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일화

덤프버전 :

1. 개요
2. 참호 속에서의 이탈리아군
3. 이탈리아군 맞아?
4. 누가 이길까요?
5. 이탈리아의 전쟁 선포
6.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7. 명장
8.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9.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
10. 해볼만한 적군
11.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리다
12. 나라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
13. 영국 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14. 이탈리아의 전쟁학
15. 전쟁 준비보다 외화
16.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17. 신의 가호
18.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
19. 군용기에 관한 일화
20. 무기 없이 싸울 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
21.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22.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
23. 와인
24.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
25. 사막에서 구원 요청
26.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
27. 공평한 팀 밸런스
28. 이탈리아군에게 잡힌 연합군 병사들의 생활
29. 패튼 장군의 사과



1. 개요[편집]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관련한 일화로, 대부분은 유머성 내용이 짙은 픽션이고 진짜 실화인 것도 있기는 하다. 이 항목에 기재된 대부분의 일화는 2006년경 일본 커뮤니티 등지에서 유행한 '이탈리아군 전설(イタリア軍伝説)' 게시물에서 유래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머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서구권에서는 그 전에 이미 존재했던 유머라고 한다. 원문을 찾아보면 본 항목에 기재되지 않은 일화도 많다. 그리고 일부 일화들은 이탈리아군의 졸전과는 상관이 없고, 이탈리아군이 전쟁을 너무 안일하게 대한다는 뉘앙스로 조롱하는 유머다.

2. 참호 속에서의 이탈리아군[편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그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 "오! 성모 마리아님!" 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납작 엎드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멈추고 반격 명령을 내리시오. 귀관이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포격이 시작되었더라도 날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동안 어느 정도 대처를 해놓은 다음 포탄이 날아오는 게 보일 시 그에 맞게 적당히 엄폐를 해 피해를 최소화 할 생각을 해야지, 포격 소리만 듣고 겁에 질려 엎드린다면 누가 봐도 한심해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참호까지 구축해놓은 상태에서 덮어놓고 저런다면 애초에 참호구축 자체를 똑바로 안 했고 또한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이라는 말도 된다.

3. 이탈리아군 맞아?[편집]


몽고메리 원수가 이끄는 영국군이 이탈리아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군이 자꾸 이탈리아군에게 패전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몽고메리 원수는 부관에게 저들이 누군지 알아보라고 했다. 부관이 이탈리아군이라고 보고하자 몽고메리 원수는 "그럴 리 없다! 저들이 이탈리아군일 리가 없어! 다시 한번 확인해 봐!" 라고 말했다. 부관이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저들은 이탈리아 폴고레 공수사단이 확실합니다!"

그러자 몽고메리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폴고레나 아리에테 정도가 아니면 잘 싸우는 부대는커녕 사람같이 싸우는 부대도 없었으니


이 일화의 원본은 롬멜과 프랑스 외인부대의 이야기다. 아프리카 전투 당시 롬멜은 독일군의 공격을 강력하게 막고 있는 부대가 프랑스군이라는 보고를 받고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확인해볼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부관이 프랑스 외인부대가 맞다고 재차 보고하자, 외인부대라면 외인부대라고 이야기하지 그랬냐고 질책한 것.프랑스나 이탈리아나 다만 이 내용도 실화라는 사실은 부족하긴하지만, 롬멜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해 고전한바 있으며 폴고레 공수사단에 대해선 상당히 고평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건 확실하다.


4. 누가 이길까요?[편집]


1936년의 어느 날, 파티에서 한 여자가 국방 장관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에게 물었다.

여자: 다음 전쟁에서는 누가 이길까요?

블롬베르크: 부인, 저는 그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없군요...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편이건 이탈리아가 붙는 쪽이 질 거라는 사실이죠. 자기들한테 붙었다



5. 이탈리아의 전쟁 선포[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외교관: 총통 각하! 이탈리아도 참전한다고 합니다!

My Fuhrer, Italy has entered the war!

히틀러: 두 개 사단을 보내라. 그 정도면 상대할 수 있겠지.

Send two divisions. That should be enough to finish them.

외교관: 그게 아니라, 동맹으로 참전한답니다.

No, My Fuhrer, not against us, but with us.

히틀러: 그건 얘기가 다르지, 열 개 사단을 보내.

That's different. Send ten divisions.


