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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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7대 대왕
인종 | 仁宗

파일:국보94호참외모양병.jpg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참외문양꽃병
출생
1109년 10월 29일
고려 개경 개성부 순덕왕후의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122년 5월 15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146년 4월 10일 (향년 36세)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보화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115년 2월 28일 ~ 1122년 5월 15일 (7년)
제17대 대왕
1122년 5월 15일 ~ 1146년 4월 10일 (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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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구(構) → 해(楷)
부모
부왕 예종
모후 순덕왕후
형제자매
3남 3녀 중 2남
배우자
연덕궁주, 복창원주, 공예왕후, 선평왕후
자녀
5남 4녀
종교
불교
신장
약 162.2cm 미만(만 13세 당시)[1]

인표(仁表)
묘호
인종(仁宗)
시호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2]



파일:고려 인종 시책.jpg

인종의 시책
1. 개요
2. 묘호와 시호
3. 생애
3.1. 재위 초기
3.2. 여진과의 관계
3.4.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
3.5. 붕어
4. 가족관계
5. 신성제왕
6. 기타
7. 대중매체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려의 제17대 대왕.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공효대왕'(恭孝大王). 는 '해'(楷).

인종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끊이지 않는 혼란의 연속이었는데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굵직한 역대급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궁궐에 타서 전소되는 엄청난 화를 입었으며, 묘청의 난 당시에는 묘청서경의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의 내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제8대 현종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가 이 시기에 종말을 고했으며, 인종 대에는 그동안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아래에서 축적되고 있던 불합리함과 그에 대한 불만도 한꺼번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6대 성종음서 제도가 생기고, 성종 본인도 신권 우대와 신분제 강화를 너무 지향해서 문벌귀족 사회가 등장했던 것은 맞지만 예종 시기까지만 해도 고려 국왕의 왕권이 강했으며 약하지 않았었다. 제15대 숙종과 제16대 예종의 왕권은 신하들이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을 만큼 막강했던 편. 그 시절까지만 했어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비록 일생을 정치적 혼란에 시달려야만 했었고 본의아니게 고려의 쇠퇴 계기를 제공해버렸지만 군주로서의 자질은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했을 때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일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기에 차마 죽일 수 없다하여 유배형을 내리는 데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있고 덕있는 왕'이라 칭송하였는데 그래서 '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 외에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들을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은 사람이었던 듯.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일족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척준경이 나중에 한 짓을 보면 척준경 건에 대해서는 실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자겸 딸들의 경우, 아버지까지 저버리고도 남편을 지켜준 셈이니 우유부단하게 판단해서 그녀들을 봐줬다고 해도 뭣하다. 한마디로 인종의 비들(이자겸의 딸들)은 반역자의 자식이기는 했지만 반역에 참가하기는 커녕 인종에게의 충의와 지조를 지켜가며 그의 목숨을 보호해줬으니 무차별하게 처벌했다면 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종은 묘청 등을 비롯한 신진 일파들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보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개경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집권층의 반발에 부딪혀서 실패했던데다 묘청 또한 반란을 일으킨 뒤 제거되면서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인종은 권력 다툼과 2번의 큰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생 동안 왕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인지 치적을 남길 새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종의 업적은 형부(刑部)에 속해 있었던 율학을 국자감[1]으로 옮겨 경사 6학[2]으로 정비했다는 점과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는 점 정도였으니 당시에 김부식 같은 대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종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 본인은 국왕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을지언정 국정을 잘 돌보기 위해 《삼국사기》 편찬, 경사 6학 정비,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하는 등 평생 동안 나라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다.인종이 발표한 유신 개혁안 15개 조항. 그 내용은 재변이 연달아 일어나고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진 것은 국왕 자신의 허물 탓이라고 했고, 이에 자책하면서 중앙과 지방에 정치 개혁안을 내린 것이었다.

그의 집권기까지만 했어도 고려의 태평성대가 표면적으로는 유지되는 듯 보였다. 인종 재위기에는 지배층간의 분열 역시 심화되어 결국 다음 국왕인 의종 때부터 고려는 무신정변 등의 온갖 정치적 변란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면서 고려 역사의 전개가 완전히 뒤틀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사실 고려의 쇠락은 인종보다는 아들 의종의 책임이 훨씬 막대한 게 사실이다. 하필 의종이 정무에 관심은 전혀 없고 노는 것이 제일 좋아 20여년간 놀기만 한 놀자파 군주였으니.

