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이 시게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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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토이 시게사토
糸井重里
Shigesato Itoi
출생
1948년 11월 10일 (75세)
군마현 마에바시시

1. 개요
2. 카피라이터 및 에세이스트
3. 게임 제작자
4. 그 외
5. 참고
6. 인터뷰 및 읽을거리



1. 개요[편집]


일본의 카피라이터이자 에세이스트, 작사가, 게임 제작자. 인터뷰어. 현재 웹 잡지/리빙디자인 브랜드인 '호보니치'[1]를 창립하여 CEO직을 담당하고 있다.

직임하는 직업이 많지만, 커리어가 카피라이터로부터 시작했으므로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국민 카피라이터 로 인지되고 있다.


2. 카피라이터 및 에세이스트[편집]


호세이대학 문학부 일본문학과에 입학.

1975년 의류 브랜드 WELDGIN의 카피라이트 "이 점퍼의 멋짐을 모르다니, 아버지,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다!"로 도쿄 라이터스 클럽 신인상을 수상하며 카피라이터의 길에 들어선다. 1978년에 야자와 에이키치[2]의 자서전의 편집을 담당. 순탄한 판매고를 올려 베스트셀러에 올리며 이토이 시게사토의 이름을 알린다.

카피라이터로써 이토이 시게사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83년 세이부백화점의 카피라이트. "맛있는 인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에 그는 세이부백화점의 카피라이터가 되는데, 그로부터 3년 후, 세이부백화점에서 "맛있는 생활"이라는 카피라이트와 브랜딩을 전개했다.[3]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oishi02.jpg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o0585082810788129671.png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ua2.gif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oishi04.jpg
우디 앨런이 모델을 하고 있는 "맛있는 인생" 팜플렛 광고[4]

동그라미 부분의 본문 카피문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달기만 하면 싫증납니다.

맵고, 쓰고, 시고, 떫은맛이 다양한 생활,

묻고 싶은 것은 맛입니다.

몸도 마음도 스스로 녹을 듯한 맛,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깊은 맛,

독특한 특징이 있는 신기한 맛,

맛이 없는 것은 질색입니다.

자기 나름의 맛을 찾아가는 여행은

그 자체가 자신의 생활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맛있는 사람과 만나고, 맛있는 책을 읽고,

맛있는 패션을 찾아 맛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런 생활을

단지 이상에 그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세이부백화점도

더욱 먹보가 될 작정을 한 1982년입니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영향으로 자산가치가 비대해짐에 따라 문화 인프라가 확충되고 소비자들의 구매력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상향하였는데, 그에 따라 일본 소비자들은 자연스레 더 윤택한 라이프스타일를 원했다. 소비력이 급상승하기 이전의 소비시장은 수요를 먼저 점검하고 사람들이 더 원하는 물건들을 우선적으로 판매하는 알뜰소비 우선 방식이었는데, 소비력이 비증해짐에 따라 알뜰소비적 시장이 점점 축소하는 가운데 개인의 개성 추구와 고급 유행을 탐닉하는 시장 기류가 형성되었다. 과소비와 사치소비를 중축으로 삼는 백화점 문화가 결실을 맺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토이 시게사토는 그런 시대적 정서를 캐치해 코미디언에서 작가주의 영화감독이 된 우디 앨런을 모델로 내세워 광고를 만들어 낸다.

그 여파로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인문학(혹은 지적 허영)과 고급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흐름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5], 세이부백화점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며 세이부 그룹은 고급 라이프스타일 소비경향에 집중. 그에 부합하는 광고와 브랜딩에 더 신경을 기울이게 되면서. 상품의 기능보다 상품의 이미지와 감성을 내세우는 기호론적인 광고를 밀어주는 계기가 되었다.[6]

이토이 시게사토는 딱 버블 경제 거품이 붕괴될 무렵인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세이부백화점의 카피라이팅을 맡았다. 어찌보면 세기의 운을 잘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글의 스타일에 관해서는 요시모토 타카아키[7]의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인 성향을 띠며,[8] 두 사람은 80년대 일본 소비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공동점이 있다. 물론 경제,커리어적으로 80년대 소비사회의 최대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은 이토이 시게사토 본인이기도 하다.[9]

1998년 매킨토시를 이용하여 호보닛칸 이토이 신문(직역하면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을 만들었다.

