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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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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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고려 재상지종 15가문


파일:인천 이씨의 종문.png
仁川 李氏
인천 이씨


관향
인천광역시
비조
김수로(金首露)
시조
이허겸(李許謙)
집성촌
충청북도 영동군
충청북도 보은군
충청남도 청양군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장흥군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합천군
인구
83,996명(2015년)[1]
링크
인천이씨대종회
1. 개요
4. 역사
5. 분파
6. 인물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현재 인천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원래 이씨가 아니라 허씨였다. 시조 허기당나라 황제에게 이씨 사성을 받으면서 이허기라 개명했고 그의 10세손 이허겸이 집안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손자이자 고려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자연 때 비로소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이 됐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한마디로 고려 문종 이래 10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세 가문. 조선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에서 조선 왕가로 일어선 뒤에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가계를 일부 도용했는데, 그게 바로 인천 이씨가문이다.[2]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 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

시조 묘소가 인천광역시에 있다. 인천은 신라시대 때 율진군 소성현(栗津郡 邵城縣)이었는데, 고려시대 현종이 양광도 수주 소성현(兩江道 樹州 邵城縣)으로 고쳤다. 이자연의 딸인 인예태후 덕분에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3]으로 승격되었고, 손녀인 문경태후 때 다시 인주(仁州)로 승격해 수주(樹州)와 떨어진다. 공양왕 때 수주는 경원부(慶原府)로 승격된다. 이후 조선시대 태종이 전국에 주(州)로 끝나는 지명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일부는 바꾸게 했고 그래서 지금의 지명인 인천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경원', '인주' 이씨라고도 불렸다.[4] 그래서 가끔 본 위키나 다른 문서에 경원 혹은 인주 이씨라 적혀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인천 이씨라고 보면 된다.[5]

고려 시대때 약 80년간 대대적으로 10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며, 고려 10대 갑족(甲族) 이기도 하다. 한국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호칭인 삼한갑족(三韓甲族) 중 하나이다.

현재는 대구광역시[6]경상남도[7], 전라남도쪽에 비교적 많이 사는 편이다.


2. 시조[편집]


시조는 고려 현종상서좌복야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이다.[8]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최고 직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太后)의 소생들인 순종·선종·숙종이 차례대로 왕위를 이었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도 인예왕후의 소생이다.

3. 분가[편집]


분가로는 조선 초 유명한 무신 이징옥의 양산 이씨[9][10]가 있다. 이징옥의 형 이징석 후손들은 양산 이씨 가계를 이었으나, 역모로 몰린 이징옥의 후손은 경주에 숨어살다 순조 때 사면복권된 후로 인천 이씨로 다시 편입됐다.[11] 인천 이씨 대종회 일부에서 주장하기로는 흥양 이씨와 함안 이씨도 인천 이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나, 명백한 근거는 없다. # 흥양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면 인천 이씨도 경주 이씨에서 분적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흥양이씨와 경주이씨 간의 관계, 흥양이씨와 인천(인주)이씨 간의 관계). 함안 이씨는 인천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사실을 연대적 오류를 들며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천 이씨와 함안 이씨에 공통으로 나오는 이방실 장군은 여주 이씨 경주파(진사공파)[12] 5세로 이름이 거꾸로 나온 실방(實芳)으로 적혀 있다.


4. 역사[편집]



