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본토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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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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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공격 측
방어 측

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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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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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상하이 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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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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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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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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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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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동계공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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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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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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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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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창 해전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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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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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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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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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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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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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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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길버트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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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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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 전투
공격측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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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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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우드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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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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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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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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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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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류샨 열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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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다 트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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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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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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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나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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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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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니카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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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솔로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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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스 곶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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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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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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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파롱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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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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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 잠수함 합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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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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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방가라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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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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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건빌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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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곶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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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스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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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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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버마국 국기.svg 버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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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타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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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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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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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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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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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우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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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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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항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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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탈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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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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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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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폭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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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리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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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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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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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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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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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군항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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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탕 굽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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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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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전략 공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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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할린 침공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슘슈 섬 전투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및 결과)는 개별 문서 확인



1. 개요
2. 1944년 이전
3. 1944년
3.1. 인도-중국 작전
3.2. 마리아나 제도 작전
4. 1945년
4.2. 제8공군의 폭격
4.3. 전투기들의 폭격
4.4. 전함부대의 본토 포격
4.5. 전후에도 이어진 작전
5. 일본군의 대응
5.1. 사이판을 타격해보자!
5.2. 열악한 조기 경보능력
5.3.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
5.4. 전투기들의 수준
5.5. 무의미한 수준의 대공포
5.6. 피해를 줄이지 못하는 빈약한 방재 능력
6. 결과
7. 여담
7.1. 공습 전 사전 예고
7.2. 기아 작전
7.3. 한반도 공습
7.4. 대만 공격
7.5. 공습 피해가 적었던 지역
7.5.1. 교토
7.5.2. 홋카이도와 남사할린
7.5.3. 핵무기 투하 목표 지점
7.6. 영국군의 참여 계획
7.7. 소련군의 공습
7.8. 2차 공습 계획(취소)
8. 전후 영향과 매체
9. 일본 본토 공습 묘사가 등장하는 관련작
10. 말말말
11. 관련 문서


Air raids on Japan
日本本土空襲(にっぽんほんどくうしゅう


1. 개요[편집]



B-29P-51 머스탱에 달린 카메라에 찍힌 공습 영상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에 가해진 미군의 대량 폭격.


2. 1944년 이전[편집]


역사적으로 미군의 첫 일본 본토 공습은 진주만 공습 발발 4개월 후인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감행되었다. 둘리틀 공습은 해당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무리하게 감행된 정치적, 선전적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여기서 '미군'으로 한정해 표현한 이유는,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자료에 따라선 마틴 B-10 폭격기인 것도 있다)가 일본 규슈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또한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부실했다는 점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으며 이후의 둘리틀 공습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가까이 영국 본토가 위치해 수시로 공습 위험이 있던 독일과 달리 일본은 당시까지만 해도 만만한 중국을 제외하면 사방이 태평양이라 대규모 공습의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둘리틀 공습으로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대도시에 폭탄 몇 발을 투하하긴 했지만 당연히 몇 발의 폭탄으로는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1] 그렇지만 진주만 기습 직후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낮아진 미국민들에게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일본에게는 신주불멸(신께서 지켜주는 일본)의 허상을 깨뜨리며 위협을 주었다.

1943년 중반,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 키스가 섬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쿠릴 열도 북단의 몇몇 섬들에 B-24 폭격기와 일부 항모 함재기를 동원해 공습을 가해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이 작전도 일본 본토 공습의 범주에 포함되는데, 흔히 인식하는 일본 본토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지만 어쨌든 쿠릴 열도는 당시까지만 해도 홋카이도 관할의 내지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역시 본토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도 일본 본토에서의 첫 지상전투로 기록된다.

1943년까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공격을 가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나마 일본과 가까운 미국 영토 중 웨이크섬, , 필리핀은 모조리 1941~1942년 초기에 걸친 남방작전의 여파로 상실한 상태였다. 기지를 제공할 수 있는 동맹국 중 중국은 일본과 가까운 해안지방을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고, 영국 역시 이 무렵 일본군에 의해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후퇴한 이후였다. 그리고 소련은 대독전에서의 동맹국일 뿐이지 대일전에서는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1944년에 들어서자 급변한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3. 1944년[편집]



3.1. 인도-중국 작전[편집]


문제는 기존 폭격기였던 B-17, B-24보다 성능이 좋은 B-29가 실전배치되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당시 기술력으로 미국 본토나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B-29의 항속거리가 길긴 했으나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2]

일본에서 이걸 하려고 계획했던 게 엔진만 몇 기 만들다 만 G10N 후가쿠다. 미국 역시 같은 생각으로 대륙간 폭격기를 개발했고 그것이 B-36이다. 하지만 B-36은 1941년에서야 개발에 들어갔고 전쟁 기간 내내 전황에 따라 개발 속도가 달라졌다.

1943년에는 북아프리카를 확보하면서 필요성이 낮아지는 바람에 개발 지원이 줄고, 반대로 1944년에는 중국전선이 붕괴 위기에 처하면서 다시 적극적으로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1945년 초에는 마리아나 제도가 확보되면서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결국 종전 이후에야 핵폭격용으로서 개발이 완료된다.

이제 미국으로서는 B-29를 발진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4년 6~7월에 걸쳐 예정된 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끝낸 후 이곳을 B-29의 기지로 삼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플랜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미 초도양산된 B-29들이 놀고만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높으신 분들은 B-29를 일본 본토 공격이 아니더라도 다른 용도로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20폭격사령부 산하 4개 비행단이 1944년 봄부터 인도에 전개,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태국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태국은 버마 주둔 일본군으로 향하는 모든 보급선이 이어지는 요충지였던데다가, 때마침 일본군이 버마에서 임팔로 대규모 공세를 단행했기에 영국군을 지원하는 측면에서 방콕에 공습을 가하였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루속히 일본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길 원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B-29를 중국 내륙에서 출격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육군항공대 주류는 이와 같은 구상에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낮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강행하면서 버로우탔다.

장제스 역시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서 무언가 기여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흔쾌히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장개석이 미국의 지원을 더 받아내기 위하여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자를 더 타내려고 일부러 수작업으로 한 건 또 아니다. 당시 7대 열강이자 아시아 최강인 일본조차 태평양 각지에서 병사들이 삽과 곡괭이로 활주로를 만들고 있었다. 불도저를 동원해 눈깜작할 사이에 활주로를 만들어내는 건 미군이나 가능했던 것이다. 하물며 일본보다 산업능력도 떨어지는 중국이 인력 말고 활주로를 만들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중국의 인해전술로 인해 그나마 수월하게 활주로를 만들어낸 편이다. B-29를 위한 중국 현지 비행장 건설비용, 중국인 노무자들에 대한 임금 등에 미국이 중국에게 지불한 관련 자금은 당시 물가로 4억 달러에 달했다!(타임라이프 책 참조).

그리고 장제스는 1944년 6월까지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는 수고 끝에 인도에 있던 B-29 비행단 4개가 모두 중국 내륙으로 옮기게 된다.

