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예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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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의 제2왕후
인예왕후 | 仁睿王后


고려 순종, 선종, 숙종의 모후
인예순덕태후 | 仁睿順德太后

출생
연대 미상
이자연의 사저
사망
1092년 9월 2일
서경[1]
능묘
대릉(戴陵)
재위기간
고려 연덕궁주
미상 ~ 1052년 2월 1일
고려 제2왕후
1052년 2월 2일 ~ 1083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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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원 이씨[1]
부모
부친 장화공 이자연
(章和公 李子淵)
모친 계림국대부인 경주 김씨
(雞林國大夫人 慶州 金氏)
형제자매
8남 3녀 중 장녀
배우자
문종
자녀
10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순종
차남 - 선종
3남 - 숙종
4남 - 대각국사 의천
5남 - 상안공 왕수(常安公 王琇)
6남 - 도생승통 왕탱(道生僧統 王竀)
7남 - 금관후 왕비(王㶨)
8남 - 변한후 왕음(卞韓侯 王愔)
9남 - 낙랑후 왕침(王忱)
10남 - 총혜수좌 왕경(聰慧首座 王璟)
장녀 - 적경궁주(積慶宮主)
차녀 - 보령궁주(保寧宮主)
3녀 - 조졸한 공주1
4녀 - 조졸한 공주2

종교
불교
거처
연덕궁(延德宮)
→ 자수전(慈壽殿)[2]
작호
연덕궁주(延德宮主)
→ 연덕궁비(延德宮妃)[3]
→ 왕태후(王太后)[4]
시호
효목성선인예순덕태후
(孝穆聖善仁睿順德太后)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성공한 자식농사
5. 점점 강해지는 인천 이씨
6. 국청사



1. 개요[편집]


문종의 제2비. 시호는 문종 仁효대왕과 仁 자 돌림이다. 대각국사문집에선 인예국모(仁睿國母)란 칭호로 등장한다.


2. 생애[편집]


인예왕후는 당대의 명신이자 문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던 이자연의 장녀로 태어났다. 문종은 이자연의 장녀와 혼인하고 연덕궁을 하사해 인예왕후는 연덕궁의 주인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된다. 문종의 후궁인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와 자매지간이다.

문종 재위 6년인 1052년 2월 2일 왕비(王妃)로 책봉되고 '연덕궁비(延德宮妃)'로 불리게 된다. 이후 1053년 11월 24일 그녀의 맏아들이 왕태자로 책립(冊立)된다.

문종 사후 연덕궁비는 태후의 위치에 오르고 자수전(慈壽殿)을 새로운 관저로 가지게 되었으나, 장남 순종의 이른 죽음으로 정식으로 태후로 책봉되지 못했다.

이후 차남 선종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하게 된다. 선종 재위 3년인 1086년 2월 왕태후(王太后)로 책봉되자 각 지역에서 하례(賀禮)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모든 주현(州縣)[2]에서 하례품으로 보낸 옷감이 10만필이였고, 탐라(耽羅)[3]에서는 직접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선종 재위 9년인 1092년 8월 17일 왕태후는 차남인 선종 함께 서경으로 행차한다. 여러 지역을 둘러보던 중 9월 2일 서경에서 갑자기 훙(薨)하니, 개경으로 모셔와 대릉(戴陵)에 장사지낸다.

아들 선종은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란 시호를 올리고 태후가 지은 국청사(國淸寺)에 인예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반혼전(返魂殿)을 짓고, 어진를 봉안하는 진전(眞殿)도 설치한다. 이후 인종이 성선(聖善)을, 고종이 효목(孝穆)의 시호를 덧붙였다.

인예왕후는 생전 은(銀)글씨로 불경을 베끼길 원했고, 이는 삼남 숙종이 완성시켜 인혜왕후가 세운 국청사에 안치한다.


3. 가족관계[편집]


인예왕후는 인천 이씨 가문으로 아버지는 문종배향공신#고려 장화공 이자연(李子淵), 어머니는 계림국대부인 (樂浪國大夫人) 김씨[4]이다.

동기간이 8남 3녀로 인예왕후는 그 중 장녀다. 《고려사》 제신열전 이자연 편에는 경원백 이호(李顥), 정현 이정(李頲), 이의(李顗), 이전(李顓)[5]과 인예왕후,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6]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인예왕후의 조카 중에는 그 유명한 조선국공 이자겸(李資謙)[7]이 있다.