출처는 영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 작가이기도 한 맥스 해스팅스의 <Inferno: The World at War, 1939-1945>이다. 적으로는 두 개 사단이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지만, 아군으로 지원을 보내려면 10개 사단을 보내야 할 정도로 없느니만 못하다는 뜻. 사실 이탈리아의 경우 독일과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두고 싸우기 때문에 독일이든 이탈리아든 공격하는 측이 매우 불리한 구조여서 이런말이 나올 수 있었다.


6.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편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 중대가 항복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 장교는 그들을 무시한 채 "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 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 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 사례는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에서도 있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전격전으로 바쁜 독일 기갑부대가 프랑스군의 항복요청을 받자 "너희 따위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무기를 버리고 아무데나 가버려!" 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각 육군 사단 간의 치열한 북진 경쟁이 과열되어 항복해오는 포로들에게 더러 후방에서 따라오는 헌병 부대한테 가라고 한마디만 하고 지나쳤다던가, 굶주림과 피로로 탈진한 북한군 낙오병이 제발 포로로 잡아달라며 한국군 중대를 막아서자 그냥 막무가내로 무시하고 진격했다던가, 포로를 관리해야 할 헌병들도 북진에 정신팔려 밧줄 울타리로 날림 수용소를 건설해 포로들을 우르르 수용하고 소총 든 헌병 한두명이 통제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렸다던가, 그 와중에 빨치산들이 밧줄 수용소를 습격하자 북한군 포로들이 국군과 함께 은엄폐하며 관측병 노릇을 하자 빨치산들이 그냥 도망쳐 버렸다던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7. 명장[편집]


어느날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방장관[1]에게 전화를 걸었다.[2]

무솔리니: 그 장군 이름이 뭐지요? 자마 전투에서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 장군을 물리친 장군 말이오.

장관: 그는 스키피오 장군입니다.

무솔리니: 그럼 우리 이탈리아를 통일로 이끈 장군은요?

장관: 그는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입니다.

무솔리니: 뤼첸 전투에서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전사시킨 장군은요?

장관: 그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장군입니다."[3]

무솔리니: 장관, 그러면 그는 누구요? 영국의 유명한 왕 있잖소?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을 물리친 왕 말이오.

장관: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입니다.

무솔리니: 그럼 있잖소. 영국의 왕태자 있잖소?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왕태자 말이오.

장관: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입니다.

무솔리니: 그럼 프랑스백년전쟁에서 승리하는데에 큰 역할을 한 소녀는요?

장관: 그녀는 잔 다르크입니다.

무솔리니: 마지막 하나만 더 물읍시다! 그는 누구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장군 말이오.

장관: 그는 웰링턴 공작입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무솔리니: 니들이 자꾸 지니까 이런 말을 하잖아! 제발 좀 이기라고!


무솔리니가 할 말은 아닌데, 군사 면에서는 히틀러보다 훨씬 무능하던 인물이다. 게다가 보급에 대한 인식도 형편없어서, 당장 식량이나 탄약을 실어야 할 트럭에 자기 흉상을 만든답시고 석고를 꽉꽉 채워서 보내고 북아프리카에 장병들은 굶고 있는데 승전퍼레이드 한답시고 백마를 보낸 사람이다. 노는물이 같은지 괴링도 공중보급하겠다고 콘돔을 준적이 있다. 적어도 히틀러는 장병생활과 밀덕경험은 있어서 최소한 장군들이 하는 말을 알아는 들었다. 전쟁 후반에 갈수록 편집증이 심해져서 그렇지.

8.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편집]


이탈리아인의 '약함'은 처세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소속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 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운 소련군이나 빨치산의 증언으로는 독일군도 2~3대 정도 때리면 울면서 정보를 발설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병사 개개인의 강인함을 따져보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전선에서도 다 그랬듯이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독일군에 거하게 빅엿을 먹였는데, 1943년 이탈리아 항복 이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이 옵저버로 파견된 영국 장교들을 대동하여 유고슬라비아에 파견되어 있던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막대한 양의 장비와 물자를 획득하면서 파르티잔의 세가 엄청나게 불어버렸다.진정한 트롤은 탈주 이후에도 팀을 곤경에 빠뜨리는 법이지 흔히 간과하는 사실로, 애초에 이탈리아군 사병 개개인은 저평가 받은 경우가 거의 없다. 에르빈 롬멜의 이탈리아군에 대한 평가도 "최악의 지휘관들, 경직된 장교들, 훌륭한 병사들" 이었다. 이탈리아군 보병 개개인이 독일군이나 영국군만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은 사병의 기량이 부족하다기보다 빈약한 무장이나 좋지 못한 전략적 상황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9.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편집]


제1차 세계 대전시까지는 각 지방에서 징병한 장병들을 지역별로 편성했지만 1차대전 후에는 각 부대에 균등하게 배치하는걸로 군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약함에 지역차이는 없었다.

