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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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렬[1]
李興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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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9년 7월 17일
함경남도 원산시
사망
1980년 11월 17일 (향년 71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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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본관
여주 이씨 (驪州 李氏)
학력
보광중학교 (졸업)
도요음악학교 (학사)
직업
작곡가, 교사, 교수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3.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음악가이자 작곡가.


2. 생애[편집]


1909년 7월 17일 함경남도 원산부(現 강원도 원산시)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서양 음악에 심취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원산부에서 미션스쿨인 보광중학교(保光中學校)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응시해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면접시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지원했다"고 대답해 낙방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해 토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2] 피아노 전공에 입학해 1931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고향인 원산의 광명보통학교, 경성보육학교, 배재학교, 경신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1933년 피아노 3중주단을 조직했고, 1936년에는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창단해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뛰어들었다. 1937년에는 성서(城西)피아노3중주단, 1938년에는 아폴로합창단을 차례로 조직해 활동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했고, 이듬해인 1946년에는 대한교육음악협회를 창설해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쓰일 음악 교과서를 제작했다. 1953년에는 한국작곡협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한국방송가요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경성음악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했다.

1980년 11월 17일 오후 5시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3-103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2005년 홍난파, 현제명 등과 함께 친일 행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갔다.


3. 작품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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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명은 나오키 쿄네츠(直木興烈).[2] 현재는 도쿄음악대학[A] 세 학교의 뿌리가 같아서 교가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