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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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부터 현대까지 가장 인구가 밀집한 자바 섬의 중부 및 동부 지역에는 순서대로 이슬람화 이전 마타람 왕국, 므당 왕국, 카후리판 왕국, 크디리 왕국, 싱하사리 왕국, 마자파힛 제국, 이슬람화 이후 드막 술탄국, 마타람 술탄국, 수라카르타 수난국, 욕야카르타 술탄국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자바 내 주류 지역 중심으로만 보면 '자바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이며, '인도네시아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지방에도 나름대로 근세 이래 기록이 풍부한 주요 국가만 수가 약 20 ~ 30개, 군소 국가들까지 합치면 세 자릿수에 달했기 때문이다.

  • 마타람 술탄국 등 많은 국가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다고 할 수 있지만, 엄밀히는 모든 국가나 지역이 네덜란드 식민화 이전 전제군주제를 취하지는 않았다. 난방공화국화교 공사 공화국, 와조 왕국선거군주제에 따라 군주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못한 국가, 서뉴기니, 보르네오 섬 내륙처럼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족 국가 단계인 지역도 있었다.

  • 네덜란드식 지역 협력적 식민지 체제(~1927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왕국의 동인도 지배 영역은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300년에 걸쳐 느리게 확대되었고, 통치 방식도 지역의 실정에 맞게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전에 동인도 지역으로 진입했던 포르투갈 및 스페인 세력과 달리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1], 무엇보다도 상업적 이윤 추구를 우선으로 했다. 지역 핵심 거점을 확보하고 나면 토착 세력에 대한 정치적 통제는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었다.

  • 자바 섬 가운데 서부(반튼 술탄국)는 17세기 말에 동인도 회사에 종속되었지만, 중부와 동부의 마타람 술탄국은 18세기 전반에야 동인도 회사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 극동부의 블람방안 왕국도 18세기 말에야 전쟁을 거쳐 회사령에 편입되었다. 마타람 술탄국의 후계국 중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했지만, 1810년 전후 이루어진 욕야카르타 점령으로 실질적으로 식민 세력에 복속되었다. 이후 1825년~1830년에 발생한 자바 중부의 디파나가라 전쟁이 토착 반란 세력의 패배로 끝나고 나서 자바의 식민지 체제는 완성되었다. 디파나가라 전쟁은 인도세포이 항쟁(인도 대반란)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 수마트라 섬은 18세기까지 남부, 동부 일부 항구 또는 상품 생산 지역이 네덜란드 영향권에 들었다. 토착 국가의 직접 정복과 종속화는 대체로 19세기의 일이었다. 동부의 팔렘방 술탄국은 19세기 전반 네덜란드에 정복되었으며, 시악 술탄국은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수마트라에서 가장 유력했던 아체 술탄국은 19세기 중반까지 독립국으로 남았으며, 30년을 끈 아체 전쟁이 종결된 1904년에야 네덜란드가 수마트라 서북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 보르네오 섬에서는 19세기 후반 반자르 술탄국, 불룽안 술탄국 식민화를 거쳐 식민지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르네오 내륙의 탐사와 통제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술라웨시 섬은 북부 마나도 인근 지역은 17세기 후반부터 오랜 네덜란드 영향권이었지만, 핵심 지역인 남부 반도에서는 18세기까지도 네덜란드 세력이 토착 세력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남부 반도까지도 네덜란드 영향권에 편입되었으며, 1905년 남술라웨시 원정으로 남부 반도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술라웨시 전체에서 식민지 체제가 완성되었다.

  • 소순다 열도말루쿠 제도도 섬마다 식민지 체제 확립 시기가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빠른 것은 암본(1609년)이었고, 가장 느린 것은 발리 섬(1906년)이었다. 롬복 섬은 1894년에 정복되었고, 말루쿠 제도 주요 지역은 19세기 초까지 정복이 끝났지만 트르나테에서 20세기 초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뉴기니는 네덜란드가 1824년부터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행정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 마노콰리(1898)와 므라우케(1902)를 지배하면서부터다.

  • 1848년 네덜란드에서 헌법이 개정되어[2] 의회민주주의에 기반한 근대적 입헌 군주제가 시작되었고, 1854년 네덜란드 의회는 정부 규정(Regeringsreglement)을 제정했다. 이 네덜란드 1848년 헌법과 정부 규정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도 헌법적 질서와 통치의 구조, 권한과 책임의 소재를 규정했다. 1854년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총독 한 사람에게 모든 행정권과 입법권이 집중되었고 총독은 전제적 권한을 휘둘렀지만, 1854년 정부 규정은 총독이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동인도 정부를 구성함을 명확히 했다. 이제 총독은 원칙적으로 네덜란드 본토의 행정부(사실상 네덜란드 식민부 장관)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본토의 정치 체계상 식민부 장관은 총독에게 지시한 식민 정책에 대해 본토 의회에 책임을 졌다. 또한 1854년 정부 규정은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참사회'(Raad van Nederlands-Indië)의 설치[3]와 권한을 규정했는데, 참사회는 총독의 자문 기관으로 당시 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독은 법령(총독령)을 작성할 때 본토 정부의 지시와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참사회의 자문을 구해야 했다. 많은 부문에서 총독이 행정권을 행사할 때도 참사회의 자문이 필요했다. 이로써 동인도에서는 어느 정도 정치적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게 되었다.