마침내 1944년 6월 15일, B-29에 의한 미군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58폭격비행단 소속 B-29 75기가 투입되어 규슈의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1944년 말엽에 이르기까지 규슈 일대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그러나 배치된 폭격기의 수량이 적었고, 주 기지인 청두에서 목표인 일본 열도까지 항속거리가 아슬아슬하여 규슈정도만이 겨우 폭격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고고도 정밀폭격에 중점을 두다보니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배치된 B-29기들은 초도양산분으로서 아직까지 기체 곳곳에서 여러가지 잔고장이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대륙타통작전으로 일본군이 한때나마 중국 내륙 깊숙이 진격, B-29 비행장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폭탄과 연료부터 시작하여 하다못해 화장실 휴지까지도 보급하는 데 문제를 겪는데 이들 보급품은 해로로 대량 수송하여야 하나 아시다시피 동남아가 당시 죄다 일본 점령지인지라 마땅히 쓸 만한 항구는 인도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 보급품을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청두로 항공수송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은 가용한 모든 항공수송력을 끌어모았으며 수송기가 부족하자 B-29에서 방어기총 등 불필요한 무장을 전부 해제하여 무게를 줄인 뒤 보급품을 실어 띄우는 극약처방까지 하여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른바 험프 넘기로 불린 이 항공수송작전에서도 조종사 및 기체의 피로 누적과 히말라야 상공의 악천후 등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으며, B-29 부대가 한번 작전을 뛰고 오면 연료와 폭탄이 재보급될 때까지 작전이 불가능하니 부대 운용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다. 이때의 비전투 손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추락한 항공기의 잔해 만으로도 항로를 잡을 수 있다'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물자수송 비행 임무는 전투 비행과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으며, 험프 수송 비행을 무사히 마치면 B-29의 노즈 아트에 폭격 임무와 동일하게 표시를 할 수 있었다.

결국 1945년 1월 6일 마지막 출격을 끝으로 마테호른 작전은 중지, 중국에 전개된 기체들은 모두 마리아나 제도로 이동 배치된다.

한편, 당시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은 전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 공산당 세력하의 중국 북부에 B-29 기지를 유치하고 이를 토대로 만주의 일본 주요 산업시설을 폭격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상태였고 또 이 제의가 들어온 시점에 이미 마리아나 제도 탈환이 완료되었기에 마오쩌둥의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2. 마리아나 제도 작전[편집]


파일:Iwo-Jima-PP-Map.jpg

사이판 전투를 통해 일본 제국 본토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가 확보되자 미국은 즉시 공장에서 막 뽑아낸 B-29들을 사이판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전투가 채 종료되기도 전에 미군은 공병대를 투입하여 B-29용 비행장과 정비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가용가능한 육,해군 공병대가 대거 투입되었는데 그 규모가 병력상으로는 군단급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활주로로 B-29들이 하나둘씩 착륙하기 시작했다. Main Base 역할을 하는 사이판 이외에, 티니언, 괌 등 탈환된 다른 섬에도 B-29를 위한 예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나중에는 사이판 섬 비행장에 착륙하려 보니 이륙하는 폭격기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섬의 비행장에 착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

또한 보급 문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결되었다. 중국 기지에서 항공편으로 찔끔찔끔 보급받던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해권을 가진 미 해군 수송선이 무제한에 가까운 수준의 보급품을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미 해군 역시 태평양 전쟁 후반에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괌으로 이전하는등, 마리아나 제도 섬 곳곳을 후방 총괄기지로 활용했기때문에 보급수요는 매우 높았다. 육군항공대 또한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핵심거점으로 마리아나 제도에 대량 전개해서 마리아나 제도 주둔 미군 전체 장병이 20만 명을 넘는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상과 미군이 갖춘 인프라는 미국 본토의 대도시와 맞먹는 위상을 자랑했다.

이제 일본 폭격을 맡은 제21폭격기사령부는 1944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돌입했다. 먼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전, 개구리 작전으로 건너뛴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이 점령한 섬들을 대상으로 연습에 가까운 폭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1일에는 B-29 편대가 도쿄 상공에 출현, 주요 타겟들의 항공사진을 촬영한 뒤 돌아갔다.

사이판에서 발진한 B-29의 첫 일본 폭격은 11월 24일에 시작되었다. 도쿄 외곽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을 주요 타겟으로 한 폭격은, 중국에서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Haywood S. Hansell)의 방침이었다.

유럽에서는 전략 폭격을 통해 독일의 항공기 생산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등 커티스 르메이에 맞먹는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고고도 정밀폭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오히려 큰 전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교리 자체는 미 공군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서 종전 후 핸셀은 정밀 폭격 무기의 개발을 감독하다가 공군사관학교에서 정밀 폭격 교리를 가르쳤다. 핸셀이 원했던 수준의 정밀성은 걸프 전쟁 때에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전략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전술(전투의 기술적인 측면 즉,기술력), 전략과 전술을 실행하기 위한 여러 조건(특히 기상연구)등이 미비했던 것이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제트기류라는 악재까지 극복해가며 고고도 폭격에서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자세한 이유는 커티스 르메이가 분석한 아래의 내용 참조.

그러나 111기의 B-29가 투입된 이 공습에서 손실은 단 1기에 그칠 정도로 일본군의 방공망은 B-29를 격추할 수단이 없었고 이후 B-29는 일본 본토 상공을 제집 드나들듯 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21폭격기사령부는 줄기차게 무사시노 공장 및 나카지마 항공기엔진 공장 등 주요 타겟을 폭격하는 한편 나고야 등지로 폭격의 대상을 확대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나마 공장이 파괴될까봐 우려한 일본이 생산 시설을 분산시키도록 하여 생산 효율이 떨어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미군이 원했던 비행기 생산의 완전 중단은 달성하지 못했다.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4)

그리고 찾아온 1945년, 일본 본토 공습에 또 다른 획기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4. 1945년[편집]



4.1. 커티스 르메이의 등장[편집]


1945년 1월, 유럽전선과 중국의 제20폭격기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거론되어 몇 달만에 다시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 미 육군항공대 소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었다.

부임 후 르메이는 핸셀이 하던대로 고고도 정밀폭격을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참다 못해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고고도 정밀폭격 집어치워!" 라는 결론을 내린다.

르메이는 고고도 정밀 폭격으로 폭격작전을 진행했던 핸셀 본인에 대한 비난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핸셀이 주장한 고고도 정밀 폭격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불가항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르메이 본인도 저고도 폭격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핸셀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목표에 고고도 정밀 폭격을 수차례 시도한 바가 있지만 역시 죽을 쑤었다.

르메이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정밀 폭격은 당연히 날씨가 쾌청할 때 제일 효과가 좋다. 하지만 일본 상공에서 정밀 폭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충분히 쾌청한 날은 보통 나흘, 아무리 많이 봐줘도 한 달에 1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3개 목표 중 하나였던 고쿠라가 목표에서 제외된 이유가 바로 짙은 구름 때문에 시계가 차단되어서였다. 구름이 많이 끼면 레이더를 이용한 폭격으로 전환해야 하니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핸셀이 부득이하게 레이더를 이용한 폭격을 가했을 때는 공장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옆의 항구를 일부 손상시키는 정도의 매우 경미한 피해밖에 주지 못했다.

  • 아무리 맑은 날에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본군 방공망이 도달할 수 없는 안전고도에서의 폭격시에는 제트기류로 인해 안 그래도 떨어지는 명중률이 개판난다. 폭탄의 비행 궤적이 흔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폭격기도 크게 흔들리거나 경로 유지가 매우 힘들어진다. 게다가 뒷바람을 맞으면 노던 조준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져버리고, 맞바람을 뚫고 가자니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요격을 당할 위험이 생긴다. 이 때문에 공장에 대한 명중률이 5%를 넘기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전과를 내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폭탄이 실제로 떨어진 곳은 예정지를 벗어난 곳이었다. 히로시마의 경우 보통 원폭돔이 타겟으로 알고 있을텐데, 사실은 원폭돔 근처의 T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였으며, 실제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오이 다리에서 조금 빗나가고 원폭돔에서는 200여미터 떨어진 시마 외과병원 상공이었다.

날씨가 맑을 때도 이 정도인데, 흐릴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흐릴 때 투하한 나가사키에서는 3km나 빗나갔다.



