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월 인도네시아 인종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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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karta_riot_14_May_1998.jpg

인도네시아어 - Kerusuhan Mei 1998
영어 - May 1998 riots of Indonesia
중국어 - 黑色五月暴動 혹은 1998年印尼排華事件

1. 개요
2. 상세
3. 사건이 문제가 된 이유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수하르토 정권 시기인 1998년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폭동. 폭동 중에 중국인의 상점에 대한 약탈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나 조직적인 중국인 학살이 일어나진 않았다. 따라서 영어 위키백과 문서의 표제를 포함하여 영어 명칭은 massacre가 아니라 riot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의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의 내용과 많이 달라서 부실한 근거에 기반했다.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는 양도 부실하므로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 영어 위키백과를 참고하자. #


2. 상세[편집]


사건이 일어난 1998년 당시 인도네시아 인구에서 화교의 비율은 5%였지만 주요 대기업의 총수나 관리직에서는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5년 호주 외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1993년 기준 300대 기업 중 68%가 화인 소유였으며 인도네시아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73%가 화인 소유였다.

다른 열대우림지역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는 열대성 질병이 많이 창궐하여 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 증가하기 힘든 곳이었고 땅은 남아도는데 땅을 경작할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랬던 상황에서 중국에서 토지가 없어 고생하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화교가 된 후 부동산을 저렴한 가격에 싹쓸이하고 그 와중에 19세기 콜레라, 황열병, 말라리아 치료법이 보급되면서 인도네시아인 인구가 급증하자 기존에 중국인들이 구입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중국인 입장에서 대박이 터진 것. 이를 바탕으로 자본을 쥔 화교 부유층이 점차 인도네시아의 부유층으로 성장해 왔던 것이다.

소수의 화교가 대부분의 부를 독점했으니 당연히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화교들에 대한 반감이 컸다. 물론 화교라고 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빈곤계층을 차지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인들 입장에선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철저한 동화정책을 거쳐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던 화교들의 정체성이 사실상 인도네시아인으로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인들은 예전부터 화교들을 자신들과 구분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일부 화교가 네덜란드인들을 대신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을 착취해 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1]

화교와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고 수카르노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면서 정권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정작 집권 후에는 중국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하게 실시하면서도 한편으로 화교 자본을 밀접하게 이용해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비록 1980년대에 원자재 값이 떨어져서 당시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좀 침체되기는 했지만 이후 어찌어찌 성장을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은 지속되기는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발전하면서도 속으로는 화교를 중심으로 한 빈부격차의 심화,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의 불만은 쌓여 갔고 결국 이러한 불만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1998년 5월 2일 동부 자카르타의 사범대학 학생들이 수하르토의 부정과 부패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은 이 시위를 공포탄을 쏘며 막으려고 했지만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두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5월 11일에는 자카르타 서부의 트리삭티에서 수하르토 규탄 집회가 열렸는데 원래 트리삭티는 학생들의 시위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곳이지만 트리삭티대학 학생들이 처음 이 지역에서 규탄 집회를 열면서 시위는 점점 확산 일로에 접어들었다. 특히 이때 진압군의 발포로 학생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결국 다음날 12일부터는 자카르타 전역이 통제 불가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시위는 폭동으로 발전하여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상가가 불타고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이때 시위를 주도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전부터 갈등을 겪고 있던 화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2]

본래 수하르토 정권 규탄 시위로 시작된 것이 어느새 화교 상점의 약탈로 변질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변질은 수하르토 정권이 의도한 부분도 큰데 이들은 시위대가 가진 불만의 방향성을 바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사위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중장과 자카르타 수도 경비사령관을 시켜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민심을 호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트렸다는것이 이후에 드러났다. 결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화교와 인도네시아인 사이의 갈등을 수하르토 정권이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화교계가 제대로 휘말린 것이었다.

여하튼 폭동으로 인해 1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강간 신고가 최소 168건이 있었는데 재산 피해는 추정 3조 1천억 루피아(한화 약 2529억 원)로 추정돤다. 오해하기 쉬운 사실인데 사망자의 대부분은 상점을 불지르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죽은 약탈자들 자신이었다. 중국인들의 재산을 노린 폭력은 만연했지만 실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살인 사건은 적었다. 물론 비교적 약한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 중에는 희생자들도 있었다.

이 폭동 당시의 사진이라며 인터넷상에 떠도는 중국인 살해 사진은 잘못된 것이 많다. 학살 사진이라고 떠도는 많은 사진들은 다른 사건 당시 발생한 살인을 찍은 사진이 마치 이때의 사진인 둔갑된 것이다. 이런 잘못된 사진들을 이용한 조작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고 종류도 많다.

