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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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제15대
홍준표[1]

제15대
이회창


제16·17대
맹형규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제17대
홍문표

제18대
이회창


제19-21대
홍문표



대한민국 제26대 국무총리
이회창
李會昌 | Lee Hoi-chang


파일:이회창 공식 사진.jpg

출생
1935년 6월 2일 (88세)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현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 신동아아파트
등록기준지
충청남도 예산군 군내면 예산리[1]
(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56-1)
본관
전주 이씨[2]

경사(徑史)
재임기간
대법관[3]
(유태흥 대법원장 제청 / 전두환 대통령 임명)
(이일규 대법원장 제청 / 노태우 대통령 임명)
1981년 4월 18일 ~ 1986년 4월 17일
1988년 7월 27일 ~ 1989년 10월 24일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88년 7월 27일 ~ 1989년 10월 24일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2월 25일 ~ 1993년 12월 16일
제26대 국무총리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4월 21일
서명
파일:이회창 서명.svg
링크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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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이홍규, 어머니 김사순[1]
형제자매
형 이회정[2]
누나 이회영[3]
남동생 이회성, 이회경
배우자
한인옥
자녀
장남 이정연(1962년생), 장녀 이연희(1964년생), 차남 이수연(1966년생)
손주
이주섭(2008년생)[4]
학력
광주서석국민학교[5]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8기)
병역
대한민국 공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종교
천주교 (세례명: 올라프)[6]
신체
163cm, 65kg, A형[7]
소속 정당
[8]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9], 16, 18
약력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조사국장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대법원 판사
대법관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노태우 정부)
제15대 감사원장 (문민정부)
제26대 국무총리 (문민정부)
제15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신한국당)[10]
제3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제4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제2대 신한국당 총재[11]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한나라당 명예총재
제2대 한나라당 총재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 한나라당)
제3대 한나라당 총재[12]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한나라당)[13]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초대 자유선진당 총재
제18대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 자유선진당)
제2대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별명
회창옹, 대쪽 판사, 보수의 품격
약칭


1. 개요
2. 약력
4. 평가
4.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
4.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 조기석방 및 사면요구
6. 여담
6.1. 이인제와의 관계
8. 저서
9. 선거 이력
10. 소속 정당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26대 국무총리.

법리에 해박하여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명판결을 많이 남겼고, '대쪽 판사'라는 별명으로 법조계에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감사원의 위상을 확립한 인물이다.

국무총리, 대법관, 국회의원,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총재 등을 역임하여, 김종필과 더불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4]

2. 약력[편집]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회창/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Lee_Hoi-chang.jpg


이회창은 현재 민주당 및 범 진보계열에서도 어느정도 인정하는 개혁우파에 가까웠고, 이전의 보수정당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8] 또한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9] 당내 정치인이나 당원에 대한 장악력도 대단해서 첫 대선에 지고도 몇 달 뒤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되었으며, 16대 총선 공천에서 이기택, 김윤환 등 거물급들 여럿을 공천탈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10]

또한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문민정부 초창기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만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리더십과 보수우파 정치계의 영향력 또한 보수우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이회창의 강력한 리더십도 대선에서 두차례 연이어 패배라는 유례없는 엄청난 치명타를 맞고 나서야 무너졌을 정도였다. 이후 정동영, 안철수 등 다른 거물급 대권주자들은 한 차례의 대선 패배 이후 지지도 추락을 겪으며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면모들을 보이고 있음[11]을 고려하면 이회창이 논란을 떠나 보수 정치계에서 얼마나 거물급 정치인인지 실감이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청렴도 또한 대한민국 공직자, 법조인,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남달랐다. 더 놀라운 것은 본인 청렴도 뿐만이 아니라 친인척들의 비리 의혹조차도 다른 법조인, 정치인들과 달리 단 일만큼도 의혹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매우 깨끗했다는 것이다.[12] 친인척 논란에서 나온 의혹제기라곤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 정도였고, 이마저도 위반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괜히 보수우파 지지자들이 이회창을 2번 씩이나 대권주자로 밀어준 게 아닌 셈이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대표적으로 3김 정치의 청산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김영삼을 강하게 비판하고 출당시켰으며 심지어 신한국당 행사에서는 김영삼 인형 화형식까지 열었을 정도였다. #[13] 또한 충청권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종필을 배척하였고, 경선을 불복하고 나선 이인제를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막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 정치 청산 주장으로 JP자민련을 자극했고 이는 DJP연합이 이루어지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결국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게 된다.[14]