  • 커티스 르메이가 제21폭격기사령부로 오기 직전에 상관인 로리스 노스테드 준장[3]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다. 그 내용은 '일본 본토를 침공해 들어가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 역량 그 자체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핸셀과 르메이가 합쳐서 열 다섯번이나 고고도 정밀폭격을 가했던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에 해군이 급강하 폭격기로 한번 저고도 폭격을 가했더니 지금까지의 결과를 합친 것과 거의 동일한 피해를 내었다. 독립된 폭격기 비행단과 값비싼 고고도 폭격기를 투입해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유지할 이유가 없다. 이런 비효율적인 사례가 반복되면 항공 전력은 독립하지 못하고 육군과 해군에 계속 종속될 것이다.

이 때 제21폭격기사령부를 비롯한 미군의 모든 항공 전력은 육군비행단이나 해군에 소속되어있었다. 미공군이 탄생한 건 조금 더 뒤. 그러나 항공대 세력은 그대로 있다. 육군항공대의 일부가 갈라져 나온 것이 공군이며 육군항공대 자체는 그대로 있다. 해군항공대와 해병대 항공대 역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다. 제독들의 단체 항명사건으로 인해 해군의 입지가 낮아진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현대 미군 자체가 해방부적인 면이 강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고도 정밀폭격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대규모의 폭격기를 저고도로 진입시켜 도시에 네이팜탄 도배를 해버리는, 말 그대로 도시 지우기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르메이의 참모로 재직하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자신의 장기인 통계분석과 가성비 짜내기를 이용해 지금까지의 폭격 성과를 분석한 끝에, 일본 열도를 효과적으로 폭격하기 위해서 고고도 폭격이 아니라 저고도 융단폭격이 더 효과가 좋고, 피해규모도 얼마 늘지 않는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해 르메이를 설특한다.

기체 및 파일럿의 피해가 급증할 것이 명백했으나 맥나마라는 손실이 크지 않다는 분석결과를 냈고, 어쨌든 르메이는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인데다 독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당장 B-29로 뭐라도 해야 면피가 가능한 육군 항공대의 절박한 사정때문에 르메이의 의견이 먹힐 수 있었다. 르메이도 무작정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양반은 아니어서, 일본군 야간 방공전 능력은 형편없고 그나마 있는 방공무기도 고공으로 조준하고 있으니 저공 목표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할 것이다는 이유를 들며 첫 대공습을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것도 폭격만 극대화 하려고 극단적으로 방어기총수도 내리고 기총도 떼버리고 단 1kg이라도 더 폭탄을 싣는 극한의 폭탄드랍을 준비한다.

1945년 기준으로 야간방공전 능력이 가장 탁월한 나라는 독일의 야간 공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시작한 영국이었다. 1944년 1~4월에 걸친 독일의 야간 공습(일명 베이비블리츠)에서 독일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하였고 이중 320대 이상을 손실하는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은 비전투 손실을 포함하여 29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나 전투 손실은 1대 파괴, 5대 손상에 그쳤다. 독일의 경우 이쯤되면 슬슬 전력이 거덜날 시점이라.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팜탄을 도쿄 시가지(스미다강 양안)에 뿌려댔다.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싸그리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도쿄의 건물 중 25%에 달하는 수치였다.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4월 초 및 5월 중순, 8월 초에도 수십여 기의 B-29로부터 집중폭격을 받았다.

도쿄 대공습이 일본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해당 항목 참조. 그런 심리적 영향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미군도 도쿄 대공습의 성과에 크게 환호했는데 격추 14기에 손상 42기라는 생각보다 경미한 피해에다가, 항공정찰 사진 판독 결과 말 그대로 도쿄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원찮은 공습과 달리 이제서야 제대로 된 피해를 주었다고 미군은 인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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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이 성공한데다, 당시 결정적 한방을 갈구하던 미국의 여론이 잿더미가 된 도쿄의 사진을 보고는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며 열광한 덕에[4] 여론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르메이는 일본측이 정신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재빨리 타격할 계획을 세운다.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나고야 공습은 폭격을 가한 범위가 도쿄보다 광범위한 덕에 피해는 적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고 실제로는 5.3km²에 해당하는 도시 면적이 소각되었고 더군다나 폭격기 피해가 전무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3월의 전략폭격은 다음과 같다.

  • 3월 9~10일 도쿄: 279기 투입. 사망자 8~10만.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km² 전소.
  • 3월 11일 나고야: 310기 투입. 도시면적 5.3 km² 전소.
  • 3월 13~14일 오사카: 274기 투입. 도시면적 21 km² 전소. 사망자 4000여 명, 행방불명자 500여명
  • 3월 16~17일 고베: 331기 투입. 도시면적 18 km² 전소.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 3월 18~19일 나고야 2차: 도시면적 7.6 km² 전소.

1945년 3월 9일 있었던 대공습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폭격이라 가장 유명하지만,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3월 11일 나고야, 13일 오사카, 16일 고베, 19일에는 다시 나고야가 르메이의 3월 1차 공습의 표적이 되어 총 82km² 면적이 지도 위에서 재로 사라졌다. 이로써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단 열흘 만에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중에서 3월 13일~14일에 이뤄진 오사카 공습이 절정이었다.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상공업 거점이었던 오사카를 미군이 놔둘 리 없었고, 폭격기 274대로 소이탄 1,700여 톤을 퍼부어 오사카 항구를 포함해 약 20km²의 시가지를 파괴했다.

이 당시 오사카 성도 완파당했다. 다만 오사카 성은 이미 19세기에 벼락으로 천수각이 완파되어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는 당시에도 높지 않았다. 당시 오사카의 가옥 13만 여 채가 완파되었지만 도쿄에 비해 대체로 소방 방재가 잘 이루어졌고 오사카 시민들도 도쿄 대공습의 소문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사망자 4천여 명, 행방불명자 5백여 명으로 도쿄에 비해선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때 폭탄이 오사카의 육군 병기창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 2,000m 상공을 비행하던 폭격기를 고도 3,600m까지 날려 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해당 폭격기는 실속 상태에 빠져 하강했으나 조종사가 상황을 수습해 600m 고도에서 정상 비행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오사카는 종전 전까지 7차례의 대폭격을 더 당한 끝에 도시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현재 오사카 성 남쪽 경내에 있는 오사카 국제평화센터(피스오사카)에 가면 당시 사료들과 재현 모형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도시에 폭격을 퍼부은 까닭은 일본이 B-29의 저공 비행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공업시설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카지마 항공기,무사시노 제작소,미쓰비시 제작소등 당시 일본 항공기 제작소,부품공장들은 이렇게 대도시 주변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집중 타겟이 되었고 어찌나 폭격을 퍼부어 댔는지, 약 1주일 후인 3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나고야를 폭격한 뒤에는 잠시 폭격을 멈춰야 했다. 장병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던 소이탄 물량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도쿄 대공습 이전 정밀 폭격 작전에 쓰인 폭탄의 비율은 대략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다. 이런 폭장 비율과 폭격 소티(sortie) 수를 따져 보면 당시 르메이가 보유하고 있던 소이탄은 약 2달 동안 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르메이는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소이탄의 불길 확산을 위한 기름폭탄이라는 비범한 작전을 실시했다. 도쿄대공습 이후 10일 동안 르메이는 무려 150만발에 해당하는 소이탄 1만톤을 퍼부어 일본의 주요 대도시를 휩쓸었다. 르메이가 "소이탄을 더 보급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 많은 양을 다 썼을 리가 없다"며 비웃었던 해군도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소이탄을 실어 날라다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4월에는 잠시 주춤했지만 공습은 계속 이어졌다. 2달치 소이탄을 싹 써버려서이기도 하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오키나와 전투 문서와 카미카제 문서를 참고할 것.

