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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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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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경세자의 세자빈
수빈 한씨 | 粹嬪 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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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 昭惠王后


조선 성종조 왕대비
인수왕대비 | 仁粹王大妃


조선 연산군조 대왕대비
인수대왕대비 | 仁粹大王大妃



파일:소혜왕후경릉.jpg

경릉 전경
출생
1437년 10월 16일(음력 9월 8일)[1]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504년 5월 21일(음력 4월 27일)[2]
(향년 66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경릉(敬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55년 9월 16일 ~ 1470년 3월 3일
조선 왕세자빈 | 정빈·수빈
1457년 9월 29일 ~ 1470년 3월 3일
조선 인수왕비
1470년 3월 3일 ~ 1475년 4월 11일
조선 왕대비
1475년 4월 11일 ~ 1495년 2월 3일
조선 대왕대비
1495년 2월 3일 ~ 150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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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주 한씨

□산(□山)
부모
부친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1400 ~ 1456)
모친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1403 ~ 1450)
형제자매
3남 6녀 중 6녀[1]
배우자
덕종
자녀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 ~ 1488)
장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1456 ~ 1482)
차남 - 성종(成宗, 1457 ~ 1494)[1]

종교
유교 (성리학)불교
봉작
군부인(郡夫人)
→ 정빈(貞嬪) → 수빈(粹嬪)[2]
전호
모자전(慕慈殿)
존호
인수자숙(仁粹慈淑)
휘호
휘숙명의(徽肅明懿)
시호
소혜왕후(昭惠王后)


1. 개요
2. 생애
2.1. 세자빈이 되다
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2.3. 아들 자을산군, 성종의 즉위
2.4. 왕대비가 되다
2.5. 인수대비의 여성관
2.6. 연산군 즉위 이후
2.7. 사후
3. 가계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昭惠王后 韓氏 소혜왕후 한씨 / 仁粹大妃 인수대비

한확의 딸로, 추존 왕 덕종의 아내이다.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월산대군성종의 어머니이다.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에 의해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고, 이후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존봉되었다. 이후, 성종의 뒤를 이어 손자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엔 자숙이라는 존호가 더해졌으나 최초에 받은 존호 그대로 인수대왕대비로 호칭되고 있다. 사후 연산군 때에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4]

남편이 의경세자에서 의경왕으로 추존되면서, 작위로서의 왕비(인수왕비)에는 있었지만, 왕비의 통상적인 의미인 '임금의 아내(중전)'로는 지냈던 적은 없었고, 거의 대비로만 지냈다보니 대중에는 소혜왕후보다는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5]

연산군중종의 친할머니이다.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막내딸인 공혜왕후,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의 시어머니이다.


2. 생애[편집]



2.1. 세자빈이 되다[편집]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문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 숭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시아버지 수양대군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양위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왕세자에 봉해졌고 그녀 역시 세자빈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남편 의경세자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결혼생활 5년 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대군, 명숙공주(이경근), 그리고 훗날 조선왕조의 제9대 임금인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이다.


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편집]


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경세자가 요절하였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한씨는 21살이었다.[6]

세자빈 자리는 아랫동서에게, 남편의 세자 자리는 시동생에게 물려주고 한씨는 '정빈(貞嬪)'이라는 빈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 4살이던 장남 월산대군, 2살이던 명숙공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자을산군을 데리고 출궁하였다. 훗날 정빈이 원경왕후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자식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시부모인 세조정희왕후는 농담 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7]


2.3. 아들 자을산군, 성종의 즉위[편집]


수빈은 차남 자을산군한명회의 딸과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자성대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종이 4살인 제안대군만 남기고 사망하자 권신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 자성대비의 지지를 받은 자을산군이 즉위하였다.

자을산군이 숙부 예종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남남인 백모와 조카 신분이 되었고, 이후 수빈은 아들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嬪)의 지위였다. 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면서 애매한 수빈의 지위에 관해 논의가 시작된다.

예종의 친자였던 제안대군세종의 적7자인 평원대군의 봉사손(奉嗣孫)이 되면서 왕위와 영영 이별하였다.


2.4. 왕대비가 되다[편집]


처음에는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지만 1471년(성종 2년), 성종이 친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수빈도 대비가 되었다. 예종의 계비인 인혜대비와 인수대비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성대왕대비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법적으로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 밝았기 때문에 자성대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자성대비의 수렴청정 시기 한글은 알지만 한문에는 밝지 못한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시어머니 자성대비가 사망하자 조선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2.5. 인수대비의 여성관[편집]


이때 아들 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인수대비가 평소에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만큼 성종의 치세 동안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금승법(禁僧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이다.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폐비 윤씨 사사를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 본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편을 들어 신하들에게 윤씨의 폐위가 옳다고 밝혔고, 시어머니 자성대비 역시 언문 교지를 직접 내려 성종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8]

그러나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주도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널리 퍼져있다. 성종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와 결탁하는 한편 성종폐비 윤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령한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 윤씨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다. 이 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폐비 윤씨를 그리워했다는 것인데, 성종폐비 윤씨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며 버럭 화를 낼 정도로 그녀를 매우 증오했다.

