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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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이자 예술인.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효종의 동복 동생이며 용성대군의 동복 형이다.
또한 인조의 막내 남동생이자 원종(정원군)의 막내아들인 능창대군의 양자이다. 따라서 후술할 그의 친후손 남연군 이구와 그의 자손들 호적에 남연군이 은신군에게 입적 되기 전 뿌리가 인조의 후손이 아닌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대군이다. 동생 용성대군이 6살에 죽었고, 이후 조선에서는 대군이 없었기 때문.[2]
2. 생애[편집]
한성부 경행방 잠궁에서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뒤 아버지가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자가 되었고, 1630년 2월 7일[3] 에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고산 윤선도를 스승으로 두어 효경과 소학 등을 배웠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인조를 모시고 수행한 공로로 원종 공신 1등에 올랐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형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간다. 당시 두 형제가 겪었던 일들은 그 들을 수행한 문신 어한명이 쓴 《강도일기(江都日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 두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7년을 만주에서 고생한 형들과 달리 심양에 끌려간 지 1년만인 1638년에 돌아왔고 1646년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5] 1등으로 책봉받았다.
동복형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事恩士)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엄연히 조선의 왕자(대군)이자 사신이었지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숙을 밥 먹듯 하며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하사(進賀士), 동지사(動指士)까지 합쳐서 총 13번, 매년 1~2회 꼴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자그만치 13번이나 청나라와 조선을 오고 가는 것도 고역인데,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막중한 책무도 덤으로 도맡았다. 이렇다보니 인평대군은 청나라의 사신으로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이로 인해 몸까지 쇠약해졌다.
청나라는 순치 연간에 남명과 싸우면서 조선에게 굉장히 히스테릭하게 굴어서, 당시 조선은 거의 청나라의 빵셔틀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효종도 청나라에 잘 보여야 하니 정기 및 비정기 사행을 모조리 형제한테 맡기려 했는데, 하필 청나라와 구면인 유일한 형제가 인평대군이었으니 그가 사신으로 간 것이다. 이로 인해 인평대군은 청나라가 효종과 조선에게 자행하는 온갖 갑질과 모욕을 황제와, 만주 대신들 앞에서 굽신거리며 견뎌내야 했으니 몸과 마음이 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인평대군은 맨날 청나라에 접대받으러 간다(!)고 쑥덕거리기만 했다. 이렇게 사신을 보낼 때마다 등판하는 인평대군이 안쓰러웠던 송시열이 보다못해 효종에게 "선왕께서 동생 잘 챙기라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어찌 그리도 뻑하면 호랑이굴에 보내면서 쉴 새 없이 혹사를 시키십니까"라며 상소를 올렸을 정도.(《효종실록》 기사)
그래도 효종의 유일한 친동생(한배에서 나온 동복동생)으로 효종 재위시절 내내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6]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이 감싸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청탁을 했다던지, 접대를 했다던지. 그리고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마치 자식처럼 아주 반기며 맛있는 음식도 주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
3. 사망[편집]
1658년(효종 9년) 6월 13일(음력 5월 13일)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 효종은 동생의 죽음을 너무나 크게 슬퍼하여 한동안 인평대군의 집을 떠나지 않아 신하들의 반대로 마지못해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제사를 직접 돌보려 했으나 역시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신 내시를 보내 위로케 하였으며 제문을 직접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으며 후일 종묘에 있는 효종의 묘정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묘 자리는 원래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의 능 자리로 고른 곳이었다. 그러나 능 조성이 다 끝나갈 무렵, 능참봉 출신인 박자우 등이 그 자리는 '흉지'라는 상소를 올리고 찜찜해 하던 선조는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게하여 현재 건원릉 내 목릉(穆陵)에 자리를 정했다. #
경기도에서는 1992년에 그의 묘를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했다. 2016년 2월 11일 오후 2시 30분께 그의 묘가 있던 야산에 화재가 나 묘가 불타는 사고가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히 옆에 있던 인평대군 치제문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5호)로 화재가 확산하는 것은 막았다고. 당시 기사.
4. 가옥[편집]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낙산 이화장 근처에 있었다. 근처에 살던 문인들의 모임인 '낙동계'에도 참여하였다. 함께 참여한 이일상을 정조부사로 데리고 1654년 청에 다녀오기도 했다.
중종 대에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이 있던 곳으로 신광한은 이 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신대동' 또는 '신대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저택은 저녁볕을 잘 받는 위치에 있어서 '석양루(夕陽樓)'로도 불렸다.