호보니치 이토이 신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도와주고 관여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려오면 당시 이와타 사토루의 인상은 "닌텐도 사장이 아닌 컴퓨터 가르쳐주는 아저씨" 였다고...[10]

호보니치 이토이 신문에서는 이름처럼 거의 하루에 한번 업데이트 하는 것을 주기로, 유명인사의 인터뷰나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있으며, 대담과 칼럼도 작성한다.그 중에 뇌 과학자 이케가야 유지의 대담은 책으로 발간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해마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간 되어있다.

글 지면 이외에는 호보니치 스토어를 운영하여 의류, 문구류 등 다양한 리빙디자인 상품을 판다.

자신이 키우는 개에 대해서도 소식을 올리는데, 브이용의 기분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묶었고 한국에서도 정식 출간 되어있다. 요즈음은 그것을 트위터에서도 하고 있는 듯 하다. 트위터에는 일상적인 글을 쓰는데에 이용하고 호보니치 이토이 신문엔 칼럼이나 대담, 인터뷰등 더 매거진으로써의 성격이 강한 글을 기고한다.

호보니치 이토이 신문은 정액제 유료 컨텐츠, 광고 지면을 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연간 매출이 30억엔이라고 한다. 수익의 대부분은 호보니치스토어의 머천다이즈의 판매에서 나온다고 하며,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호보니치테쵸"는 2005년부터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세븐일레븐닛산 식품사업부와 합작한 컵라면도 팔았다고 한다.대략 하루 조회수는 140~150만뷰에 이른다. 호보니치테쵸는 MOTHER 2의 다이어리 디자인도 매년 꾸준히 나온다.

2017년 3월 16일엔 도쿄 증권 거래소에 주식을 상장시켜 주식회사 호보니치(Hobonichi Co., Ltd.)가 되었다. 2018년 8월 말 기준으로 직원은 총 75명이고 연 매출은 2018년 기준 5037백만엔. 원화로 511억원 정도.

2006년에는 닌텐도와 협력하여 MOTHER 3의 정보를 하루의 한차례씩만 공개하는 일종의 신비주의 마케팅을 펼쳤다. MOTHER 3를 개발하고 있다고 인터뷰만 하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공백의 기간이 꽤나 길었고, 맨 처음 공식 홈페이지가 나왔을때 게임의 대한 정보라고는 MOTHER 3의 로고와 발매일 뿐이었는데다, 가장 먼저 공개한 정보도 스크린샷이나 영상이 아닌 MOTHER 3의 메인 테마곡 "사랑의 테마"였다. 그 다음날 공개된 정보는 주인공의 이름[11] 과 스프라이트였고, 이후 게임의 스크린샷은 나중에 공개되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의 광고 카피는 거의 모든 카피라이팅을 작업했다. 우리나라에 비교적 유명했던 카피라이트는 모노노케 히메의 "살아라"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터널의 저편은 불가사의한 마을이었습니다."가 있으며, 게드전기의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브리 스튜디오의 카피라이팅을 담당하지 않는다.

영화배우 히구치 카나코와 결혼했다. 1981년 먼저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1982년, 히구치 카나코와의 불륜 사실이 발각. 이후 양측이 공개적으로 교제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10년간 계속했다. 이토이 시게사토는 전처와의 이혼 후 동거를 시작해 1993년 히구치 카나코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에세이도 썼다. 제목은 꿈에서 만나요.[12]


3. 게임 제작자[편집]


나무 위의 비밀기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other_series_logo.png 시리즈의 포스터와 카피라이트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d241.gif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d139.gif
파일:external/yomuka.files.wordpress.com/mother3.jpg
엔딩을 볼 때 까지 울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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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아이들도 누나도.파일:external/wikibound.info/100px-Mother_2_logo.png
기묘하다, 재미있다, 그리고 애절하다.
파일:external/wikibound.info/100px-M3metal.png

일본 외 나라에서는 MOTHER 시리즈의 아버지로 친숙하다. 처음 MOTHER를 만들게 된 계기는 패미컴드래곤 퀘스트를 해보고 감동받아 MOTHER의 기획안을 들고 닌텐도를 찾아갔다고 전해진다.

그 가능성이란 게임이라는 매체가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경험을 주체한다는 가능성이었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서사 전개성과는 차별된 방식이었다.