폐비 윤씨의 두 차례 폐비 위기는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의 주도였다. 나중에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도 신하들의 동정론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결단하여 진행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성종을 참조.


2.6. 연산군 즉위 이후[편집]


1504년(연산군 10년) 1월 8일, 인수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을 온 신하 박열을 통해 "내가 이미 늙었고 본 것도 많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饌]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육선[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를 전후로 대비의 건강이 위중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王)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귀인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야사 중 이미 광분해 날뛰던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향해 뛰어가 머리 박치기를 하였고 그 충격으로 승하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단순한 야사에 불과하다. 깊어진 병세에 정신적 충격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실록에 안 올렸을 리가 없다. 실록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은 명백하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의 소생 안양군봉안군의 생 머리카락을 잡고 인수대비에게 질질 끌고 가서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나와 있다. 단순히 인수대비에게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지른건지, 아니면 쌍욕을 섞어가며 패드립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연산군의 상태나 실록의 서술적 특징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 인조실록이나 영조실록같은 경우 각각 며느리와 아들에게 하는 모진 말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적는 것이 특징인데 그 정도가 너무 과한 경우 상황만을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묘사하는 것도 또한 특징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투정으로 끝났다면 그 말들을 중종 대에 들어서 사관이 안적었을리가 없다.

이날 연산군의 깽판은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다.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승하하였다. 연산군갑자사화 이전엔 할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윤기무'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 전말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던지라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도 연로하신 분들 중에 정정하던 사람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속히 건강을 해치거나 심하면 아예 세상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인수대비는 위에 나온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손자 연산군이 직접적으로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이 일이 인수대비의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극에서 인수대비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2.7. 사후[편집]


일설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가진 원한이 깊어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전호(殿號)는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나 지어올리는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보면 인수대비의 혼전(魂殿)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정황상 인수대비의 혼전으로 보이는 모자전(慕慈殿)에 연산군이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지위를 격하하여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연산군이 "대행대왕대비께서는 곤위(坤位)[9]에 계셨던 적이 없으니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맞지 않겠는가?"하고 하문하니 신하들이 연산군의 폭력적인 행동에 눌려있다가도 이것만은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유순은 "그건 주상전하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10]라고 아룄다.

그러자 연산군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의경세자보다는 높고 안순왕후보다는 낮게 행하라고[11] 분부하였으나 이것도 신하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결국 왕후의 예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상제(喪祭)를 단축하여 지내는 것을 밀어붙였고 반발에도 끝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상제를 단축하여 지낸 것은 연산군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종도 할머니 정희왕후의 상제를 한 달로 단축해서 지낸 예가 있었는데, 보통 국왕이 상제를 단축하려 한 뜻은 상제를 빨리 끝내야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 딱히 인수대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안순왕후장례 때는 13일 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인수대비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친할머니라고 조금 더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승하한 직후 상례를 의논할 때 왕세자빈의 예로 치르자고 한 것을 보면 연산군이 조모 인수대비를 격하할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편집증이 의심될 정도로 계속 상제를 빨리 치러버리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에 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승하한지 2년 후인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 사태가 벌어져 연산군이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나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3. 가계[편집]


  • 친정(청주 한씨)
    • 아버지 : 서원부원군(西城府院君) 한확(韓確)[12]
    • 어머니 :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 1남 : 한치인(韓致仁)
      • 2남 : 한치의(韓致義)
      • 3남 : 한치례(韓致禮)


  • 배우자 / 자식
    • 남편 : 덕종(德宗) 이숭/이장(李崇/李暲)
      • 1남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 며느리 :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 서며느리 : (측실)부부인 김씨(府夫人 金氏)
          • 서손자 :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
      • 1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 사위 :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
          • 외손자 : 공조참의(工曹參議) 홍백경(洪伯慶)
      • 2남 : 성종(成宗) 이혈(李娎)


4. 기타[편집]


  • 아들왕위에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정왕후 조씨와 비슷하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13]

  • 불교를 신봉하면서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 전부 통달했다. 여성 행동 교육서인 <내훈(內訓)>을 썼는데 <내훈>에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엄격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며느리의 위치가 보편적으로 이 정도였을 수도 있다.