후일 고종 대인 1865년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을 제작, 보관하는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뒷날 이 일대에 이화장이 들어선 이후 이승만이 이 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그 앞에 남아 있었다.
5. 영정[편집]
인평대군의 영정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 그의 종가에서 영정을 보관했다.
그런데 후술할 인평대군의 8대 종손이자 조선귀족이었던 이재극이 1923년에 잃어버렸다. 그해 12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재극은 평소에 인평대군 영정 두 폭을 자신의 집 한 켠에 걸어두고 문을 잠가 보관했다. 인평대군의 기일에만 문을 열어 한 번씩 봤는데, 1923년 기일에 열어보니 영정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 이에 이재극 일가 사람들이 어찌된 건지 철저히 조사했는데 누가 훔쳐갔다고 하기에는 그런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재극은 경찰에 사건을 의뢰하려 했으나, 조상님의 영정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돌면 집안 망신이 된다는 이유로(...) 몇 달 간 계속 속앓이만 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서 이를 탐지하여 조사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면 정원군 시절의 모습이 전해지는 원종과 더불어 인조, 소현세자와 효종의 얼굴을 추측할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될 것이나 이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6. 여담[편집]
- 도둑맞은 적이 있다. 이광필(李光弼)이란 사람이 그의 집에서 금병풍과 벼루집, 그리고 동물의 털로 짠 붉은색 담요 등을 훔치다 잡혔다. 왕자의 집을 도둑질했으니 당연히 중죄였다. 이에 이광필이 물귀신 작전을 써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복동생 등 여러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금방 들켰다. 그래서 이광필은 절도죄에 무고죄까지 더해져 처형당했다.(《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2월 21일 갑오 2번째 기사 : 이광필을 무고죄로 처형하다.)
- 소용 조씨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효명옹주와 껄끄러운 일화가 있다. 효명옹주는 인조의 유일한 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라 성격이 이기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려 왕실 가족이 다같이 참석했을 때, 효명옹주는 자신의 이복오빠인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오씨는 "작급으로는 내가 옹주보다 아래이나[7] 적통으로서는 내가 옹주보다 먼저이다."라고 주장했고, 효명옹주는 "부왕(인조)이 계시니 내가 먼저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효명옹주의 나이가 11세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을 보면 오만방자한 성격이 다 드러난다.
사실 양쪽 말 다 맞다. 인조가 살았든 죽었든 옹주의 품계는 무계이니 정1품인 부부인보다 엄연히 위다. 하지만 오씨는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 오빠이자 적통 대군인 인평대군의 부부인이자 손위 올케였다. 둘의 말이 모두 맞았기에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일이 커지자 인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 인조는 자기 딸의 편을 들어 효명옹주가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 이때 다툼의 상대가 복천대부인이 아니라 민회빈 강씨였다는 판본도 있는데, 신빙성은 매우 낮다. 대부인은 품계상 옹주보다 아래니 애매하지만, 세자빈은 어떻게 쉴드가 안 된다. 세자빈은 차기 국모로서 무품 중에서도 왕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설령 옹주가 아니라 공주고 세자보다 누나여도 세자빈에게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 효명옹주가 아무리 오만했어도 세자빈에게 덤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효명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8]
인평대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형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의 가족들을 음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인 소용 조씨의 딸인데다, 자신의 부인을 대놓고 무시한 행적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걸려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동복 형제들간의 우애는 좋았다. 인조는 이복 형제자매들간의 사이를 염려했는지 승하하기 전에 효종에게 효명옹주와 그녀의 남동생들을 잘 보살펴주라 당부했다. 소용 조씨는 효종 즉위 직후 '효종 저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지만 효명옹주와 그녀의 동생들은 효종의 보살핌을 받아 국문도 면하게 해주고, 귀양지도 지속적으로 편한 곳으로 옮겨주다가 종래에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주었다.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효명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8]
인평대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형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의 가족들을 음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인 소용 조씨의 딸인데다, 자신의 부인을 대놓고 무시한 행적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걸려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동복 형제들간의 우애는 좋았다. 인조는 이복 형제자매들간의 사이를 염려했는지 승하하기 전에 효종에게 효명옹주와 그녀의 남동생들을 잘 보살펴주라 당부했다. 소용 조씨는 효종 즉위 직후 '효종 저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지만 효명옹주와 그녀의 동생들은 효종의 보살핌을 받아 국문도 면하게 해주고, 귀양지도 지속적으로 편한 곳으로 옮겨주다가 종래에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주었다.