  • 1901년부터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윤리정책을 내세우며 토착민의 복지와 처우 개선에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를 비롯한 근대적 공공 영역으로 토착민의 진출이 가속화되었다.

  • 식민 치하 엘리트적 의회 정치 경험기(1927 ~ 1942년)

  • 20세기 초부터 지방 자치가 발전하여 바타비아 시의회(1903년)를 시작으로 도시에서 시의회 등이 생겨났고, 대의제 의회 정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국 단위에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의 입법 자문 기구로 1918년 폴크스라트(Volksraad, 인민참사회)가 설치되어 일부 선거(간선제), 일부 임명으로 의원을 뽑았으며, 폴크스라트는 계속 확대되다가 1927년 개편되어 정식으로 입법안 발의권과 심사권, 예산안 심사권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폴크스라트의 입법안 발의가 드물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폴크스라트는 기존 동인도 참사회의 권한을 상당 부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동인도 참사회 자체는 폴크스라트 설치 이후에도 자문 기구로 존속했다) 그보다 더욱 큰 자율성과 권한을 누리게 되었다.

  • 폴크스라트 창설 직전인 1910년대 초부터 유럽계 외에도 토착민, 화인 등이 활동하는 근대적 정당이 생겨났으며, 폴크스라트는 자연스럽게 창설과 동시에 다당제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 체제는 원칙적으로 인종 간 분리에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폴크스라트에서는 인종별(유럽계, 중국계, 토착민)로 선거가 따로 시행되고 의원도 인종별로 뽑혔다. 1984~1994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처럼 인종별로 별개의 의회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토착민 의원 수는 전체 의석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지만, 각 민족별 인구 비례를 고려하면 표의 가치와 대표성이 인종별로 달랐다.

  • 선거는 보통선거가 아니었고, 식민지 시대 마지막 폴크스라트 선거였던 1939년 선거에서조차 총인구의 10%(약 7,000,000명)만이 투표권을 가졌다. 이들이 일단 총 937명의 민선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식민 정부는 515명의 관선 선거인단을 임명해서 1,452명의 선거인단이 38명의 선출직 의원을 뽑는 구조였다. 여기에 더해 식민 정부가 22명의 임명직 의원을 뽑아 총 60석이 채워졌다.

  • 여러 한계가 있었더라도,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정당성이 부여되는 제도가 20년 이상 지속된 역사는 독립 이후 국민으로부터 나온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치인들에게 심어주었고, 국민들도 이를 공유했다. 장기 독재 정치를 한 수하르토도 구색으로나마 다당제를 취하고 총선을 꾸준히 열었으며, 수하르토를 무너뜨린 민주화도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비교정치학에서는 19 ~ 20세기 식민지였다 20세기에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국가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식민지 시대 대의 기구의 존재와 선거의 유무가 크게 좌우한다고 보기도 한다.

  • 폴크스라트에 참여한 토착민 민족주의 정파도 있었고, 이들은 주로 폴크스라트 내 좌파 그룹을 형성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지향하는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고, 이들은 폴크스라트에 참여하지 않고 장외 투쟁을 전개했다. 대표적으로 수카르노와 그의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이 그러했는데, 이들은 급진파로 분류되어 식민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 외에 극좌파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정파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20년대 무장 봉기를 일으키다 식민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 독립 준비 조사회(BPUPK, 1945년 3 ~ 8월): 1944년 9월 7일 일본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가 동인도 독립을 약속했다. 일본 해군은 독립 방침에 반대했지만, 자바 주둔군 16군은 동의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16군의 하라다 구마키치 중장은 일본군에 협력하는 유력 인사들 위주로 인도네시아 독립을 준비하는 59인의 '독립 준비 조사회'를 발족했다. 이 가운데 저명한 독립 운동가 수카르노, 모하맛 하타 등도 속해 있었다.

  • 독립 준비 위원회(PPKI, 1945년 8월 7일~29일): 수카르노가 의장, 모하맛 하타가 부의장인 인도네시아 정치인들의 위원회. 이 단계부터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독립 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PPKI 의장 수카르노가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했고, 이어 8월 18일 PPKI는 인도네시아 헌법을 채택했다. 이때 PPKI는 수카르노를 인도네시아 대통령, 모하맛 하타를 부통령으로 추대했고, 헌법에 따라 양원제 입법부[4] 등 국가 조직을 공표했다. 8월 19일에는 정부 부처 12곳의 장관을 임명하고 인도네시아가 8개 주(서부자바, 중부자바, 동부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로 분할된다고 선언했다.