이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민주당계 진영이 후단협 등의 잡음을 뒤로 하고 일단 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우파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김영삼과 박근혜는 이회창을 명목상으로는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 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김종필을 비롯해서 이회창으로부터 배척 당했던 김윤환, 이한동[15]과 같은 우파 정치인들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거나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 같은 꼬마민주당 출신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원칙과 정공법을 강조하는 그의 이미지는 3김 정치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주고 지지도의 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반대로 각종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했다.

지금으로 보면 오히려 첫 대선에서 낙선 후 의외의 면이 많은데, 장외 투쟁[16][17]이나 단식[18]과 같은 강대강 노선보다는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과 정부 인사들의 비리에 대해 (비교적) 정공법으로 싸웠다는게 특이점이다.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시키고 옷 로비 사건 특검, 각종 게이트 폭로, 국회 안기부 분실(529호) 폭로, 도청 폭로 등으로 정권과 대결하면서도 영수회담 등을 통해 최소한의 협의는 했다.[19] 또한 재보궐을 통해 다수당이 되어 총리를 두 차례나 낙마 시키며 결국 후임 정부인 노무현 정부부터는 (헌법 상의 규정이 없는 관례였던) 국무총리 서리제를 폐지하고 선 청문회, 선 표결 후 취임하도록 하는 바탕이 되었다. 비록 그의 정치가 기반인 보수정당의 색깔론이나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은 한 세대 뒷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헌법에 보장된 견제 기능을 통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싸우는 전범을 만든 인물에 가까웠다. 부정선거론 등으로 선거로 통해 선출 된 대통령을 부정하는 행보는 일찌감치 없었는데, 대선 직후 김대중 당선인을 이회창이 천주교 미사에 참석해 축하하고 김 당선인 역시 '이회창 후보의 논리가 엄밀해 대선에서 혼이 났다'며 그를 박수로 격려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20] 제6공화국 역사는 물론 이전의 역사에서도 2위를 득표한 패자가 낙선 직후 승자의 자리에 참석해 당선을 축하한 경우는 이 사례가 유일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회창과 7번의 영수회담을 했고, 6번은 합의가 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반면 차떼기[21]총풍사건[22], 아들들의 병역 논란으로 인해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고 97년 추석 때는 내란수괴로 구속수감 중인 전두환과 비밀리에 사면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아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설훈, 김대업은 처벌받았지만[23], 총풍사건과 차떼기와 97년 추석 때 전두환 사면 추진에[24] 대해서와 "이런놈의 나라" 발언 등 다양한 구설과 스캔들이 청렴과 정공법을 고집하던 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며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적인 이미지가 다소 약한, 개혁지향적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25] 김영삼을 대체하는 보수우파 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흔히 말하는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우파 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중도우파 ~ 우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 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적어도 한나라당 등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이나 남북전쟁과 링컨 대통령 암살 이후의 미국 공화당이나 19세기의 영국 보수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거나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개혁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에 손을 내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 때만 하더라도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다.[26] 박근혜가 권위주의 정권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 확장을 위해 민정계, 권위주의 정권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새로운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건실한 보수우파 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 공화계에게 넘어가고 만다.[27] 남은 민주계 인사들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 정부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28]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보수우파 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29] ,박성호, 김대희,[30]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김숙,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31] 등이 있다. 지금은 유명 친민주당 유튜버가 된 김용민이회창을 지지한 전적이 있다. @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올바른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엔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보수 우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연예인은 이순재, 송해, 최불암 정도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 이덕화, 김영철, 이경규[32]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우파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나타나기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33] 이회창의 이미지가 지지를 드러내도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정도로는 좋았다는 뜻이다.[34]

끝으로, 이회창의 말년 경력인 17대 대선 무소속 출마와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의 불완전하게 구성한 선진과 창조의 모임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는 경력이다. 우선 이회창의 영향력이 참여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친 2007년에도 남아있었다는 뜻이며, 강력한 이명박을 위시로 12명의 후보가 난립한 대선에서 개인 브랜드 파워로 무소속 후보로 선거비용을 보전하며 3위를 기록했다는 점도 그렇다.[35] 결국 이명박의 과반 득표를 저지한 것은 이회창인 것이었다. 또한 공중분해된 자유민주연합을 기실은 가장 대극점에 있었던 이회창이 명맥을 이어, 구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 인사까지 포섭하여 중부권 보수야당으로의 지위를 굳히고, 심지어 본인이 정계를 은퇴한 19대 총선까지도 지역구/비례에서 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특기할 점이다.