  •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배우기 무척 어려운 언어이다. 명나라를 통해 인도에서 불경 원본을 반입해 볼 수도 있었겠고 이를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왕비세자빈들도 한자를 못 읽는 경우가 많았고 산스크리트어 교육용 교재도 적었을 것이므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대중의 인식이 야사에 편중되어 있어 정사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세조 때는 인수대비가 처세와 수완을 발휘했지만 예종, 성종 시절에는 아니다. 국왕의 생모라는 지위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대비 이미지는 후대의 문정왕후가 더 어울린다. 성종이 어렸을 때 수렴청정은 정희왕후 몫으로 정희왕후를 보좌하는데 머물렀으며 스스로가 '여인은 정사에 깊이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성한 성종이 하는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극에서는 주로 야사의 모습으로 그려져 폐비 윤씨와 성종을 구속하며 망설이는 성종을 설득해 폐비 윤씨를 적극적으로 폐위시켰고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머리 박치기를 했다는 야사가 정사처럼 널리 퍼져 있다.

  • 1962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에서는 배우 전옥이 연기했다.


파일:attachment/인수대비.jpg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는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배우 고두심과 배우 임영규[14]가 각각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김영란[15]이 연기했다.


파일:attachment/219.jpg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배우 채시라[16]와 배우 안재모.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어미 잃은 연산군을 측은히 여겨 감싸안고 대성통곡하며 그 전에 폐비 윤씨 사사가 거론이 되었을 때도 사촌오빠 한치형이 "차라리 폐비를 죽이지 말고 원자를 같이 폐위시켜 버리자"고 주장할 때 "엄연히 자신의 손자이고 도 없기 때문에 폐위시킬 이유는 없다"고 감싸주기는 한다. 극 중 보면 친할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친손자인 연산군에게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천한 가 흐르다"고 냉혹하게 운운하면서 을 먹이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제대로 된 정을 보여주지 않고 심하게 갈군다. 이래서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볼 때마다 항상 위축되면서 우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인수대비가 "죄인자식"이라고 낙인을 찍어 개망신을 주며 이는 세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한 뒤로는 연산군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할머니에게 항상 골탕을 먹이는데 온 을 집중한다. 하지만 성종 승하 직후 연산군의 즉위마저도 저지시키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오죽하면 "세자를 즉위시킬 바에야 차라리 제안대군을 옹립하겠다"고 할 정도. 심지어 성종승하하고 나서 연산군이 상주(喪主)로서 뒷처리를 해야할 때 굳이 사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연산군에게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 행사인 수륙제를 지내야 할 것"이라며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즉위를 윤허한다는 교지 역시 쉽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측근이자 사촌오빠인 한치형이 간곡하게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왕위를 인정해준 것 뿐이고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문안 인사를 할 때 제대로 받지 않고 자신의 둘째 손자인 진성대군만 편애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나마 이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았을 때는 무오사화 때 뿐.[17] 하지만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자신의 왕권을 다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연산군은 아예 자신의 친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깽판을 놓기 시작하는데 결국 인수대비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과 치열하게 대립하다 못볼 꼴 다보고 죽는다. 죽기 전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왕위에 올리라"고 암시를 주기도 한다. 죽고 나서도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에게 온갖 방법으로 고인 드립을 당하는데 실제로 마지막 회에서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자신은 크게 웃으면서 덩실덩실 추며 "할머니,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 신하임금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새 임금인들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겠습니까?"라고 외치면서 매우 기뻐한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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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전인화[19]가 연기했다. 권력욕이 강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잘 연기해냈으며 나름대로 연산군과 사이가 좋고 연산군을 아끼는 편이다. 다만 계모 정현왕후와 단 둘이 있을 때 "세자폐비의 소생"이라면서 내심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왕실장자이자 왕위를 잇는 후계자로서 우대는 해 주는 편. 물론 가끔 연산군을 붙잡고 잔소리로 갈굴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연산군학문을 게을리하거나 함부로 사화를 일으켜 조정 대신들 여럿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차원에서 왕족으로서가 아닌 가족으로서 하는 잔소리다. 실제로 자신이 아끼던 상궁을 잡아가려는 것을 말리려다 연산군에게 밀쳐져서 앓아눕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문병을 온 며느리 정현왕후에게 "주상의 폭정이 더 심해지면 진성대군옹립 하자는 말들이 들릴게요. 허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비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죽기 직전 연산군과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이 "어찌 소손어미를 그리도 미워하신 겁니까! 소손보위에 올리시고도 어찌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으신 겁니까! 소손할마마마가 원망스럽습니다!"며 슬퍼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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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함은정, 이후에는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했던 배우 채시라가 연기했다. 2011년 JTBC <인수대비>와 1998년 KBS <왕과 비>는 같은 작가(정하연)와 같은 주인공(채시라)이 참여했음에도 인수대비에 대한 작중 묘사가 크게 다른데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일개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가족이라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하는 냉혹한 면모를 지녔지만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비교적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면모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특히 연산군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 차이가 큰데 가령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어린 연산을 매우 귀여워하고 어린 연산의 장난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며 같이 을 자며 보살필 정도로 각별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폐비 윤씨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린 연산까지 목숨을 잃을 것이 우려되어 못내 망설여 권신 한명회에게 방법을 묻기도 한다. 