1945년 4월 1일, 도쿄의 나카지마 항공기 엔진 공장이 B-29의 폭격을 맞았고 4월 3일, 시즈오카와 간토에 위치한 엔진 공장이 공습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야간 작전이어서 명중률이 떨어졌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4월 4일, 소규모의 B-29들이 도쿄와 가와사키를 폭격했다.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4월 7일에 있었던 작전이었는데 이오지마에서 본격적으로 배치된 P-51 머스탱들이 호위기로 동참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달려들던 일본기들은 101대나 격추되어버렸다. 이때는 요격기들을 머스탱이 상대할 수 있었으므로, 아예 당당하게 주간에도 출격해 백주대낮에 고폭탄을 주요 군수시설에 쏟아붓는 식으로 폭격을 가했다.

4월 12일,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그 과정에서 185기의 일본기들이 격추되었다.

4월 13일, 도쿄에 또 다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무기 공장을 비롯한 3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4월 15일, 수도권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도쿄 면적 16km²,가와사키 면적 3.9km², 요코하마 면적 3.9km²가 파괴되었다. 4월 24일에는 도쿄 인근의 타치카와 엔진 공장이 박살났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방 된 5월 이후부터 공습은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5월 5일, 구레 인근의 히로 해군 항공기 공장이 파괴되었고 10일에는 이와쿠니, 오시마, 도야마의 연료 저장고가 파괴되었다. 13일에는 나고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되었고 나고야 면적의 8.2km²가 파괴되었다. 16일에 재공습이 가해졌고 나고야 면적의 9.9km²가 파괴되었다. 두 번의 공습으로 나고야 시민 3866명이 사망하고 47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되었다. 5월 19일에는 타치카와 항공기 공장을 대규모로 폭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5월 23일과 25일에 걸쳐서 도쿄에 두 번의 대규모 폭격이 이어졌고 총 58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 공습을 기점으로 황궁을 비롯한 일본 정부 기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은 히로히토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추가적인 폭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도쿄의 절반이 넘는 면적(50.8%)이 파괴되어 더 때려부실 곳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폭격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5월 29일, 요코하마에 대규모 폭격이 이어져 18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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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있었던 재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홀라당 다 타 버린 도쿄의 천황궁 고쿄.)

당시 일본 육군일본 해군과 민정문관 및 일본제국 경찰과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를 포함해 약 1만 명이 소방차 40대를 동원하여 주택가가 활활 타는 약 4시간 동안 불을 끄기 위한 작업을 벌였으나, 세이덴(正殿)을 포함해 27동이 홀라당 다 탔다. 천황가 삼종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참화를 면했다. 쇼와 덴노는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고, 전쟁 끝날 때까지 계속 거기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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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공습을 받은 다이호쿠(현 타이베이) 시가지, 폭격을 받은 대만총독부 청사[5] 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5월 31일에는 일본 본토뿐 아니라 일본령 대만 다이호쿠시에도 117기의 B-24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타이베이 대공습) 대만총독부 청사,[6] 용산사, 단수이 극장, 대만철도호텔 등의 건물이 파괴되고 3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6월 1일, 오사카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3,960명이 사망하고 8.2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5일에는 고베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11.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7일, 오사카에 재공습이 가해져 5.7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5일에는 4.9km²가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마가사키 까지 폭격을 맞아 1.5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6월까지의 공습 기간 동안 총 12만 명 이상의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들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27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연합군이 파괴한 독일 면적보다 높은 수치였다.(200km²) 미국의 손실은 B-29 136대 손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때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 중순, 사이판에서 헨리 아놀드와 만난 르메이는 협의 끝에 대도시는 그만. 이제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6월 9일, 나라오와 아츠다의 항공기 공장들이 B-29의 공습으로 대파되었다. 아카시의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에도 공습이 가해졌지만 인근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에는 도쿄 만의 6개의 공업 지대가 파괴되었다. 17일에 시즈오카의 하마마츠 그리고 가고시마, 오무타, 요카이치 지역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이 가해졌다. 15.7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고 시즈오카는 잿더미가 되었다. 19일에는 후쿠오카, 시즈오카, 도요하시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6월 22일, 대규모의 B-29들이 서일본의 구레, 카카미가하라, 히메지, 미즈시마, 아카시를 폭격했다.

타겟이 된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4일에는 오사카와 나고야 인근의 공업지대에 폭격이 가해져 4개가 대파를 입었고 26일에는 혼슈와 시코쿠의 공업지대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지만 구름으로 인해 명중률이 떨어져 피해는 적었다. 28일, 모지와 노베오카 그리고 오카야마와 사세보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7월 1일, 구마모토와 구레, 시모노세키와 우베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3일에는 히메지, 고치, 타카마츠, 도쿠시마 지역이 폭격을 맞았고 6일과 9일에는 아카시, 지바, 고후, 시미즈[7] 기후, 사카이, 센다이, 와카야마가 소이탄 공습으로 초토화 되었다.

7월 10일에는 도합 2천 대에 이르는 폭격기가 동원된, 개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합동폭격이 결행되었다. B-29 500대 이상이 오사카 근교 와카야마현과 사카이현, 나고야시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센다이를 차례로 폭격했다. 함재기 1천여 대는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으며, 300대는 규슈의 비행장을,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

12일에는 이치노미야와 츠루가, 우츠노미야에 공습이 가해졌고 16일에는 히라츠카, 쿠와나, 나마즈, 오이타가 폭격을 맞았다. 19일에는 초시, 후쿠이, 히타치, 오카자키에 공습이 가해졌다. 26일에는 마츠야마, 오무타, 도쿠야마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도쿄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 간 미국은 9만 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도시 26개, 총면적 330km²를 초토화했다. 건물 250만 동이 소실되었으며, 산업생산량은 1944년에 비해 약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석탄생산량은 절반, 정유량은 15%, 항공기 엔진은 25%, 총포, 화약은 45%, 알루미늄은 9%로 생산량이 떨어졌다.

그 동안 약 5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반딧불이의 묘처럼 옥외생활 및 식량부족 때문에 죽은 사람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대 사망자가 100만 명 대로 추산되기도 한다.

일본이 항복을 안하자 8월 1일, B-29 836대가 동원되면서 2차대전 중 가장 많은 항공기가 동원된 공습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단순히 폭격기의 숫자만 따지만 밀레니엄 작전 당시 영국이 실시한 쾰른 폭격에 투입된 폭격기가 868대로 더 많기는 하지만 이들 중 4발 중폭격기의 비중이 높지 않고[8] 빅커스 웰링턴 같은 물건까지 포함된 수치라 B-29로 836대를 동원한 것에 비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밀린다고 봐야한다.

다수의 폭탄과 기뢰가 부설되었고 하치오지, 미토, 나가오카, 토야마가 초토화되었고 특히 토야마는 99.5%의 건물이 파괴되는 수준의 문자 그대로 지도 상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8월 5일, 이마바리, 마에바시, 니시노미야, 사가에 공습이 가해졌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인 8월 14일에는, 아키타시에 B-29 134기가 동원되어 전쟁 마지막 대단위 공습을 가했다. 아키타의 소규모 유전과 정유시설을 목표로 한 공습이었고 유전, 정유시설, 항만이 완전 파괴되었고 이에 인접한 시가지가 모조리 전소되었으며 250명 이상이 폭격과 이로 인하 화재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전역이 개박살나는 와중에도 몇몇 도시들은 이상할 정도로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교토, 니가타, 고쿠라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였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일본 제4의 도시였던 교토와 군수공업 중심지였던 히로시마가 멀쩡했던 까닭을 많은 사람들이 무척 궁금해 했다.

일본인들 뿐 아니라 미군의 커티스 르메이 역시 교토를 포함한 이 도시들을 폭격하지 않는 까닭을 따지고 들었다.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9] 하여간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행운(?)의 도시들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야 그 숨은 까닭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 직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돌린 다음 그동안의 전과를 분석하며 추가 작전을 준비했다. 경고문에 대한 내용은 문서 참고.

