받은 이상훈을 보고 억대 계약금을 요구한 이종범에게 "광주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 받는 것보다 광주에서 7000만원 받는 게 더 낫다"는 드립을 날렸다.[7] 말이 2위지, 무려 73도루를 기록했다. 1위는 75개의 전준호.[8] 2014년 그의 먼 고교 후배인 서건창이 201안타로 20년만에 최다 안타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9] 당시 타율 1위 이종범과 2위 김응국은 무려 7푼 차이가 났고, 안타 2위 서용빈은 39안타 차이가 났다.[10] 이제 메이저리그로 가서 의미가 없어졌지만, 94 이종범은 역대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라는 2014 강정호보다 조정 OPS, wRC+ 모두 이종범이 더 높다. 물론 장타율은 40홈런을 때린 강정호가 압도적으로 더 높기는 하지만... 사실 강정호가 파크팩터를 무시한 장타율 역대 2위다(...)[11] 허나 좌우 수비범위는 넓은 편이지만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12] 93년도 시즌 막판 도루왕을 차지하기 위해 쌍방울과 짜고 2루타성 타구를 치고도 1루에 멈춘뒤 2루,3루 무관심 도루를 시도하여 한경기 6도루 라는 부끄러운 신기록을 세운 추태를 부린적 있다. 우리나라에서 무관심도루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2003년 이승엽의 도루가 최초[13] 그래도 데뷔 후 3년간의 홈런 갯수가 각각 16-19-16개로 홈런 순위 10걸 안에는 늘 들었다. [14] 다른 한 선수는 박재홍으로 96시즌 홈런1위-도루4위, 98시즌 홈런4위-도루2위를 기록했다[15] 퓨처스 리그에서는 kt 김지열김사연이 2014시즌 23홈런-37도루로 홈런왕-도루왕을 석권한 사례가 있다.[16] 95년은 방위복무로 인해 홈경기만 출전[17] 양준혁은 같은 기간에 34.49를 기록했다.다만 wOBA, wRC+와 같은 여타 타격부분의 세이버 수치와 홈런, 타점의 경우 시대를 양분했던 양준혁에 밀린다.[18] 이게 어느정도냐면 진갑용, 이진영, 김성한, 이용규, 마해영 등과 같이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기록한 통산 sWAR보다 높다![19] 당시 49억원에 달하는 거액 현금트레이드를 통해 해태 구단은 98년 선수단 연봉을 해결하게 되면서 잠깐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나 이후 길고 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20] 4월 0.337 2홈런 14타점 10도루 / 5월 0.260 5홈런 10타점 5도루 / 6월 0.235 2홈런 4타점 2도루.[21] 대표적으로 4월 11일 요코하마의 경기에서는 빈볼을 2회, 이어 16일에는 삼성에서 뛰었던 갈베스에 의해 헤드샷까지 당하기도 했다. 가와지리에 의한 사구 시점에서 이종범의 사구는 리그 1위였다.[22] 일본시절 통산 WAR의 경우 00년까지 3년간 5.5로, 의외로 처절하게 망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식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데 이는 98년의 활약에 기인한다. 출처[23] 당시 이로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탈모까지 생기게 되었다.#[24] 나가질 못해서 그렇지(...) 출루시에는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슬라이딩과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로 상대를 뒤흔드는 모습이 종종 나오긴 했다. 이 덕분에 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하이라이트에 성적에 비해선 제법 등장하기도 하고, 나름의 팬층도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도루 성공마다 헬멧에 붙이던 하얀 닌자스티커가 나름의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이종범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비교적 강한 모습을 종종 보여, 안티교진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주니치팬덤에서 어디까지나 처참한 성적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25] 다만 2000년 이종범의 성적은 타율만 보면 전년도에 비해 괜찮아 진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실책은 적었지만 수비지표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데다가 장기인 주루플레이에서도 상당 수의 도루사를 기록했고, 출루율이나 장타율도 나쁜 편이었다. 1년에 10개 안팎정도의 홈런을 치는 대신 주루 능력이 퇴화된 이대형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하다.[26] 투수쪽은 지난시즌 다승왕과 구원왕인 번치와 게일러드가 붙박이였고, 고메스의 가세로 남은 2개의 용병 엔트리를 놓고 용병 넷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27] 대체로 코리안 삼총사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편이다.[28] #1#2#3[29] 좌우 100m, 센터 122m, 펜스 높이 4.8m[30] 한국의 다른 구장이었다면 넘어가거나 펜스를 때렸을 타구들이 여지없이 외야수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종종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한번 불이 붙으면 기세를 타서 플레이하던 이종범에겐 호시노의 갈굼과 함께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31] 당시 나고야 돔의 악명은 대단했는데, 90년대 초 강력한 공격력으로 승부하던 주니치 드래곤즈는 입주 첫해 성적이 말 그대로 폭락해버린다. 이후 호시노 감독에 의해 지키고 짜내는 스몰볼야구로 체질 개선을 해서야 겨우 리그 우승을 거두게 되었다.[32] 사실 이종범은 한국에서 방위복무시즌이던 95년을 제외하면 매 시즌 홈런 5위 안에 들었던 강타자였고, 일본 데뷔 첫 해에도 팀내에서 3위에 해당하는 제법 많은 수의 홈런을 때려냈던 만큼 당시 주니치에서 요구했던 타격방식의 변경을 쉬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33] 이종범 자신도 전혀 빈볼이라거나 일부러 맞힌 공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일히 설명하기도 힘들었지만 딱 잘라 말하면 자신이 치려고 나가다가 맞은 공이었다고.[34]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당시 이종범 본인이 팔꿈치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나온 것이 아쉬운 노릇. 무릎팍도사에서 조금씩 보여준 자료화면에서 일본에서도 팔꿈치 보호대를 착용하고 나온 화면이 보였는데, 하필 이 날은 착용하지 않은 것. 