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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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 仁烈王后


장릉 전경
출생
1594년 8월 16일(음력 7월 1일)
강원도 원주읍내 우소
(現 강원도 원주시)
사망
1636년 1월 16일
(음력 1635년 12월 9일) (향년 43세)
한성부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623년 4월 13일 ~ 1636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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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주 한씨
부모
부친 서평부원군 한준겸[1]
(西平府院君 韓浚謙, 1557 ~ 1627)
모친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2]
(檜山府夫人 昌原 黃氏, 1561 ~ 1594)
형제자매
2남 5녀 중 3녀
배우자
인조
자녀
슬하 4남 (6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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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1645)
차남 - 효종(孝宗, 1619 ~ 1659)[1]
3남 - 인평대군(麟坪大君, 1623 ~ 1658)
4남 - 용성대군(龍城大君, 1624 ~ 1629)
딸 - 공주(1626 ~ 1626) 요절
5남 - 대군(1629 ~ 1629) 요절
6남 - 대군(1635 ~ 1635) 요절

봉작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전호
숙녕전(肅寧殿)
휘호
정유명덕정순(正裕明德貞順)
시호
인열왕후(仁烈王后)

1. 개요
2. 생애
3. 성격
4. 사망과 사후
5. 창작물



1. 개요[편집]


조선 제16대 군주인 인조의 정비이자 조강지처이다. 소현세자효종, 인평대군의 어머니이다. '烈' 자가 '렬'로도 읽을 수 있다보니 인렬왕후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2. 생애[편집]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한효윤, 아버지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이며 어머니는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이다. 한준겸은 개국공신 한상경[1][2]의 7대손이고, 세조 때 명신 한계희의 5대손으로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받은 유교 7대신 중 한명이다.[3] 실학자의 선구로 유명한 한백겸은 한준겸의 형이고,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했던 우의정 한효순은 한준겸의 숙부이다.[4][5]

1594년(선조 27년)에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17세의 나이로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장남인 이왕을 낳고, 7년 후에 차남 이호를 낳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남편 능양군쿠테타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보위에 오르면서 본인도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한씨는 적극적으로 남편 인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2년) 12월 5일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아들을 사산, 그 충격으로 한씨는 산욕열에 걸려 나흘 후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635년 12월 9일).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으며, 차남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

인조는 인열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자녀는 6남 1녀이나 안타깝게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제외하면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3. 성격[편집]


왕가에 시집을 왔지만 중전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후덕하면서도 강단있는 성격으로 보였다.

현부인 시절에 살림이 어려워졌는데, 직접 자신의 재물을 모아 팔아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이후에 내명부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중전으로서 엄하게 다스려 내명부가 안정되었으며[6] 자녀교육에도 엄격했다고 한다.

다만 자애롭고 관대한 면모도 보인 일화가 있는데, 인열왕후는 광해군폐비 류씨를 따른 내인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광해군을 모신 한보향[7]이라는 상궁이 광해군을 그리워하며 통곡한다"는 것을 밀고받았다. 그런데 이를 듣고 인열왕후는 '이는 의로운 사람이다' 며 한보향을 불러 '우리 임금이 하늘의 덕으로 보위에 있지만 훗날 폐조처럼 왕위를 잃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 며 소현세자를 그녀에게 맡겼다고 한다. 반면 밀고한 이에게는 '오늘 날 너의 행동이 다른 날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종아리를 때렸다. 이는 광해군을 모신 상궁 내인들에게 찬탈자로 인식된 인조정권에 대한 반감을 없애고 궁인들이 모두 안심하고 복종하는 계기가 되었다.[8]

이와 같이 인열왕후는 인조반정 이후 피를 보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남편 인조에게도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와 사이도 좋아서 6남 1녀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한씨의 내조 덕에 이괄의 난정묘호란이라는 위기를 넘겼다고도 평가하기도 한다.[9]

4. 사망과 사후[편집]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지금으로서도 적지 않은 나이인 43세로 7번째 아이(아들)를 낳았다. 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열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한다. 이 때문에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이 벌을 받아 강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장남 석철이 이 직후에 태어났는데, 할머니의 관이 혼전에 모셔져 있던터라 아버지는 상주로서 장례진행을 도맡아 바빴고, 어머니는 할머니 대신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기에, 평시에 원손 탄생시 치러지는 행사를 대폭 생락해야 했다.

