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마르 프랑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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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33대 대통령
이타마르 아우구스투 카우치에루 프랑쿠
Itamar Augusto Cautiero Franco


파일:이타마르_프랑쿠.jpg

출생
1930년 6월 28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사우바도르행 선상
사망
2011년 7월 2일 (향년 81세)
브라질 상파울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33대 대통령
1992년 12월 29일 ~ 1994년 12월 31일
최종 당적
경력
주이스지포라 시장 ,(1967~1971, 1973~1974),
미나스제라이스주 연방 상원의원 ,(1975~1990, 2011),
브라질 제21대 부통령 ,(1990-1992),
브라질 제33대 대통령 ,(1992~1994),
미나스제라이스주 주지사 ,(1999-2003),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2.2. 정계입문
2.3. 부통령 시절
2.4. 대통령 시절
2.5. 대통령 퇴임 후
2.6. 사망
3. 소속 정당
4.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 제33대 대통령.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193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사우바도르로 향하는 선상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어머니는 이탈리아계 혈통이었다. 이후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주이스지포라에 정착했으며 1955년 주이스지포라 연방 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2.2. 정계입문[편집]


1950년대 중반에 정계에 입문하여 주이스지포라 시의원과 부시장을 거쳐 1967년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974년 시장직을 사임하고 미나스제라이스주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브라질 민주운동(MDB)의 소속으로 1976년과 1977년에는 당의 부대표를 지냈다. 상원의원 임기 동안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노력을 펼쳤다.


2.3. 부통령 시절[편집]


1989년 국가재건당으로 당직을 옮기고 페르난두 콜로르의 러닝메이트로 1990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브라질 제21대 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취임 후 특히 민영화에 관한 대통령의 정책들 중 일부에 반대하며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여러 차례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콜로르 정부에서 개각을 통해 옛 군사정권의 부역자들을 장관으로 입각시키자 반발하면서 국가재건당을 떠나 원래 소속 정당인 브라질 민주운동에 복당했다.

1992년 9월 29일, 콜로르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연방 하원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되었다.[1] 1992년 10월 2일, 콜로르의 직무가 정지되었고 프랑쿠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2월 29일, 연방 상원이 콜로르를 유죄로 판결하고 해임할 것이 확실해지자 콜로르는 사임했고[2], 그 시점에서 프랑쿠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4. 대통령 시절[편집]


취임 당시 브라질은 인플레이션이 1,110%에 달했고 1993년에는 거의 2,400%로 치솟는 등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프랑쿠는 재무장관으로 페르난두 카르도주를 임명하며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3]

1993년 4월, 브라질은 정치 체제(공화정군주정)와 정부 형태(대통령제 또는 내각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공화정과 대통령제가 승리하며 체제가 유지되었다.[4]

프랑쿠 정부는 떨어진 정부의 청렴성과 안정을 회복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쿠 역시 개인적으로 정직하다는 평판을 유지했다. 1993년 말, 프랑쿠는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사임을 제안했지만 의회는 이를 거절했다.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90% 전후를 유지했다. 임기 동안 남미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발족시켰다. 또한 브라질의 핵 비확산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5. 대통령 퇴임 후[편집]


브라질 대통령은 4년 중임제이지만 만약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5]을 한다면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프랑쿠의 대통령 정식 재임[6]은 두 번째 임기로 취급되어 당시 3선 제한 법률에 의거, 1994년 대선 출마가 금지되었다.

이후 1995년 주포르투갈 브라질 대사와 1996년 미주 기구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1998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에 당선되어 재직했다. 그러나 1999년 페르난두 카르도주 정부에게 중앙정부 부채 185억 헤알(150억 달러)에 대해 상환을 90일간 유예한다고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전면도전을 했다.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진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의 재정 갈등은 결국 90년대 후반 브라질의 경제 위기를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당선되는 계기가 된다.

프랑쿠가 카르도주에게 도전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의 부하였던 카르도주가 자신을 밀어내고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을 멈추게 한 업적인 헤알 플랜에 대한 공로를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룰라 다 시우바를 지지했었다. 이후 룰라 대통령에 의해 주이탈리아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제라우두 아우키민을 지지했다.

2011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상원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2.6. 사망[편집]


상원의원으로 다시 당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1년 5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폐렴까지 걸리자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 호흡기를 달았다. 2011년 7월 2일 아침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브라질 노동당

1955 - 1965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65 - 1966
해산

브라질 민주운동

1966 - 1986
입당

자유당

1986 - 1989
입당

국가재건당

1989 - 1992
입당

1992 - 2009
복당

2009 - 2011
입당
사망

4. 여담[편집]


  •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대다수는 프랑쿠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한다. 어찌됐든 지금은 능력으로나 청렴함으로나 전임자보다 낫다는 평.

  • 원래 인지도가 낮았던만큼 재임 시절 인기가 별로였지만 각종 기행 때문에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팬티를 입지 않은 모델과 춤을 추는 모습이나 광대 차림을 하고 리우 카니발에 참가한 모습이 주로 애용됐다고. 특히 전자의 경우 구글에 이타마르 프랑쿠를 알파벳으로 검색해보면 금방 나온다(...).

  • 1968년 안나 엘리사 수레루스와 결혼해 두 딸을 두었으나 1978년 이혼했다. 이후에도 재혼하지 않아 그가 재임하는 동안 브라질의 대통령 배우자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정치 인생 내내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고, 프랑쿠의 사생활은 대중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 직접 쓴 단편 소설이 있다고 한다.

[1] 브라질 헌법에 따르면 탄핵된 대통령의 권한은 180일 동안 정지된다.[2] 먼저 사임을 선언했으나 연방 상원은 이를 무시하고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 카르도주는 1994년 헤알 계획을 실시하여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킨다.[4] 프랑쿠는 내각제를 선호하는 입장이었다.[5] 프랑쿠의 경우 1992.10.02.~1992.12.29.[6] 1992.12.29.~199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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