4월 동안에는 미군이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일본의 항만도시에 만 2천여개의 기뢰도 부설하였다. 그 결과 종전 직전까지 기뢰에 의해서만 백만톤이 넘어가는 일본의 수송선단이 침몰당했고, 기뢰를 피하려다 잠수함에 당해버린 배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일본의 원자재 수입량은 80% 이상 감소하였다. 이는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군수 산업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버린 조치였다.

또한, 외부 점령지로부터의 식량 수입도 덩달아 감소하면서 일본 내 식량난이 크게 심각해졌다. 상세한 건 상기 링크 및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언급된 도시만 봐도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모조리 공격받았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일본령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섬 남부) 정도였다. 대신 홋카이도는 아래 따로 서술할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폭격과 전함부대의 포격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부산이나 제주, 원산, 함흥 등에 소규모의 폭격을 받았다. 가라후토의 경우 경제적 가치가 전무했고 미군 기지로부터 거리가 매우 멀어 폭격을 받지 않았기에 이 소문을 들은 적잖은 일본인들이 가라후토로 피신했는데 몇 개월 후 B-29 폭격기 못지 않게 무서운 손님이 찾아오게 된다.

한편 이런 전략폭격과는 별개로 6월 하순 사이판에 전개한 315 폭격비행대는 역시 B-29를 기종으로 쓰고 있었으나 당시 미국의 모든 기술력이 결집된 최첨단 정밀폭격기기를 갖추고서 야간폭격에 돌입, 일본 전국에 산재한 주요 정유시설을 정밀폭격하였다.

그러나 워낙 르메이의 초토화 폭격의 인상이 강해 전쟁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에는 분석해 보니 정제할 기름도 거의 없는 곳에 폭격했다고 하여 묻혔다. 이미 1944년 이후 남방 점령지와의 해운이 완전히 끊겨서 일본의 석유 수급은 0에 가까웠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의 석유 수송로 자체를 미 해군이 잠수함과 항공모함 등으로 다 끊어버렸기 때문. 315 비행대도 상대적으로 더할 뿐이지 공습의 성과가 없으면 가차없이 대단위 공습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전쟁 최후의 공습인 8월 14일 아키타시 공습이 바로 315 비행대에 의한 것이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역시 B-29에 의해 이루어졌다.


4.2. 제8공군의 폭격[편집]


유럽 전역에서 독일 폭격 임무를 담당하던 제8공군은 독일의 항복 직후 태평양 전역에 재배치되어 1945년 7월 16일부터 오키나와에 전개되어 일본 폭격에 가세했다. 독일을 상대하던 미군의 주력부대가 태평양 전선으로 재배치되는 첫 단계였다.

제8공군이 1945년 7월에야 배치된 것엔 독일이 5월에 항복하고, 유럽에서 지구 반대편인 태평양까지 재배치해야 하는 거리, 시간상의 장애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항속거리 자체의 문제도 있었다. 제8공군의 주력 폭격기인 B-17, B-24들은 사이판, 티니안과 같은 기존의 마리아나 제도 기지에서 출격하기엔 다소 항속거리가 짧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키나와 전투로 오키나와를 함락한 뒤에 이곳을 전진기지로 활용하면서 비로소 제8공군이 배치될 수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제8공군의 주력 폭격기들도 일본 본토까지 충분히 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 전개된 제8공군은 주로 규슈 일대에서의 제공권 제압에 나서면서 소규모 폭격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몰락 작전을 전후로 B-17 및 B-24 폭격기를 대대적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조기 항복하면서 약 1달여의 짧은 태평양 전쟁 참전을 끝냈다.


4.3. 전투기들의 폭격[편집]



P-51 머스탱의 기총으로 기지를 공습하는 현장이 담겨진 동영상

P-51로 대표되는 장거리 전투기가 배치되고, 일본과 가까운 도서지역들이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도 일본 폭격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들의 임무는 B-29의 호위였으나 1945년 5월이 지나면 폭격기들에 도전할 일본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 전투기들도 로켓발사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소규모 공습에 나섰다. 이 전투기들의 작전엔 B-29가 지원되었다. 일본에 가까운 도서지역(오키나와는 제외..?)이 일본 본토와의 거리가 꽤 돼서 항법장비와 항법사가 있는 B-29가 경로안내를 담당했다.

공군 전투기들은 주로 일본군 소규모 비행장과,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주요 공장들, 철도역 등을 타겟으로 폭격에 나섰으며 가끔 움직이는 연안 수송선이나 기관차들이 제일 먼저 얻어터졌다.

한편, 육군과는 별개로 미 해군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도 일본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해군 항공대의 폭격 목표는 당시 해상 작전중 해군의 골머리를 썩던 카미카제의 사전 봉쇄용이 강했다. 오키나와가 떨어진 이후에는 항모를 일본 코앞까지 댈수 있어서 함재기의 작전범위를 더 늘릴수 있기에 이전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간토지역의 폭격까지 감행하게 되었다. 7월 14일, 항모 함재기들이 도호쿠 일대를 폭격한 걸 시작으로 7월 15일에는 그동안 폭격에서 제외된 홋카이도가 항모 함재기 공습을 받았다. 이후 항모기동부대는 일본 동해안을 따라 움직이며 보름여동안 일본의 주요 항구도시를 타격했다. 그중 백미는 구레 군항 공습.


4.4. 전함부대의 본토 포격[편집]


항모 기동부대가 공습을 가하는 동안 미 해군의 전함 부대 또한 일본 본토 포격에 투입되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였는데 전함부대의 지상 화력투사가 비행기에 비해 월등하고 파괴력도 무시무시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과달카날 전투가 격화된 10월에 일본전함 공고와 하루나는 53분간 868발의 14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는데 이와 동급의 공격을 비행기로 실행하려면 이론적으로 1식 육공 900대가 필요했다.

항모기동부대가 공습을 개시한 7월 14일에는 고속전함 3척이 이와테현 카마이시시의 제철소를 포격하였다. 다음날인 7월 15일에는 홋카이도무로란에 아이오와급 3척이 포격을 가하였으며, 17일에는 이바라키현의 히타치시 인근 해상에 영국 해군의 킹 조지 5세를 포함한 고속전함 6척이 히타치 제작소를 대상으로 대규모 포격을 가해 과거의 앙갚음을 해주었고, 7월 29일에는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에 고속전함 4척이 포격을 가하였다. 8월 7일에는 다시 카마이시시에 출현하여 포격을 가해 확인 사살을 가하였으며 일본군 항공대는 여기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16인치 포탄에 얻어맞은 공장지대들은 철저하게 괴멸당하였다.


4.5. 전후에도 이어진 작전[편집]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후에도 일본 본토에서의 항공 작전은 이어졌다. 물론 폭격이 아니라 정찰과 같은 비전투 임무였다. 8월 17일과 18일, B-32 폭격기가 도쿄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해군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항공전으로 기록되었다.

8월 27일 부터 10일 간 일본, 한반도, 중국에 대규모 보급이 투하되었다. 소이탄을 무자비하게 투하하던 B-29들은 이제 보급물자를 투하했고 자그마치 4,500톤의 보급물자가 투하되었다. 작전 도중 한반도에서 소련 공군기의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기도 했다.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가 도쿄만의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서명을 할 때 하늘을 가득 메우는 수준의 수백대의 미해군 전투기들이 미주리 상공을 비행했다. 이는 축하 세레모니이자 동시에 다시는 허튼 짓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의도의 무력시위였다. 통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외교적 결레를 넘는 선전포고 수준이었지만 일본은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항복 서명을 하러 나온 일본측 인사들도 이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미 공군의 일본 열도 및 한반도 항공 정찰 작전이 한동안 진행되었다.