다만 다른 정당에선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폐지된 총재제를 고수하고, 지역주의에 기대어야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이회창이 한 때 외쳤던 개혁보수의 가치는 퇴색되어 젊은 층의 지지는 없다시피했다. 그저 자민련 시즌2, 국민중심당 리뉴어버전이었다는 평가. 자유선진당의 당론이었던 강소국 연방제조차도 결국 지역할거를 위한 명분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4.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편집]


1997년 15대 대선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통일에 대한 반대의견이 50%를 넘는 여론에 따라 국민이 반대해도 통일을 추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이 통일을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선 현실적이지 못하며 국민들은 당연히 통일을 원한다. 부정적인 견해는 통일이 과연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과 통일 후 우리가 겪어야 할 부담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지 통일의 본질적 의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남북통일 이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지금까지는 단순히 남북대립이나 안보차원에서 미군 주둔이나 철수 문제를 다뤄왔는데 통일 이후엔 미군 주둔의 필요 여부를 정치적 국제관계차원에서 봐야 하며 동북아시아 세력균형과 생각해 봐야한다. 이 지역 강대국인 미중일의 세력균형 속에 중국미군의 주둔을 원할 때가 있다."라고 밝혔다. 1997.10. 한겨레신문 이회창 후보 인터뷰


4.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 조기석방 및 사면요구[편집]


1997년 대선 전, 이회창은 자신이 직접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단 입장을 밝히면서 문민정부 집권 기간동안 TK홀대론으로 흔들리던 TK 민심을 잡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당내 주류파였던 김영삼계 PK를 견제하고 TK 중심의 민정계와 이회창 본인의 충청, 수도권을 중심으로 당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15대 대선은 모든 후보가 전노의 사면을 내밀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나버렸다. 결론적으로는 대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당선인 신분의 김대중이 현직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사면이 이뤄졌다. 낙선한 이회창후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김대중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독재자들을 사면하지 않았다는 책임은 덜고 동시에 화해와 용서라는 이미지를 취한 것이었고, 김영삼은 후임 대통령의 부담은 덜어주는 동시에 TK홀대론을 달래주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36]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파일:Screenshot_20210829-150458_Samsung Internet.jpg

당시 이회창 후보는 추석 전 전두환 사면건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국민공감대 측면엔 소홀 시인 1997.10.11 한겨레


5.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회창/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에겐 '노사모'가 있었더라면 이회창에겐 '창사랑'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이회창의 정치 입문과 동시에 천리안·나우누리 등 포털 사이트에 처음 생겼다. 기사 하지만 지지자 연령대가 다소 높은 탓이었는지 노사모만큼의 활동량은 보이지 못했고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노사모들이 '이회충', 이회창 지지자들을 '회충알'이라고 부르면서 비토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17대 대선에서 정계복귀에는 제법 역할을 했다. 현재 창사랑 공식 홈페이지는 여건상 문을 닫고 다음카페 이회창사랑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2002년 대선 TV광고 1, 2, 3, 4, 5

  • 한나라당 총재를 지내던 2001년,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 주최 행사에 참여해 한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 2002년 대선 당시 시장을 찾아가 친서민 유세를 벌였는데, 한 상인에게 흙 묻은 생오이를 건네받고는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선 '이회창 흙오이 사건' 이라고 유명해졌다.