인열왕후가 사망하고 후금은 왕비 조문을 구실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정작 그들은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조선은 당연히 요구 수령을 거부했고 인열왕후의 조문을 받는 것도 거절하며 천막으로 만든 가짜 빈소에 조문하라 했다. 하지만 천막이 바람에 날라가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을 자객으로 오인해 사신단의 반감을 샀고 이는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듬해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고 인열왕후의 아들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내명부의 수장 자리는 새로 왕비를 들이는 것 외엔 채울 방법이 없으니 3년 후 인조는 당시 15살이었던 조창원의 딸과 혼인하니 장렬왕후다. 장렬왕후는 세자보다 어려 권위가 확고하지는 못했다. 1645년 청에서부터 병치레를 하던 소현세자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청나라를 등에 업은 세자와 정적이 되어있던 인조와 어린 임금이 즉위함을 탐탁찮게 여긴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봉림대군으로 후대를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장렬왕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는데, 청에게서 자유로우며 수렴청정을 해줄수 있는 왕실 어른 인열왕후가 살아있었다면 판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10]

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열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지비는 6.25 전쟁에서 불타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나마도 도로 코앞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임진왜란 이후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3명 이상의 대군을 낳았던 덕분에[11] 철종 이후 단절된 왕통은 그녀의 3남이었던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이 즉위하면서 이어졌다. 즉 후기 조선 왕실의 갈라진 왕위 계승은 모두 인열왕후를 뿌리로 두고 있는 셈이다.


5. 창작물[편집]


  •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 서우림이 연기했다.

  • 1986년 MBC 드라마 남한산성에서 김도연이 연기했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 이승아가 연기했다.

  • 2019년 KBS 드라마 조선로코 녹두전에서는 남편인 능양군이 차율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인열왕후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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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상경의 형이 한상질이고 한상질의 손자가 그 유명한 한명회다.[2]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와는 9촌이다.[3]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광해군일기 광해 즉위년 2월 2일 7번째 기사. 선조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이 기사가 선조실록이 아닌 광해군일기에 등장하는 것에서, 인조 정권의 광해군 정권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묻어난다.[4] 한효순은 인목대비의 폐위에 관여했지만, 한준겸 형제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5] 한효순의 아들인 한이겸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오빠인 장선징의 장인으로서, 환향녀 논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6] 그 악명높은 조 귀인도 인열왕후 생전에는 얌전하게 지냈다. 조씨가 인열왕후의 주선 덕분에 입궁한 탓도 있지만 입궁 뒤에 총애를 어느정도 입고난 뒤에도 인조는 여전히 인열왕후와 사이가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7] 원래는 문성군부인을 모신 상궁이었는데 이후 승은상궁이 되었다. 인조반정 당시 목숨을 걸고 문성군부인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궁궐에서 쫓겨나지 않았고 보모 상궁이 되어 인조의 자식들을 돌보아 인열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인조 재위 기간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숙원으로 진봉되었다.[8] 연려실기술 23권 인조조 고사본말 인열왕후[9] 사실 이 두 개의 실책도 실록에 묘사된 인열왕후의 행적과 내조를 생각하면 인조가 행하지 말았어야할 것이긴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중전이면서 내명부 수장에 불과한 인열왕후가 어찌할수도, 관여할수도 없는 문제라 인조가 알아서 잘해야되는 쪽이고, 정묘호란은 복잡한 외교적 상황과 이괄의 난이 시너지를 이루어서 발생한 쪽이므로 역시 이 문제에 제일 기민하게 제대로 대응해야할 인조의 전적인 책임이므로 인열왕후가 어찌할수 있는것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근원적인 조언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10] 설사 청으로부터 인열왕후조차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강빈이 인조의 억지로 주살당하고, 원손들이 폐위를 당해 일찍 죽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적통 자녀들을, 그것도 아들을 많이 낳은 왕비의 발언권은 아무리 전제군주제 국왕이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11] 당장 본인의 3남 인평대군이 조선의 (동생 용성대군이 요절했으니 사실상) 마지막 대군이다. 효종, 현종, 순조, 고종은 적자가 1명뿐이고, 숙종, 영조, 정조는 서자만 있었고, 나머지는 아들이 없거나 일찍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