인도네시아 화교는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가톨릭개신교로 대거 개종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 중국인 종교로 인식되어 교회나 성당이 불타는 경우도 많았다. 인도네시아인 기독교인도 피해를 입은 건 덤. 지금도 원리주의 성향이 강한 섬들의 경우 기독교인이 학살당하거나 성당이 불타는 등 박해가 극성이며 박해의 제1호 대상은 화교, 그 다음은 기독교인 인도네시아인이다. 그래서 화교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많은 싱가포르 등으로 도망가 버렸고 아직까지 많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1만 명에서 10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한 듯한데 이는 인구의 3–5%다.

사건의 진상 자체는 인도네시아 민주화 이후 밝혀졌고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면서 인도네시아 등지의 많은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와 별개로 상처는 강하게 남아있다.

여담으로 영화 28일 후 초반에 나오는 과학자들이 참고 데이터를 모으는 장면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다.


3. 사건이 문제가 된 이유[편집]


인터넷에선 출처를 알 수 없는 학살 소문이 떠돌아다니지만 실제로는 학살이 아니라 집단강간이 문제가 된 사건이며 중국인에 대한 학살(대량 살인) 은 확인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를 전문으로 다루는 호주 매거진에도

The typical pattern of these riots is of a day-long outburst of violence confined to one town or a region. Usually property damage occurs but not killing...

The aspect that caused the most international outrage were credible reports of widespread rapes against ethnic Chinese women. Yet government ministers in August 1998 began to sound unanimous in their denial that any such rapes had occurred. My analysis of the government's refusal to treat the rapes reports seriously is that the government, which was new and weak because of its close links with the discredited Suharto government, could not afford to alienate its Islamic constituency by speaking out on behalf of an unpopular minority .

This refusal in principle exposes all women of Chinese descent to rape with impunity anywhere in the country. However, it does not mean that abuse of Chinese women is equally likely anywhere in the country. For that, a judgment on local conditions is perhaps as important as the central government's stated policy or lack thereof. In Minahasa, for example, anti-Chinese violence is less likely than in the towns of Java.

Slightly edited version of expert testimony to the Refugee Review Tribunal, Melbourne, 23 September 1999, Gerry van Klinken, editor, 'Inside Indonesia' magazine.

폭동의 전형적인 양상은 하루 동안 한 마을이나 지역에 국한되어 폭발하는 폭력 사태이다. 보통 재산 피해를 입히지만,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국제적인 분노를 유발한 것은 화교계 여성들을 향한 광범위한 강간 관련 보도였다. 그러나 정부는 1998년 8월부터 강간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부인하기 시작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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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학살 문제로 중국인과 별개의 사례를 소개했고 중국인에 대해선 언급이 없으며 강간이 핵심이다.

뉴욕 타임즈 기사의 제목도 다음과 같다.

In Jakarta, Reports Of Numerous Rapes Of Chinese in Riots

By SETH MYDANSJUNE 10, 1998

자카르타서 폭동 속 수많은 화교계의 강간 피해 보고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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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 보고서를 봐도 알 수 있다.

Following the riots, allegations of mass gang-rape of ethnic Chinese women became an international head line news, forcing the Government to establish a fact-finding team to investigate the riots and rapes. The team found that elements of the Indonesia military special forces (Kopassus) had been involved in the riots, some of which were deliberately provoked. The U.N. Human Rights Council visited Indonesia also verified 66 rapes victims who came forward, the majority of whom were Sino-Indonesian, as well as numerous other acts of violence against women

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abor (26 February 1999). "Indonesia Country Report on Human Rights Practices for 1998".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Retrieved 9 June 2011

폭동 이후, 화교계 여성들을 향한 집단 강간 의혹이 전세계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보도되면서 정부는 폭동 및 강간에 대한 진상조사 팀을 구성해야만 했다. (하략)


이 사건은 대량 강간이 문제지 학살(대량살인)이 문제가 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확인된 건 다른 집단에 대한 학살이다. 학살 가해자가 인도네시아인은 맞는데 학살 피해자가 잘못 소개된 것.

다만 위의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강간한 중국인 여성을 불길에 던져 죽인 증언이 확인되기 때문에 강간살해 사건이 존재한 건 사실이다.


4. 기타[편집]


자카르타에 있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근처로 시위대가 접근해 학생들이 위험에 처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정문에서 근무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여기 다니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아니라 한국인들이다"라고 설득해 시위대를 멈춰서 아무런 사건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 잘 넘어가서 그렇지 잘못하다간 한국인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였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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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당시 착취를 통해 부를 쌓은 일부 화교들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에도 여러 세탁과정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주요 부유계층을 형성하였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 행위로 부를 쌓은 이들이 당시에 쌓은 부를 바탕으로 새롭게 회사를 차려 과거를 숨긴 채 부유층을 형성한 것이다.[2]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외지인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부분의 화교들은 상점과 기업을 운영하는 등 자영업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에 시위대들은 화교들의 상점을 많이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