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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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대 총장 목록
2.2. 제4대 룰루 프라이
2.3. 제5대 자네트 월터
2.4. 제6대 앨리스 아펜젤러
2.5. 제7대 김활란[1]
2.6. 제8대 김옥길
2.7. 제11대 장상
2.8. 제12대 신인령
2.9. 제13대 이배용
2.11. 제15대 최경희
2.12. 제16대 김혜숙
2.13. 제17대 김은미



1. 개요[편집]


이화여자대학교의 역대 총장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역대 총장 목록[편집]


파일:이화여자대학교 심볼.svg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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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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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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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네트 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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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아펜젤러
김활란
김옥길
정의숙
윤후정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장상
신인령
이배용
김선욱
최경희
제16대
제17대

김혜숙
김은미




모두 여성[2]이며, 메리 스크랜튼, 장상, 이배용 총장을 제외하면 다 미혼이다. 또한, 한국인 총장들은 모두 이화여자대학교 전신 학교(이화학당,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졸업자 중 하나다.


2.1. 초대 메리 스크랜튼[편집]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로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조선으로 건너온 미국인 선교사[3] 중 1명으로, 종교는 개신교 중 북감리교 계열이다.

조선 말기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은 것을 보고 여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 서울 중구 정동에 학당을 설립했다. 단 1명의 여학생으로 학당을 시작,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운영하였다. 이화여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 학교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분의 이름을 딴 "스크랜튼 대학"이라는 단과대학도 있다.

한편 이화학당뿐 아니라 1902년에는 경기도 수원삼일소학당이라는 여학교도 세웠다.


2.2. 제4대 룰루 프라이[편집]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설치, 여성에게도 대학교육의 길을 열었다. 유관순 열사 재학 당시 교장이기도 하며,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2.3. 제5대 자네트 월터[편집]


체육 수업을 시작했다.[4] 당시 학생들이 입던 한복 치마에 어깨끈(어깨허리)을 달아, 가슴을 숨막히게 조이지 않으면서도 활동하기 편리하도록 개량했다.


2.4. 제6대 앨리스 아펜젤러[편집]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딸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가 유창했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이화여전을 정동에서 신촌으로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2.5. 제7대 김활란[5][편집]


이화학당 고등과와 대학과를 졸업했고, 모교 교사가 되어 교장까지 되었다. 이화 최초의 한국인 교장(총장).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의 이유로 여러 방면에서 까이고 까이는 총장.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학교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도 있지만 그녀가 한 일은 다음과 같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조선부인연구회, 방송선전협의회, 애국금차회에 참여했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언론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을 통해 강연하며, 《동양지광》, 《조광》에 대한 기고로 일본의 전쟁 지원을 선동하는 친일 및 전쟁지원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일본의 한민족 말살정책인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고, 징병을 권유하는 강연에도 앞장섰다는 것이 그녀의 과오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연희전문학교윤치호 교장과 비슷한데 더 비판받는 듯.[6]

여기에서 공적을 살펴보면, 이화여대를 엄청나게 크게 키우고, 캠퍼스를 확장하고, 해방 이후 최초로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냈으니, 총장 역할에 굉장히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머리가 상당히 좋았다고 하며[7] 여권향상 부분에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의원 총선에서 낙선한 뒤로 민중들의 여권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YWCA 활동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실로 여권운동 향상 부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학교의 여학생들의 정신대 지원을 독려한 사람이 무슨 여권향상 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대생들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동상 철거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대학 대부분이 양지바른 터에 자랑스럽게 친일파 동상을 세워두고 있지만, 실질적인 철거운동을 하는 곳은 이대가 유일하다는 후문.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든 교회가 바로 금란교회(金蘭敎會)이다.


2.6. 제8대 김옥길[편집]


김동길연세대 교수의 친누나.[8] 최규하 대통령 시절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2.7. 제11대 장상[편집]


본교 수학과 출신이나, 졸업 후 연세대 신학과로 편입하였고 기독교학 교수이다. 왕년 철의 여인. '총장은 기독교인 비혼 여성이어야 한다'라는 룰을 깨트린 인물. 정치계로 나가 있다. 학교에 있을 때는 운동권마저 (나쁜 뜻이라도) 철의 여인이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이재오에게 발리며 빵상(…)이란 별명까지 붙는 등 눈물과 수모의 정치생명사를 쓰고 있다.