이 일화는 1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난 국가들의 경험 때문에 지역을 섞어서 배치한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지역별로 마을 장병들을 "같은 마을 청년들이면 전투력이 오를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한 부대에 몰아 넣었다가 기관총 하나에 다 죽어 마을의 세대 하나가 절멸한 경험을 한 이후 지역 혼성으로 바꾼 것. 사실 근대까지는 국가의 결속력이 비교적 약했으므로, 이런식의 지역적 편성이 사기 진작이나 탈영병 감소에 어느정도 도움이 되긴 했다.


10. 해볼만한 적군[편집]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메넬리크 2세가 부족들에게 유럽의 열강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싸워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부족들은 유럽의 열강이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겁먹어 메넬리크 2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 이에 메넬리크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상대는 이탈리아군이오!

이 말에 에티오피아의 부족들은 모두 곧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은 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졌다. 물론 에티오피아군도 군을 현대화했고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강씩이나 되는 국가가 막 군을 현대화한 약소국에 졌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라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총독과 내각이 갈려나갔고 잡힌 포로들 몸값도 거하게 지불하고 영토도 약간 잃었다.

11.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리다[편집]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 결과 수많은 야습을 허용했다.

사실 이 일화는 19세기 말엽, 영국군과 싸우던 이집트군이 야간 경계를 안 하고 자다가 영국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 텔 엘 카비르 전투에서 유래했다.

12. 나라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편집]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짐을 싸면서 소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 때 뿐이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자 병사도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

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함께 갑시다!"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원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남은 소대원들: ??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이거

장난같이 서술되어있지만 이탈리아는 14세기까지 완벽하게 다른 나라로 구성된 곳이였으며 유럽에서 가장늦게 통일이 된 국가였다. 2차대전기때 북부 빨치산들이 유의미하게 저항하며 파시스트 정권을 엿막인 것도, 연합군의 이탈리아 남부 상륙시 파시즘의 본포임에도 미군을 환영한 것도 이러한 지역감정과 분열된 이탈리아의 민족성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른 왕국처럼 최소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도 약했으며 현재의 이탈리아도 남부와 북부는 거의 다른나라 수준으로 봐도 될만큼 격차도 크고 분리주의자들도 존재하는 등 국가 내부의 결속력이 상당히 약한 국가이다.

13. 영국 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편집]


이탈리아군 잠수함 갈릴레이(Galilei)호는 무장상선도 아닌, 영국 해군의 트롤어선 개조 무장 어선과의 1:1 승부에서 패하고 심지어 나포까지 당했다. 어선 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영국 해군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장교들이 다쳤다고 시원하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 버렸다.

실제로는 그냥 무장어선이 아니라 당시기준으로 충분한 대잠장비를 갖추고 있던 어선이었다. 폭뢰 공격을 견디다 못한 이탈리아 잠수함 쪽이 부상해서 양측이 가지고 있던 함포로 함포전을 벌인 것. 하지만 교전 중에 함장 포함, 4명의 사관을 비롯해 총 16명이 교전 중 전사한데다가 그 직후 영국 해군의 구축함이 왔기 때문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잠수함이 잠수 상태도 아닌 데다가 지휘 체계도 날아갔는데 본격적인 구축함까지 왔으니 항복할 수 밖에 없기는 했다. 그렇지만 군함이 어선과 맞짱떠서 졌고, 무장어선이 보기 드문 전과를 올린것 자체는 사실이다.결국 졌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14. 이탈리아의 전쟁학[편집]


  • 이길 수 없는 상대 = 절대 전쟁까지 가지 않는다.[4]
  • 강적동격의 상대 = 약해지기신중하게 기다리고 나서 개전 → 하지만 참패
  • 약한 상대 = 기꺼이 개전 → 하지만 왜인지 참패
  • 절대 지리라 생각할 수 없는 상대 = 기꺼이 개전 → 고전을 면치 못한다.[5]


15. 전쟁 준비보다 외화[편집]


피아트사에서 개발한 G50 전투기는 1940년 6월부터 제51전투비행단 21, 22비행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국에도 배치가 안 끝난 최신 전투기 G50은 이미 1940년 1월부터 핀란드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개발된 최신개량형 G50bis는 1941년 1월 핀란드 공군에 판매되었다.