아마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1998년 <왕과 비> 방영 당시와 어느 정도 달라진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보니 과거에 <왕과 비>를 본 시청자 입장에서 <인수대비>를 본다면 가히 충격과 공포를 느낄 정도.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에게도 제법 거칠게 대했음은 물론이고 폐비 윤씨중전으로 세웠다가 가차없이 토사구팽을 해버린 반면에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공혜왕후에게 친근하게 대해줬으며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세우자는 시어머니 정희왕후에 맞서서 처음부터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세우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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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교롭게도 음력 9월 8일은 소혜왕후의 시아버지 세조의 기일이다. 이 때문에 소혜왕후가 인수왕비로 책봉된 1470년(성종 1년)부터, 그녀의 탄신 하례는 이튿날인 9월 9일에 올리게 되었다.[2]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한 바로 전 날이다. KBS 드라마 왕과 비 등에서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3] 훗날 숙종의 비 인현왕후도 여기서 승하한다.[4] 친자매 간의 돌림자가 뫼 산山 자를 쓰는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이름이 0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다만 여타 추숭 왕비들과는 다르게 인수대비와, 조대비(신정왕후)는 생전에 대비로서 왕후의 지위를 실제로 누렸다.[6] 야사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자 이 말을 믿은 세조형수의 무덤(소릉)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와 달리 단종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친 행위는 소문대로 실제 있었다.[7]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대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는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차남인 해양대군을 다음 세자로 지목했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적장자 상속제가 사대부는 물론 민간 까지 널리 퍼진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때는 이런 종법을 어겼어도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임금들은 문종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해양대군월산대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대군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5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해양대군은 8살, 월산군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비슷했다.[8] 물론 그렇다고해서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가엾게 여겼을 리는 절대 없다. 본인부터가 웬만한 선비들보다 예법을 잘 알았고 성종과 자성대비와 더불어 왕비를 폐해야 하는 이유를 들며 폐비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9] 왕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다.[10] 의경세자왕세자일 때 사망하였으니 당시에는 왕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으나,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는 이미 의경세자조선으로 추존된 이후다. 그러므로 인수대비의 장례를 세자빈의 예로 치른다면 의경세자까지 도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그렇게 되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대부터 족보가 꼬이게 된다.[11] 세자빈보다는 높고 정식 왕후보다는 낮게 치르라는 소리.[12] 덕종 의경세자의 장인어른이자, 소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서원부원군이란 직책은 '국구(國舅, 장인)'의 자격이 아닌 반정으로 세조의 즉위를 적극 도왔기에 그 공로로 받은 것이다.[13] 혜경궁 홍씨의 경우에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 때 장조)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 고종 때의 일이다. 이 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 효강대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으나 남편이 죽은지 100년, 홍씨가 죽은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14] 배우 견미리의 전 남편이다.[15]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원경왕후 역,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신덕왕후 역.[16] 채시라는 당시에 30대 초반으로 저 모습으로 나온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다. 드라마가 세조 때부터 시작해 무려 50년의 세월을 다루는지라 세조의 며느리 때였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 중년~노년까지 다루며 중반쯤 되면 세조가 승하하는데 이 때쯤부터 대부분의 출연 분량은 약간의 분장을 한 중년 모습으로 나왔다. 저 사진의 모습은 연산군이 장성을 한 후반부인데 긴 드라마다 보니(186부작) 후반부만 해도 분량이 꽤 되지만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은 편.[17] 무오사화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 사건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찬탈자로 격하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역모에 준하는 사건인지라 세조의 맏며느리인 인수대비로서는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작심하여 선비들을 제대로 족쳐내려고 하자 "없는 선비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더 이상의 사화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18] 실제로 연산군에 이어 보위를 이은 중종 역시 박원종, 성희안과 같은 반정공신들의 압박에 못이겨 첫번째 왕비였던 조강지처 단경왕후를 7일만에 내쳐야 했으며 그 후로도 신하들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다.[19] 전인화는 <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지만 사실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덜 화제가 된 감이 있다. 물론 전인화문정왕후 연기는 드라마가 끝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기였다. 바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뭬~~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