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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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傳

1. 개요
2. 내용


1. 개요[편집]


조선 숙종의 2번째[1] 왕비인현왕후 민씨의 일생을 이야기로 엮은 소설. 계축일기, 한중록과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 분류된다. 작가는 그 유명한 미상.

한편, 궁녀의 시점에서 저술되어 인현왕후를 곁에서 모셨던 궁녀가 회고하여 쓴 논픽션 궁중문학으로 정의되어 왔으나 내용 자체에 궁녀가 결코 알 수 없는 다수의 내용[2]이 수록되어 있고[3], 뭣보다 소설에 영종도 아닌 영조[4]가 50년 넘게 태평을 누렸다는 문구가 수록되어 있어 소설의 집필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영조의 사후인 것이 명백해 이 소설의 저자는 결코 인현왕후를 모셨던 궁녀일 수 없을 뿐더러[5] 이 소설 자체가 20세기 전까지 친족에게만 제한 열람이 가능했던 <단암만록>의 내용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아예 궁녀일 수도 없다. 이에 이 소설의 저자는 조영진[6]이나 그 자손, 혹은 김제겸 남매[7]의 자손이거나 20세기 근대 작가로 추정된다. 정황상으론 17-8세기 소설 붐을 극도로 혐오했던 정조가 젊은 대신들이 당시 유행하던 중국 소설의 어법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문체반정을 일으킴과 동시에 소설 탄압을 시행해 20세기 개화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소설이 뭍위로 올라오게 됐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 영남 남인 등용을 위해 희빈 장씨에 대한 중립적 처우를 시작했던 점 등에 비춰 이 소설의 집필 시기는 정조 초, 혹은 여흥민씨 외척의 세도정치가 재개된 고종-순종 때, 혹은 20세기 초 개화기 때로 좁혀진다.

원제는 〈인현성후덕행록 仁顯聖后德行錄〉이며 〈인현왕후민씨덕행록〉·〈민즁뎐덕ᄒᆡᇰ녹〉·〈민즁전긔〉등의 제목을 가지기도 한다.


2. 내용[편집]


주인공 인현왕후 민씨의 출생, 그리고 숙종의 왕비가 되어 겪은 사건을 그렸다. 작중에서 어진 성품을 지닌 인현왕후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숙종에게 궁녀 장씨를 궁으로 도로 데려오도록 권한다. 장씨는 본래 인현왕후가 시집오기 전 숙종이 총애하던 궁녀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장씨는 궁으로 돌아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정식으로 후궁 첩지를 받아 희빈이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아들(경종)을 낳자 인현왕후를 모함해서 폐출시키고, 자기 아들을 세자로 책봉받게 하여 정비(正妃)가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중전 장씨의 간악한 성품이 점점 드러나면서, 숙종은 잘못을 깨닫고 인현왕후를 도로 궁으로 데려와 왕비 자리에 앉히고, 장씨는 후궁으로 강등한다. 그러나 희빈은 무당 등을 동원해 몰래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인현왕후는 건강악화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희빈은 사약을 받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현왕후가 주인공인 고전소설인 만큼, 인현왕후는 고전소설의 클리셰에 따라 주인공으로서 모든 장점을 다 갖춘 여성으로 묘사된다. 또한 악역인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아주 악랄하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 널리 읽혔기 때문에 널리 퍼진 '요녀 장희빈'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선악의 양분법이 분명하고 희빈 장씨를 일방적으로 악역으로 묘사한 만큼, 사료적 가치는 0에 수렴한다. 서두에 언급한 궁중문학 3종 중 한중록은 임오화변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대우받는 것과 대조되며, 인현왕후전과 자주 비교되는 계축일기는 그래도 일단 '궁중 인물이 쓴 것 같다'는 평가는 받기는 하지만, 인현왕후전은 그조차도 의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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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병으로 죽은 후, 새로 맞이한 왕비이다.[2] 박태보의 국문 과정 및 유배길에서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이 대표적. 박태보가 국문을 당할 때 곁에서 지켜본 궁녀라면 함께 국문을 당했다는 건데, 그럼 그때(숙종 15) 죽었지. 그리고 박태보가 고문 후 유배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 부친 박세당이랑 담화한 거며, 외숙부 남구만이 박태보의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가 뒤늦게 사랑하는 조카의 죽음을 알고 비통해했다 같은 건 궁녀가 어떻게 아는건데?[3] 관찰자 시점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전지적 시점인 것. 때문에 논픽션 전기에서 픽션인 소설로 전환됐다.[4] 고종 26년에 영종에서 영조로 묘호가 개칭됐다. 단, 이 부분은 대한민국 정부가 이 소설을 청소년을 위한 필독 고전으로 선정하며 배포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영종을 영조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5] 소설에서 피력했던 것처럼 숙종 7년(1681)에 이미 궁녀로 있어 갓 계비가 된 인현왕후를 시종하였다면 이때 10세 생각시였다고 쳐도 정조 즉위년(1776) 당시엔 이미 100살이 훌쩍 넘는다.[6] 인현왕후의 질녀(민진후의 첫째 아내 연안 이씨의 딸)이 조규빈(조태채의 조카, 조사석의 종손자)과 결혼해 낳은 아들로, 인현왕후 수기 사건, 인현왕후 비녀 사건, 감고당 사건 등을 벌인 영조 때의 간신이다. 이 소설의 특성 중 하나가 《단암만록》·《농수 수문록》 등엔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고 있는 조사석·장렬왕후·영풍군부인에 대한 비방이 전무하다 못해 오히려 장렬왕후를 인현왕후의 지원자로 굳이 각색했다는 것.[7] 김창집(영빈 김씨의 당숙)의 자녀. 이 중 김제겸의 누이(김창집의 딸)가 민진원의 며느리이며, 김제겸은 송병문(민진원·인현왕후의 4촌 외종형)의 사위이다. 한편 김창집의 모친 나씨는 남구만(박태보의 외숙)의 처형이며, 김창집의 매제 이섭은 박태보의 처의 종손자이다.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주인공인 인현왕후만큼이나 박태보에 대한 찬사어린 내용이 상당하여 소설의 1/3 상당을 차지한다는 점으로, 이에 이 소설의 저자가 박태보의 후손이 아닐까란 학설이 존재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