인종은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오르면서 일생을 권력 다툼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사후에서도 정변이 일어났으니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으며 평생 국정에 집중한 것으로 볼 때, 의지 만큼은 어느 명군들 못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공식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묘호를 달리 불러 '인묘'(仁廟)라고도 불렸다. <인종 시책>에선 인종 묘호를 올렸다고 언급한다.

시호는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이다. 대표시호는 어들 의종이 올린 '공효대왕'(恭孝大王)이다. <인종 시책>에서 의종은 왜 '공효' 시호를 올렸는지 설명했는데,
(恭)은

'덕(德)의 기틀을 지켰다.'

(孝)는

'행한 일의 의도가 매우 고귀하다.'

란 뜻으로 올렸다고 한다.

생전의 존호, 미칭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당시 재위 때 일컬어진 존칭으로 '신성제왕'(神聖帝王)이 있다. 정지상의 《동산재기》(東山齋記)[3], <염경애 묘지명>에선 '천자'(天子)로 불렸다. 《동문선》에 수록된 <서경 대화궁 대연치어>에선 인종은 '천'(天), '건원'(乾元), '황상'(皇上)으로 불렸고, 그의 거처는 '제소'(帝所), 그의 얼굴은 '천안'(天顔)으로 불렸다.


3. 생애[편집]


"고선철왕(古先哲王)들은 방하(方夏)[4]

를 보살필 땐 반드시 저이(儲貳)[5]를 세워 천서(天序)를 잇게 했다. 감히 사사롭게 편애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포용하여 국본(國本)을 다지고자 한 것이다.

짐(朕)이 자리에 오른 뒤, 계속하여 빼어난 후사를 찾고 있었다. 점을 쳐보기도 하고 신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여 좋은 날을 정해 오늘 휴명(休命)[6]

을 기쁘게 펼치겠다.

아(咨)! 너(爾) 원자(元子) 구(構)는 중용의 순수함과 산악의 굳은 자태를 가졌다. 인의효우를 아는 그 마음은 타고 난 것이다.

(생략)

이에 동조의 자리(東朝之位)를 쥐게 하니, 조종(祖宗)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 지절(持節)을 들고 널 왕태자(王太子)로 책명한다.

오호라(於戱)! 경손함과 진중한 마음가짐만이 고귀함을 드러낼 수 있다. 넌 사부의 훈계를 지키고 향락을 경계하며 바른 사람이 아니면 거부하고 바른 소리가 아니면 듣지 말거라. 네가 좋은 풍습을 보여 만방(萬邦)을 보다듬어야 짐의 아들이 고선철왕들과도 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다. 말을 듣고 영원히 복을 누리거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인종의 왕태자 책봉문.

《고려사》 <김인존 열전>에 따르면 예종은 왕태자 책봉을 서경 장락궁에서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인존의 반대로 개경에서 치르게 되었다. 만약 서경에서 태자 책봉식이 거행됐다면 목종과 더불어 서경에서 후계자가 된 국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개경 밖에서 후계자가 된 국왕으로는 강도에서 태손태자가 됐던 충렬왕도 있다. 만 6세에 태자가 되었으며 7년 동안 동궁에서 거처했다.

예종은 인종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해 붕어하기 며칠 전 미리 한안인[7]을 통해 국새(國璽)를 전달하고 직접 인종에게 유언을 전했다.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유조를 선포했고, 인종은 예종이 붕어하기 전 며칠간은 권국사(權國事)가 되어 국왕 아래, 세자 이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1122년 부왕인 예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권국사 왕해는 만 13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3.1. 재위 초기[편집]


그러나 인종이 왕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사》<인종 세가> -총서-에

예종 17년(1122년) 4월 병신일에 예종이 붕어하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8]

은 왕[9]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평장사[10] 이자겸이 왕을 받들어 중광전[11]에서 즉위시켰다.