5. 일본군의 대응[편집]


아예 손도 안 댄 건 아니지만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손이 그냥 안 닿았고, 그나마도 뻗을 손이 없다시피 했다.
파일:비29보고서수정.png
일본 본토 공습 중의 B-29 손실 (제 20공군)
1944년 후반기의 정밀폭격시에는 대본영이제 미국이 본토로 폭격을 퍼붓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대응에 나서며 요격기 부대를 배치하고, 해안을 따라 레이더를 설치하며 소형선들을 바다로 내보내 폭격기들을 사전에 탐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라도 했다. 그러나 미군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고, 전술을 바꿔서 초토화폭격에 나서면서 대응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일이 이렇게 된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연합국이 추진한 사실상의 해상봉쇄로 인해 자원이 고갈되면서 뭔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열화된 산업 구조가 있었다. 그리고 폭격기를 막을 전투기의 유능한 파일럿들은 미드웨이-과달카날-필리핀을 거치며 거의 갈려나갔다. 가미카제는 시작 시점에서 이미 항공전력의 등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일본의 능력으로는 폭격을 막을 수도, 이를 수습할 수도 없었다.


5.1. 사이판을 타격해보자![편집]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 이후로 대본영이 지속적으로 생각한 방법으로, 일종의 공세적 방어 계획이다. 적 폭격기가 오길 기다려 방공전을 펼치는 것보다 아예 적 폭격기의 근거지를 공격하자는 개념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 대본영의 계획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나 이오지마같은 남쪽의 섬에 있는 비행장에 항공기를 전개시키고 이 항공기들로 사이판을 때려보자는 데 있었고 이 정도는 충분히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소규모나마 그러한 시도가 있었고 사이판에 몇 차례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소규모 공습으로는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도 못했고, 이후 괌과 사이판의 미 항공전력이 급격히 증대되면서 그런 소규모 공격으로는 도저히 방공망 돌파가 안 될 지경이었다.

이같은 계획의 근본적인 문제는 당연 절망적으로 기울어진 전세로 인해 폭격기들을 호위할 전력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군 폭격기 테크트리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대전 이전부터 일본군의 폭격기 개발 테크는 기체의 대형화와 폭장량 증가가 아닌, 폭격기의 속도와 운동성의 향상에 있었다. 1회 출격해서 많은 폭탄을 떨구는 대신 여러 번 출격하는 것으로 폭장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폭격기의 속도와 운동성의 향상은 동 시기 유럽 열강들도 같이 추구하던 바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폭장량을 희생하진 않았다.

물론 항공 전력에서 빈약했던 중국 상대로는 일본의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서 미국의 쇼미더머니 신공이 보여주는 폭격기의 고성능화+대형화+폭장량은 물론 생산량조차 일본은 범접할 수 없었으니...이러한 꼴에서 다회 출격은 커녕 첫 출격에서 태반이 격추당하는 판이었다.

지상 발진기로의 공습이 안되면 항모 함재기를 이용한 공격을 검토해볼 수 있지만, 해군이 건재했다면 애시당초 사이판을 안 뺏겼다. 애당초 사이판이 함락된 이유 중 하나가 필리핀 해 해전의 참패에 있었고, 몇 달 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연합함대 잔존전력까지 모조리 말아먹으면서 사이판을 타격할 항모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덤으로 44년 11월에 막 취역한 시나노까지 격침된다. 항모가 없으면 전함 등 일반 전투함이 해안까지 밀고가 함포사격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본들 야마토 특공을 몇 달 일찍 찍는 꼴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의열공정대(義烈空挺隊)라 하여, 육군 공수부대(일본군 용어 정진대)에서 차출한 정예병력을 병력수송용으로 개조한 폭격기 다수에 태워 사이판에 기습공격을 단행, 이들 특공대원들이 닥치는대로 B-29를 파괴한다는 구상을 세우고 여기에 의호작전(義号作戦)이라는 명칭까지 붙인다.

그러나 의호작전의 문제는, 항공기 항속거리 문제로 중간에 이오지마에서 급유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오지마 전투로 이오지마가 함락당하면서 의호작전은 실행도 못하고 폐기되었다.그나마 의열공정대는 이왕 만든 부대를 활용이라도 해보자며 미군이 점령한 오키나와에 기습공격하는 작전을 시행했지만, 예상대로 거의 모든 항공기들은 격추되고, 극소수의 부대원들이 생존해서 미군과 교전했으나 곧 전멸하였으며 미군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5.2. 열악한 조기 경보능력[편집]


중국에서 B-29가 날아들던 당시에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한 번, 한반도에서 한 번 폭격편대를 감지하고 본토에 연락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독일도 영국 공군에게 실컷 두들겨맞고 있었으나 서유럽 점령지를 영국 사이에 두고 있던 독일과 달리 망망대해 태평양 한가운데 있던 마리아나 제도와 일본 사이에는 이오지마 및 오가사와라 제도를 비롯한 작은 섬밖에 없었다. 일본은 레이더와 비행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땅'을 상실한 때부터 이미 한 수 접어들고 시작한 셈이다.

더구나 이오지마 전투의 패배로 이오지마 섬도 미군에게 넘어가며 일본 제국은 조기경보 수단이 사라져버렸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영국은 중부지역에 주요 도시와 공업 지대가 위치하여 남부지역이 독일의 공격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의 주요 도시 및 공업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태평양에 인접하여 있었다.

이미 지리적 상황은 최악인데 일본의 자체 능력까지 매우 부실했다. 기본적인 조기경보장비인 레이더는 최악의 성능을 자랑했다. 다른 국가 레이더보다 탐지거리, 정확도, 신뢰성 등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것이다. 이를 만회해보겠다고 군용 청음기들을 도쿄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본토에 폭격기가 날아들기 전에 이를 탐지해야 할 이오지마도 잃고, 자체적으로 보유한 장비는 개판이니 일본 해군이 이 역할을 대신해야 했으나 이미 기나긴 패배의 연속으로 해군은 허울만 남은 존재. 몇 남지도 않은 전함이니 순양함이니 하는 대형선들은 나가봐야 즉각 침몰.

그래서 탐지용으로 소형 선박들을 내보냈으나 목표로 삼을 대형 함선들이 없어 어선이나 때려잡고 있던 미군 잠수함들에게 사냥당했다. 나중에는 어선조차 보이질 않아 때릴 목표가 없어 화난 잠수함 승조원 일부가 자원하여 해안에 상륙하여 철로와 같은 목표 비스무리한 걸 찾아 폭파시키고 돌아오기까지 한다. 이 사례의 주인공은 가토급 잠수함 중에서 격침 톤수 1위를 기록한 USS Barb이다.

사실 이오지마가 있었어도 별 상관 없었다. 날아가는 새를 땅에서 총 쏴서 잡는 게 어렵듯, 새보다 몇십 배는 빠른 B-29를 잡으려면 미 해군처럼 최소한 고고도 요격기→중고도 대공함포→저고도 대공포조직 같은 다층 방공망이 형성해야 하고, 그렇게 해도 100대 중 1대 정도는 뚫린다. 하지만 일본군은 제대로 일원화된 다층 방공망은커녕 대응할 방공팀이 각자 따로 떨어져있고 일본 관료제의 특성상 운영도 경직되어있으며, 특유의 지역 분할 파벌, 나와바리 때문에 자기 머리 위에 B-29가 안 뜨면 옆 동네가 작살나도 구경이나 하고 말았다. 방공 체계가 이 지경이니 아무리 빨리 B-29 편대를 포착해도 공습 경보나 요격 명령의 전파 속도도 지극히 느려 경보가 발령될 때는, 십중팔구 B-29들이 이미 폭탄 다 쏟아붓고 유유히 퇴근하고 있었다. 이오지마를 잃기 전에도 이랬다. 심지어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수도가 포함된 동부, 중남부 지역의 상황이 이 모양이었다.

