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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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centered therapy / client-centered therapy / Rogerian therapy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 영화 《굿 윌 헌팅》中

영화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 중 하나로, 인간 중심 치료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국의 수많은 대학교들의 심리학 개론 시간마다 주야장천 틀어준다

"우리가 사람(내담자)들에게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석양이 지는 것처럼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나는 석양이 지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하늘에 펼쳐질 때 경외심을 갖고 바라볼 뿐."

- 칼 로저스(C.R.Rogers), 임상심리학자


1. 설명
2. 상세
2.1. 일치와 불일치
2.2. 긍정적 성장과 자기실현
2.3.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2.4. 공감적인 이해
3. 남은 이야기



1. 설명[편집]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고안한 상담치료 방법 중 하나로, 인본주의 접근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후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계층이론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자체로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 인간 중심 치료는 인본주의 상담이론에 근거하는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상담이론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상담 장면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신분석 치료가 아니면 바로 이 인간 중심 치료이다.

인간 중심 치료는 사실 본 문서에 이론화하여 적어놓기가 쉽지 않다. 이유인즉슨 로저스 이 양반이 학자라기보다는 천상 상담가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인간 중심 치료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사실, 이는 이 치료법에 대한 설명이 상담 현장의 감각과 테크닉, 노하우에 가깝기 때문이며, 그래서 엄밀한 이론적 입증이나 논리의 연쇄, 주장에 따르는 경험적 근거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이 지긋하신 만렙 상담가가 후배 상담가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준다는 느낌으로 공부하면 될 듯.(…)

그럼에도 인간 중심 치료의 특징을 적어놓는 것은 가능하다. 여타 상담들이 내담자를 치료하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1] 인간 중심 치료는 상담자가 함부로 개입하려 하지 않고 내담자에게 가급적 손대지 않는 비지시적 면접(non-directive interview) 방법을 취한다. 게다가 독특하게도, 이 치료법은 인간의 병약한 부분이나 병리적 소견을 보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긍정적 발전 가능성을 바라본다. 궁극적으로 이 치료법의 목표는, 한 개인을 성장시키고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을 이루게 하여, 마침내 온전히 기능하는 개인(fully-functioning person)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중심 치료의 기본 대전제를 임의로 꼽아보자면 몇 가지가 있다.
  • 인간은 자신만의 주관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바라본다.
  • 인간은 자신을 승인해 주고 수용해 줄 대상을 찾는다.
  • 인간은 긍정적인 성장을 하려는 천성적 동기를 갖고 있다.

대략 이 정도쯤 될 듯. 일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대전제로서 리비도와 고착(fixation), 무의식 등을 언급한 적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인간관 자체를 바꾸기도 했지만,[2] 아무래도 로저스의 관점은 그 정도 경지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저스의 인간관이 무가치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본주의적 접근법은 세월이 흘러 마침내 긍정심리학으로 계승되었고,[3]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야 '인간의 긍정적 성장'이라는 아이디어가 비로소 학계에 쩌렁쩌렁 메아리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로저스는 자기 학문분야의 먼 미래를 기가 막히게 내다본 셈이다.

인간 중심 치료의 분위기는 정신분석 치료와는 사뭇 다르며 좋은 비교가 된다. 정신분석 치료에서 상담가는 내담자가 보기에 철저한 신비주의를 고수해야 하며,[4] 일체 자신의 개인적인 사실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 즉, 자기공개(self-disclosure)는 금기시된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이라는 가장 아픈 치부를 건드려야 하므로, 종종 치료 장면은 내담자의 역린을 열심히 건드리는 상담가와 그것에 반발하는 내담자의 저항으로 매우 격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곤 한다. 반면, 인간 중심 치료에서 상담자는 진솔성(authenticity) 있는 모습으로, 인간 대 인간의 입장에서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리액션도 커야 하고, 감정의 표출도 강해야 한다.[5] 특히 이는 자긍심이 낮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비행청소년이나 사회 부적응 문제에 효과가 있다.[6] 물론 어떤 치료법이 가장 좋을지는 상황을 봐서 상담가가 알아서 정한다.

인간 중심 치료는 이후 표현적 예술치료 및 동기화면접법 등의 다양한 심리치료/상담기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상세[편집]


많은 후학들과 상담가들이 있는 힘을 다해(…) 로저스의 잡다한 어록들과 임상 사례들을 연구한 끝에 겨우 정리한 바는 대략 다음과 같다. 다소 두서없어 보이거나 체계적이지 못하게 보일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중적으로 "아하, 이런 식으로 지지해주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상담기법이 심리학의 알파요 오메가구나!" 와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심리학? 그런 주관적인 상담 테크닉도 자칭 과학이라고?" 와 같은 안타까운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하에는 약간 비판적인 시선에서 보는 듯이 서술되어 있지만, 이는 해당 치료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그 장점이 다소간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상담가가 환자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모습이 이 치료법이 등장하기 전에는 생경한 것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는 막대하다.


2.1. 일치와 불일치[편집]


로저스는 자기(self)에 대해서 그 나름의 설명을 시도했는데,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서 느낀 주관적 경험의 축적된 구조라고 보았다. 그는 이상적 자기(ideal self)와 현실적 자기(real self)의 불일치 상태[7]가 불안을 초래하며, 개인은 이를 극복하고 일치(congruence)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게 된다고 보았다.

로저스는 일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건강하다(healthy)고 보았고, 자기에 대한 개념과 정보, 의식을 모르거나 무시함으로써 불일치 상황을 내버려두게 되어 심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을 신경증적(neurotic)이라고 보았다.


