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사건 내용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1. 개요
2. 1986년
2.1. 1차 사건
2.2. 2차 사건
2.3. 3차 사건 ★
2.4. 4차 사건 ★
3. 1987년
3.1. 5차 사건 ★
3.2. 6차 사건
4. 1988년
4.1. 7차 사건 ★
5. 1990년
5.1. 9차 사건 ★
6. 1991년
6.1. 10차 사건


1. 개요[편집]


번호
일시
피해자 및 정황
죄목
기타
1
1986년 9월 15일
06:20(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할머니(72)가 귀가하다 피살
살인[1]
화성 연쇄살인
1차 사건
2
1986년 10월 20일
22:00(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2]에서 박현숙 씨(26)가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2차 사건
3
1986년 12월 12일
23:00(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140[3]에서 권정분 씨(25)가 귀가 중에 집 앞에서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3차 사건
4
1986년 12월 14일
23:00(추정)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논둑[4]에서 이계숙 씨(22)가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4차 사건
5
1987년 1월 10일
20:50(추정)
화성군 태안읍 황계리[5]에서 홍진영 양(18)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5차 사건
6
1987년 5월 2일
23:00(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 씨(29)가 남편의 (우산 소지)마중 가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6차 사건
7
1987년 12월 24일
수원시 화서동 383[6]에서 김모 양(18)이 피살
살인
성폭행

8
1988년 9월 7일
21:30(추정)
화성군 팔탄면 가재3리 292 농수로에서 안기순 씨(54)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7차 사건
9
1988년 9월 16일
02:00(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424[7] 주택에서 박상희 양(13)이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윤성여 씨(당시 22세)가 검거되었으나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
10
1989년 7월 7일
화성군 태안읍 병점5리 원바리고개에서 김모 양(9)이 실종[8]
살인
성폭행[9]

11
1990년 11월 15일
18:30(추정)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4)이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10]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
12
1991년 1월 26일
20:30(추정)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공사 현장에서 박모 양(17)이 피살
살인
성폭행
박모 군(19)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
13
1991년 3월 7일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가정주부 김모 씨(29)가 피살
살인
성폭행
14
1991년 4월 3일
21:00(추정)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599[11]에서 권순상 씨(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10차 사건
15
1992년 6월 24일
청주시 복대동에서 가정주부 이모 씨(28)가 피살.
살인
성폭행

16
1994년 1월 13일
청주시 복대동에서 이춘재의 처제 이모 씨(19)가 피살
살인
성폭행
이춘재의 자택에서 피해자의 혈액이 발견되어 구속되었으며 이후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됨.
 
: DNA 등의 유력한 증거가 발견된 사건

주소는 사건 당시 기준이므로 지금의 행정 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사건의 주 무대였던 태안읍은 2006년부터 6개 행정동으로 분리되면서 없어진 지명이다. 10차 사건의 발생지인 동탄면도 동탄신도시의 개발에 따라 동으로 전환되었다.

화성에서 일어난 10번의 사건에서 총 10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령은 13살 중학생부터 71살 할머니까지 매우 다양했다.

강간살인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고 속옷을 안면에 씌우거나 두 손을 뒤로 묶는 등 대단히 충격적인 범행 수법으로 화제가 되었다. 무조건 목을 졸라 살해한 것도 아니고 가슴이 9차례나 난도질(9차사건)되거나 음부에 복숭아 9조각(7차사건)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수사에 참가했던 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자상에서 피가 많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 죽은 후에 찌른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은 화성군민뿐[12][13] 아니라 전 국민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당연히 범인을 빨리 잡으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여론에 떠밀려 경찰은 엄청난 숫자의 용의자들을 잡아들였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여름인 6월, 7월, 8월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데 그 대학교는 6월에도 학생들이 나가기 때문에 일용직 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수사 책임자가 밝힌 자세한 사건 내역 - 2006년 1월 기사(월간조선), 2019년 8월 인터뷰(유튜브 채널)


2. 1986년[편집]



2.1. 1차 사건[편집]


1986년 9월 14일 밤 9시경 또는 9월 15일 새벽 6시경에 화성군 정남면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씨(72)가 피살된 사건.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9월 15일 오전 6시에 재배한 채소들을 팔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후 그대로 실종되었다. 실종된 지 약 4일 후인 9월 19일 오후 2시경 목초밭에서 목장 주인이 숨진 피해자를 발견했다. 이씨가 발견된 장소는 딸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였으며 시신은 하의가 벗겨지고 다리가 X자 형태로 교차된 상태였다.