문종과 금슬이 좋아 혼인 후 슬하에 자식을 무려 14남매나 두었다.
아들로는
  • 순종 왕훈(王勳)
  • 선종 왕운(王運)
  • 숙종 왕옹(王顒)
  • 대각국사 의천 왕후(王煦)[B]
  • 상안공 왕수(王琇)
  • 도생승통(道生僧統) 왕탱(王竀)[*B ]
문종 24년인 1070년에 왕명으로 승려가 되어 속리사(俗離寺)에서 살았다. 예종 7년인 1112년 반역을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와 거제현(巨濟縣)[8]으로 유배보냈다.
《고려사》 종실열전에 "총혜수좌(聰惠首座) 왕경(王璟)이다." 라는 기록 뿐이다. 시호로 봐서 승려로 추정로 된다.
이 있었고 딸로는
  • 적경궁주(積慶宮主) - 부여공 왕수[9]와 혼인
  • 보령궁주(保寧宮主) - 낙랑공 왕영[10]과 혼인
가 있었다. 《고려사》 공주열전에 의하면 인예왕후 소생의 공주가 2명 더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고 한다.


4. 성공한 자식농사[편집]


인예왕후는 정말 많은 자녀를 두었다. 게다가 다수의 자녀들이 고려사에 두각을 드러냈는데, 장남 순종태자에서 국왕이 됐고, 차남 선종도 국왕으로 즉위했다. 인예왕후 사후에는 손자 헌종과 삼남 숙종도 모두 국왕이 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출가해 승려가 된 후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합쳐 천태종을 만들어 불교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자녀들의 명성을 커질수록 인예왕후의 권위도 수직 상승했다.

시아버지인 현종의 많은 부인 중 원혜왕후가 직계를 이었는데, 인예왕후 역시 삼남 숙종이 왕실을 이어가면서 문종 이후 모든 국왕이 인예왕후의 후손이다.


5. 점점 강해지는 인천 이씨[편집]


현종의 왕후인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는 모두 외가가 인천 이씨다.[11] 이미 이 때부터 인천 이씨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진정한 외척으로 등장하는 건 이자연과 그의 딸 인예태후 대부터이다.

이자연은 딸 셋을 모두 문종과 혼인하여 명실상부한 외척이 되었다. 인예왕후는 왕의 어머니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아들인 순종, 선종, 숙종 삼대가 모두 공경했다.

예종인천 이씨순덕왕후와 혼인했고, 덕분에 예종과 순덕왕후의 아들 인종은 외척에게 크게 시달리게 된다.


6. 국청사[편집]



고려의 왕립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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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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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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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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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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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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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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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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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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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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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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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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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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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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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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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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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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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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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국청사는 고려 개경 개성부 황성 근처에 위치했던 사찰로 인예왕후가 창건한 절이다.

선종 재위 6년인 1089년 10월 때부터 짓기 시작해 숙종 재위 2년인 1097년에 완공해 숙종이 직접 찾아와 낙성식을 열고 도량을 열었다.

인예왕후가 직접 지은 절인 만큼 아들 숙종은 큰 관심을 쏟았고, 절에 13층 황금탑과 은글씨로 쓴 불경까지 안치해 국청사는 문종흥왕사와 견줄 정도의 화려함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인예왕후의 혼전, 진전(眞殿)[12]도 설치해 태후의 원찰 역할도 겸하게 했다.

사찰명은 중국 천태산에 있는 국청사[13]에서 가져온 것이다. 천태산 국청사는 천태종을 일으킨 장소인데, 인예왕후는 이 국청사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 교선 통합을 지원했다.

실제로 고려시대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흥왕사, 현화사 등 절의 주지를 맡다가 국청사로 온 후 대대적으로 천태종 설파에 힘을 쏟는다.

국청사가 세워졌을 때 대각국사 의천이 남긴 글이 문집으로 전해진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청사를 창건하고 개강할 때의 치사

용궁(龍宮)의 해장(海藏)[14]

이 지극히 도도(滔滔)하여 일불(一佛)의 교문(敎門)이 이미 충만해졌습니다. 용수(龍樹)보살이 경함(經函)을 세어 보았지만 석 달이 되도록 소분(小分)도 알 수 없었으니, 이는 제불(諸佛)의 지혜가 매우 깊어서 한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바닷물을 먹물로 삼아서 점진(點塵)[15]과 같이 기록한다 해도 모두 다 기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운운….