핀란드는 1940년 3월 까지 소련을 상대로 겨울전쟁 중이었으니 당연히 전쟁 중이 아닌 이탈리아보다 병기가 시급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은 1939년 5월 강철 조약으로 동맹상태였고,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과 영국, 프랑스는 전쟁중이었다. 이 때 이탈리아군은 영국과 프랑스 전투기를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구식 복엽기인 CR.32가 전체 전투기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복엽기인 CR.42가 차지했으니 이탈리아도 신형전투기도입이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게다가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뒤에는 이탈리아도 전시상황이 되었는데 이 시점에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G.50은 겨우 118대 뿐이었음에도 핀란드에는 이미 35대나 팔았다는 점이다.
이 당시에는 독일과 소련의 사이가 아직까지는 동맹이었으니 독일이 자국영토 통과를 거부, 결국 가까운 육로를 냅두고 먼 바다로 돌아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두 대가 파손되어 핀란드에는 33대만 도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소전쟁 당시 독일은 핀란드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6.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편집]


이탈리아 전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지만,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어영부영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독일군 정찰기가 지나갈 때는 제대로 싸우는 척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 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한 것이다. 당연히 미군도 눈가림 반격.

그런데 그 전투를 목격한 정찰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대단해!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군의 바람과는 달리 독일군의 원군이 왔고, 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고 한다.사실 밀리는 척 해도 거기 지키려고 원군 파견, 미는 척 해도 공세에 힘 붙여주려고 원군 파견

실제로는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사단장이 해안 상륙을 저지하라는 이탈리아 장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케셀링의 명령을 기다리느라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렸으며 알베르트 케셀링이 내린 명령도 이탈리아군과 협력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미군이 해군에게 포격을 요청해서 헤르만 괴링의 기갑사단은 별 활약도 못하고 리타이어해버렸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어영부영'이 왠말이냐 싶겠지만 이탈리아와 미국은 독일과 소련처럼 뼈에 사무치는 원한과 증오가 쌓인 사이도 아니고 일본처럼 미국이 이탈리아인을 지상에서 박멸하려 한다는 공포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괜히 목숨 버리지 말고 자리만 지키면서 정부에서 항복선언하는 거 기다리다 미군 오면 항복이나 하자.', 미군 병사들도 '괜히 목숨 버리지 말고 이탈리아 애들 적당히 후퇴만 못하게 붙잡고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자.'하는 사고방식으로 버텼을 가능성이 있다.


17. 신의 가호[편집]


이탈리아군은 적절한 보관 장소가 없을 경우 성당에 화약을 즐겨 보관했다. 성당이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몬테카시노 전투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로 성당이나 수도원에 대한 공격을 주저한 사례가 종종 있긴 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성당의 첨탑에 보기 좋게 낙뢰가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나 순식간에 마을의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성경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무기고로 만들었겠다!

보통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당이나 수도원은 폭격하지 않는 게 암묵의 룰이었다고 한다. 부상병만이 아니라 피난 온 민간인을 수용하는 시설로서 기능했기 때문. 또한 유럽은 추축이나 연합이나 기독교 문화권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나 성당에 폭탄을 날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지금에 비해 기술이 열악했던 당시 교회의 높은 첨탑이 오히려 위치를 파악하기에 좋은 지표였기에[6] 파괴하는 게 손해인 경우[7]도 있었다.
성당은 보통 도시의 중심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하고, 특히 방어에 중점을 두어 언덕지형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은 전근대 도시라면 성당이 위치한 곳이 지형상으로도 가장 높은 장소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게다가 첨이므로 당연히 우뚝 솟아 있고 교회의 첨탑인만큼 십자가나 종과 같이 벼락을 유도하기 쉬운 금속제 기물도 거의 항상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마치 피뢰침처럼 벼락맞기 좋은 과학적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 셈. 이 때문에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이도 조사결과를 토대로 유독 교회에 벼락이 자주 떨어진다고 경고하며 피뢰침 설치를 독려했을 정도. 즉 성당을 화약 보관소로 자주 사용하다보면 자연히 벌어질법한 일.


18.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 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나라도 도둑맞은 적이 있다.

전차를 도둑맞은 이야기는 사실 이스라엘 건국 시에 철수하는 영국군의 셔먼 전차를 신생 이스라엘군이 훔쳐다 자국군 장비로 편입한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미모의 여성이 전차 주차장을 경비하던 경비병을 유혹해 자리를 비우게 한 사이에 전차들을 몰고 달아났었다고... 이 전차들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중요한 전력이 된다.