  • 독립파 : 인도네시아 공화국 전시 행정부(1945 ~ 1949년 12월 27일). 다당제 체제로서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국민당 외에도 인도네시아 공산당, 인도네시아 사회당, 인도네시아 기독당 등이 각자 세력을 이루고 독립 투쟁을 벌이는 공화국과 협력했다. 독립전쟁 초기인 1945년 11월, 부통령 모하맛 하타와 공화국 총리 수탄 샤리르는 1946년 1월 총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했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공화국이 주요 도시를 빼앗겨 정상적으로 선거를 할 여유가 없어 선거는 전쟁 기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제1차 총선은 1955년에 시행되었다.

  • 중앙 인도네시아 국가 위원회(KNIP, 1945년 8월 29일~1949년 12월 15일) : PPKI를 확대 계승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단원제 입법 기구. 1947년 기준 514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당제로 좌익 블록(공산당, 사회당, 노동당, 기독당, 가톨릭당) 117인, 민족주의자 블록(국민당, 마슈미) 105인, 지역 대표 78인(수마트라 50, 술라웨시 10, 칼리만탄 8, 소순다 열도 5, 말루쿠 5), 직능 대표 80인(노동자 40, 농민 40)[5], 비토착 소수 민족 대표 13인(중국계 7, 아랍계 3, 유럽계 3), 기타 121인이었다. 1949년 12월 15일 마지막으로 소집된 KNIP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 가입하는 안건에 동의했다. 이후 KNIP는 인도네시아 입법부로 사실상 계승되었다.

  • 식민 정부 :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시 행정부(네덜란드군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군정, 1945 ~ 1949년 12월 27일)

  • 새로 수립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과도기적 다당제/양원제, 1949년 12월 27일 ~ 1950년 8월 17일)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등 16개 구성체의 연방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적 총선은 아직 시행되지 못했지만(합중공화국의 첫 총선이 1951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전에 합중공화국이 해산되었다), 동인도네시아 자치국과 파순단 자치국에서는 선거를 통한 입법부가 구성되었다.[6]


  • APRA 쿠데타 이후,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 16개 구성체 중 13개 구성체는 1950년 4월까지 모두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합류했다. 5월 초 기준 마지막으로 남은 두 비공화국 구성체는 각각 비자바 지역의 두 최대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수도 마카사르)과 동수마트라 자치국(수도 메단)이었다. 남은 세 구성체 간 통합 논의도 5월 초부터 진행되었고, 5월 5일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두 자치국은 통합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5월 19일 연방 정부는 세 구성체가 통합하여 새로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구성하는 합의에 도달했음을 공표하였는데, 사실상 두 자치국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흡수되는 형태로 통합이 결정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연방 대통령 수카르노가 독립기념일인 8월 17일 공식적으로 연방을 해산하여 인도네시아는 단일 국가 체제가 되었다.

  • 마카사르 반란(1950년 4월 5일 ~ 21일) :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의 수도였던 마카사르 지역에서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대위 출신 안디 아지스(Andi Azis)가 동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통합을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공화국군 대령 알렉스 카윌라랑(Alex Kawilarang)과 중령 수하르토가 이끄는 마카사르 파견군의 4월 작전 결과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 신질서(Orde Baru, 수하르토 독재. 1966년 3월 11일 ~ 1998년 5월 21일): 군부의 지지를 받았던 수하르토는 민간 부문에 대한 군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군대의 '이중기능'(dwifungsi) 독트린[7]과 사실상 여당 역할을 한 골카르를 정치 기반으로 하였다. 이 둘 모두 수카르노 시대에 연원을 둔 것이기는 했지만, 수카르노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수하르토 시대에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수하르토는 억압을 통해 정치적 안정화를 달성하고 인도네시아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이를 통해 장기 집권에 성공했지만, 경제가 무너지자 그의 집권도 끝났다.

  • 서뉴기니 병합(1969년) : 인도네시아가 관리 중이었던 서뉴기니에서 인도네시아 병합을 결정하는 주민 투표에 의해 서뉴기니가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해당 주민 투표는 공정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측에 유리하도록 조작되었다.

  • 제2차 인도네시아 총선(1971년) : 수하르토 시대의 첫 총선. 62.8%를 득표한 골카르가 360석 중 236석을 획득해 압도적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수카르노 시대의 다당제를 이어받아 해산된 공산당 등을 제외하고 9개 야당이 총선에 참여했다. 이후 제3차 총선(1977년)부터는 총선이 5년마다 안정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 제2차 총선은 수카르노 무력화 직후 1966년 6월의 국회 결의안에 따르면 1968년 7월 5일 이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골카르가 선거를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기 위해 실제로 총선은 연기되다 1971년에 시행되었다. 수하르토 집권 초기는 아직 수하르토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아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수하르토가 30년 독재를 할 인물인지도 당시로는 분명치 않았다. 많은 사람들도 수카르노 시대의 경제난에서 서서히 벗어나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신국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금지되지 않은 정당들(NU, 국민당, Parmusi, 기독당, 가톨릭당, 이슬람연합당 등)은 기존처럼 민주주의 및 각자 이념을 강조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 골카르의 주요 경쟁자는 NU, 국민당, 그리고 마슈미의 후계 정당인 Parmusi였다.