조사 결과 성폭행은 없었으며 사인은 교살이었다. 경찰은 이씨가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가다가 범인의 눈에 띄어 목초밭으로 끌려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지문, 유류품, 족적, 체모 등의 단서를 발견하는 데 모두 실패해 용의자조차 잡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이춘재를 잡고 보니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 전인 9월 14일 밤 9~10시경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고 목격자도 밤 9시경에 살인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을 토대로 범행 시각이 변경되었다.

2001년 9월 14일 공소시효 만료.


2.2. 2차 사건[편집]


1986년 10월 20일 밤 10시 경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현숙씨(26)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송탄시 신정로에 거주 중이던 피해자는 이날 수양어머니인 허모씨가 거주하던 태안읍 송산리에 버스를 타고 갔고 소개로 맞선을 보고 오후 8시 50분경 집으로 돌아갔다. 허씨는 마을 입구까지 피해자를 배웅했고 피해자는 1km 정도 떨어진 버스 정류장을 향해 둑길을 걸어가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약 3일 후인 10월 23일 오후 2시 경 농수로의 콘크리트 수로 안에 숨져 있는 피해자를 논 주인이 발견 후 신고했다. 피해자는 발견 당시 알몸이었고 가슴과 등에 수차례의 자상 흔적이 있었다. 목에는 스타킹이 감겨 있었고 사인은 액살로 밝혀졌다. 옷가지들은 농수로 둑에 버려져있었고 강간당한 흔적과 정액이 확인되어 조사했으나 혈액형 분석에는 실패했다. 경찰은 대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유팩, 담배꽁초, 모발을 분석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분석 결과 B형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경찰은 이번에도 유력 용의자를 밝혀내는 데 실패했으며 수사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01년 10월 19일 공소시효 만료.

2.3. 3차 사건 ★[편집]


19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에서 권정분씨(25)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피해자는 공장에서의 작업이 끝나고 오후 6시경 버스를 타고 남편을 만나러 수원시 세류동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부부는 저녁 식사를 한 후 피해자만 먼저 귀가하기 위해 10시 30분경 버스에 탔고 11시가 약간 지날 시점에 안녕리 삼거리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4개월 후인 1987년 4월 23일 논두렁 보수 작업을 하던 논주인 김씨에 의해 부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권씨의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며 하의가 벗겨져 있었고 입에는 스타킹과 거들로 재갈이 물려있었으며 피묻은 속옷이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 시신은 부검하기 힘들 정도인 상태였으나 소지품 중에서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이 발견되어 신분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논바닥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재갈을 물린 후 성폭행했고 이후 스타킹으로 교살한 후 시신을 둑 밑의 모래 부대 아래에 은닉한 것으로 보았다.

2001년 12월 11일 공소시효 만료.


2.4. 4차 사건 ★[편집]


1986년 12월 14일 오후 11시경 정남면 관항리 논둑에서 이계숙씨(22)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3차 사건 이후 불과 이틀 만에 벌어졌다.

피해자 이씨는 이날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수원 시내의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맞선은 잘 진행되면서 밤 10시 이후에 끝났고 이씨는 11시경 집이 있는 종점인 정남면 면소재지에 내려 1km 떨어진 집으로 가다가 11시 05분 쯤 이웃 주민 강모(여.70)씨에게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실종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은 관항리 일대를 샅샅히 뒤졌고 약 일주일 후인 12월 21일 오후 12시 반경 관항천 둑에서 들깻단으로 덮인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여 있었으며 거들은 머리에 씌워져 있었고 블라우스를 벗기고 다시 겉옷을 입힌 것이 확인되었다.[14] 조사 결과 피해자는 스타킹으로 목을 졸려 살해당했으며 하체에서 성폭행 흔적과 우산으로 난행당한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비가 왔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나 지나 혈액형 판독에는 실패했다. B형의 혈액형이 검출되기는 했으나 피해자의 혈액형도 B형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2001년 12월 13일 공소시효 만료.


3. 1987년[편집]



3.1. 5차 사건 ★[편집]


1987년 1월 10일 오후 8시 50분경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홍진영 양(18)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일 홍양은 회사에 이력서를 내려 간 후 수원시 북문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고 8시 30분경 태안읍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 50분경 반정리 정류소에서 내렸다. 이후 집으로 돌아가던 피해자는 범인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아침 볏짚을 옮기던 논주인이 볏단 속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피해자는 양손이 속옷으로 묶여있었고 다른 사건과는 달리 옷이 모두 입혀져 있었다. 조사 결과 피해자는 목도리로 교살당했으며 성폭행 흔적이 나왔다. 정액이 검출되긴 했으나 혈액과 섞여있어 혈액형 판별이 어려웠고 대신 천조각과 음모 등에서 나온 혈액형은 모두 B형으로 나왔다.