2.8. 제12대 신인령[편집]


이화여대의 그 유명한 금혼 학칙을 없앤 인물. 법대 출신이며, 로스쿨 유치에 힘 좀 썼다. 노동법을 전공한 희귀한 여성 법학자였으며, 그와 별개로 학창 시절엔 '내가 서울시내 경찰서 중 안 들어간 곳이 없다' '내가 숨어지냈을 때' 등등의 자랑을 하곤 한다. 후자는 지명수배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파쇼적인 면을 보여주었을 당시 사람들의 절망은 더욱 컸다.


2.9. 제13대 이배용[편집]


2010년 8월까지 총장직을 역임하였다. 인문대학 사학과 출신이다. 총장 임명 전에 역사스페셜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다. 장상 총장과 함께 유이한 기혼이다.

이분 이후로 총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기존 총장은 학생과 거리가 먼 사무적인 총장이었다면, 이 분은 학교 이미지를 대표하고 학생들과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총장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문자가 오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화인 여러분♥개강을 축하합니다. 신종플루도 조심하길 바래요. 화이팅!" 같은. 하지만 보낸 사람은 총장비서실 소관이라는 소문이 있음.) 학생들 사이에서 배드래곤(Dragon)이라고 불리는 모양.

다만 등록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2년이나 동결했는데 이 정도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거 아님?"이란 말을 하여 '우리나라 등록금 정도면 조낸 싼 거라능'이란 말을 한 이기수 고려대학교 총장과 함께 까이고 있다. 핑크색, 옥색 등 현란한 색깔의 정장을 입고 채플에 등장하는데, 옆에는 항상 총장님의 자그마한 토드백을 드는 비서(가방셔틀)와 함께 나타남 그 때문에 '이핑총(핑크총장)'이라고도 불렸으나, 총장 취임 후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오히려 파란 옷을 많이 입고 학내 행사에 등장하여 '불총(블루총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퇴임 후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과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 역임. 현재는 자주색 의상을 즐기시는 듯. 참고로 행정고시 강사 정원준에게 까인다.


2.10. 제14대 김선욱(1952)[편집]


2014년 8월까지 총장직을 역임하였다. 법대 출신이며, 재학 중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때 총장이 제8대 김옥길 총장이다. 자세한 에피소드는 김옥길 문서 참조.) 제26대 대한민국 법제처 처장(2005-2007)을 역임하였다.

전임 이배용 총장에게서 전체문자스킬을 배웠는지, 가끔 학생 전체에게 문자를 날리곤 했다. 시험기간에 열람실에 예고없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편지와 함께 가벼운 먹을거리를 돌리기도 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 때문에 엄총(엄마총장)으로 불렸을 정도.

전임 이배용 총장이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면,[9] 김선욱 총장은 이화여대의 아웃풋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편이었다. 법대 교수 출신이었던 이력을 보아[10] 총장 직위에 있는 동안 학생들의 고시 및 각종 시험에 대한 지원이 크고 지속적이었다.


2.11. 제15대 최경희[편집]


사범대학 과학교육과를 졸업했고, 사범대 학장을 지냈다. 최초의 이공계 교수 출신 총장이 되었다.

2014년 총학생회 '시너지 이화'가 독선적인 프라임 사업 설립에 대해 반발하자 대동제의 예산을 줄이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대해 학생처에 대동제 예산의 확충을 요구하자, 총장이 직접 흰 봉투에 100만 원을 넣어 교직원의 손으로 남몰래 총학생회장에게 전달했다는 웃지 못할 사연의 주인공. 총학생회가 이를 비판하며 대자보를 붙이자, "순수하지 않은 학생들과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공개면담 약속한 지 이틀 만에 박살내셨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학생복지를 독단적으로 대폭 축소시킨 후, 전교생이 듣는 채플에서 "졸업 후 기부금을 내겠느냐"는 설문조사의 결과에 서운함을 표하며 "어떻게 졸업 후 기부금을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국 대학 10위권 안에도 안 들 수가 있느냐. 졸업하면 꼭 기부금을 내도록 하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총학생회에서 채플 총장 연설을 문제 삼으며 학내 시위를 벌이자, 그 자리에 나타나 학생들을 향해 '쉿, 땡큐~' 라고 하며 유유히 자리를 뜨셨기 때문에 백총, 쉿총, 불통 총장, 멍총 등의 별명을 가졌다. 이화여대 태풍의 눈 수많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학교의 주인은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삐삐 틀렸읍니다.

