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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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진행
3.1. 번암선생집의 기록
4. 이후
5. 대중매체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무신 이징옥이 일으킨 반란. 이시애의 난과 더불어 세조 시기의 대표적인 내란이다.


2. 진행[편집]


단종 원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정분, 안평대군 등 고명대신과 반대파 왕족 및 측근 인물들을 숙청하면서, 이징옥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1] 수양대군은 김종서 측근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함경도 도절제사에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했다. 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2]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에 수양대군의 정변 소식과 김종서의 죽음을 듣자 상황을 파악하고[3]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한 다음[4]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부하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반란 이후 항상 무장한 상태로 잠도 안자고 있어서, 부하 '정종'은 날씨가 추우니 부하들이 술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징옥도 이를 승낙하고, 정종이 술을 바쳐서 막 마시려는 찰나에 부하들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을 맞고 도망치던 중에 추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야사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는데 수양대군의 밀계를 받은 병사 두 명이 그를 살해하려고 잠입하여 술에 취해 잠든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이에 이징옥은 오히려 칼을 빼앗아 역으로 그들을 죽이고 밖으로 나왔는데 회령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이 잠입시킨 군사들이 이징옥을 살해하기 위해 포진해 있었다. 이징옥은 오른팔이 잘린 상태에서 칼 한자루 뿐인 맨몸으로 수백명이나 쓰러뜨리면서 사투를 벌이다가 다음 날아온 화살들에 전신을 맞으면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았다.[5] 사후 시신은 거열형으로 찢겨졌으며 목은 베여져 3일간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져 조정에 바쳐졌다.


3. 미스터리[편집]


반란이라곤 해도 이징옥의 난이라 불린 이 사건은 사실상 이징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궁지에 몰린 이징옥의 최후의 발악적 성격이 강하다. 다만 아무리 궁지에 물렸다지만 출신도 경상도 출신이라 지연도 없고 4군 6진 개척 토벌로 여진족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라 인맥도 전혀 없고 사이도 영 안 좋은 인간이 갑자기 대금 황제를 자칭한 일이나, 이징옥의 아들이 이징옥의 혹은 그냥 친한 기생황후라 말하는 점, 이징옥이 살해된 직후 조선 상황을 알기 힘들었을[6] 야인들이 수양대군[7]을 칭송했다는 기록 등 현실적으로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종실록의 기록 때문에 이징옥의 난을 세조의 조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이징옥이 무력으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것을 세조측에서의 역사왜곡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 채제공은 자신의 문집 번암집에서 이징옥의 난은 단종복위운동으로 이징옥이 칭제건원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3.1. 번암선생집의 기록[편집]


李節度澄玉者。梁山人。自少武勇絶人。兄澄石亦以力爲州里所伏。其母欲見生野豕。澄石卽日射一豕而歸。澄玉出門二日。始徒手還。母訝之。澄玉與其母出外庭。一大豕臥於場。脅息瞪目。其狀甚獰。蓋澄玉必欲令母目見生豕。跡而逐之。超山越壑。竆日夜蹴迫。必使疲頓氣盡而至於是也。每射虎。張目叱之。虎便闔眼。低首而走。金宗瑞以江界府使。知澄玉忠且勇。擧以自代。時年二十二。未幾陞拜北方節度使。璽書諭曰。卿之威武大振。雖古人無以過之。虜皆讋服。予甚嘉之。須體寡人之至意。永作北鄙之良將。以副予心。旣莅營。選六鎭藩胡驍敢善騎射者三千。皆隷牙下分爲隊。每廵列邑也。使之各出境迎送焉。光廟受禪。密遣朴好問代之。澄玉疑之曰。曾有密敎。非國有大事不召我。今佗將之匿聲來代。何也。於是捽下新節度問之。好問不敢諱。遂殺之。謀擧兵直指京師。約其麾下曰。吾渡江請命于天朝。復上王事蔑不濟矣。決以明日行。鍾城府使鄭種知其謀。是夜使人伏於板上。乘其熟睡斫右臂。澄玉驚起奪其劒。赤身飛出。左手擊殺百餘人。身亦被亂箭死之。年二十四。忠臣義士聞之。莫不暗暗流涕。光廟三年。爲冤死人招魂。設供於東鶴寺。特書李澄玉於錦城大君及六臣列。嗚呼。聖人之不以嫌害義。以勸千古爲人臣者盡心所事之忠。其意不亦宏達乎哉。