이 사건을 포함해 4차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수사본부가 있는 태안지서에서 반경 2km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경찰은 이때부터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스템적인 한계로 연쇄살인의 시점에서 수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3개월 후 3차 사건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2002년 1월 9일 공소시효 만료.


3.2. 6차 사건[편집]


1987년 5월 2일 오후 11시 경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29)씨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진안리에 거주 중이던 피해자는 폭우가 내리는 밤에 남편의 우산 마중을 나갔다. 밤 9시에 집을 나선 피해자는 9시 30분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10시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이때 남편은 야근 때문에 밤 10시 30분에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으며 11시쯤에 버스정류장에 내렸으나 정류장에도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아내가 걱정이 된 남편은 이틀 후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은 수색 도중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스정류장에서 바로 밑 논바닥에서 피해자의 샌들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시신은 실종된 지 약 일주일 후인 5월 9일 수업을 마치고 산을 넘어 집으로 귀가 중이던 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피해자의 집에서 200m 떨어진 무덤 옆 나무더미였고 시신은 상체가 벗겨지고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으며 목에는 블라우스와 속옷이 감겨 있었다. 조사 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교살이었다. 현장에서 234mm 정도의 족적이 나왔고 츄리닝 상의에서 발견된 정액을 조사한 결과 A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피해자의 남편이 A형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02년 5월 1일 공소시효 만료.


4. 1988년[편집]



4.1. 7차 사건 ★[편집]


19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 경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기순씨(54)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피해자는 이날 장남이 운영하던 수원 시내의 분식집에서 일손을 도운 후 저녁 8시 40분쯤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다가 실종되었다. 밤이 늦도록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남편은 날이 밝자마자 친척들에게 연락해 피해자를 찾아 해맸고 실종 다음날인 9월 8일 아침 9시 30분쯤에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 풀숲에서 피가 흥건한 피해자의 시신을 찾아냈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었고 입은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린 상태였으며 쥐색 치마를 벗겼다가 도로 입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사 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 끈으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피해자의 질 내부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잘려 있는 복숭아 7조각이 발견되었으며 4차 사건에 이어 또다시 우산으로 하체를 난행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이춘재가 현장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논밭에 족적을 남겼고 그 족적이 마을버스 노선이었던 도로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춘재가[15] 그 곳에서[16] 수원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도 경찰이 확인하였다. 당시 그 버스정류장 노선을 지나가는 버스를 전수 조사하여 당시 그 시간대에 운행했던 버스기사를 찾아 목격자를 확보하고 몽타주를 배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용의자의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 물이 들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는데 사실은 이춘재가 자신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것이 아니라 변태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이춘재 새끼손가락에 묻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난 데다 더욱 잔혹해진 수법에 여론은 난리가 났고 당시 화성경찰서장이 교체되었다.

2003년 9월 6일 공소시효 만료.


4.2. 8차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8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88년 9월 16일 새벽 2시 경 태안읍 진안리 주택에서 박상희양(13)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5. 1990년[편집]



5.1. 9차 사건 ★[편집]


1990년 11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4)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태안읍 능리에 거주하던 피해자는 사건 당일 학급의 청소 당번이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늦은 시각에 하교를 하게 되었고 오후 5시 경 친구인 이 양[17]과 헤어져 하교하던 중 실종되었다. 이후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축산업자 전모(41)씨에 의해 감색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목격된 것과 정 씨(45)에 의해 능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S석재에서 500여m 떨어진 연립주택 앞을 미정 양이 지나갔는데 20대 청년으로 보이던 의문의 남성이 팔을 휘두르며 그 뒤를 쫓아간 것이 목격된 것을 끝으로 밤 9시가 되도록 피해자는 귀가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돌아오지 않자 매우 불안해진 가족들은 인천에 있는 친척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 밤을 새워 주변 근방을 모조리 뒤지며 피해자를 찾아 해맸으나 결국 피해자는 다음 날인 11월 16일 아침 9시경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는 피해자의 삼촌이었다. 피해자가 발견된 야산은 밤에 늘 경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었다.[18]

피해자는 교복으로 덮여 있었으며 양손과 양발이 스타킹으로 묶여 있었고 속옷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부검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피해자의 필통에 있던 문구용 칼로 가슴을 20여 회가량 난행한 후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질 안에서 피해자의 소지품이었던 수저, 포크, 볼펜 등이 나왔다.