  • 골카르가 이길지는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하르토는 군 조직을 활용해 국민당과 Parmusi에 대한 여론 공작으로 이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새로운 골카르 조직과 신체제(신질서)를 믿음직하게 보이도록 했다. 공무원들도 사실상 의무적으로 골카르에 투표해야 했다. 또한 수하르토는 국민당과 Parmusi 후보자들을 다수 실격시키는 방식으로도 이들을 방해했다. 예를 들어 국민당 후보 중 선거에 참여한 후보가 506명, 실격된 후보가 171명이었고, Parmusi도 141명의 후보가 실격되었다. 결과적으로 62.80%를 득표한 골카르는 승리했고, NU는 18.67%, 국민당은 6.93%, Parmusi는 5.36%를 득표했다.

  • 나수티온 숙청(1972년) : 9월 30일 운동의 피해자 중 하나였던 나수티온 장군은 수하르토 집권 이후 국회에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아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인도네시아 국회의장을 지냈다. 나수티온이 이끄는 국회는 수하르토와 반공 정책에 대해 협력하며 공식적으로 1967년 3월 12일 수카르노를 실각시켰고, 수하르토를 대통령직 대행으로 임명했으며, 1968년 3월 27일 수하르토를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명망 높은 국회의장 나수티온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견제하기 시작했고, 즉시 나수티온 숙청 절차가 시작되었다. 1971년 나수티온은 정년을 2년 앞두고 제대해야 했으며, 동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972년 10월 28일 국회의장에서 사임해야 했다. 이후 나수티온은 수하르토 반대파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 정당 통폐합(1973년 1월) : 수하르토 정부는 효율적인 야당 통제를 위해 이슬람 계열 4개 정당을 통합개발당(PPP)으로, 민족주의 계열 5개 정당을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으로 통폐합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골카르-민주당-통합개발당 3당 구도는 수하르토 실각 시점(1998년)까지 이어진다. 골카르 외 2개 정당은 관제 야당이었지만 1990년대 무렵에는 실질적인 야당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간선으로 열린 대통령 선거(1973, 1978, 1983, 1988, 1993, 1998)에서 수하르토는 유의미한 반대 없이 계속 재선되었다.

  • 반수하르토 학생 운동(1970년대 초 ~ 1990년대) : 수하르토 집권 초의 유화적인 분위기에서 처음에 학생들은 수하르토 정권과 신질서 체제에 대한 입장을 뚜렷이 정하지 못했다. 교도민주주의 시대부터 수카르노 독재에 항거하는 반독재, 반공 학생 운동이 있어 왔고, 수카르노의 몰락은 반독재 학생 운동가들의 동정을 사지 않았다. 그러나 1971년 제2차 총선이 군이 개입한 부정 선거로 얼룩지자, 선거 부정을 지적하는 반수하르토, 반골카르 학생 운동이 생겨났다. 집권 초기 수하르토가 근절을 약속했던 정치권의 부패가 오히려 제도화되고 있던 것도 학생들의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수하르토는 처음에 학생 운동을 일단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지만,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인도네시아 대학교, 반둥 공과대학교 등에서 반독재 학생 운동이 조직화되었다. 1978년 마침내 반둥 공대에서 수하르토 독재를 비판하는 흑서가 나돌자(흑서 사건), 수하르토는 군을 동원해 반둥 공대 캠퍼스를 점거하고 주모자들을 투옥했으며, 1978년 4월 "학업과 무관한 캠퍼스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 정치 조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상대적 자유화 분위기와 함께 다시 한 번 학생 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다. 결국 수하르토 하야를 불러온 1998년의 반독재 시위도 학생들이 주도했다.


  • 동티모르 대학살(1975 ~ 1999년) : 점령당한 동티모르에서는 독립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맞서는 독립 운동이 벌어졌다. 이에 맞서는 인도네시아군은 반복적으로 소탕 작전을 벌였다. 1974년부터 1999년까지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인도네시아군의 폭력 등 점령 피해로 사망한 동티모르인은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에 달했다. 동티모르 전체 인구가 1990년 기준 75만 명 수준이었으므로 이는 동티모르에 엄청난 손실이었다. 유엔 동티모르 잠정행정부(UNTAET)가 과거사 조사를 위해 설치한 수용, 진실 및 화해 위원회(CAVR)가 2005년 공식 발표한 바에 따르면, 동티모르 분쟁 관련 사망자는 최소 약 102,800명(±12,000명), 최대 183,000명으로 추정되었으며, 10만 추정치 중 직접 살해 혹은 실종된 경우가 약 2만 명, 분쟁 중 분쟁으로 인한 질병이나 기아로 사망한 경우가 8만 명이었다.[8]

  • 아체 내전(1976 ~ 2005년) : 이슬람세가 강한 아체 지역에서 다룰 이슬람 반란에 참가했던 하산 디 티로 등이 이끄는 자유 아체 운동을 중심으로 발생한 내전. 2000년대까지 이어지다 인도네시아 민주화 이후 아체주 자치권 부여 및 자유 아체 운동의 지역정당화를 통해 종결되었다.