-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헨드릭 하멜 및 그 일행들과 인연이 있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해서 제주에 머물다 한양으로 압송당해 지내던 중,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을 보고 하멜의 동료 2명이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험분자로 여겨 죽이려고 했다. 심지어 이미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 역시 가망없을 거라고 했을 정도. 정확히는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 것"이라 말했다. 즉,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절망하던 하멜 일행은 마침 지나가던 인평대군을 보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딱하게 여긴 인평대군이 효종에게 간청해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줬다. 이 정도면 인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썼다.
- 하마터면 역모로 몰려 큰일날 뻔했다. 1656년(효종 7년)에 당시 승지 유도삼이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의 연회에 참석해서 행패부리다가 뒤늦게 대군이 있음을 알고는 사과했다.
柳承旨最後扶疏醉入來蹲座則座客謂曰大君自家在此矣柳承旨顚倒起拜稱小臣不察云座
유승지(승지 유도삼)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좌객이 "대군 자가께서(인평대군)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승지가 깜짝 놀라 일어나 절을 하며 '소신의 불찰입니다'라고 말했다.-
- 추국일기 3권 #
그런데 문제는 사과하던 중에 그만 칭신, 즉 인평대군에게 신하를 칭한 일이 일어난 것. 원래 칭신은 왕에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거 까딱 잘못하면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거리다. 아니나 다를까 천안군수 서변이 이 사실을 전 군수 홍주일의 아들 홍만시에게 전해 듣고, 오정일 · 허적· 원두표 등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효종은 이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두표는 서인인데 오정일, 허적은 대표적인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 일단 고변에 연루된 자들을 근신시키고는, 서변 및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국문했다. 그 결과 서변이 뜬소문을 듣고 공을 세울 욕심에 무고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서변과 홍만시 등은 혹독한 국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배를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대사간 유철은 유도삼이 인평대군에게 신하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나 사사롭게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며 유도삼의 파면을 청했다. 그러자 효종은 하나뿐인 친동생 인평대군을 없애려는 나쁜 짓이라며 분노했고 오히려 유철이 서변을 사주했다며, 그를 국문하고 절도에 귀양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서변의 옥사 문서 참조.
- 《풍암집화(楓巖輯話)》, 《이순록(二旬錄)》, 《성호사설(星湖僿說)》 등 조선 후기에 나온 책들에 인평대군가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책마다 조금씩 버전이 다른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 성천군에 재색을 겸비한 득옥(得玉)이란 기녀가 있었다. 인평대군이 성천에 갔을 때 득옥을 보고 연모하여 자신의 집에 데려왔다. 인평대군은 술자리마다 득옥을 옆에 두었는데,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창이 보고서는 몰래 득옥과 정을 통했다. 이를 알게 된 오정창의 아내 정씨 부인은 득옥을 없앨 계획을 꾸몄다. 바로 여종을 시켜 득옥의 방에 인평대군이 아끼던 귀중품을 숨기고 이를 득옥이 훔쳤다고 모함한 것. 시기도 하필이면 인평대군이 집을 비운 때였다. 이에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는 무고함을 알면서도 노비들을 시켜 득옥을 매질해 죽인 다음 산에다 매장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득옥이 살아돌아왔다! 그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씨 부인의 방과 먹을 약에 피가 낭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평대군은 병석에 누웠다. 득옥이 인평대군 베개 옆에 앉아있는 것을 본 집안 사람들은 놀라 무서워했고, 얼마 못가 인평대군은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득옥은 귀신이었다. 즉, 살아온 게 아니라 복수하려고 귀신이 되어 돌아온 것. 인평대군 사후 득옥은 오씨 부인에게 “심정이 어떻습니까? 저승에서 죄 없이 죽은 저를 가엾이 여겨, 대군을 모시며 팔각정에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부인은 저를 또 부러워하겠군요”라면서 조롱했고, 이후 가솔들이 늦은 밤에 (인평대군 저택의) 후원을 가면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오씨 부인은 신경이 쇠약해져 얼마 못가 남편을 따라갔다. 이후로도 득옥은 온갖 변괴를 일으켜 그 일족을 다 멸하고 나서야 저주 행위를 멈췄다.#
물론 실화는 아니다. 다만, 인평대군과 그 가족들의 이른 죽음이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저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하는 추측이 있다. 이 이야기는 2020년 7월 7일 채널 A 역사재현 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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