  • 2002년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5월 15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교사로 강의를 했다. 350여 명의 여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시작을 농담으로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자고 한말이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당에도 많아요. 지방 돌아다녀보면 오빠부대 많아요. (저는) 오빠가 아니라 '늙빠'지. 늙은 오빠….".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그냥 준비해온 강연을 하고 마쳤다.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얼마뒤 새어 나가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알고보니 정병국 의원이 어린 여학생들 눈높이에 맞춘다고 써줬다고 한다. 이회창은 '10대 나이의 오빠부대'를 뜻하는 말로 썼는데, 학생들은 당연히 '과도한 팬질을 하는 여학생'으로 그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빠순이'라는 단어를 전자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정병국과 이회창 뿐일 것이다. 참고로 빠순이는 '술집에 다니는 여자'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런 의미는 정병국 나이대나 알만한 은어이지, 당시 여고생들이 알 단어는 아니기 때문에 여고생들이 이런 의미로 알아 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 지금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이트를 들어갈 때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창 닫기"라는 버튼이 있다. 그런데 당시 대선 정국 때 보수 언론사들의 사이트의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이 버튼의 문구가 "창 한 번만 띄워주기"로 바뀌었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창 닫기"라는 문구로 돌아왔다. 사진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미니홈피에 유세문구 중 하나로 킹왕昌!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킹왕짱은 2007~2008년 전후로 인기 좀 있었던 유행어였다.)게다가 이 무렵엔 각 커뮤니티와 젊은층 사이에서 反MB정서가 만연해 있었는데, 이회창은 이명박에 비하면 당시엔 상대적으로 수구적이고 부패적인 색채가 많이 옅어보였고 대쪽 이미지가 돋보여서 16대 대선에 비하면 젊은층 사이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20대는 물론이고 3040대에서도 꽤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37] 그러나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에 대해 전두환과 직거래를 했던 것과[38][39] 정치지도자로써 대한민국을 "이런놈의 나라"라며 비하하는 망언을 일삼던 것을 생각해보자.[48]

  • 2008년 국회의원 출마 당시 재산신고 때 무려 채무만 120억 원을 신고한 바 있다. 기사 당시 해명에 따르면 이는 대선 공탁금 등을 환급받지 못한 2007년 말 기준이라 그렇고 이후 환급받아 남은 빚은 20억 원 정도였다고. 그 직전인 2007년 대선 출마 당시엔 재산이 43여억 원이었고, 공직자로서 마지막으로 재산 신고, 공개를 했던 2011년 말에는(18대 국회 임기 말엽)에는 약 30억 8천만 원 정도의 재산을 신고했다. 기사 위 해명을 믿는다면, 18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재산이 약 50억 증가한 셈이다.

  •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2002년에는 이효리를 꼽았었다.

  • 2002년 대선 때 모 산부인과 의사가 '이회창 아들처럼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를 지닌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내용의 <179cm 45kg 인간 미이라>라는 책을 출간했다가 공직선거법위반죄로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받은 바 있다.#[49]

  • 롄잔: 대만의 정치인인데, 2등을 여러 번 하는 등 정치적 행보가 이회창과 흡사하다. 문서 참고.

  • 김종필: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 애당초 김종필 쪽이 먼저다. 국무총리 후 정치, 충청권의 지지를 등에 엎은 것 등 이회창이 김종필을 따라갔다.


  • 김수환 추기경과 친분이 있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 기념 축하 미사에 이회창이 참석한 것도 김 추기경의 권유였다. 이회창의 부친 장례미사도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 대선 첫 출마인 97년 당시에는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 이 시절에도 "사회운동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현재의 정치인들보다도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 이회창의 동생인 경제학자 이회성은 2015년 10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의장으로 선출되어 재임중이다. 이는 한국인이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5번째 사례이다.


  • 이회창의 정치경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박근혜를 정치계에 입문시킨 것이다.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입당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이회창의 1인 지배하에 있다면서 2002년 대선 직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는 뒤통수를 친다.


  • 2017년 8월 자신의 신념과 정치경력을 담은 책인 이회창 회고록 나의 삶 나의 신념을 출간했다. 책은 시리즈 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회고록 출간기념 기자간담회를 했다. 영상, 영상2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경기고등학교 졸업생인 점, '재조'법조인[50] 출신인 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는 점, 60대 초반에 총리직을 마치고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 정치 신인 상태에서 당권을 잡았다는 점, TK 출신이 아닌데도 TK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 보수층에 어필할 신중하고 원칙적이며 안정감 있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 다만 이회창은 금수저 출신이나 황교안은 흙수저 출신(피난민 출신)이라는 점, 이회창이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신한국당은 집권여당이었으나 황교안이 정계에 입문한 지금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지지도가 높지 않다는 점, 민정계와 민주계 모두의 지지를 받았던 이회창과 달리 황교안은 뚜렷한 당내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차이점으로 꼽힌다. 기사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으로 이회창은 '원칙과 소신'으로 기존 권위에 도전한 '대쪽 총리'였지만 황교안은 '안정과 순종'으로 기존 권위에 도전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결국 황교안 대표가 2020년 총선에서 180 대 103이라는 보수정당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사퇴하면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워졌다.