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훈요십조 등으로 인해 마땅히 승계할만한 자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문제가 있는 경우에 형제가 상속받는 케이스가 자주 있었다. 덕종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정종이 계승받았고, 정종은 아들들의 나이가 어려서 문종이 바통을 넘겨 받았다. 2대 혜종의 아들 역시 나이가 어려 대신 정종이 즉위했고, 정종의 아들도 어려 광종이 즉위했다. 선종의 아들 헌종도 몸이 약해 숙종이 보위를 찬탈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종의 입지는 위태로웠고 외조부인 이자겸은 인종의 정적이 될만한 이들을 조정에서 없애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려사》 <숙종 종실 열전>을 보면 가장 위험했던 4남 왕보는 경상도 성주군, 5남 왕효는 남부 지방으로 유배를 가듯 떠났고 6남 왕서는 자기 사병을 해산시키고, 손님을 받지 않으며 에 미쳐 사는 척해 이자겸의 마수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겨우 왕실이 조용해졌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조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의 힘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해 권력을 한 손에 움켜 쥐고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며 갖은 횡포를 부렸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는데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시 예법으로도 인종과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다.


3.2. 여진과의 관계[편집]


인종이 즉위한지 1년 후인 1123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가 붕어하고, 금 태종 완안오걸매가 즉위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북송은 번갈아가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동맹을 제의했다.

7월에는 합문지후 후장이 이끄는 60여 명에 이르는 북송 사신단이 금나라를 공격해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8월에는 금나라 사신 고백숙 등이 고려에 와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주민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금 태종의 의사를 전달했다. 인구가 감소했던 고려는 옛날부터 전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오는 북방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고려는 끝내 이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또한 금 태종은 인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요나라 천조제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요나라를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요나라 황제를 잡지 못했다"

고 말했다. 요나라 황제도 도주했으니 이제는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황제 등극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금 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요나라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았고, 결국 요나라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건국한 이후 9대 219년만에 멸망했다.

1125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表)가 아니고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인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논의했다. 윤언이를 위시한 대다수는 오랑캐와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서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성계의 제2차 요동정벌 4불가론 중 하나와 유사)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

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전면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臣)이라고 칭하는 등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3.3. 이자겸의 난(1126년)[편집]


한편 인종은 만 18세가 되던 해에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횡포를 보다 못한 나머지 몰래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고위 무관 최탁, 오탁, 권수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사주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이자겸은 숭덕부(인종이 내린 이자겸의 관저)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으며, 자신과는 사돈지간이었던 척준경에게 군사를 내주고 궁궐로 보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본궐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궁성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 궁궐은 불타버리고 지낼 곳이 없어진 인종은 외조부에 소환당해 남궁에 갔다가 이자겸의 집(개명택)에 머무른다. 이것도 호위대와 같이 간 것도 아니라 왕이 호위병도 가마도 없이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한편, 인종을 독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종의 왕후였던 두 딸이 독이 든 떡을 땅에 흘리고, 탕약을 실수로 떨어트린 척하고 깨먹는 등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두 왕후는 이자겸이 축출당한 후 궁에서 쫓겨났지만, 인종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보답인지 반역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나 가택을 하사 받는 등 꽤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간의 사이가 틀어졌음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남몰래 최사전을 보내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를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분을 일으킨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되고 만다.

이와 관련해서도 엄청난 기록이 있는데 척준경이 인종을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갈 때 방망이 하나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자겸 측의 군인들이 막아서자 그가 고함만 내질렀을 뿐이었는데도 감히 척준경 일행을 공격할 엄두를 못냈다고.

이후 자신의 외조부의 목숨을 거둘 수는 없었으니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보내 처벌을 유배 조치만으로 끝내고, 그 곳에서 사망하자 사후 관작을 어느 정도 돌려주었다. '검교태사 및 한양공'. 즉 명예 태사에 한양의 공작이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에 제수하려고 했으나 척준경이 거절했고, 대신 신흥사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서경파의 정지상의 주도로 신하들이 그를 극렬히 탄핵하자 척준경이 눈치를 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체포, 삭탈관직하고 '귀향형'에 처했다.

이 유배지는 척준경의 고향 곡주였다. 척준경이 받았던 처벌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귀향형으로 죄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관직에 나올 수 없도록 한 형벌이다. 형벌이 끝난 뒤에도 관직에 복귀할 수 없다는 점이 특이한데 후에 이는 조선시대의 '귀양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1144년 척준경은 얼마 후 등창이 발병하여 사망했다.