19. 군용기에 관한 일화[편집]


이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 때까지도 계기비행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조종석을 밀폐식으로 만들었지만 조종사들이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양산형은 개방식으로 되돌렸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만든 고속 전투기가 엉망.

1차 대전 때만 해도 모든 비행사들은 당연히 손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바람을 직접 몸으로 느껴가면서 풍향과 풍속을 계측해 비행했다[8]. 그리고 당시 곡면 유리를 가공하는 기술이 부족해서 시야가 좋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엔 아직 사출좌석이 없었던 시대라 완전밀폐식 캐노피는 고장이나 피격 등 낙하산으로 탈출해야 할 때 제대로 열리지 않아 위험을 초래할까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9]어차피 MC. 202 폴고레부터는 죄다 밀폐식으로 돌렸다.


20. 무기 없이 싸울 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편집]


소말리아에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을 때, 약간의 시비로 미 해병대와 이탈리아군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10] 사건의 단초는 이탈리아군이 검문에서 통과시킨 소말리아인 용의자를 미 해병대가 연행하려고 하자 이탈리아군과 미 해병대간의 언쟁이 일어났고[11] 이 틈을 본 소말리아인 용의자는 도망, 그것을 본 미 해병대원이 그 소말리아인을 사살해 이를 계기로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양군 장교들이 이 패싸움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탈리아군이 미국 해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역시 백병전 전문가 로마군의 후예 참고로 미해병대는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백병전을 가르치지않는 현대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백병전을 중요시하는 부대다.


21.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편집]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마을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마을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영국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설탕 5포대와 밀가루 5포대를 주겠다."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다.이건 잘한 것 같은데

이탈리아군이 게을러빠져서 잔머리를 굴렸다는 의도로 작성된 유머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 거래를 통해서 원주민들의 협력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낸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으며, 세계대전 사례만 해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사례도 있으며, 애당초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는 잔당과 게릴라부대를 토벌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민사작전을 통한 민심 확보, 해당 지점을 거점으로 삼아 잔당이나 적군을 공격, 처음에는 천천히 방어전만을 수행하다가도, 대규모 적 혹은 잔당 집결지점이 보이면 재빠르게 집결, 이동해 최대 화력으로 십자포화를 퍼부어 적 살상에 집중, 이를 반복하다가 최종적으로 FOB 혹은 마지막 생존자까지 모조리 찾아내 섬멸하고 군사 자료나 물자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장 독일과 일본[12]의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여러 식민지 및 점령지들이 저항군을 조직해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현명한 대처였던 셈.


22.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편집]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가 로마 해방을 위해 진군했을 때의 일화이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시 이탈리아의 절반을 가리발디의 의용군이 해방하고, 로마 해방이 눈앞에 보이자, 가리발디가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세력가들과 마피아는 가리발디의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계책을 궁리했다. 가리발디와 그의 의용군을 초대하는 대연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훈제 햄으로 시작된 코스요리는 메시나풍 생선 요리, 사슴고기, 어린 양 통구이, 닭 요리 등등 디저트에 도넛이나 구운 사과에 이르기까지 총 12 접시가 나올 정도로 매우 호화로웠고, 게다가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여기에 눈이 멀어 발이 묶여버린 가리발디는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런 연회가 있든 없든 애초에 둘은 동맹관계였다. 물론 사르데냐 정부와 가리발디는 단순히 동맹관계라기 보다는 조금 미묘한 관계였다. 둘 다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지만, 사르데냐 정부는 복잡한 국제외교관계를 따져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카보우르 수상이 이끌고 있었고 그에 반해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재야 이상주의자였다. 샤르데냐 정부는 사르데냐의 북이탈리아 통일에 가장 큰 조력자였던 프랑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의 완전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교황의 후원자이기도 했고, 게다가 교황에 대한 성급한 군사행동은 다른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여지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데냐 정부는 (1) 가리발디가 나폴리를 해방시키고 이어 로마를 침공하려는 의도를 보이자 서둘러 나폴리로 진군하여 가리발디와 회담하여 가리발디의 폭주를 막은 적이 있고, (2) 그 이후에 가리발디가 다시 로마 공격을 위해 의용군을 모집했을 때 이를 무력으로 저지한[13] 적이 있다. 그러나 위 일화의 기술은 (1) 과 (2)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2) 번의 경우, 정부군 쪽에서는 가리발디를 막아야 하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가 무엇하니 절대로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작정이었고 가리발디 역시 같은 이탈리아인을 공격하기가 망설여져서 제대로 된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 수밖에 없었' 지만, 그것이 연회 때문은 아니었다.