4.1. 고려시대 이전[편집]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전한다. 수로왕의 장남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 김씨가 되고,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이다. 허황옥의 23세손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는데, 때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755년) 이때 당나라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성인 이씨사성받았다. 당시 그는 이씨와 허씨를 합쳐 '이허'를 성씨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10세손 이허겸(李許謙)이 바로 인천 이씨의 시조이다.[13] 고려사 후비열전에 따르면 원성왕후의 외조부인 이허겸은 고려 현종 15년에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에 추증되면서 소성현(邵城縣)에 식읍(食邑) 1천 5백 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태인 허씨 족보(1918)[14]에는 위와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태인 허씨의 시조는 수로왕보주태후의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인데, 그는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장남 허즙(許楫)과 차남 허도(許棹)를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 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는 고려 왕조에 의해 '이'라는 성씨와 '허겸'이라는 이름을 내려받고 소성백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인천 이씨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사 이자연 열전에는 이허겸이 생전에는 소성백에 봉해졌다고 하고 있는데다 고려 건국 초에 사성정책이 유행했고, 상식적으로 인천 이씨의 주장처럼 두 성을 동시에 쓴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워서 정황만 놓고 보면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같은 열전에서 이허겸의 선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대관(大官)이 당나라에 가서 이씨를 사성받았다고 하고 있으며, 실제로 신라 때 사성받은 것이라면 신라 때까지만 해도 신라 중앙 6부의 성씨인 기존의 이씨와 다른 이씨라는 점을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성을 겹치든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려 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의외지만 남아있는 기록만 놓고 보면 이쪽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


4.2. 고려시대[편집]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날마다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갔다."

(이자겸의)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으며,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에 실어 나르니….

고려사[15]

고려 전기에 대를 이어 세력을 점차적으로 키운 문벌 귀족 중에서도 최고 권력을 가진 가문이 바로 인천 이씨였다. 고려 시대 당시에 인천 이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집안이 없었을 정도.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왕실일 정도로 한 때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이였다.

파일:경원 이씨와 왕실의 혼인 관계.jpg

이 성씨의 시조인 이허겸부터 고려 초기의 권세가로 세력을 떨쳤고, 아들인 이자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증손자 이자의계림공 왕희와 대립하다가 암살당하면서 한동안 위기를 맞았지만, 또 다른 증손이자겸이 가문의 수장이 된 후 권세가 극에 달했다. 이에 이자겸은 자기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었고, 심지어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자겸이 꾸준히 자기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고려 최고의 외척 문벌귀족 세력이던 인천 이씨는 조선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가 아홉 명이 있었다.[16] 고려 문종의 부인이 인천 이씨이며, 조선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파평 윤씨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이다.

이 집안에서 본격적으로 왕과 사돈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자연[17]은 당시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고, 과거 문과로 시험쳐서 관직에 들어서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실력파 인재였다.

기타 주요 인물로는 고려 무신 집권기 초기의 문학자로 파한집 등을 저술한 한림원학사를 지낸 이인로, 여말선초에 형조판서, 대사헌, 참찬의정부사를 지낸 공도공 이문화 등이 있다. 이문화는 세조정희왕후의 외조부다.


4.3. 현재[편집]


고려 시대에 비하면 2015년 기준 전국 인구 조사에서 전국에 약 83,855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과거 리즈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적어진 숫자. 이씨 성 치고는 드물게 알려진 지역 출신 유명 인물이 많지 않다.

아마도 고려 중기(이자의, 이자겸)부터 조선 초기(이징옥)에 걸쳐 본가나 방계에 걸쳐 여러차례 역모 사건에 휘말린 결과로 가세가 크게 위축된 것이 원인으로 파악된다. 특히 조선초기 세조연간에 일어난 이징옥의 난이 치명타였다.

또 다른 가문 몰락의 원인으로는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견제를 꼽는 경우도 있다. 조선의 왕가인 전주 이씨의 원래 시조는 이광희였는데 조선 건국이후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었는데 이들은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조선 건국이후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위인데 학자들은 고려 당대 최대의 명문가였던 인천 이씨의 2세 이한,3세 이자연,이자상 부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본다. 이자상의 이름만 비슷한 이천상으로 바꾸고 같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조작하여 전주 이씨 족보에 등재하였다. 조선왕조 입장에선 이러한 약점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키기 위하여 인천 이씨 가문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이유가 충분하였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세자 석의 비가 인천 이씨였는데 조선 조정입장에서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외척가문이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과거 급제자조차도 통틀어 겨우 9명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문이 크게 쇠락하였다.