드디어 최악의 외척 이자겸과 그 세력을 일소하는데 성공한 인종은 새롭게 국정을 이끌어야한다는 결심을 가졌고, 서경파 육성에 나선다.

3.4.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편집]


인종은 자신을 문벌귀족으로부터 지지해줄 외척 인주 이씨들이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자 새로운 친위 세력 육성을 시도했다. 바로 그들이 서경파였는데 선왕 숙종, 예종이 장락궁 행차, 궁궐 건설, 여진 정벌 등을 통해 세력기반을 다져 놓았고 대부분 문벌귀족이 개경 출신이라 서경엔 힘이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자겸 축출 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인종은 정지상, 백수한 등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서경 출신인 승려에게도 힘을 실었는데 그가 바로 풍수지리와 도참을 연구하던 묘청이다.

딱 여기까지면 꽤 괜찮았을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은 각자 서경 대 개경, 문장 대 문장으로 끊임없이 대결해온 희대의 라이벌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서경은 장락궁을 중심으로 용덕궁, 대화궁, 구제궁 등 이름 있는 궁궐이 조성돼 서경 분사 조정과 개경 중앙 조정의 힘도 서로 견제해야 하는 통에 바빠졌다. 게다가 윤언이(서경파가 제안한 '칭제건원'을 지지)같은 전형적인 개경 문벌귀족도 대금 사대 문제로 서경파를 은근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정계가 복잡해졌다.

인종은 뒤에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며 조금씩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문제는 이 대립이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묘청이 특히나 계속 선을 넘는 행동을 범했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시발점은 서경 천도 논의 때문이었다. 여진족 즉 금나라에 대한 사대는 고려에게 큰 수치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재위 9년(1131년) 9월 정유일 기록엔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되어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1,000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

라고 떠들고 다녀서 금 조정이 이를 알게 되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간쟁했다. 하지만 인종은 결국 그를 임명했다.

묘청은 이 상황을 이용해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를 포함한 천하 36개국이 고려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한껏 떠들었다. 물론 이는 당연히 말이 안된다. 수도 하나 옮긴다고 주변국이 복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당시 동북아시아를 다스리던 이들은 금희종, 송고종, 서하숭종, 리신종, 요덕종, 스토쿠 덴노(실질적으로는 조우고인 도바 상황)등으로 요덕종과 숭종을 제외하면 평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만만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이 나라들은 일본만 빼면 그런대로 잘나가고 있었기 때문. 묘청은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인종을 현혹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예를 들면 대동강 물에 기름진 을 넣어서 강이 오색 영롱하게 빛나 보이게 했다는 둥, 서경의 궁궐로 들어가니까 노랫 소리가 들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서경 천도 논란으로 인해 조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지만 개경파의 거두였던 김부식의 거센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게다가 평양에 지은 궁궐에서 연이은 불길한 징조가 묘청의 입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비단 대화궁만이 아니라서 중흥사라는 절에서는 화재가 나고 인종이 행차하던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내리며 길 잃고 늪에 빠지고 진눈깨비까지 내리는 등 묘청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악재가 일어났고 이는 정적들에게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인종 역시 조금씩 막나가던 묘청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급기야 자신의 입지에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묘청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묘청과 그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짓고 서경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총사령관 김부식의 재빠른 조처로 곧 서경에 고립되었고, 김부식의 조이기 전략 중 내분으로 묘청은 부장 조광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서경의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서경 사람들이 다시 저항을 하게 되었고, 완전히 이를 진압하는 데는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신채호 선생을 필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용하다 보니 묘청의 과격한 행동을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유학자들의 왜곡된 기록이라고 보는 시각도 간혹 있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묘지명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왜곡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또한 서경 천도 문제는 인종이 사실상 일부러 키운 것이나 다름없어 소위 묘청의 난이라 불린 사건은 묘청이나 정지상 등의 서경파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왕이 자초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자세하게 표현하면 제 때에 멈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묘청의 난으로 인해 꽤 큰 타격을 입은 인종은 결국 스스로를 탓하는 조서를 써 중서문하성 및 기타 정부기관에 선포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는 자책하는 조서를 쓰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서경의 난이 매우 큰 충격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관련하여 《동문선》 제23권에 <인왕죄기교서>(仁王罪己敎書)가 남아 있다. 특이한 건 내용에선 '죄기조서'라고 칭했는데 분류는 '교서'로 했다.