23. 와인[편집]


대전기 이탈리아군이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 "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있었다. 또 물자 비축량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유럽고질적인 수질 문제와 더불어 당시 부족했던 보관기술[14], 청야전술로 현지에서 물조달이 어려운 경우 등으로 인해 고대 유럽군대는 물론 근현대까지 대신 와인이나 맥주식수로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좀 이색적이긴 하지만, 원래 프랑스군은 병사들에게 하루에 와인 1/3병을 줬다고 한다. 식수와 별개였으나,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하다하다 액체상태의 와인이 수송하기 힘들다고 고형으로 가공해서 보급할 정도였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와인 수출이 잘 안돼[15] 와인 잉여분이 쌓이자 이걸 소모하기 위해 2/3병으로 주는 양을 늘렸다고 한다. 독일의 맥주도 전통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연합군 측도 마찬가지였고 현재 유럽의 여러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러 참전국들이 병사들을 상대로 각성제라는 명목 하에 마약을 지급한 것에 비하면 몇 백 배는 나은 편이다. 메스암페타민이 이 용도로 개발된 것이며, 실제 2차 대전 내내 병사에게 엄청난 양이 살포 됐다. 다만 메스암페타민은 당시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 비슷한 경우로 방사능 이나 같은 물질도 종전 이후 5~60년대 까지 중독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24.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편집]


오스트레일리아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3개국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땅굴을 파서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16]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 버렸다.[17]

하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수용소의 문(門)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자기들끼리 요리대회도 열어서 즐거운 수용소 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동네 아가씨를 꼬셔서 결혼하여, 호주군이 이탈리아군을 해방시켜줘도 그 동네에 그냥 눌러사는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다 한다. 심지어 어떤 수용소에서는 포로들끼리 연습해서 오페라도 공연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악단을 구성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특이한 사례는 아니긴 하다. 사진은 계속전쟁 기간 핀란드 수용소 경비대와 소련군 포로의 합동 밴드. 사실 상황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본디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는 포로들이 무장해제된 상태이긴 해도 소수의 경무장한 경비대가 몇십, 몇백 배에 달하는 포로들을 관리해야 한다. 일단 한번 소요사태나 폭동이 발생한다면 수습이 매우 곤란해지고 수용소장도 경질되고 재수없으면 불명예 제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수용소 측과 포로들 간에 암묵적인 타협이 적당히 이뤄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25. 사막에서 구원 요청[편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 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이 들어오자 독일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귀중한 물을 사용해 파스타를 데치고 있었다.

파일:jXLRAyJ.jpg
실제로는 사진 오른쪽과 같이 조리된 파스타가 들어있는 통조림을 먹었으므로 파스타를 데친 적은 없다.


26.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편집]


"전장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을까."라는 그 일념하에 이탈리아인에 의해 동결건조 기법이 발명되었다. 연합군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첫 동결건조 기법은 프랑스의 다르송발이 방법을 찾아냈고 1911년 다우니 해리스가 도입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를 실전적으로 적용한 것은 미군으로 주 용도는 백신과 의약품 운송을 위한 것이었다. 출처


27. 공평한 팀 밸런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붙었다는 보고를 듣자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우리 편이였으니 이젠 딱 맞는다." 라고 했다.


28. 이탈리아군에게 잡힌 연합군 병사들의 생활[편집]


이탈리아 근처에 있는 몰타 섬에서 출격해 작전을 하던 한 영국 공군(RAF) 조종사가 이탈리아에 추락,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날 밤 와인을 비롯해 자신이 있었던 몰타섬 영국군 기지에서는 꿈에서나 보던 음식들을 대접해 주는 걸 보고 이제 내일 사형당하는구나... 이런 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잠도 잘 자고 죽을 각오도 다진 상태에서 갑자기 이탈리아 통역병과 장교 한 명이 그의 방에 들어왔다.

조종사는 이제 아... 죽는 건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교가 말을 하기 시작했고, 통역병이 영어로 통역했다. 그가 말하길...