  • 수하르토의 대통령 임기 제한 해제(1978년) :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된 지 10년째가 되자 수하르토의 대통령 임기가 슬슬 법적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모두 제압하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1970년대 후반의 수하르토를 견제할 사람은 없었다. 1978년 국회가 수하르토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해제함으로써 수하르토는 국회 내 간선제 대선에서 계속 당선되기만 하면 종신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 50인 청원(Petisi 50, 1980년 5월 5일) : 나수티온, 모하맛 낫시르, 부르하누딘 하라합, 알리 사디킨(전 자카르타 지사) 등 수하르토 정권에 반대하는 50명의 저명인사가 1980년 5월 5일 개혁과 독재 완화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하고 5월 13일 국회에 이를 전달하였다. 청원은 수하르토가 판차실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중단하고, 인도네시아군이 골카르 선호로 편향되지 않고 정치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수하르토는 청원자들에 대해 여행 금지령을 내리는 것으로 응답했다.

  • 수하르토의 군부 장악력 약화(1980년대 후반) : 1980년대를 거치며 수하르토의 독재 권력은 공고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군부가 수하르토 정권과 이권 충돌을 빚으면서 군에 대한 수하르토의 장악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1988년 3월, 수하르토는 충성스러운 군부 계열 정치인 수다르모노(Sudharmono)를 새 부통령으로 지명하려 했다. 그런데 국회의 군부 측 의원들이 이때 수다르모노의 부통령 지명을 막으려고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점 군 총사령관 무르다니(Moerdani) 대장은 수하르토 가문의 부패를 비판했고, 수하르토는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수하르토는 군 요직에 충성파를 더욱 자주 임명해야 했으며, 동시에 군 외부로 권력 기반을 넓히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1990년대 수하르토 정권은 민간 영역에서 상대적 자유화로 정책을 선회해야 했다.

  • 메가와티 실각(1996년) : 1990년대 들어 점차 수하르토에 비판적인 정치적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야당 민주당 및 그 지도부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수카르노의 딸)가 수하르토 정권에 대한 개혁 요구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견제한 수하르토는 민주당 내 반메가와티 수랴디(Suryadi) 파벌을 지원했다. 민주당이 친메가와티파와 반메가와티파로 양분된 가운데, 1996년 7월 27일 자카르타의 민주당 청사를 점거한 메가와티 지지자들을 수하르토가 지원한 반메가와티파가 공격해 싸움과 폭동이 벌어졌다. 정부는 이를 가라앉히고 난 후 좌파 집단 민주인민당(PRD)의 개입이 있었다고 발표하고, 수랴디파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뒤이어 군의 대표적인 충성파 장군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체포가 벌어졌다.

  • 아시아 금융 위기와 집권 연장(1997 ~ 1998년 초) : 1997년 5월 총선에서 골카르는 경제가 다소 불안한 가운데 부정선거를 통해 승리했다. 직후 아시아 금융 위기가 터졌고, 인도네시아는 여러 국가들 가운데 태국과 함께 위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 1998년 경제 성장률이 보통 전쟁 등 극단적인 특수 상황에서나 발생하는 수준인 -13.1%을 기록했다. 1998년 초 루피아-달러 환율도 1997년 8월의 4~5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이렇게 수하르토 정권의 집권 기반이었던 경제가 크게 휘청이자, 1997년부터 인도네시아 각계각층에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규모로 동시다발적인 민생 안정, 반독재 민주화 요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새 국회는 1998년 3월, 들끓는 민심과는 정반대로, 간선으로 또 한 번, 일곱 번째로 수하르토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 수하르토 실각(1998년 5월) : 임계점을 넘은 민주화 요구는 이제 독재 정권에 대한 직접적 행동의 양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1998년 1월부터 운동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독재 학생 시위가 조직되었다.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국빈 방문을 위해 이집트로 출국하고 난 후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5월 12일 자카르타의 트리삭티 대학교에서 군이 학생 시위를 진압하다 시위 학생 4명을 살해했다. 자카르타는 폭동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이때 통제되지 않는 군중에 의해 화인들이 약탈, 강간,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한편 민주화 세력의 학생들은 수만 명이 결집해 5월 16일 자카르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수하르토 하야를 요구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수하르토는 새 임기를 마치면 2003년에 물러날 것과 내각 개편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동시에 5월 18일 치안 유지를 위해 대통령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대통령령을 내렸는데(위란토 측 주장), 군 총사령관 위란토(Wiranto) 대장은 명령 이행을 거부했으며, 충성파 인사들 역시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수하르토는 5월 21일 퇴로가 없음을 자각하고 사임했다.