최경희 총장 임기 중에는 경찰 병력이 대거 학내 진입하여 피켓이나 현수막 등을 들고 평화시위 학생들을 제압한 일이 2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2015년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방문에 대한 시위 때 사복경찰이 학내로 평화시위하는 학생들을 힘으로 제압하여 많은 학생이 부상을 당한 일, 2번째는 2016년 7월 30일 경찰 1,600명 학내진입이다.

이화여대의 수많은 재학생과 졸업생 및 교수들이 이렇게까지 사퇴론을 부르짖게 만든 총장은 없었다. 2016년 10월 정유라 부정입학 관련 논란으로 인해 결국 여론에 견디지 못하고 2016년 10월 19일에 사의를 표명했으며, 정유라의 입학 비리 및 특혜 논란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어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2.12. 제16대 김혜숙[편집]


이화여자대학교 사상 최초 투표제에 의해 선출된 총장이다. 해당 유권자에는 교직원과 재학생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김혜숙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정유라 특혜 논란에 의한 청문회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사건 당시 공권력이 투입되어 학생들이 폭행당한 사실이 언급될 때 눈시울을 붉힌 것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최경희와 극단적으로 대비된 것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혜숙 교수의 높은 인기를 의식한 학교 측이 뜬금없이 정년 문제를 들고 나와 입후보가 불가하다고 하여 재학생들의 반발 심리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학교 구성원의 많은 기대를 얻고 이념과 사상에 의해 선출된 차기 지도자인 것에 비해, 정책을 포함한 행정 능력에 관해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2.13. 제17대 김은미[편집]


2021년 3월부터 임기 시작. 김은미 총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역사상 두 번째로 직선투표로 선출되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모교 교수로 임용된 그는 국제대학원 원장, 국제개발협력연구원 원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총장직과 함께 모교 법인 이사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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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活蘭. '활란'은 Helen이라는 영어 이름을 비슷한 음의 좋은 뜻을 가진 한자를 덧대어 한자어 이름처럼 삼은 것이다. '베델'이 '배설(裵設)'이 되고, '오언(Owen)'을 '오원(吳元)'으로 쓰는 것과 비슷. 영어 이름은 미국 유학 및 해방 후 각종 외교활동에 참여할 때 필요했기 때문에 편의상 지은 것이다.[2] 이는 1886년 설립 이래부터 2013년 12월 30일까지 약 127년간 총장 후보 자격이 여성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던 규정 탓이 크다. # 그러나, 이 규정 폐지가 무색하게 남성 총장 입후보가 가능해진 2014년 총장 선거부터 현재까지 남성은 단 한 명도 총장 선거에 입후보한 적이 없다.[3]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뉴턴 알렌,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클라크, 메리 스크랜튼.[4]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자아이들이 체육을 한다는 것에 대해 반대도 엄청났다고 한다.[5] 金活蘭. '활란'은 Helen이라는 영어 이름을 비슷한 음의 좋은 뜻을 가진 한자를 덧대어 한자어 이름처럼 삼은 것이다. '베델'이 '배설(裵設)'이 되고, '오언(Owen)'을 '오원(吳元)'으로 쓰는 것과 비슷. 영어 이름은 미국 유학 및 해방 후 각종 외교활동에 참여할 때 필요했기 때문에 편의상 지은 것이다.[6] 여권운동가로서의 공적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일제 말기 정신대 모집을 위한 강연에 참석했다는 이야기 등, 그녀 자신이 걸었던 길과는 상반된 일까지 하면서 친일을 했다는 것이 일종의 비웃음을 닮은 질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7] 유관순 열사도 이화학당 재학 시절 김활란 선배를 보고 진짜 대단하다고 평했다 한다.[8] 남매가 모두 독신이다.[9] 이화 커리어 르네상스 인증, 이화 문화기획단, 이화 문화 예술기획아카데미 이런 거 다 이분 작품. 물론 이배용 총장이 직접 기획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방향 제시는 했다고 보여진다.[10] 법대 특성상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최대의 관심사이며 커리큘럼 및 학생지원도 그쪽이 중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