절도(李節度) 징옥(澄玉)이라는 자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무용(武勇)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형인 징석(澄石) 또한 힘으로 주리(州里)에서 탄복하였다. 그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어 하였는데 징석이 그 날로 활로 멧돼지 한 마리를 쏘아 돌아왔다. 징옥은 문을 나선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묻자 징옥은 그 어머니와 함께 뒤뜰로 나왔다. 한 마리의 큰 멧돼지가 마당에 드러누워 있는데, 씨근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였다. 대개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으로 발로 차고 협박하여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온 것이었다. 호랑이를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가 눈을 감고 머리를 떨구고 달아났다.

김종서(金宗瑞)가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징옥이 충성스럽고 또한 용맹함을 알고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이때 나이 스물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위가 올라서 북방절도사(北方節度使)가 되었다. 새서(璽書)로 그를 효유하였다.

"경의 위엄과 무예가 크게 떨쳤으니 옛 사람이라 하여도 그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으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모름지기 과인의 지극한 뜻을 이루었다. 길이 북도(北鄙)의 양장(良將)으로 내 마음에 부합하라."

드디어 군영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들로 날래고 용감하며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3천 명을 뽑아 모두 아장 아래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부대로 삼았다. 열읍을 순시할 때마다 그들을 시켜서 각기 국경을 나가서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광묘(세조)께서 선양을 받으시고 은밀히 박호문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징옥은 그를 의심하고 말하였다.

"일찍이 밀교(密敎)가 있기를 '국가에 큰 일이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지금 다른 장군이 그 온다는 소리도 숨기고 와서 나와 교대하려 하니 어째서인가?"

호문은 감히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죽이고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사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그 휘하에 약속하였다.

"내가 강을 넘어서 천조에 명을 청하면 상왕(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를 날 밝는 대로 결행할 것이다."

종성부사 정종이 그 모의를 알고 그날 밤에 사람을 시켜서 판상에 숨어서 그가 깊이 잠든 틈에 그의 오른편 어깨를 찍어 끊었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서 그 칼을 빼어 맨몸으로 솟구쳐올라 왼손으로 수백 명을 쳐 죽이고, 그 자신도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충신 의사가 이를 듣고 암암리에 눈물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광묘 3년(1457년)에 원통하게 죽은 자를 위해 초혼하고 그 공양을 동학사(東鶴寺)[8]

에서 베풀었을 때, 특별히 이징옥을 금성대군여섯 신하의 반열에 썼다. 오호라, 성인이 그 꺼리는 바를 가지고 의를 해치지 않으심으로 하여 천고에 인신된 자에게 그 마음을 다해 힘쓰는 충성을 권하게 하셨으니, 그 뜻이 또한 멀리까지 미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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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권55 전(傳) 이절도전(李節度傳)#



4. 이후[편집]


이후 연좌제로 그의 장남 이자원(滋源)과 차남 이윤원(潤源)은 처형 또는 이징옥과 함께 살해되었고,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이연원(淵源)은 유모가 구출하여 은신,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가(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징옥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는 이징옥과 달리 계유정난에 가담했기에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형식적이었을 뿐 전부터 이징옥과 사이가 안좋았고 적극적으로 난을 토벌하기도 하여서 세조가 그들을 연좌하지 않았기에 석방되어 무탈하게 지내게 된다.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의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1698년(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가 올려졌으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어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당시 이완용은 과거의 인물들의 신원을 회복하고 시호를 붙여주는 명예회복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했는데 이징옥도 여기에 포함된 것.


5. 대중매체[편집]


이징옥이 조선시대를 다룬 TV 사극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거나 영 폄하에 가깝게 묘사되기에 이징옥의 난 또한 초인적인 용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있는 데에다 황제국을 칭했다는 등, 극화하기 좋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들을 잘 갖췄음에도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저 그런 역사적 헤프닝 정도로 등장한다.

  • 고우영의 만화 오백년에서는 이징옥의 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이징옥 반란이 성공하여 만주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 국세를 떨쳤으면 어땠을까에 대한 대체역사적 상상을 늘어놓다가 결론은 "꿈깨!"(...)