어제는 행정상의 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병사용 식사를 제공하고 말았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나는 귀관을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정중하게 대접할 것이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어제의 무례를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르는 것을 비웃는 게 아니라 군대나 전쟁 문제보다는 영국 요리를 디스하는 대중적인(?) 개그인데 단지 배경설정이 2차대전인 것에 불과하다. 굳이 전쟁 관련으로 유머 코드를 분석하자면 이탈리아가 당시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때문에 '안습 개그'라 할 수 있다. 만약 이탈리아군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 일화의 평가는 180도 달랐을 것이다. 당시 몰타는 거의 봉쇄당하다시피 해서 물자가 부족했고, 일화 속의 포로는 보급이 가장 잘 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이탈리아 본토에서 잡혔다. 두 환경을 감안하면 식단상황이 천지차이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다. 당장 이탈리아군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병들 식사는 형편 없었다.[18] 또 이 일화가 (만행을 일삼는 독일군에 비해) 이탈리아군이 적들에게 관대하고 신사적이었다는 이야기로 비약되는 경우가 많다. 다소 묻힌 감은 있지만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만행도 상당하다.[19] 동부전선에서 학살을 일삼았던 독일군도[20] 서부전선에서는 나름대로 포로에게 잘 대해주었다는 점에서 두 추축군의 성향은 비슷하다.


29. 패튼 장군의 사과[편집]


미군조지 S. 패튼 장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 부임했을 때 일이다. 패튼 장군은 미군이 이탈리아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들에게 "이 멍청한 놈들! 져도 어떻게 이탈리아군에게 지냐? 니들이 그러고도 남자냐?"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부하들의 항변에 패튼 장군은 곧바로 사과했다. 부하들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우리들이 상대했던 이탈리아군은 그냥 이탈리아군이 아닙니다! 베르살리에리 부대와 이탈리아 육군 제132 아리에테 기갑사단이었습니다!


베르살리에리 부대는 롬멜조차도 자기 휘하 부대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으며, 아리에테 기갑사단은 토브룩에서 영연방군을 탈탈 털어버린 전적이 있다. 두 부대 다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서 인정 받은 정예부대였다. 베르살리에리와 제132기갑사단 둘 다 편제를 변경하여 현재까지 존속중이다.
※ 이 문서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이 에피소드 또한 출처불명의 주장이며 미군이 이탈리아군에게 참패한 것은 북아프리카 최악의 데뷔전이었던 1943년 2월 19일부터 24일까지 벌어진 카세린 협곡 전투이다. 패튼의 전임자인 로이드 프레덴달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2군단 산하 제1기갑사단은 로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주축은 독일 2개 기갑사단이었다. 또한 참전한 이탈리아군은 제131센타우로 기갑사단이었다. 아리에테 기갑사단은 이미 앞서 벌어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괴멸하여 탈출에 성공한 극소수의 잔존병력은 센타우로 기갑사단에 합류했다. 패튼이 부임한 것은 이 전투 직후이며 불과 꼭 한달 뒤에 벌어진 엘 게타르 전투에서 로멜은 패배했고 센타우로 기갑사단 또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잔여병력은 제16보병사단 피스토이아에 흡수되었다. 한마디로 패튼은 그런 질책을 할 필요가 없었다.


30. 니가 왜 거기서 나와?[편집]


그리스 침공 당시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모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그리스 공군은 가진 폭탄이 떨어지자 폭격기에 화장실 변기나 구멍난 신발, 빈 깡통 등을 탑재한 다음 이탈리아군을 폭격했으며, 양측 모두 방한용 장비가 없어서 그리스군은 잠을 잘 때 여러 명이 1장의 모포를 덮고 자곤 했는데, 그리스군 사이에 이탈리아군이 끼어 자고 있었다.