  • 개혁(Reformasi) 시대

  • 하비비의 과도기(1998년 5월 21일 ~ 1999년 10월 20일) : 하비비는 공학자 출신 기술관료로 수하르토의 신임을 받아 부통령이 되었고, 수하르토 퇴진 후 그를 승계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하비비는 민주화 요구에 응답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정치 개혁을 시작했고, 지방 자치를 확대했으며, 조기 총선 및 대선(당시 대선은 간선제)을 약속하고 실행했다. 하비비는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했지만 동티모르에 일단 특별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후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고 이루어진 개혁의 전조가 되었다.

  • 개헌 및 민주화(1999년 ~ 현재): 주요 개헌과 민주적 제도 개혁은 압두라만 와힛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의 집권 시기에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 헌법은 2002년 8월 11일 마지막으로 개정되었다. 이하는 하비비 이후의 대통령과 임기 목록이다.








독립은 모든 민족이 가진 권리이다. 식민주의는 보편적인 인간성과 정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세계 어디서든 반드시 소멸되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을 위한 투쟁의 도상에 기쁜 순간이 도래하였다. 운동은 자립하고 단일하며 주권을 가진 정의롭고 번영할 인도네시아 국가의 독립의 문으로 인도네시아 인민을 안전히, 또 영원히 인도할 것이다.

전능하신 신의 은총과 자유로운 국민의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고귀한 열망으로, 인도네시아 인민은 이에 독립을 선언한다.

다음으로 인도네시아 민족 전체와 인도네시아 국토 전체를 보호하는 인도네시아 국가 정부를 형성하고, 공공 복리를 증진하고 국민의 삶을 교육하며 자주(自主), 영구한 평화 및 사회 정의에 기반한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국민의 독립을 인도네시아 국가 기본법으로 공식화한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주권국으로서 유일신에 대한 믿음, 정의롭고 교양 있는 국민 인성의 함양, 인도네시아의 통합, 숙의와 대의제 정치의 지혜가 인도하는 민주주의, 전 인도네시아 인민을 위한 사회 정의라는 원칙에 기초한다.







  • 1차 개정 : 1999년 10월 14 ~ 21일.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를 각 5년으로 규정하고 1회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이 가진 각종 인사권을 행사할 때 국회 또는 대법원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규정해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했다. 또한 대통령의 법률 제정권을 박탈하고, 입법권은 국회에만 귀속되도록 하였으며, 대통령은 오직 국회로 법안을 발의하는 권한만 갖게 되었다.

  • 2차 개정 : 2000년 8월 7 ~ 18일. 인도네시아군과 경찰의 권한을 분리하여 군의 권력을 제한하고, 지방 자치를 보장했으며 직접 선거로 지방 행정권자가 선출되도록 규정했다. 누산타라를 인도네시아의 영토적 특성으로 언급했고, 인도네시아 국가와 국장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인권 보장에 대한 조문이 추가되었다. 국회에서 군부의 임명직 의석이 사라지고, 모든 의석은 직선으로 선출되게 되었다.

  • 3차 개정: 2001년 11월 9 ~ 10일.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와 상원 설치를 규정했고, 대통령이 직선으로 선출되도록 규정했다. 수하르토 시대에 도입된 국가 정책 지침(Garis Besar Haluan Negara, GBHN)이 삼권 분립을 보장하기 위해 이 3차 개정에 의해 폐기되었다.

  • 4차 개정: 2002년 8월 1 ~ 11일. 대통령 자문 기관이었던 최고 자문 위원회에 대한 조항이 삭제되었다.



  •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헌법(Konstitusi Republik Indonesia Serikat, 1949년 12월 27일~1950년 8월 17일) :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사용된 헌법. 1950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공화국 단일 국가 체제가 됨에 따라 이하의 1950년 잠정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 1950년 인도네시아 공화국 잠정 기본법(Undang-Undang Dasar Sementara Republik Indonesia 1950, UUDS 1950, 1950년 8월 17일~1959년 7월 5일) : 말 그대로 잠정 헌법으로, 새로 선출된 제헌평의회가 제정한 신헌법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1945년 기본법이 다시 도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945년 기본법과의 주된 차이점은, 1945년 기본법이 암묵적으로 대통령제적 내지 이원집정부제적인 반면[9], 1950년 기본법은 의원내각제 시행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50년 기본법이 시행된 자유민주주의 시기 인도네시아는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 제헌평의회 해산(1959년 7월 5일) : 1955년 선출된 제헌평의회에서 헌법 제정에 관한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고, 특히 헌법에 이슬람의 역할을 명시하는 문제에 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958년 7월 육군 참모총장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나수티온(Nasution)은 역사적 정당성이 있는 1945년 기본법으로 회귀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결론 없는 의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통령 수카르노와 여러 정당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세력이 컸던 이슬람 조직이자 정당 나들라툴울라마(NU)는 이슬람에 관한 특별한 원칙이 없고 세속적인 1945년 기본법('이슬람'이나 '샤리아'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의 재도입을 반대했다. 1959년 4~6월 제헌평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제헌평의회에서 1945년 기본법 채택을 위한 표결이 두 차례 이루어졌지만, 찬성률은 각각 57%, 56%로 채택에 필요한 2/3의 동의에 미치지 못했다. 제헌평의회는 6월 3일 휴회에 들어갔고, 대통령 수카르노는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7월 5일 대통령령으로 제헌평의회를 해산하고 1945년 기본법을 재시행하였다.