질도 떨어지는 와중에 남쪽에서 먼저 피켓 역할을 해줄 기지들을 상실함으로써 질도 양도 없어진 일본군은 눈 감고 싸우는 꼴이 됐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당시 일본의 조기경보능력은 장비와 체계, 운영능력, 의지 모두 당시 주요 참전국들 중에서 최악이었다.


5.3.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편집]


위의 문제의 근본에는 일본군의 구시대적인 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레이더로 전파를 내쏴서 적의 위치를 감지하는 건 적에게 자기 위치를 알리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전파를 내쏘는 게 무섭다면 전파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방식으로 적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방법도 있다. 현대의 전자전에서 기본이 되는 레이더 전파에 대한 역추적 목적인 패시브 레이더가 이런 거 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인데, 저 주장을 하고 있을 때도 이미 기술적으로 패시브 레이더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를 사용해서 적에게 자기 위치를 노출시키는 전파탐신에 의지하느니 견시병으로 대응하는 게 더 낫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견시원들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재미를 봤었다. 미군 레이더보다 일본군 견시원이 수 km 떨어진 상대를 먼저 발견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전쟁 중~후반으로 갈수록 레이더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 반해 우수한 견시원들은 죽어나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군 육군이나 해군 할 것 없이 똑같이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고 방식을 고수했기에 야기-우다 안테나 같은 걸작 안테나가 일본인들 손에 의해 개발됐음에도 써먹기는커녕 묵살해버렸다. 참고로 이 안테나는 미국의 두 핵폭탄에 장착된다.

그러한 결과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운명의 5분, 1944년 6월의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같은 대참사를 빚어내게 된다. 심지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같은 해에 있었던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항공전에 들어가서는 그냥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일본이 이길 수도 있는 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대의 후방에 적이 나타났다는 오보 하나 때문에 승리의 기회를 무산시켰다. 이것이 바로 구리다 턴.


5.4. 전투기들의 수준[편집]


이렇듯 일본의 사전 탐지 능력은 폭격기가 바로 머리 위에 올 때까지 제대로 대응을 못할 정도의 멸망 수준인 데다 요격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인도나 중국에서 B-29가 출격하던 시기에는 B-29를 이용한 폭격 전술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B-29 배치 초기의 해결되지 못한 여러 문제점들, 그리고 거리상의 이유로 인한 작전고도의 문제가 겹치면서 일본 전투기들도 나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B-29가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전투기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B-29가 저 높이 올라가있으면 전투기가 따라붙지를 못했다. B-29와 같은 높이로 올라가는 것도 힘이 벅찼고 어찌어찌 올라가면 이번에는 B-29의 속도를 따라잡지를 못했다. 전쟁 초부터 사용한 일본군의 주력기종(특히 육군의 Ki-43 하야부사, 해군의 A6M)들은 애초부터 고고도 작전은 생각도 않고 만든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주력기들은 먼 거리를 빠르게 날아가 잽싸게 치고 빠져 나오는 히트-앤드-런에 특화된 기체들이어서 고고도 비행을 목적으로 설계된 미군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과 비교해서 열등한 공업력과 기술력을 지녔던 일본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일본군의 전투기는 억지로 올라가다가 엔진이 퍼져버리고는 고도를 잃기 십상이었다. B-29 승무원들이 증언한 내용을 들어보면 일본군 전투기가 쫓아오다가 어느 순간 무슨 에프킬라 맞은 모기마냥 뚝하고 떨어졌다고 한다.

그나마 일식육공의 엔진을 단 요격기 J2M 라이덴이나 수랭엔진을 갖춘 Ki-61 히엔 같은 기체들은 고고도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B-29 요격에 투입되었다. Ki-84 하야테는 터보슈퍼차저 같은 장비는 없기에 고고도 성능은 제로센이나 시덴과 큰 차이가 없다. 애초에 터보차저 같은 형태의 과급기는 미국만 만들 수 있었다. 단순 과급인 슈퍼차저 같은 경우는 일본도 잘 만들어 쓰고 있었지만, 터보차저와 터보 슈퍼차져는 아예 미국이 아니면 만둘 나라도 없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럭저럭 쓸 만한 성능이 유지되었다는 것이지 고공에서의 성능이 우수하다고 하기는 애매한 데다가 숫자와 신뢰성이 모두 부족했다.

이마저도 B-29가 고도를 최대로 올려서 최고속력으로 비행하면 폭격기가 전투기보다 빠른 웃지 못할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이는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에서 엔진의 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 과급기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고, 그나마 배치된 것들도 성능이 떨어진 데서 기인한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매달렸으나, 기본적인 공업능력과 기술, 그리고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미군의 공습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실패했다.

고고도에서 성능이 떨어지는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성능이 좋다는 독일기들도 10,000m 정도 고도에서는 엔진이 60~80% 수준밖에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독일은 적어도 폭격기보다 느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련 항공기들은 4~5,000m 이상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였는데 이는 일본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소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고고도에서 공중전을 벌일 일이 잘 없었기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 중에 노획P-38 라이트닝에 장착된 것을 카피한 조잡한 수준의 과급기를 소수의 기체에 시험해 보는게 당시 일본이 발휘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능력이었다..과급기는 슈퍼차저와 터보차저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과급기는 터보차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슈퍼차저는 일본도 항공기용 엔진에 잘 써먹고 있었고 독일제 수랭식 엔진을 라이센스 생산한 경험도 있었다. 반면에 터보차저는 당시 미국이 가장 앞서있던 분야였으니 복제할 가치는 있었다.

르메이의 등장과 함께 B-29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자, 이제는 일본군도 전투기로 요격을 시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위의 열거한 문제점들이 B-29가 내려온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지라 폭격기의 예상 이동로를 예측하여 대기하다가 한 번 요격을 시도하고, 끝. 그나마 이것마저도 전쟁 후반기에 나온 몇 안되는 기종만 가능했고 사전 탐지 역할을 하던 이오지마가 날아간 뒤부터는 아예 시도조차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전투기가 폭격기에 다가가봐야 폭격기에 달린 무기에 되려 얻어맞고 격추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미군 쪽은 비행성능과 더불어 B-29는 크기에 걸맞게 장갑판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관계로 매우 튼튼했고, 일본 전투기에 장착된 7.7mm 기총은 아예 무용지물, 12.7~13mm 기총이나 심지어는 해군의 구형 20mm 기관포로도 좀처럼 효과가 없었다.

이 기관포는 제로센에 장착된 것으로 스위스제 기관포의 카피였다. 근거리에서의 위력은 좋았으나, 탄도가 부정확하여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탄착군이 흩어지고 명중률과 위력이 크게 떨어져서 탄 소모가 많아지는 바람에, 유효탄을 내기도 전에 탄을 다 소모하는 일이 많았다. 바꿔 말하자면 B-29에 제대로 유효탄을 내려면 B-29의 방어화망 안으로 바득바득 들어가야만 한다는 얘기. 이들이 상대해야 했던 폭격기의 방어화력에 대해서는 B-29항목을 참고. 별명인 '하늘의 요새'는 허명이 아니다.

당시 일본 전투기들의 화력 부족은 B-29를 만나기 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터라 일본 육군은 독일로부터 MG 151 20mm 기관포를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입 수량이 많지 않아서 종전 즈음에는 남아난 게 없었다.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일본의 가상전기나 자위물에 자주 등장하는 "마우저포"가 바로 이것이다.