거기다 피해자의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잡채가 발견되었는데 이 말은 피해자가 잡채를 먹은 지 2시간 내에 살해됐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피해자가 이날 점심 도시락으로 잡채를 싸 왔지만 점심에 먹은 것은 진작 소화됐어야 했고 저녁에는 바로 하교하기 때문에 먹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피해자의 도시락에서 지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잡채를 먹이거나 혹은 억지로 먹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에서는 40개 정도 되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고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2005년 11월 14일 공소시효 만료.


6. 1991년[편집]



6.1. 10차 사건[편집]


1991년 4월 3일 오후 9시경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순상(69)씨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권씨는 수원시 매탄동에 있는 큰딸의 집에 갔다가 6시 반경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오후 8시경 동탄면 오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이 있는 반송리 쪽으로 귀가하던 중 피살되었다. 다음날 밭둑을 올라가던 중인 중장비 운전기사가 피해자를 발견해 신고했다.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집에서 200m 떨어진 곳으로, 하의가 벗겨지고 검은 스타킹이 목에 감겨 있는 상태였으며 음부에는 양말이 삽입되어 있었다.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재갈도 없고 손을 결박하지도 않았으며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 역시 교살이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모방범죄로 의심받기도 했다.

경찰은 양말에서 B형의 정액과 지문을 채취했고 이 지문을 3천명 가량의 용의자와 약 4만명의 참고인과 대조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6년 4월 2일 공소시효 만료. 이로써 결국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모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1] 전문가들은 이것이 연쇄 강간만 저지르던 이춘재가 저지른 첫 살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2] 현재 화성시 진안동 북부(논밭 일대).[3] 현재 화성시 안녕동 140-5 성우교차로 일대.[4] 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관항교차로 인근 논밭 일대.[5] 현재 화성시 황계동 수원 공군기지 남측 논밭 일대.[6] 화서역 1번 출구 인근으로 추정.[7] 현재의 진안동 다람마을월드메르디앙1차아파트 일대.[8] 현재 화성시 병점동 - 능동 구봉산 일대[9] 다만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당시 경찰이 은닉하였기 때문에 성폭행 사실은 이춘재의 자백에만 근거한다.[10] 강도 미수사건의 대한 화풀이+등화관제로 인한 목격자 부재+ 피해자가 범인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시너지로 인해 가장 잔인하게 살해되었다.[11] 현재 화성시 반송동 270번지 일대 인근.[12] 범인이 저렇게 끔찍한 범죄를 수차례 이상씩 저질렀음에도 잡히지 않아 그로 인해서 몇 년 동안 가족이나 지인들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두려움을 떨어야 했고 밤에 길거리로 나가기 힘들었으며 특히 여학생은 범죄를 우려해서 아예 외지로 전학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또 수사도 살인의 추억에 나온 것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 초상권 개념도 미비하던 시절이다 보니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하면 실명 및 얼굴을 진범이든 범인이 아니었든 간에 그냥 막 공개하여 실제로는 별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용의자로 특정되었다가 아닌 것이 밝혀져 풀려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트라우마를 가지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여성은 여성대로 죽음의 공포를 마주봐야 했고 남성은 남성대로 경찰에게 얻어맞거나 용의자로 특정되어서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어 트라우마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화성이 개발되면서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되었지만 중년층 이상의 토박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나 다름없다.[13] 화성시로의 승격은 2001년에 이루어졌다.[14] 이 겉옷이 빨간 투피스였는데 이 사실은 이후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노린다는 루머의 시작점이 되었다.[15] 당시에는 용의자[16] 이 곳은 버스정류장도 아니었는데 이춘재가 손을 흔들어서 버스를 잡아 탔다고 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탑승했기 때문에 버스 안내양이나 버스기사가 유심히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17] 해당 사건 이후 이 양의 모친은 여인숙을 운영하던 자신의 집이 사실상 당시 사건 조사를 하던 형사들의 숙소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며 딸인 이 양은 형사와 경찰들에 의해 조사를 받느라 심리적인 고충을 겪기도 했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18] 이때 경찰에게 범행이 발각되지 않은 건 등화관제 때문이다. 등화관제 시기엔 불빛을 모두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49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49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13:26:53에 나무위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사건 내용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