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독립운동가)

덤프버전 : r



1. 부여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漢龜
2.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韓久


1. 부여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漢龜[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한구
李漢龜[* 李漢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출생
1870년 10월 10일
충청도 임천군 서변면 발산리
(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
사망
1935년 5월 14일 (향년 64세)
충청남도 부여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7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이한구(李漢龜)는 1870년 10월 10일 충청도 임천군 서변면 발산리(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5월 17일 민종식의 홍주군 의병진에 가담하여 선봉장 박영두(朴永斗)와 함께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소모장 이사성(李思聖)과 같이 임천군·한산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군에 도착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23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유배형 10년형을 선고받고 유배되었다.

이후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5년 5월 14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2.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韓久[편집]



초명
이경구(李暻久)

한유(漢有, 韓有) 또는 경일(景日)

지포(芝圃) 또는 신성재(新省齋)
본관
여주 이씨[1]
출생
1870년 9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2]
사망
1907년 9월 11일[3] (향년 36세)
경상북도 청하군 죽남면 입암리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묘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현내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독립유공자 이순구는 그의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이훈구는 그의 4촌 형이다.[4]

이한구(李韓久)는 1870년 9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서 이언적의 11대손인 아버지 이능종(李能種, 1851 ~ 1890. 5. 6)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 이후 경주부 죽장면 지동리(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지동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분강개하여 의병대장 정용기(鄭鏞基)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여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청하군 북면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동생 이순구정진한(鄭鎭漢)·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정용기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그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어 이후 모든 일을 계획, 지도했다.

그후 정용기 의병장이 흥해군 신광면(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자 자신의 휘하 의병들을 인솔하고 청송군 부동면(현 청송군 주왕산면) 주왕산으로 들어가 활약했다. 그러던 중 좌영장(左領將) 이경구(李景久)가 흥해군 서부면 약곡(藥谷)[6]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패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휘하 의병진을 이끌고 약곡으로 나아가 이경구를 격려하였다.

이어서 그는 청하군을 습격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의병진을 인솔하여 청하군 현내면(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를 거쳐 진격하던 중 돌연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고, 이를 맞아 의병들을 독려하며 격전을 펼쳐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군에 북진(北陣)이 격파당했고, 신돌석이 이를 추격하였으나 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이한구는 의병들에게 정용기는 체포되었고 신돌석은 패전했음을 들어 일본군에 대해 우리 의병이 중과부적임을 잘 알게 하고 훗일을 도모하자는 기약을 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1907년 석방되어 재기를 도모하고 있던 정용기와 더불어 재차 의병을 일으켜 청송군 현북면 신성리(薪城里)[* 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로 진영을 옮기던 중 밤중에 일본군이 잠입하여 파수병을 사살하고 의병진으로 돌진하니 적들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영천군(현 영천시) 자양면에서 벌어진 자양(紫陽) 전투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분파소장(分派所長)을 생포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9월 11일 강원도로 북진하던 도중 청하군 죽남면 입암리에서 일본군을 맞아 교전 끝에 정용기·손영각·권규섭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2-16 23:41:26에 나무위키 이한구(독립운동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여강경주파(驪江慶州派)-무첨당파(無忝堂派) 23세 ◯구(久) 秉(병)◯ ◯燁(엽) ◯榮(영) 時(시)◯ 항렬.[2]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3] 여주(여강)이씨족보 권1 663쪽에는 9월 1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이훈구의 아버지 이능경(李能璟, 1848 ~ 1889. 12. 18)은 본래 이한구의 아버지 이능종의 셋째 형이었지만, 11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재효(李在斆, 1804 ~ 1835. 9. 26)에 입양되었으므로 족보상으론 이훈구는 이한구에게 14촌 지간의 족형(族兄)이 된다.[5] 아버지 이능종에게는 창녕 성씨 성도영(成道永)의 딸과 경주 손씨(? ~ 1920. 10. 31) 손찬호(孫瓚浩)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한구가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6]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약성리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