  • 파천무에서는 김종서의 죽음을 알게 된 이징옥이 처음에는 김종서의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당장 자신이 이끄는 군사만으로 곧바로 한양까지 밀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에 노선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되어 북쪽을 싹 정리한 뒤 대제국을 세워 그 전력을 동원해 수양대군까지 죽이겠다며 대금국을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이징옥이 황제를 자칭했다는 소식이 한양까지 전해지자 모든 대소신료들이 기막혀 하는 가운데 "역적놈이지만 황제를 자칭하다니 그건 사내답다"고 하는 홍윤성의 반응이 압권. 이후 수양대군파의 계략으로 부하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사망한다.

  • 한명회에서는 아주 악의적으로 역사왜곡을 해놔서 황제가 되었다고 실실 웃어제끼기나 하는 한심한 모습에 최후 장면도 마치 만취 노숙자처럼 만들어놨다. 이징옥의 기록상 모습과 지나치게 차이가 심할 정도로 사람 하나를 비하해놓았다. 당시 이 드라마를 통해 이징옥의 코믹한 모습만을 기억한 어린이들이 나중에 이징옥의 실제 행적을 찾아보고는 그 괴리감에 놀랄 정도였다. 한명회 미화 드라마의 한계.

  • 왕과 비에서도 등장하였으나 세조 미화 드라마답게 악역에 가깝게 그려지며, 청렴한 인품이나 공적은 전혀 묘사되지 않은 채 김종서 사망 이후 포악한 성격으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징옥이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던 수양대군이 전화위복을 맞게 되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결과적으로 단종의 앞날에 악영향만 끼치게 된다. 하지만 의외로 최후에는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깨닫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는다. 담당 배우는 송용태. 재미있게도 이 배우는 한명회에서 이징옥을 암살하는 정종 역을 맡았었기에 예전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죽이는 배우 개그가 되었다.

  • 이원호대체역사물 반역에서의 주 배경. 이징옥의 난이 실패하고 여진족과 같이 있느라 살아남은 이징옥의 막내아들 이반이 장성 후 복수를 위해 조선에 들어와 이징옥을 배신한 부하들을 죽이고 세조에게 엿을 먹인 후 느닷없이 세조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부르짖은 후 만주로 뛰쳐나와 부하들을 이끌고 대금국의 황제를 자칭하며 일본 먹고 먹고 중동 싹 쓸어버린 뒤 유럽까지 먹는다.(...) 이원호의 소설답게 고증은 먹는 거고 당연히(?) 베드신만 주구장창 나온다. 각국의 공주, 왕비(!) 하나하나 침대 밑에(...) 무릎꿇리는 절륜한 테크닉의 표현은 참으로 훌륭하다. 양산형 대역 괴작 중 하나이다.


6. 같이보기[편집]




7. 둘러보기[편집]


대금의 역대 황제
건국

초대 이징옥

멸망
[1] 실록 기록을 보면 계유정난 이전부터 한명회, 홍달손이 대놓고 이징옥도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는 무리라 말하고 수양도 동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징옥이 계유정난 후 적극적으로 수양파로 전향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거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도 숙청이 안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2] 과거 김종서를 모함했던 인물이다.[3] 한양으로 가면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 잘해봐야 숙청 뿐이다. 이징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4] 이징옥한테 참수된다.[5] 야사에는 이 때 그의 나이가 24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징옥의 활약 연대로 봐서는 틀린 기록이다. 활약 연대로 유추해 보면 1400년 전후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야사의 24세(二十四)라는 기록을 54세(五十四)의 오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6] 단종실록에는 단종 2년(1454년) 단종이 청계산에서 사냥하는데 마침 여진족으로써 사냥 행차를 따라 왔던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 등이 "우리는 태상왕께서 다시 나오신 줄 알고 이렇게 찾아뵈었다"라고 대답했다고 나와 있다.(출처: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2월 17일 계사 1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태조가 죽은 것이 언제인데(...)[7] 당시는 계유정난이 끝난지 보름도 안된 시점이었고 수양대군도 조선 중앙정계에나 잘 알려져 있었지 크게 전국구적으로 알려진 사람도 아니였다.[8] 계룡산 동학사. 이곳에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숙모단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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