3.5. 붕어[편집]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점(大漸)에 이르렀다.

오호라! 성철의 도(聖哲之道)는 존망을 아는 것이며 불로의 말(佛老之言)은 생사를 알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치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돌아가는 자는 변화에 순응해 남지 않고, 남아있는 자는 슬퍼하며 효를 드러내는 것은 천하의 도이다.

아! 너 왕태자(王太子) 현(晛)은 충효(忠孝)의 미덕을 갖추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덕업(德業)이 융성하여 인망(人望)을 갖추었다. 이에 마땅히 왕위(王位)에 오를 수 있도다.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성현의 철칙을 깊게 생각하고 조종의 영광을 저버리지 말라.

문무백료(文武百寮)는 다 같이 협력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 왕가(王家)를 보우하라. 중외(中外)에 이를 포고해 짐의 뜻을 알게하라.

- 《고려사》 <인종 세가> 중 발췌. 인종의 마지막 유조(遺詔)로 왕태자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은 탓인지 결국 38세라는 비교적 젊은 보령에 병을 얻어 본궐 보화전(保和殿)에서 붕어했다. 야사에는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들자 의원의 치료에도 소용이 없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이자겸, 척준경, 묘청 등의 귀신이 왕의 몸에 씌여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왕실에서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인종은 끙끙 앓다가 승하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역대 임금 중 <시책>(諡冊)이 남아있는 유일한 임금이기도 하다. <시책>은 으로 만들어서 <옥책>(玉冊)이라 불리기도 하고, 귀한 책이라 해서 <보책>(寶冊)이라고도 한다. 선대 임금이 죽으면 차대 임금이 선대에게 시호를 올렸고, 천자일 경우 묘호까지 올렸음을 고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글자를 새기고 을 채워 넣어 외관이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유물은 글자에 채운 금이 거의 긁어진 상태이다. <시책>의 양 끝에는 부월(斧鉞)을 들고 있는 호위 무장을 그려 넣었으며, 인종이 죽은 뒤 1146년 3월 태자 왕현이 만들어 올렸다. 자신을 신(臣)으로 표현했고, 인종이 호경지란(鎬京之亂)을 제압한 것을 칭송했으며, 시호 '공효'(恭孝)를 올린 이유를 설명하고, 묘호 '인종'(仁宗)을 소개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4. 가족관계[편집]



  • 제1비: 공예왕후 임씨 - 임원후의 장녀
    • 의종 장효대왕
    • 대령후 왕경
    • 명종 광효대왕
    • 원경국사 충희
    • 신종 정효대왕
    • 승경궁주: 공화후 왕영[12]과 혼인
    • 덕녕궁주: 강양공 왕감[13]과 혼인
    • 창락궁주: 신안후 왕성[14]과 혼인. 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의 어머니
    • 영화궁주: 소성후 왕공[15]과 혼인
  • 제2비: 선평왕후 김씨 -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선(金璿)의 장녀



5. 신성제왕[편집]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무엇보다 겸손을 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왕(王)과 공(公)은 스스로를 고(孤: 아버지가 없음)[16]

, 과(寡: 덕이 적음), 불곡(不穀: 착하지 못함)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에서 신하들이 상서를 올릴 때 성(聖)자를 쓰지 말라고 하였으며, 공자도 역시 인자(仁者)나 성인(聖人)이라고 자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신하가 임금을 높이고 찬미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이는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상소나 공문서에서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인종 16년(1138년) 2월 26일