이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분신" 이라는 게임의 서사전개 방식은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 철학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고, 이토이 시게사토가 집중한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관객이 텍스트 바깥의 존재임을 관객들 자신들도 인지하는 것처럼, 게임 역시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타자"라는 지극히 당연한 한계도 드러나는데, 이 두가지 특성은 MOTHER 시리즈의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메타적인 서사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토이 시게사토가 처음 MOTHER의 기획안을 들고 닌텐도로 찾아간 당시에는 기타노 타케시타케시의 도전장아카시야 산마의 산마의 명탐정[13]등. 유명인의 이름만 빌리고 내실없는 게임들이 있었기 때문에,[14] 닌텐도 쪽에서 그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이 시게사토는 닌텐도를 설득하고, 1989년 3월에 APE를 설립한다.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사장은 APE의 사장 자리에 이토이 시게사토를 임명하고 팍스 소프트와 같이 MOTHER를 개발한다. MOTHER를 개발하면서 이토이 시게사토는 도쿄에서 개발 현장인 치바현 이치카와를 수시로 왕래하면서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게임을 완성했다고 한다..

MOTHER 2의 시나리오 방향성은 MOTHER의 개발중에 조금씩 구상하고 있었으며, MOTHER가 완성된 가운데에도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 후속작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를 쌓았다. 그 후 MOTHER를 공동개발했던 팍스 소프트와 함께 시리즈의 후속작 MOTHER 2를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프로그래밍상의 문제 때문에 축적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별 진척없이 4년이 흘렀다. 그렇게 기획이 무산되기 직전 당시 HAL 연구소이와타 사토루가 프로그래밍에 대한 진단을 했고 그 유명한 "기존 프로그램을 고쳐서 개발하면 2년이 더 걸리지만, 아예 처음부터 개발하면 반년 안에 완성이 가능하다." 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이토이 시게사토는 이 대답을 들었을 당시에 큰 절망감과 동시에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94년, MOTHER 2를 완성한다.

그렇게 MOTHER 2는 이와타 사토루의 프로그래밍 덕분에 1994년 순조롭게 발매할 수 있었고, 팍스 소프트 합작이 아닌, HAL 연구소와 공동개발 작품이 되었다. 이후 12년 동안 후속작이 없다가 2006년에 MOTHER 3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토이 시게사토가 닌텐도에서 MOTHER 시리즈만 만든줄 알지만, 사실 낚시 게임도 만들었다. "이토이 시게사토의 베스 낚시 No.1" 이 그 이름이며, 평소 낚시광이라는 이토이 시게사토의 검수를 받아 만든 낚시 게임이라고 하는데, 무려 후속작이 있는 게임이다.

첫번째 작품의 1997년 SFC로 나왔고 이후 "이토이 시게사토의 베스 낚시 No.1 완전판"이 2000년 N64로 나왔다.
파일:external/www.nintendo.co.jp/bass_01.jpg
오징어를 잡은 이토이 시게사토를 볼 수 있다.

별의 커비 슈퍼 디럭스의 개발비화를 담은 인터뷰에서 슈퍼 디럭스라는 타이틀 명명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현재는 게임 업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상태. 2006년 MOTHER3 발매 후 인터뷰에서 시리즈의 후속작은 없다고 못박았고, 다른 게임 제작은 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커리어에서 게임 제작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호보니치주식회사 CEO라는 직책도 있는지라 아마 의지가 있어도, 직접 제작 전선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게 반응. 그럼에도 닌텐도와는 인터뷰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으며, 2010년 후반에도 MOTHER 시리즈 관련 인터뷰는 지속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8년 12월. 일본의 하드코어 록밴드 맥시멈 더 호르몬의 료쿤과 신일본 프로레슬링 챔피언 케니 오메가. 두 사람과 함께. "상남자들과 함께하는 MOTHER 대담"이라는 WILD MOTHER PARTY를 기획하였다.

2020년부터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이 주관하는 “HOBONICHI MOTHER PROJECT”를 시작했다.


4. 그 외[편집]


영화 상실의 시대에서는 그리스 비극을 가르치는 교수를 연기했다. 전공투 대학생들이 그리스 비극보다 더 중요하게 투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들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강의실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알겠습니다. 그리스 비극보다 더 중요한건 없지만..." 라는 대사를 날린다.