다만 스윙을 하다가 안쪽에 맞은 것을 생각하면 팔꿈치 보호대를 했어도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35] 이종범은 첫 해부터 리그 1위에 해당될 정도로 잦은 사구도 있었으며 판정에 대한 불만이 폭팔한 영상이 있을 정도였다.#[36] 단적으로 국내에서 비슷한 평가를 받던 김태균과 이대호가 한국과 다른 일본의 여러가지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려 노력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뉜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37] 거기에 데뷔 초에는 수비능력에 대해 혹평을 한 것도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수비 기본기를 커버하기 위해서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범위와 이를 이용해 타구를 포기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자세를 고평가하기도 했다.[38] 당시 일본 야구팬들도 당시 강압적이던 호시노의 주니치보다는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퍼시픽리그 쪽으로 이적했다면 더욱 활약했지 않았겠냐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39] 98시즌 중반까지 실책 11개를 기록했으며 4월엔 무려 6게임 연속에러를 기록하기도 했다.[40] 실제 수비 성적을 봤을 때 130경기로 환산하면 이종범은 이후 유격수 주전으로 활동한 쿠지 테루요시에 비해 10개의 자살, 75개의 보살을 더 많이 기록하고 18개의 실책을 더 기록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아무리 런세이브나 레인지가 나쁘지 않았다 해도 수비실력이 결코 괜찮다고 말할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41] KBO에서도 93,94,97년 20실책 이상을 3번이나 기록했으며 모두 야수 최다실책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일본 진출 바로 전 시즌인 97년에는 에러규정이 바뀌었음에도 27개의 에러(...)를 기록했었다.[42]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코치. 199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참고로 일본 최초의 무홈런 야수 신인왕 수상자었다.[43] 이전 문서엔 이종범의 성적이 좋지 않자 쿠지를 영입했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애초에 이종범과 쿠지는 두 명 모두 1998년 주니치에 입단했다. 누가 성적이 좋다 나쁘다 따질 게 보이지도 않던 상황. 게다가 쿠지를 영입시킨 이유 자체가 이종범이 못해서가 아니라 위에 나오듯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의 탈세 징계로 인한 시즌아웃으로 인해 내야수비자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주니치는 이미 이종범을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기로 정해져 있어서 쿠지는 입단 첫 해엔 2루수뿐 아니라 이종범의 수비부진으로 인해 유격수로도 뛰었고, 이종범의 대안이었던 후쿠도메 코스케도 수비력에 문제를 보이자 이에 호시노 감독은 수비에서 정평을 받은 쿠지를 유격수로 기용했던 것이다.[44] 호시노의 야구관은 일단 못하는 놈은 닥치고 패고 보자다(...) 실제로 나카무라 타케시, 오치아이 에이지, 야마모토 마사,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등 호시노 휘하에서 소속팀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들은 전부 호시노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심지어 나카무라는 뼈가 부러졌을 정도.. 어째 주니치 선수들뿐이지만 기분탓이다[45] 해당 부상 후유증으로 한동안 타격감을 찾지못해 02년은 비교적 그동안의 명성에 걸맞지 못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46] 바로 이 2007 시즌의 이종범이 찍은 성적은 지금까지 한국리그의 역사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악의 성적이었다. OPS+가 50정도 되는데,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선수의 반절을 겨우 했다. 더불어 wRC+는 무려 8.0으로 200타석 이상 선수 중 4위에 해당한다. [47] 이를 제대로 보여준 게 2006시즌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의 2루타다. 류현진을 상대로 짧은 안타를 치고 2루까지 전력 질주해 세이프됐는데, 2루수 한상훈의 태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2루에 안착한다.[48] 선두타자 홈런은 1회 초,말 합쳐서 통산 44개. 독보적이다.[49] 이 영상을 보면 작게 삼진을 외치는 LG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기아가 원정온것이지 기아홈구장이 아니다. 역시 종범신[50] 참고로 이종범과 최향남은 불과 1살 차이다.[51] 2010년 양준혁 은퇴 당시에도 확연히 드러났다.[52] '~면 쓰겠다(쓰것다)'는 전라도 쪽 중년층 이상에서 '~면 좋겠다'는 표현을 대신하는 사투리이다.[53] 하필 운이 없었던 게, 당시는 1차지명이 부활하기 이전이어서, 1차지명이 부활한 이후 폐지되었던 기간동안 전학을 간 선수들에 대해 전학선수 1차지명 금지규정을 소급적용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1차지명으로 넥센에 지명되었다. KIA 입장에서는 더 통탄할 노릇. 일각에서는 이종범이 몇 년 더 현역을 뛰고 은퇴를 했더라도 이정후를 키움에 빼앗기는 건 피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종범이 서울로 간 건 교육 문제였기 때문에 이종범의 은퇴가 빠르던 늦던 이종범이 서울로 가는 건 정해진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라는 식.[54] 다만 이때의 오버런 아웃으로 인해 추가 득점에 실패한 한국대표팀은 이후 또다시 일본을 만나 패배하며 4강에 머물러야 했다. 훗날 라디오스타에서 밝히길 타격 시 홈런인 줄 알고 세레모니를 했다가 안타인걸 보고 부리나케 달려가다 아웃 당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지인들이 그 때 왜 오버런을 했냐고 까고 있다고(...)#[55] 당시 이종범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신께서 내 야구 인생의 마지막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자신이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남달랐을 것.[56] 투수 쪽에서는 후배인 서재응이 비슷한 경우. 전 시즌 맹활약을 바탕으로 WBC에 차출되면, 그 때마다 후유증으로 몇 년간 부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