대신 모계쪽으로는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의 모친이 인천 이씨이고, 조선 중기 유명한 유학자 남명 조식의 모친이 인천 이씨이다.

시조인 이허겸의 묘려(墓閭)인 원인재가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에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위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수인선 원인재역이 여기서 이름을 땄다.


5. 분파[편집]


  • 시중공파 (侍中公派): 시조의 8세 이작신(李作臣)
  • 공도공파 (恭度公派): 이문화(李文和)[18]
  • 쌍명재파 (雙明齋派): 시조의 7세 이인로(李仁老)
  • 충강공파 (忠剛公派): 이징옥(李澄玉)


6. 인물[편집]


이름
생몰년

비고
20세 이전
이한(李翰)
? ~ ?

2세. 고려의 문신.
이자연(李子淵)
1003 ~ 1061

3세. 고려의 문신.
이정(李頲)
1025 ~ 1077

4세. 고려의 문신.
인예왕후(仁睿太后)
? ~ 1092

4세. 고려의 왕비.
이예(李預)
? ~ ?

4세. 고려의 문신.
이오(李䫨)
1042 ~ 1110

4세. 고려의 문신.
이자인(李資仁)
? ~ 1091

5세. 고려의 문신.
이자의(李資義)
? ~ 1095

5세. 고려의 문신.
원신궁주(元信宮主)
? ~ 1095

5세. 고려의 후궁.
사숙태후(思肅太后)
? ~ ?

5세. 고려의 왕비.
연덕궁주(延德宮主)
? ~ 1139

5세. 고려의 후궁.
복창원주(福昌院主)
? ~ 1195

5세. 고려의 후궁.
이자현(李資玄)
1061 ~ 1125

5세. 고려의 문신.
이자덕(李資德)
1071 ~ 1138

5세. 고려의 문신.
이자겸(李資謙)
? ~ 1095

5세. 고려의 문신.
이자량(李資諒)
? ~ 1123

5세. 고려의 문신.
이식(李軾)
1090 ~ 1151

6세. 고려의 문신.
이지미(李之美)
? ~ ?

6세. 고려의 문신.
이지보(李之甫)
? ~ ?

6세. 고려의 문신.
문경태후(文敬太后)
1094 ~ 1118

6세. 고려의 왕비.
의장(義莊)
? ~ ?

6세. 고려의 승려.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
쌍명재공파
7세. 고려의 문신.
이장용(李藏用)
1201 ~ 1272

9세. 고려의 문신.
이원굉(李元紘)
? ~ ?
시중공파
12세. 고려의 문신.
이징옥(李澄玉)
1399 ~ 1453
충강공파
16세. 조선의 반란자.
30세 이전
이두황(李斗璜)
1858 ~ 1916
공도공파
28세. 친일파
이희석(李喜錫)
1892 ~ 1950
공도공파
30세. 독립운동가
이규석(李圭錫)
1897 ~ 1950
공도공파
30세. 독립운동가
31세(祥/禧)
이수정(李洙貞)
1890 ~ 1934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32세(柄/根)
이태준(李泰俊)
1883 ~ 1921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이태길(李泰吉)
1920 ~ 2014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33세(熙/煜)
이경희(李慶熙)
1880 ~ 1949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이장희(李章熙)
1900 ~ 1929
공도공파
시인
34세(在/埈)
이우환(李禹煥)
1936 ~
공도공파
미술가
35세(夏/殷)
36세(鉉/鍊)
이명흠(李明欽)
1949 ~
공도공파
장흥군수
37세(洙/泰)
이홍빈(李洪彬)
1923 ~ 1975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족보명 영빈(永彬).
이영권(李永權)
1934 ~
공도공파
정치인
이승우(李承雨)
1959 ~
공도공파
소설가

7. 같이보기[편집]