  • 한성수 전 대법관이 장인어른, 한대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처남이다.


  • 20대 대선에 대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야 하고, 당선될 후보에게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링크

  • 이름 때문에 이해찬과 헷갈리는 사람도 많다.


6.1. 이인제와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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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4271493020102011.jpg

파일:external/www.ebaekje.co.kr/20220_16805_5432.jpg
둘의 관계는 3개의 짤방으로 요약 가능하다.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는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어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이회창도 마찬가지긴 했다. 적어도 대선 이전까지는 같은 당원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술한 15대 대선의 과정 속에서 둘은 경쟁하게 되었고 네거티브를 퍼붓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위에도 서술했듯 결과는 둘 다 낙선하여 결국 상처만 남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인제는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성공적인 철새테크를 탔고, 5년이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되어 네임밸류를 밀어붙이며 경선 초창기엔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과 리턴매치가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노무현의 영남을 중심으로 강세를 몰아친 노풍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에서 떨어지며 무산되었다. 낙선한 이인제는 탈당하여 자민련으로 갈아타 과거 행적에 대해 거듭 사과한 뒤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다시 5년이 흘러 17대 대선 시즌이 되자 민주당[51]으로 돌아간 이인제는 출마를 선언하며 정식후보가 되어 기호 4번을 부여받았다. 초반에는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무시할 수 없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컸던 포스를 몰아붙이며 충청도의 지지기반을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소수점대로 폭삭 무너졌으며, 이회창은 무소속 후보로서 중도층을 어필하며 15.1%의 득표율로 마감한 반면 이인제는 손써보지 못한 채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탈당하여 무소속 국회의원 자리를 지낸 이인제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이끄는[52][53]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54] 이로서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둘의 사이는 개선되었고 14년 만에 동지로 회복되었다. 어쨌든 이인제로선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회창은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도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시키면서 둘은 새누리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신분을 이어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인제는 정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반면에 이회창은 은퇴하며 평당원으로만 지낸다는 것. 악연과 인연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1997년여당 신한국당에서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대선후보로 달리던 이회창은 2017년에는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으로 옮기고,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 출마를 감행했던 이인제가 자유한국당에서 대권주자로 달리다 경선 탈락했다. 이후에는 둘 다 정계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데, 이회창은 2012년 이후 정계 은퇴를 했고 이인제 역시 2018년 충남도지사 낙선과 2020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경선 탈락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7. 이회창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회창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저서[편집]


  • 2017년- 이회창 회고록 1권
  • 2017년- 이회창 회고록 2권


9.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3,730 (34.52%)
당선 (1번)
초선[55]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9,935,718 (38.74%)
낙선 (2위)

1999
6월 재보궐선거
서울 송파 갑
42,901 (61.47%)
당선 (1위)
초선
[56]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365,359 (38.85%)
당선 (1번)
재선[57]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1,443,297 (46.58%)
낙선 (2위)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무소속
]]

3,559,963 (15.07%)
낙선 (3위)
[58]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예산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49,908 (60.99%)
당선 (1위)
3선


  •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승을 기록하였으나, 그와 대조적으로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패를 기록하였다. 다만 15대 대선16대 대선에서 각각 1.6%, 2.3% 격차로 석패한 것과 17대 대선에서 독자 출마했음에도 득표율 15%를 넘겨 선거비 전액 보전에 성공한 것은 이회창 개인의 지지세도 상당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93 - 1996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6 - 1997
입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07
합당[59]
정계 은퇴[60]

[[무소속|
무소속
]]

2007 - 2008
정계 복귀
17대 대선 출마를 위한 탈당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창당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1 - 2012
합당[61]

[[무소속|
무소속
]]

2012
탈당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복당
정계 은퇴

[[무소속|
무소속
]]

2017
바른정당 합류를 위한 탈당[62][63]