  • 민주항쟁당(투쟁민주당, PDI-P, 128, 418) : 민족주의-수카르노주의 중도좌파. 수하르토 시대 민주당(아래의 민주당과 무관) 내 구 국민당 내지 메가와티 파벌이 1999년 창당하였다. 계보상 수카르노의 정당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정당이다.

  • 국민민주당(Nasdem, 59, 186) : 민족주의 중도파(중도좌파~중도우파). 원래 골카르에 속했던 자유파 기업가 수랴 팔로[10]가 창당한 것이다.

  • 국민계몽당(PKB, 58, 180) : 민족주의, 이슬람 민주주의, 전통주의 중도파. 유럽의 기독교민주당 포지션 1. 전통주의 이슬람 단체(나들라툴울라마)에서 기원. 이슬람계 정당 중 가장 포용적이며, 심지어 동누사틍가라 등 기독교도 다수 지역에서도 일정한 지지세가 있다. 국민계몽당 소속 와힛 전 대통령(구스 두르)은 비록 다른 이유로 탄핵당했지만 소수 종교와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을 없애거나 완화하는 데 크게 노력해 자바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 민주당(Demokrat, 54, 219): 중도파~중도우파. 공식적으로 중도라고 주장하며, 이념색이 약하다. 수하르토 이후 레포르마시 시대의 신생 정당으로, 중심 인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지만 수하르토 시대를 비교적 깨끗이 보냈고 간선제 정권 교체로 이루어진 와힛-메가와티 정부에서 각료를 지냈다. 이후 유도요노가 대권을 노리는 독립 파벌을 형성하여 2003년 창당하였다.

  • 국민수권당(PAN, 44, 165) : 이슬람 민주주의 중도우파. 유럽의 기독교민주당 포지션 2. 근대주의 이슬람 단체(무하마디야)에서 기원. 정견은 국민계몽당보다 다소 보수적이지만, 관용적이고 협의를 매우 중시한다.

  • 골카르(Golkar, 85, 309) : 중도우파 ~ 우익. 전통적 보수파. 수하르토 시대보다 좀 더 중도로 이동해 우파 빅텐트 정당화가 이루어졌다. 대략 한국의 국민의힘 포지션이다.

  • 통합개발당(PPP, 19, 92) : 중도우파 ~ 우익, 이슬람 빅텐트 정당. 다른 정당들에 비해 다소 강점이 불분명해 2019년 총선에서는 2014년 총선에 비해 득표가 크게 줄었다. 2019년 총선 득표율이 4.52%로, 4%로 높아진 봉쇄조항 기준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 인도네시아 통합당(Perindo, 29) : 대중주의 중도파

  • 인민양심당(Hanura, 66):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협동조합주의 중도파. 골카르에서 분당.

  • 월성당(PBB, 7) :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중도우파~우익. 수카르노 시대의 이슬람계 정당 마슈미에서 기원.

  • 아체 지역 정당(도합 28) : 아체당(Aceh, 18) 등 아체 지역 정당들도 있다. 모두 공통적으로 아체 지역주의를 우선시하며, 아체 분리주의 단체 자유 아체 운동에서 기원한 경우도 있다. 다른 아체 지역 정당들은 비교적 세속적인 경우도 있지만 아체당은 이슬람주의와 아체 지역주의를 함께 주장한다.

  • 근로당(Berkarya, 8) : 수하르토주의, 반공주의 극우파. 수하르토 신질서 체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정당이다.







  • 수마트라 : 방카블리퉁 제도(항쟁당 1/3석, 국민당 1/3석), 리아우 제도(항쟁당 1/4석, 국민당 1/4석)

  • 칼리만탄 : 서칼리만탄(항쟁당 4/12석, 국민당 2/12석), 북칼리만탄(항쟁당 1/3석, 국민당 1/3석), 중부칼리만탄(항쟁당 2/6석, 국민당 1/6석)


  • 술라웨시 : 북술라웨시(항쟁당 3/6석, 국민당 2/6석), 서술라웨시(항쟁당 1/4석, 국민당 1/4석)

  • 말루쿠 제도 : 말루쿠(항쟁당 1/4석, 국민당 1/4석), 북말루쿠(항쟁당 1/3석, 국민당 1/3석)

  • 서뉴기니 : 서파푸아(항쟁당 1/3석, 국민당 1/3석)




























  • 인도네시아 인터넷 검열 타임라인
    • 2017년 7월 : 텔레그램 차단. 텔레그램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의 선전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유. 텔레그램과 인도네시아 정부 간 합의 후 차단 해제.