진짜로 이런 일화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상위 문서에서 봤으면 알겠지만 외교적 강짜와 허점들을 적극적으로 써먹으면서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하며 숨가쁘게 재무장을 하던 독일과는 다르게 간헐적으로 계속 전투 및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를 쌓아가기는 커녕 오히려 낭비해가고 있었다. 그리스가 여럿이서 모포 한 장을 덮고 잘 때 이탈리아군은 해군은 해군대로 대판 깨져서 못 나오고, 준비해놓은 물자 자체도 없거나 죄다 소모해버리고 없어 벌벌 떨어야 할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1] 실제로는 무솔리니 본인이 1933년부터 1943년까지 국방장관도 했다.[2] 소련의 브레즈네프도 이 일화가 있다.[3] 사실 뤼첸 전투의 승자는 스웨덴이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해서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였다. 또한 발렌슈타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세는 스웨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이전에도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밀어붙인 적이 많았다.[4] 당연한 말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랑은 당연히 절대 싸워선 안된다. 선제공격을 당했다든가 해서 싸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는 이상은 전쟁으로 안 가게 하는게 현명하다. 물론 무솔리니는 독소전쟁에도 참가했고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했지만, 적극적 교전은 피했던 덕분에 어느 무모한 열도보단 괜찮은 꼴로 전쟁을 마쳤다..[5]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전쟁 자체는 이탈리아가 이겼지만, 이탈리아는 이 전쟁에 GDP의 20%, 예산의 70%를 전쟁에 꼬라박았다. 지키고 관리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뭔가 이탈리아에 필요한 전략자원이 있는 것도 아닌 내륙국 에티오피아를 획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순전히 무솔리니의 허영 때문에 일어난 무익한 전쟁이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제연맹의 경제제재 크리와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인해 이탈리아군의 현대화는 자금난으로 지지부진해졌으며, 이후 본 문서가 작성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여담으로 이탈리아의 스페인 내전 개입은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에서 본게임에 쓸 힘을 비축하지 않고 연습게임에 온 전력을 쏟아부은 바보같은 짓으로 까이고 있다. 이마저도 1895년에 같은 국가인 에티오피아와 벌인 1차 전쟁에서는 이탈리아가 패배하고 포로들 몸 값까지 지불해야 했고 식민지 영토도 빼앗기는 등 상태가 훨씬 안 좋았다(...)[6] 거대하고 높으며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쓰였던 대성당들은 GPS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이 시기, 작전 지역으로 비행할 때 중요 지표가 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한 이 방향으로 이 정도로 오래 날았으니 슬슬 에펠탑이나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보일텐데." 하면 "네. 보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하고 확인하는 식으로.[7] 폭격으로 초토화된 독일의 쾰른 시도 폭격 직후 촬영된 사진을 보면 폭격에 의한 화재로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쾰른 대성당은 무사했다.[8] 속도계 기술이 그렇게 발달되지 않았던 경우로...[9] 덩케르크에서 바로 이 문제점 때문에 콜린스가 탈출 못하고 그대로 죽을 뻔 했다.[10] 당시 소말리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이탈리아의 영향력이 큰 상태였다.[11] 아마 '야 우리가 확인했다잖아 근데 왜 너희가 지랄이야' 느낌이었을 것이다.[12] 물론 이들에게도 사토 고토쿠의 31사단을 비롯한 양심적인 군인도 있었지만...[13] 의용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총격전에 의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가리발디 역시 체포되어 비록 경미하긴 했지만 처벌받았다.[14] 물은 콜래라같은 전염병을 옮길 수 있다는 매게채인 점을 생각해야 된다. 물을 언제 어디서든지 따마실 수 있게 된 건 산소 혹은 염소소독으로 물을 살균한 이후 유리 혹은 플라스틱 병에 담을 수 있게 된 20세기 초중반 이후의 이야기이다.[15] 그 이유는 프랑스 와인의 주 수입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로의 수출길이 막히고, 러시아로 가는 육로와 해로가 막히면서 러시아로의 수출이 막혔기 때문이다.[16] 2차대전 최대의 독일군 탈주사건인 아일랜드 팜 브레이크을 말하는 듯 하다. 사건 자체는 해당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차라리 어설픈 코미디에 가까웠다. 탈주포로들은 영국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죄다 다시 잡혀들었고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나 공식 처벌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 사건 자체의 심각성보다는 언론에서 군을 씹는데 딱 좋은 기삿거리라 충격! 구멍난 안보, 독일군 수용소 허술한 관리실태 이대로 괜찮은가? 이후 유명해졌다.[17] 실제로는 자살한 사람보다, 일본군 생활보다 훨씬 나은 포로 생활을 잘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빵과 고기, 과자를 실컷 먹고 책과 담배도 주고 영화도 틀어줬으니 어떤 면에선 일본 본토보다도 나았다. 여기에 평소 자기들을 학대한 상관들이 상황 판단 못하고 상급자 행세를 하려들면 집단 린치를 가한 건 덤. 그래서 일부는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이 좋은 생활이 끝났다며 한탄했다고. 물론 오키나와 전투 이전까지는 살아서 영미군에 포로로 잡혀 적절한 처우를 받게 된 일본군은 소수에 불과하긴 했다. 지옥 같았던 태평양 전선의 특성상, 미국과 일본 모두 포로를 잡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기 때문. [18] 물론 영국군보다는 나았다. 이건 영국의 굉장한 요리들 때문이 아니고, 이탈리아 본토가 훨씬 북아프리카 전선에 가까이 있어 보급이 원활했기 때문.[19]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문서를 참고 바람.[20]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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