[[바른정당|
파일:바른정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18
입당[64]

[[바른미래당|
파일:바른미래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8
합당[65]

[[무소속|
무소속
]]

2018 - 현재
탈당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1] 본적이 충청도라 충청도 출신 인사로 분류되곤 한다. 실제로 충청도 지역 정당이었던 자유선진당을 창설하여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2] 주부공파 23대손, 시조 41세손 회(會)◯ 항렬.[3] 1981년 당시 대법원 판사, 1988년 재임부터 대법관[4] 국무총리, 국회의원, 대법관으로 행정/입법/사법의 3부는 물론 5부 요인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전서열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다음이다), 문민정부의 첫 감사원장까지 지낸 이회창의 역임직은 전무후무하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감사원장으로서의 이회창은 역사상 한 획을 그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도 제6공화국 최초의 위원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5] 국민학교 졸업 이후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했으나 부친 이홍규청주시로 발령되면서 청주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경기중학교로 전학했다.[6] 49회 졸업생이며 이세중, 이홍구, 김덕중이 동기생이다.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 형 이회정, 동생 이회성(60회) 모두 경기고 졸업생이다.[7] 송파구 갑 국회의원이였던 홍준표가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고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송파구 갑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8] 엄숙한건 나도 싫어' / 이후보 `원고없는 연설'.거리시민에 친근감 유도[9] 당시 김영삼 정부의 경제위기 실책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폭락했음에도 고작 1.6%p, 2.3%p 차이로 졌다.[10] 이기택과 김윤환은 당시 한나라당 양대 계파의 거물이라 불리울 정도로 상당히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11] 안철수는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를 시도했지만 단일화 과정에서 오세훈에게 밀렸고, 홍준표박근혜 탄핵 상황에서 치뤄진 19대 대선에서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패배했고, 이후 당 대표를 하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으로 당내에서 쫓겨나듯이 떠나 무소속으로 21대 총선에 나와야만 했다. 이후 20대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20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전했으나 당심에서 외면받으며 윤석열에게 후보 자리를 내 줘야 했다. 비록 여론조사상에서 앞섰음에도 당 내 영향력에서 윤석열에게 밀린 것이 패인이었다.[12] 이회창의 부인의 10억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자금지출명세서는 폭로자들이 위조한 문서이다. 당연히 이들은 허위사실 유포죄로 처벌된다.[13] 이는 정치적 자살 행위 수준인데, 아무리 그 당시 김영삼이 IMF 유탄을 맞고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고 해도 PK라는 지역 기반과 상도동계로 대표되는 당내의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여당 후보가 대통령의 지지층을 버리고 성공한 경우는 없다.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도 수도권에서는 "나는 지방에 있어서 박근혜 탄핵과 관련 없다."라고 했지만, 대경권에서 "박근혜가 안타깝다." 등의 발언을 하며 친박을 내치지는 않았다. 그 결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대형 악재와 안철수유승민으로 보수표가 흩어져 자유한국당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2위라는 결과를 거두며 최소한의 성과를 챙기는 데에는 성공했다.[14]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0만 표 차로 이회창을 이겼는데, 여기에는 DJP연합으로 인한 충청권에서의 우세와 이인제가 500만 표를 들고 나간 것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이회창을 이기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15] 단독 출마를 한다.[16] 98년 의원 빼가기 반발과 2000년 의약분업 강행처리(날치기) 국면 등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강행처리 과정에선 국회 몸싸움도 벌어졌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회창이 장외 투쟁에 있어서 오히려 온건파에 속하여, 장외투쟁을 계속하자는 강경파들을 통제하는 역할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0년 장외 투쟁의 경우 16대 총선에서 1당은 유지했으나 과반을 얻지 못한 한나라당에서 낙선자를 중심으로 '4.13 부정선거' 조사(...) 주장이 횡횡했는데, 이걸 영수회담을 끝으로 접은 쪽은 여하간 이회창이었다. 장외투쟁을 정국 주도권, 영수회담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 수준. - 이를 위해 깜짝 쇼를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회고록에 따르면 98년 10월 8일까지 정권 퇴진을 외치다가 10월 9일 전격 등원 선언을 한 경우가 있다. 당내 강경파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으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여당인 국민회의와 야당 강경파에겐 일절 언질이 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는 반응도 나왔다. '제왕적 리더십'의 일장일단인 셈.