돌이켜 보건대, 해동의 불법이 7백여 년에 이르는 동안 비록 제종(諸宗)이 경연(競演)을 하고 중교(衆敎)가 성황을 이뤘지만, 천태(天台) 하나의 지파(枝派)만은 어느 시대에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원효(元曉)보살이 앞에서 찬미하였고, 제관(諦觀) 법사[16]

가 뒤에서 선양했습니다만, 기연(機緣)이 익지 않아서 밝게 드러낼 길이 없는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법의 유통은 뒷날을 기다려야 할 것도 같았습니다.

우리 선비(先妣)인 인예(仁睿) 국모(國母)께서는 누생(累生)에 불법을 떠받들고 적겁(積劫)토록 선인(善因)을 닦아 오시다가 이번에 가람(伽藍)을 건립하면서 국청사(國淸寺)의 웅장한 규모를 본받으시고, 묘법(妙法)을 드날리며 불롱봉(佛隴峰)의 드높은 풍도를 옮겨 오려 하셨는데, 대원(大願)을 미처 이루지 못한 채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께서는 종사(宗社)의 대통(大統)을 이어받고 제왕의 지위에 오르시어 불도를 고수하며 존엄하게 거하셨습니다. 성선(聖善)[17]

의 절실한 소원을 따르고, 능인(能仁)[18]이 부촉하신 뜻을 받들어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이루었으니, 이는 실로 간절한 효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리하여 문모(文母)[19]가 지극히 참되게 세운 서원의 바다가 석일(昔日)에 남상(濫觴(發源))하여 일인(一人(제왕))이 잘 이어받은 공덕의 산이 금조(今朝)[20]에 위인(爲仞)[21]이 되는 광경을 실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각원(覺苑)에 봄날이 돌아오고, 황가에 회상이 열렸습니다. 천룡은 조용히 듣고 환희하며, 치소(緇素(僧俗))는 마음을 기울여 찬양합니다. 비록 사자후와 같은 변설이나 수미산과 같은 필력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임금님의 훌륭한 일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빈도(貧道)는 숙생(宿生)의 크나큰 행운으로 밝은 시대를 만나 공문(空門)에 몸을 의탁하고 불법(佛法)에 마음을 침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버려 진리를 묻고 목숨을 던져 스승을 찾고자 만경창파(萬頃蒼波)를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례(參禮)할 적에 국청(國淸)과 천축(天竺)[22]

에서 교관(敎觀)을 승품(承稟)하고, 불롱과 고산(孤山)[23]에서 탑묘(塔廟)를 예배하며, 목숨을 다해 전등(傳燈)할 것을 성심으로 다짐하였는데, 지금 평생의 소원을 거의 이루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생각을 다해 돌아갈 곳이 있고, 몸을 버려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하였고, “비록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다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이다.[24]

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그 말을 들었는데, 지금 그 사실을 확인하였으니, 너무도 기쁜 나머지 춤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나 감격하고 얼마나 경하(慶賀)하는지는 오직 성현만이 나의 심정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대각국사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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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평양시[2] 주(州)와 현(縣)[3] 현재 제주시[4] 김인위의 딸로 원순숙비, 김원황, 김원정, 김원충과 동기간(同氣間)[5] 아들 중 재상의 자리에 오른 이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6] 두 사람 다 문종의 후궁[7] 경원백 이호의 아들[B] 승려[8]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9] 인경현비의 차남[10] 문종의 동복동생 정간왕 왕기의 아들[11] 셋 다 김은부의 딸[12] 어진을 모신 전각[13] 고구려 승려 파야가 있던 곳이다.[14] 불교 경전, 그중에서도 화엄경을 뜻한다[15] 미세한 티끌이라는 뜻이다.[16] 고려시대 천태교관을 잘 알았던 스님이다.[17] 모친을 말한다.[18] 부처를 뜻한다[19] 인예태후를 비유한 말이다.[20] 이번 왕조라는 뜻으로 고려 왕조를 뜻한다.[21] 아홉 길의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22] 중국의 천축사를 뜻한다.[23] 중국 항저우 서호에 있는 섬 안에 있는 산이다.[24] 오나라 손등손권에게 올린 상소문에 있는 글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