지브리 전속 카피라이터의 인연으로 이웃집 토토로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정작 영화에서는 이렇게 두 번 나온 것밖에 없는데 네이버에서 이토이 시게사토를 검색하면 영화배우로 나온다.

사와다 켄지의 TOKIO를 작사. 이후 사카모토 류이치가 멤버였던 YMO의 노래도 작곡했다.

자신이 제작한 음반도 있다. 앨범 이름은 PENGU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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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 274화에 언급되었다. 긴토키가 우리 만화 카피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 얼굴이 나온 것. 그리고 MOTHER 1의 광고 카피도 패러디한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iVY0FgVEAAc-YZ.jpg
2016년 5월 13일, MOTHER 시리즈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언더테일의 개발자 토비 폭스(사진 왼쪽의 파란 티셔츠를 입은 남성)와 만났다. 토비 폭스 단독으로 만난 것은 아니고, Fangamer[15]에서 이토이 시게사토를 찾아온 것으로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을 취재시켜주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마더 2에서의 기그를 디자인할 때 본인의 트라우마를 모티프로 만든터라 제작하다 운 적도 있다한다. 실수로 들어간 영화관에서 군인과 강간당하는 여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는데 어린 본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 다시 영화를 보았지만, 시간이 흐른지라 애초에 어째서 그 부분에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한다.

2014년 후쿠시마의 피폭량은 적고 음식물도 먹어도 된다는 주장의 책을 내었으며 http://www.donga.com/news/View?gid=67742978&date=20141108 2018년 연구부정행위가 적발된 도쿄대학 하야노 류고 교수를 띄워준 사람으로 일본에서 비판받았다. #

상기한 것들 외에는 호보니치 스토어의 다이어리 시리즈인 호보니치 테쵸(ほぼ日手帳)도 유명한 편이다.

영화 감독 이타미 주조와 절친한 사이였다.


5. 참고[편집]


일어 위키피디아
소비문화론을 자극한 광고 (일본의 광고를 중심으로 7)
지브리 스튜디오 카피라이트


6. 인터뷰 및 읽을거리[편집]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일문)
트위터(일문)
이토이 시게사토의 카피라이트 모음(영문)
인터뷰 : 전후 70년 전환기(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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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의 약자.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2] 일본의 유명한 가수. 당시 무도관에서 공연한 최초의 일본인이라고 한다.[3] 이 한줄짜리 광고 카피라이트의 비용은 1천만엔이었다고 한다.[4] 기모노를 입은 우디앨런 광고페이지의 경우 맛있는 인생 한문을 본인이 직접 썼다고 한다.[5] 우리나라로 치면 인문학 열풍, 웰빙 열풍을 생각하면 비슷하다.[6] 그러나 세이부와 소고가 세븐앤아이홀딩스에 인수되면서 편의점 PB상품도 느는 등 홍보전략도 바뀌는 추세.[7] 일본의 철학자 및 시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이다. 그의 유명한 일화로는 친구도 안 사귀고 틀어박혀 책만 읽는 딸을 걱정하는 타인들에게 "괜찮다. 인간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라고 한 것[8] 또한 이토이 시게사토는 전공투 세대이다.[9] 이후 80년대 소비사회에 대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MOTHER 3의 스토리는 인간과 개발, 소비사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짙다.[10] 이 당시에 이와타 사토루는 HAL 연구소 소속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2000년에 닌텐도 기획실장이었으나... 당시에는 1998년이었다. 인터뷰 원문에 任天堂の社長 , the top of Nintendo 라고 되있는걸 보아 1998년에도 당시 측근들은 이와타가 사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 듯 하다.[11] 그런데 이는 N64 버전 계획에서도 같은 이름이었어서 이 때 공개됐다고 하긴 뭣하다.[12] 국내 정식발간된 제목은 소울메이트.[13] 이 경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소속사에서 자기 소속 연예인들을 게임에 출현시킨 것이라고 한다.[14] 이 게임들은 판매량도 좋지 않았다.[15] 각종 비디오게임의 2차창작 굿즈를 파는 곳으로, 언더테일의 굿즈도 팔고 있다. 사실 Fangamer 자체도 토비가 활동했던 MOTHER 시리즈의 팬사이트인 STARMEN.NET에서 파생되어 나온 사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