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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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width=9%><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fff><bgcolor=#d60026> 권동진 ||<width=9%><bgcolor=#d60026> 권병덕 ||<width=9%><bgcolor=#ba4160> 길선주 ||<width=9%><bgcolor=#ba4160> 김병조 ||<width=9%><bgcolor=#d60026> 김완규 ||<width=9%><bgcolor=#ba4160> 김창준 ||<width=9%><bgcolor=#d60026> 나용환 ||<width=9%><bgcolor=#d60026> 나인협 ||<width=9%><bgcolor=#ba4160> 박동완 ||<width=9%><bgcolor=#ba4160> 박희도(日) ||<width=9%><bgcolor=#ff8c00> 백용성 || ||<bgcolor=#d60026> 박준승 ||<bgcolor=#d60026> 손병희 ||<bgcolor=#ba4160> 신석구 ||<bgcolor=#ba4160> 신홍식 ||<bgcolor=#ba4160> 양전백 ||<bgcolor=#d60026> 양한묵 ||<bgcolor=#d60026> 오세창 ||<bgcolor=#ba4160> 오화영 ||<bgcolor=#ba4160> 유여대 ||<bgcolor=#ba4160> 이갑성 ||<bgcolor=#ba4160> 이명룡 || ||<bgcolor=#ba4160> 이승훈 ||<bgcolor=#d60026> 이종일 ||<bgcolor=#d60026> 이종훈 ||<bgcolor=#ba4160> 이필주 ||<bgcolor=#d60026> 임예환 ||<bgcolor=#ba4160> 정춘수(日) ||<bgcolor=#d60026> 최린(日) ||<bgcolor=#ba4160> 최성모 ||<bgcolor=#ff8c00> 한용운 ||<bgcolor=#d60026> 홍기조 ||<bgcolor=#d60026> 홍병기 || ||<-11> ※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인물은 (日)로 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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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으로써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중 한명. 1962년에 대한민국 건축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이필주는 현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무관심한 성격을 가졌다.
20대(
1890년에 한국군(
대한제국군)에 입대하여 단시일에
장교로 승진하였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동학농민군과 전투했었다.
이후
8년간 근무하다가
1907년에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되자
군생활을 청산후,
상동예베당에
전덕기 목사가 주축으로 있는
삼동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3.1운동계획이 구체화 되던 1919년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만들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가담하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마지막으로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민족 대표들과의 회담자리에서 3.1독립운동 계획을 검토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석. 독립선언서를 서명및 읽고 만세삼창을 외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3.1만세운동으로 출동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2년 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이후 종교활동을 벌여 포교를 하며 육영사업등 힘썼으며, 말년에 일제가 신사참배를 하라 강요를 하였는데 이때 거부하여 일제에 대한 신사참배를 항거하였다.
이후에 이러안 활동후 1942년 항년 74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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