당대 고려인들이 군주를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해 인종 스스로가 내린 조서에 나와 있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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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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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병
  • 인종은 현재 북한의 영토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있는 장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고려왕릉들처럼 이미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당했다. 위에 있는 사진 두 장은 국보 제94호인 청자참외문양꽃병과 인종의 '옥돌 <시책>'으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정식 학술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아니고, 1916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일본인 골동상에게 구입하면서 유물대장에 인종의 '옥돌 <시책>'과 함께 장릉 출토라고 기록해 놓아 신빙성이 아주 높다. 또 이것 외에 알려진 부장품으로 질이 우수한 청자 접시 5점 1세트, 청자합, 청자 받침대, 뚜껑 있는 청자잔,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 내합과 옥돌 외합, 청동 인장 등도 있다. 정작 도굴꾼이 파냈다는 장릉의 위치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대로 개성 서쪽 벽곶동으로만 추정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 송사》에 의하면 태자 시절 금나라가 발흥할 때 북송의 외교정책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1118년 고려가 북송에 의관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당시 11세였던 인종이 의관에게 "송나라금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금나라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의관은 1119년 송나라로 귀국했고, 이 의견을 전달했지만 송나라 황제 휘종이 의관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후 북송은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결과는 정강의 변남송의 건국이었다. 사실 이 조언은 11세인 인종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태자 교육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는데 성실했고,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인종 때까지는 군주들이 노력을 많이 했다. 문제는 자식에게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에는 인종의 태묘 악장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은 <이안>(理安)이고, 가사는 빠져 있다.

  • 여러가지 의미로 고려 왕조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이다. 인종은 34명의 왕 중 딱 17번째의 임금이다. 18대 왕 의종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인종의 후손이므로 고려 왕조의 중시조 역할을 하였고, 인종 이후를 기점으로 고려가 쇠락했다. 즉, 다시 말하면 1대~17대:발전 기간, 18대~34대: 쇠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 북송 말기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 인종은 재위 1~2년차 14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했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다고 했다. 또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 했다고 묘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임금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해(楷)는 왕우(王俁)의 세자이다. 임인년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 성격이 지혜롭고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 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지람을 당했다.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세차>(世次)

  • 인종 사후로 고려의 왕위 계승은 매우 뒤틀리게 된다. 그 이후 정상적인 즉위와 퇴위 과정을 보낸 이는 거의 없었는데 고종 정도가 유일하고[17] 나머지는 다 그 계승과 물러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18]


7. 대중매체[편집]


  •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배우 이성호가 연기했다. 극중에서는 거의 특별출연이나 다름없는 비중으로 정중부김돈중 과거의 불상사 및 회상에서 약간 언급되는 것으로 나온다.


8. 같이보기[편집]



[1] 제1대 태조 왕건 때 경학(京學)이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관제를 개혁하면서 경학을 국자감이라 개칭하였다.[2]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3] 원문은 실전됐고 《파한집》 <권하>에 일부분이 발췌되어 기록되어 있다.[4] 천하의 다른 말.[5] 태자의 다른 말.[6] 아름다운 명령.[7] 韓安仁. 예종이 태자를 부탁한 고명대신 중 한 명으로 조정에서 존재감이 컸다. 이후 다른 고명대신들과 내분이 생기고 외척 이자겸에게 밀리면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8] 숙종의 아들은 예종, 왕필(차남, 일찍 죽음), 원명국사(3남, 이미 출가), 왕교(7남, 일찍 죽음)를 제외하고도 왕보(4남), 왕효(5남), 왕서(6남) 3명이나 있었다.[9] 인종을 의미.[10] 당시 이자겸은 중서문하성 소속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였다.[11] 重光殿. 본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 본궐의 여러 편전 중 제1편전이라 부를 수 있다.[12] 문종의 4대손[13] 숙종의 손자[14] 현종의 5대손[15] 숙종의 증손[16] '고아(孤兒)'의 그 '고(孤)'다. 일반적인 부자 상속제 하에서는 부왕이 승하해야 세자가 승계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인 만큼, 아버지가 이미 죽어서 없어야 한다(...).[17] 다만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꼭두각시 노릇이었기에 즉위나 퇴위에서만 정상이었지 인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모를 겪었다.[18] 의종(강제퇴위)-명종(강제옹립, 강제퇴위)-신종(강제옹립)-희종(강제퇴위)-강종(강제옹립)-고종-원종(강제퇴위 1번)-충렬왕(강제퇴위 1번)-충선왕(강제퇴위 1번)-충숙왕(퇴위 1번)-충혜왕(강제퇴위 2번)-충정왕(퇴위당한 아버지 대신 즉위)-충목왕(강제퇴위)-공민왕(강제즉위, 암살)-우왕(이인임에게 옹립, 강제퇴위)-창왕(강제옹립, 강제퇴위)-공양왕(강제옹립, 강제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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