  • 인천광역시
  • 고려시대
  • 문벌귀족
  • 이자겸의 난
  • 안동 김씨 - 고려시대에 경원 이씨 문벌귀족이 있었다면 조선시대에 대응되는 척족은 안동 김씨가 있다. 이자연은 정조의 충신 김조순에 비견되는 명망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종의 충신이었으나, 후손들이 국정 농단한 것까지 똑같다.[19] 다만 차이점도 꽤 있는데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면서 고려의 황권까지 도전한 것과는 다르게 안동 김씨는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겸과 다르게, 안동 김씨의 수장이던 김좌근은 흥선대원군 때도 예상과는 다르게 크게 무너지지 않고 잘 대접받고 살았으며 의외로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 때 꽤 관직에 올랐고,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에도 관직에 많이 올랐다. 그리고 안동 김씨는 경원 이씨랑은 다르게 능력은 꽤 있었다. 이 쯤 되면 경원 이씨와 비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여흥 민씨가 이자겸 같은 짓거리를 안동 김씨보다 더 많이 저질렀다.[20]

[1] 인천 이씨 83,855명 + 인주 이씨 141명[2]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세워진 이자춘신도비에서는 전주 이씨의 역사를 고려 초기의 아간(6등급) 이광희(李光禧)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희 이하로는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광희의 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는데, 《인천 이씨 족보》에서 퍼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연은 이한의 아들이고, 시중을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인천 이씨 족보》에서 이자연의 동생으로 '이자상'(李子祥)이 있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이자연의 아들로 이천상(李天祥)이 있으며, 이름은 다르지만 복야를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3] 경사의 근원지라는 의미다.[4] 본관 이칭은 경원 이씨(慶源 李氏) → 인주 이씨(仁州 李氏) → 인천 이씨(仁川 李氏) 순으로 바뀌었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 인주이다.[5] 경주 김씨를 월성 김씨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지역명이 바뀌면서 바뀐 것이다.[6]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과 동서변지구에 인천 이씨들의 집성촌이 있었다. 현재 동서변동은 택지지구로 개발되었고, 연경동 역시 개발되어 거진 초토화 됐으나, 여전히 주변에는 인천 이씨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다.[7] 경상남도 창녕군의 가항리 인근에 시중공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이씨 집성촌이 있다. 또한 창원시 진해를 중심으로 공도공파 후손들이 꽤 있다.의령군에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 모여있다.[8] 고려 때 현종의 장인이 된 김은부의 장인이기도 하다.[9] 양산 이씨도 한자가 다른 두 가문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梁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고, 陽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다. 후자인 경우는 공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며, 양산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을 가리킨다.[10] 가락종친회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 성(姓), 본관(本貫)이다.[11] 인천 이씨 대동보 1982년판에는 나타나지 않고, 2009년판에 충강공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12]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 선생이 속한 계파로, 그는 경주파 11세이다.[13] 기(奇) - 검(儉) - ○ - ○ - 파(波) - ○ - 귀(貴) - ○ - 준(浚) - 겸(謙). 인천 이씨 대동보(1982, 열람 시 로그인 필요)[14] 열람 시 로그인 필요[15] 당시 고려 시대인천 이씨의 권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자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권력을 악용한 부정부패로 당시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갔다.[16] 대과 급제자를 말하는 것임, 진사시, 생원시는 예외.[17] 이자겸의 조부. 사실 이자연 이전엔 왕과 직접적으로 사돈관계를 맺지 않았다. 굳이 기원을 찾자면 이허겸이 현종의 왕비들 중 3명의 아버지인 김은부의 장인이긴 하지만.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과 결혼시켰는데, 이 중 장녀가 인예왕후다.[18] 고려의 권신인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의 현손, 이자상>이예>이공수>이지저, 이문화는 이지저의 6대손임[19] 비슷한 예로 해주 최씨풍양 조씨에 비유할수 있다. 1위 가문인 인천 이씨와 안동 김씨가 무너지자 1위로 등극한 가문들이다.[20] 여흥 민씨도 세도정치 이전에는 민유중, 민정중, 민시중, 민진후, 민진원, 민진장 같은 충신들을 배출했지만 후손들이 국정농단을 한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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