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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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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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wins_champion_v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4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1999 KBO 퓨처스 북부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LG 트윈스 등번호 34번
김성준
(1991~1993)

인현배
(1994~2000)


최성현
(2001~2002)



파일:인현배.png

인현배
印鉉培 | In Hyun-Bae

출생
1971년 10월 4일[1] (52세)
충청남도 당진시[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3] (90학번 / 학사)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2차 1라운드 (전체 6번,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4~2000)
본관
교동 인씨[4]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3. 이후
3. 연도별 통산 성적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프로골퍼. 입단 첫 해 돌풍을 일으키며 LG 신바람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으나, 이후로는 부상으로 인해 신인 시절만큼의 위력을 보이지 못하고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다 결국 은퇴하였다. 하지만 LG팬들에겐 1994년을 언급 할 때면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바람 삼총사과 함께 자주 언급 될 정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선수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1989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선린상고를 결승에 올려놓았으나, 최상덕인천고에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고교시절 장재중, 서용빈과 함께했는데, 이 셋은 전부 LG 트윈스에서 현역생활을 끝냈다. 다만 인현배가 2000년에 은퇴하고 장재중이 2001년에 LG로 오는 바람에 세 명 모두 같은 팀으로 뛰었던 적은 없다.

이후 단국대학교로 진학, 동기 최상덕에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LG 트윈스에 지명을 받아 데뷔한다.


2.2. LG 트윈스[편집]


첫해부터 이광환 감독에 의해 선발로 고정되었고, 4선발로 뛰며 괜찮은 활약을 선보였다. 커브볼의 낙차가 굉장히 커서 간파당하기 전엔 정말 파죽지세로 승수를 쌓아나가며 이 해 LG가 시즌 초반부터 압도적으로 리그 1위를 치닫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이해 6월 17일 첫 완봉승을 거두는데 상대팀이 해태 타이거즈, 상대 선발은 선동열이었다.[5] 당시 선동열이 선발 전환 실패로 커리어로우를 찍으며 이빨 빠진 호랑이 소리를 듣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쌩신인이 국내 최고의 투수라 불리던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임팩트를 주었다. 재미있는 점은 무탈삼진으로 경기를 매조지었다는 점으로, 2019년 현재까지도 KBO 리그에서 무탈삼진 완봉승 기록은 인현배가 마지막이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4년 전반기에만 9승 1패로 승률 1위를 달릴 정도로 맹활약했다. 비록 후반기에 신인의 한계를 보이며 1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지만 어쨌든 신인 10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소화 이닝이 규정이닝인 126이닝에 한 끗 차(124.2이닝)로 못 미쳤다는 건 좀 아쉬운 점.

이해 LG는 이상훈-김태원-정삼흠-인현배의 선발진이 전부 10승을 거둔 데 이어, 제국의 파수꾼 김용수와 신바람 3총사의 등장 등으로 인해 명실상부 강팀으로 군림했으며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스윕으로 우승을 거둔다. 하지만 인현배는 한국시리즈에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첫해 활약 덕분에 인현배는 장차 LG를 책임질 전도유망한 투수로 기대되었으며, 신인왕 후보로까지 오르내릴 정도였다. 구단에서는 연봉을 133%나 인상시켜주기도 했고 그만큼 기대가 컸다. 하지만 1994시즌 후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한다.

팔꿈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인현배는 꼬박 2년을 수술 및 재활에 날려먹게 되고, 1997년 시즌 복귀에 앞서 구단에서 마련한 특별훈련까지 받아가면서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해는 부상 여파로 개점휴업, 그 다음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1999년에는 퓨쳐스리그에서 평균자책점 1위를 하기도 했지만, 1군에서는 11경기 16이닝 ERA 6.75로 부진했으며 결국 2000년 시즌 이후 은퇴하였다.


2.3. 이후[편집]


은퇴 직후 프로골퍼로 전직했으나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 리크루트솔루션이라는 회사의 이사가 되면서 기업가로 변신했다.

2023년 현재 광교신도시에 위치한 광교골프연습장의 레슨프로로 근무중이다.

3. 연도별 통산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세이브
홀드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4[6]
LG
23
124⅔
10
5
0
-
0.667
4.19
125
9
52
44
62
58
1.34
1995
1군 기록 없음
1996
1997
2
3
0
0
0
-
-
3.00
2
1
2
3
1
1
1.00
1998
3
3
0
0
0
-
-
3.00
4
1
0
2
1
1
1.33
1999
11
16
0
1
0
-
0.000
6.75
20
2
7
7
13
12
1.56
2000
6
10⅓
0
0
0
0
-
4.35
11
2
6
8
7
5
1.45
통산(7시즌)
45
157
10
6
0
0
0.625
4.41
162
15
67
64
84
77
1.3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4년
3완투
2완봉
(6위)
통산
3완투
2완봉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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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8월 16일.[2] #[3] 고교, 대학, 프로까지 서용빈과 쭉 같이 다녔다.[4] 직무공파 61세 배(培) 항렬. 아버지 인희성(印熙盛)은 60세 희(熙) 항렬.[5] 다만 패전은 9회 올라온 송유석이 떠안았다.[6] 커리어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