  • 2018년 9월 : Tumblr, Vimeo에서 일부 누드 콘텐츠에 대해 검열 시행. 2018년 12월 17일 Tumblr는 검열 해제.

  • 2019년 5월 22일 : 페이스북, 왓츠앱, 인스타그램 3일간 차단. 대선 패배로 인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지지자들의 대규모 폭동(600명 이상 사상) 직후 SNS를 통한 허위 정보 전파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 3일 만에 차단은 해제되었으나 차단 우회를 위해 VPN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다.

  • 2020년 11월 : 2020년 통신정보기술부 장관령 제5번(Peraturan Menteri Komunikasi dan Informatika Nomor 5 Tahun 2020) 시행. 모든 민간 전자 서비스 사업자(Penyelenggara Sistem Elektronik Swasta, PSE)는 통신정보기술부에 등록해야 하며, 또한 모든 사업자는 요청 시 통신정보기술부 및 관련 행정 기관에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전자 시스템 및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허용해야 하고, 이를 위한 담당자를 인도네시아 내에 최소 한 명 두어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사업자는 인도네시아 법률을 위반하거나, "사회 불안" 또는 "공공 질서 교란"을 초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해서는 안 되며, 이와 같은 콘텐츠의 배포를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서비스를 자체 모니터링해야 한다. "아동 성착취", "테러리즘", "사회 또는 공공 질서 교란"을 사유로 통신정보기술부가 사업자에게 콘텐츠 게시 중단을 요구할 경우 사업자는 이를 4시간 내로 준수해야 한다. "사회 불안"이나 "공공 질서 교란"과 같이 모호한 사유로 정부 임의로 온라인 콘텐츠를 검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많은 인권 단체들 및 언론 자유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 2022년 6 ~ 7월 : 통신정보기술부는 PSE 등록제를 시행하며, 2022년 6월 말 2022년 7월 20일을 PSE 등록 마감일로 지정하고, 이때까지 등록하지 않은 서비스는 차단될 것이라고 공시했다. 이에 따라 규정에 맞게 등록하지 않은 야후!, Steam, PayPal 등이 7월 30일 실제로 차단되었다. 이 차단이 일시적일 것인지, 장기화될 것인지는 7월 30일 현재 아직 불투명하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 2022년 8월 2일 : 야후, Steam, PayPal 등 여러 사이트의 차단이 풀렸다. 그러나 EA 오리진, 에픽게임즈 등 일부 게임 플랫폼은 여전히 차단 상태다. #

  • 2022년 8월 3 ~ 4일 : EA 오리진 차단이 풀렸다. #
  • 2022년 8월 10일: 주요 게임 플랫폼 중 가장 오래 차단되어 있었던 에픽게임즈도 8월 9일 인도네시아 정부의 방침에 따를 뜻을 밝혔고, 8월 10일 PSE 등록이 끝나 차단이 풀렸다. #


[1] 민간 선교사들의 활동은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슬람이 퍼진 지역에서 식민 정부는 종교 관련으로는 지역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지역 실정을 파악하여 적절히 관리하는 정도로만 활동했다.[2] 최초 제정은 1815년[3] 동인도 참사회 자체는 1610년부터 존재하던 기구이지만, 그 권한은 고정적이지 않았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도 않았다.[4] 그러나 독립전쟁 기간 양원제가 실현되지는 못했고 단원제로 운영되었다.[5] 일반적으로 좌익 블록과 함께 행동했다.[6] 전자는 1950년 2월의 동인도네시아 총선으로 구성되었으며, 후자는 아직 독립전쟁 기간인 1948년 기존 식민지의 폴크스라트처럼 일부 선거(선거인단 간선제), 일부 임명으로 뽑혔다.[7] 교도민주주의 시대 육군 참모총장 나수티온이 1957년 PRRI/Permesta 반란으로 내려졌던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정교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군이 정치 권력을 직접 장악하지는 않지만,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등 민간 영역에서 군이 군사적 역할 외에도 비군사적인 능동적 '이중'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수카르노 무력화 이후인 1966년 8월 육군 간부들과 육군 참모대학 학생들이 참여한 세미나에서 공식화되었다.[8] "Conflict-Related Deaths in 1974-1999: The Findings of the CAVR Report Chega!," Post-CAVR Technical Secretariat.[9]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 내각은 수카르노가 주도하는 대통령 내각과 총리가 주도하는 의원내각이 섞여 있었다.[10] 아체 출생이지만 메단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았고, 수카르노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경력이 있다. 미디어 기업가로서 언론의 자유를 옹호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