[17] 재미있는 건 2000년 당시의 박근혜 부총재인데, 장외투쟁은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집회 참여를 포함해 장외투쟁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당 전체를 장악한 '여의도 대통령' 같지만 동시에 대 정권 강경파, 온건파에게 묘하게 어중간하다는 반응을 받는 것이 이회창 리더십의 특징이었다. 강경하면 삼김 보스정치의 부활이라고 비판받고, 온건하면 삼김보다 약한 지도자라는 평을 받기 딱 좋은 과도기의 인물이었다는 난점도 있었다.[18] 의외로 정치 생활 중 단식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98년 당시 정당의 제2주주 격이었던 이기택의 단식은 만류하는 입장이었고, 대선 낙선 후 대표가 된 최병렬은 여지 없이 단식을 해 이미지를 깎아 먹었다.) 후일 정계 은퇴 후에는 탈북자 북송반대 문제로 일일 단식한 바 있다.[19] 역설적으로 이회창의 보수 야당이 정치 사찰에 반발하면서 군부 시대부터 내려 온 관행적 안기부-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새삼 개선된 것이다.[20] 엄밀히는 김수환 추기경의 작품으로, 이회창도 처음엔 내키지 않았으나 김 추기경의 설득에 참석했으며 김대중 당시 당선인도 나름의 예우를 해준 셈이다.[21] 이회창을 위시한 한나라당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 자금을 차량 째로 받은 것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노무현 측도 불법자금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차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불법자금 비율은 약 1:8에 달할 정도였다.[22]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에다 무력 시위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낸 게 드러난 사건.[23] 보론하자면 이회창의 장남의 경우 전혀 검증이나 검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남의 경우 몸무게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신장 조사만 이루어졌고 본인 여부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결은 정확히 설훈과 김대업의 사칭과 허위성 판결이고 재판시 허위 판결은 실체적 진실 판결이라기보다는 위법성 인식에 관한 허위성 판결이다. 다만 병역면제 당시가 아니라 현재의 몸무게를 공개하라는 당시 반대측의 의견도 검증과는 동떨어진 측면은 있었다.[24] 당시 전노사면은 원론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9월 1일, 신한국당 이회창 전 대표가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추석전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조기 석방을 요구하여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비화되었던 것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 요구[25] 지역 기반으로 보자면 TK와 PK 모두 해당한다. 권위주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분은 지역기반이 아니므로 TK, PK 구분과 연계시켜 분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26] 김대중과 박근혜는 과거가 껄끄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사이가 어느 정도 화목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와 사이가 안 좋던 동교동계 상당수(김경재, 한광옥, 한화갑 등)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정도였다.[27] 두번째 대선 패배 이후, 즉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의 대표가 순서대로 최병렬 - 박근혜 - 강재섭이다. MB는 이런 당 내의 열세를 민선 3기 서울시정의 성과를 통한 당 바깥의 일반 시민의 지지로써 대선 경선 여론조사에서 뒤집은 것이다.[28] 이명박 또한 민정계와 공화계에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삼재, 김덕룡 등 일부는 나중에 아예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다.[29] 다만 강성범을 비롯한 일부 개그맨들은 소속사 관계자의 강권 혹은 압박에 의해 참석했다고 말한다. 강성범은 이를 계기로 소속사와 갈등이 생겨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다수의 팟캐스트에서 주장했다. 강성범은 2022년 기준 현재에는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30] 심현섭이 주도한 이 흐름에 김철호·이병진·황승환·이태식·김숙·김미진 등이 참석했다. #[31] 물론 베이비복스는 항목에서도 보듯이 소속사 DR뮤직에 의해 억지로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32] 다만 이경규는 보수 성향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는데, 그가 실제로 이명박을 지지한 전적은 있지만, 막상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을 꼽은 바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MBC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 출연한 영향도 있는 듯 하다. 비슷한 이유로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한 적이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경실이 존경하기도 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이전만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심상정 같은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 당선을 축하한다며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였을 만큼 보수 성향을 딱히 드러내지 않았으므로(시니컬하게 말하면, 중도 코스프레를 꽤나 꼼꼼하게 했다.), 당시에는 그를 지지했다고 무작정 보수 성향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33] 상술한 연예인들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 연예계 원로들이다. 