2.2. 긍정적 성장과 자기실현[편집]


반대로, 인간 중심 치료에서 매우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것이 바로 내담자의 긍정적 성장의 잠재성이다. 인간 중심 치료는 모든 인간은 천성적으로 긍정적 성장을 하고자 한다는 동기를 갖는다고 전제했는데, 사실 이 점이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그렇다고 네가 어떻게 알아? 입증할 수 있어?" 라고 질문이 들어왔을 때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 게다가 긍정적 성장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도 있다.

자기실현[8]에 대해서 로저스는 "현실적 자기를 이상적 자기로 끌어올리는 과정" 쯤으로 이해했고, 그 사례로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토머스 제퍼슨 같은 위인들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있어 왔는데, 자기실현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았다는 반론,[9] 그리고 위인들을 사례로 거론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반론이다.[10] 자기실현의 완성으로 로저스는 온전히 기능하는 개인을 들기도 했는데, 마치 이는 동양의 "군자"(君子)와도 유사한, 이상적 인간상을 그리는 것일 수 있다.


2.3.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편집]


인간 중심 치료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게 된 가장 가능성 높은 이유. 인간 중심 치료에서는 비난하거나, 지적하거나, 비판하거나, 비꼬거나, 교정하거나, 판단하는 등의 반응이 엄격히 금지된다. 대신 상담가는 깊고 진솔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을 보일 필요가 있다. 괜찮아 부둥부둥 단,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긍정적 존중의 대상은 반드시 내담자의 정서적 상태에 한정되어야 하며, 내담자의 행동이나 발언 자체를 무조건 긍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로저스는 긍정적 존중을 통해서 내담자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치료에 성공할 거라고 여겼다. 다른 치료법들이 "이런 문제가 있어요" 라고 내원했을 때 "치료해 드릴게요" 로 반응하는 반면, 인간 중심 치료는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로 반응했더니 "우와, 이 문제를 해결할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로 화답하게 될 거라는 얘기다. 그래서 인간 중심 치료를 시행하는 상담가는 "그럴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상심하지 마세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예요" 와 같은 따뜻한 표현들로 반응하며, 필요하다면 자신의 비슷한 경험이나 일화를 끌어내어 내담자와 공유할 수 있다.[11] 왜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다


2.4. 공감적인 이해[편집]


상담가는 내담자의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하며 그것을 무제한적으로 수용한다. 로저스에 의하면, 이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자기개념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상담자가 자신의 리액션을 통해 거울처럼 비추어 주는 것이다. 즉, 상담자는 공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지금 당신이 느끼는 당신의 정서적 경험을 제가 직접 보여드리죠!" 의 의도를 전달한다는 것, 그러니까 상담자가 내담자의 감정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내담자의 감정을 자기의 감정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12] 로저스는 위에서 별로 강조되진 않은 것 같지만 개인의 주관적 느낌과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남은 이야기[편집]


1966년MIT의 요제프 바이첸바움이라는 컴퓨터 전문가가 한때 이 인간 중심 치료에 감명을 받아 "엘리자"(ELIZA)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는 사용자가 입력한 문장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존중을 보이는 무인 상담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컴퓨터의 '공감'은 위화감이 클 수밖에 없었고,[13] 근원적으로 '기계와의 유대감'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면서 조용히 묻혔다.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던 것. 일라이자 효과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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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행동주의 치료가 가장 심하다.[2] 그래서 흔히 코페르니쿠스찰스 다윈과 함께 인간관을 바꾼 3대장으로 묶이기도 한다.[3] 연구방법론 자체는 엄연히 다르고, 이보다 훨씬 더 엄밀하고 체계적이며 과학적이다.[4] 일체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한 한 자제해야 한다. 특히 자유연상 도중에는 더욱 그렇다. 내담자가 아무리 기괴하고 추악한 것을 무의식에서 끌어올리더라도 동요해서는 안 된다.[5] 때문에 감정적인 상담사들에게 많이 추천되거나 애용된다. 현실치료정신분석 치료가 특성상 이성적인 상담사들에게 어울리는 것을 감안하면 대조적이라 볼수 있다.[6] 한 전설적인 사례로는, 어느 비행청소년이 상담가와의 약속을 어기고 된통 크게 사고를 친 후 다시 나타나자, 상담가가 펄쩍 뛰어 일어나서 냅다 뺨을 후려갈기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욕설(…)을 퍼부어 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충격요법으로 잘 먹혔는지, 국내 임상심리학계에 굉장히 성공적인 치료 사례가 되었다고. 글로 옮기기는 힘들고 이론화는 더더욱 힘들지만, 상담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라포(rapport)가 둘 사이에 작용했던 것이다. 즉,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 애정을 읽어낸 것이다.[7] 이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불일치 이론(self-discrepancy theory)과도 관계가 있다.[8] 흔히 자아실현이라고도 하는데, 덜 적절한 번역이다. "자아"는 영어로 ego이고, "자기"는 영어로 self에 대응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단어는 다름아닌 self이다.[9] 사실 이것은 매슬로의 욕구계층이론에서 더 심하게 나오는 반론이다. 그나마 로저스는 정의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내리기라도 했지, 매슬로는 자기실현에 대해 별 언급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10] 로저스가 그들에게 무슨 심리검사나 질문지를 돌린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이상적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자기실현의 예시로 드는 것은 자칫 이 개념이 사회적 성공이나 직업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한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11] 심지어 "부모님을 죽이고 싶었어요" 와 같이 명백한 반사회적 발언이라고 해도,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말릴지언정 그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살면서 그런 생각 한 번쯤 해 보는 사람들, 의외로 정말 많아요" 와 같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가능하다.[12] "공감의 'as if'적 속성"이라고 부른다.[13] 오늘날의 소위 심심이 같은 서비스들조차 엘리자에 비해서 크게 기술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