민주당 성향인 강성범, 보수정당 성향인 최국김영민 등도 1970/80년대 초반 생들로, 정치 유튜버가 되기 전에 이미 지상파 개그맨으로 명성을 많이 쌓아놨다. 1980/90년대 태생으로 갈수록 연예인(예능인, 배우, 가수 등)이 정치적 소신을 분명하게 밝히면 상대편 진영 커뮤니티에서 심하게 매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밝히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풍토에 있다.[34]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정치 중립화시켜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전직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과는 차별화를 시도했던 것이다.[35] 덕분에 이회창은 직선제 개헌 이후 대선에서 역대 최다득표를 한 무소속 후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36] 당시 전노사면은 원론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9월 1일, 신한국당 이회창 전 대표가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조기석방을 요구하여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비화되었던 것이다.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 요구[37] 아이러니한 것은 60대 이상에서 가장 적은 지지율을 보였다.[38] 단 이때는 이인제, 김대중, 이회창 라인업의 유력 대선 후보 모두가 전두환의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었고 맨처음에 전두환 사면을 정부에 건의한 것은 신한국당의 김윤환 등 민정계인사들이 신한국당 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며 TK 정체세력들의 공약인 전두환 사면을 이회창에게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39]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40] 사정 강경기류에 여야 긴장, 상호 비난 1998 mbc뉴스데스크[41] 경향신문 1998.9.7[42] 이 총재, 이런놈의 나라 대변인끼리 설전 한겨레신문 1998[43] 경향신문 1998.9.7[44] 이회창 죽을 각오로 싸운다 한나라당 대응 1998.9 경향신문[45] 한나라 의총 반격 1998.9 동아일보[46] 이회창후보 말-말-말 2002.6. 세계일보[47] 엄숙한건 나도 싫어' / 이후보 `원고없는 연설'.거리시민에 친근감 유도[48] 1998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 빼가고 정치 사정해서 국회의원 잡아갈 생각이나 하고, "이런 놈의 나라"가 이런 놈의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라 발언하며 김대중 정권과 국가를 맹비난했다.[40][41] 그러자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대변인은 "이회창 총재가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을 이런놈의 나라라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정치지도자로써 해서는 안될 망언"이라며 강력 비판했다.[42][43][44][45]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또다시 김대중 정권을 비난하며 "이런놈의 나라"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빚었다.[46][47][49] 참고로 의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이회창의 아들의 검사 기록이 BMI 환산값으로 14 정도인데, 2008년 병역검사에서 BMI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어(당해에는 17미만이 4급 기준, 2009년에 16으로 바뀜) 당해 검사대상자들 이외에 기존의 판정받은 미필자들의 재검이 허용되면서 상당한 검사자들이 나왔고, 병무청 검사자료상 BMI 14~15, 즉 키가 180 근처인데 몸무게가 50kg 미만인 사람들이 의외로 한국에도 꽤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회창의 아들과 똑같은 키와 몸무게를 가진 검사자들도 발견되었다.[50] 판사+검사.[51] 당시에는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뒤로 주요인사가 전부 빠져나가 지리멸렬해진 상태였다.[52] 입당한 2011년 당시에는 이회창은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난 상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53] 자유선진당국민중심연합과 합당할 때 동시에 합류했다.[54] 참고로 이인제는 자민련과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국민중심당에 잠시 몸담갔던 시절이 있었다.[55] 1997년 11월 사퇴 (대선 출마)[56] 전임자 홍준표 선거법 위반 판결 전 의원직 사퇴.
이회창이 당선된 적이 있는 15대 국회의 보궐선거이므로 국회의원 당선증이 두 장이더라도 의원 선수가 추가로 올라가지 않는다. 유사한 사례로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후 비례대표 사표를 내고 대구 동구 을 재보선에서 당선된 유승민이 있다.
[57] 2002년 11월 사퇴 (대선 출마)[58] 국민중심당과 선거연대.
직선제 개헌 이후 무소속 대선 후보 중 최고 득표율.
[59]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60] 16대 대선 낙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평당원으로 당적만 유지하고 있었다.[61]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62] 1월 25일.[63] 유승민 지지를 위한 입당이며 정계 복귀를 한 것은 아니다.[64] 유승민 대통령 후보 지지.[65]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