일본 해군은 또한 기존의 20mm기관포를 개량하고, 30mm 기관포도 얹어봤지만 이래저래 역부족이었다. 20mm급의 경우 이미 동급을 운용하던 독일군들도 폭격기 요격에 부족함을 느끼던 차였다. B-29보다 한 수 아래이던 B-17, B-24를 상대하던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30mm급은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를 운용할 기체가 발목을 잡았다. 제로나 하야부사 같은 초기 주력기들은 애초에 엔진이 시원찮아 그 중요한 장갑판도 못 단 허약체질인지라 이런 대형 무장을 운용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후기형 기체들인 , 프랭크, 조오지, 어빙, 등은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전쟁 후반 들어서 열악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덕분에 성능은 고사하고 신뢰성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해권을 잃어버리면서 남방 점령지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이 급감하는 바람에 기체 생산에 필요한 재료가 부실해진다. 인력관리 역시 엿바꿔 먹은 당시 일본의 높으신 분들 덕에 생산을 책임질 숙련공들이 일선의 총알받이로 사라진다. 그래서 끌려간 숙련공들 땜빵으로 징용해 온 일본 민간인/조선인/중국인들의 허접한 숙련도가 맞물려 공장을 아무리 돌리고 징용된 사람들을 아무리 갈궈도 카탈로그 스펙을 절대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선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신형기종보다는 구형기종을 선호하고, 같은 기종이라면 최신 생산분을 외면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특히 하야테는 45년형이 하도 구린 탓에 44년형이 훨씬 선호되었다.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분명 같은 기종인데 일렬로 주기하고 보니 치수가 제각각이라던가, 편대비행을 하는데 각 기체별 순항속도가 들쑥날쑥해서 편대 유지조차 어려웠다는 식으로 당시 지급받은 기체들에 대한 불신이 드러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신뢰성을 인정 받는 기종들은 전쟁 초기에 제작된 구형기들뿐이었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들을 요격에 동원하기엔 그 능력이 낙제점이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J9Y 깃카J8M 슈스이, J7W 신덴이 제때 완성되어 투입되었다 할지라도 그 슈발베의 전철을 이어받아 반짝 활약했다면 좋겠지만 이미 미국은 P-80 슈팅스타가 1945년에 생산되고 있었다. 또 저 세 기체가 완성되었더라도 전시 말기의 열악한 일본의 생산력상 극소수일 건 불보듯 뻔한 일이고 계속 등장할 미국의 신형 기체 앞에 몽땅 격추당했을 것이다.

비행기를 돌릴 연료도 위와 같은 이유로 엔진이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기준으로 집어넣는 실정이다보니 그나마 몇 없던 멀쩡한 기체들마저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송근유라고 해서 소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을 넣기까지 했는데 엔진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종전 이후, 미군이 이 송근유를 시험해 보기 위해 지프에 넣어봤는데 며칠 만에 엔진이 고장나면서 지프가 퍼져버렸다. 신뢰성 좋은 윌리스 MB의 엔진도 이 정도로 맛이 가는데, 일본군 기체들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뻔하다.

이 때문에 아예 전투기의 무장과 장갑을 떼어내 버리고 B-29에 직접 충돌하는 카미카제 전술이 도입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진천제공대'가 유명하지만, '진천제공대' 자체가 카미카제 비행대인 것은 아니다. 단, 작전에 실패 시 카미카제로 좌천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서 막장이었다.

이때의 카미카제가 미군 함정을 상대하는 것처럼 '작전 투입=무조건 인원 손실' 같은 무자비한 조건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는 조종사의 생환을 전제(동체 충돌 후 낙하산으로 탈출)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기체는 100% 손실이었고, 인원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10]

카미카제를 하고 탈출에 성공해 낙하산을 폈어도 B-29의 순항고도에서 지상까지 낙하하는데, 포화를 받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일본군 조종사가 살아서 지상에 착지하기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투기만 이런 판이 아니라 이들을 조종할 조종사도 멀쩡하지 않았다. 이때쯤 일본의 조종사 양성능력은 일선의 수요를 충족하기엔 이미 한계를 넘어간 상황이었다. 조종사를 양성할 능력이 되는 에이스급 조종사들은 전사했거나 부상으로 활동조차 할 수 없었고 훈련기조차 변변한 게 없으니 제대로 된 조종사를 배출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한정된 양성기관으로 수요를 충족하려다보니 조종사 양성에 들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와 비례하여 새로 배출되는 조종사들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동시기 미군 조종사들과 비교하면 일본군은 연습생 수준이었다.

미군은 전역한 조종사들이 훈련교관으로 변모하여 실전에서 얻은 경험, 그리고 적기와 아군기를 비교해서 얻어낸 데이터를 통해 효과적인 전투교범 및 교리를 통해 양질의 조종사들을 육성해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최신형 기종을 개발한 후에는 신속하게 훈련소로 투입, 훈련생들로 하여금 기종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등 전략적인 우위를 지키는데 많은 애를 썼지만 언제나 부족과 결핍이 뒤따르던 일본군에 미군과 같은 조건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1936년 재무장 이후부터 히틀러 유겐트를 기준으로 비행 자질이 있는 청년들을 위주로 파일럿 양성에 힘쓰며 소련 공군을 학살하며 경험치를 쌓은 독일 공군조차 미국과 영국 전투기들과의 교환비에서 약세를 보이며 1944년 초부터는 비행교육을 받은 히틀러 유켄트 단원들을 닥치는 대로 차출하는 수준이었으니 독일보다 양성 시스템과 기체가 허술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B-29만으로도 피똥을 싸던 일본군에게 더 큰 재앙이 닥쳤으니, 이오지마를 점령한 미군이 이곳을 기지로 하여 P-51, P-47을 호위 전투기로 딸려보내기 시작했다. 덤으로 이오지마는 점령 이후, B-29들의 비상 착륙지가 되면서 승무원들의 생환율이 높아졌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조종사들이 폭격기를 요격하기는커녕, 호위기도 못 뚫고 죽어나갔고 겨우 호위망을 뚫고 폭격기에 접근한다고 한들 B-29가 워낙 사기적인 맷집에다가 자체적인 방어무장이 워낙 충실해서 폭격기 잡으려다 오히려 요격기가 격추되기 쉬웠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쯤에 이르면 전투기 부대들은 아예 B-29 요격에 사실상 손을 놓아버린다. 일본 전투기들의 씨가 말라 버렸고, 그나마 남은 것도 본토 결전에 대비한 비축물자로 남겨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군의 공습 동안 일본이 격추시킨 미군의 B-29는 고작 74기에 그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미군이 단 한 번의 공습으로 잃어버린 B-17의 숫자보다도 적은 수이다. B-17이 B-29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5.5. 무의미한 수준의 대공포[편집]


비행기로 폭격을 막는것이 불가능하다면 대공포가 있지만 일본의 대공포는 더욱 막장이었다.

전쟁 당시 일본은 '신주불멸' 즉, '일본은 신의 나라이므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란 정신승리로 자위하고 있었다. 애초에 레이더를 위시한 조기경보체계 역시 이 정신승리 때문에 반대한 부분이 확실히 존재하는데다가, 본토의 대공화기 개발과 배치를 등한시한 탓에 B-29가 들이닥치던 시점에서 B-29에 대해 유효한 대구경 대공화기는 소수의 독일제 대공포의 복제품들 뿐이었다.

나머지는 소/중구경 화기들 뿐이었으나 고고도의 B-29들을 상대로 이들에게 뭔가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였고,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계속된 공습에 차츰 소모되어 갔고, 전쟁 말기의 미군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를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이들이 격추시킨 B-29는 54(+19)대가 전부다. 전투기가 격추시킨 전투기 74기에 대공포로 격추시킨 54(+19)를 합쳐봐야 145기가 전부다. 전 항공기를 다 합치면 614대까지 늘어나기는 하지만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이 격추시킨 연합군 항공기가 4만 대 정도임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손을 놓은 수준. 참고로 미8공군은 독일을 두들길 때 1만 2천대의 B-17을 투입했는데 독일 방공망은 4,750여 대를 격추 혹은 재사용불가 수준으로 손상을 입히고 B-17 항공승무원 4만 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심지어 독일은 1943년 이래 연합군에게 전선과 본토 가리지 않고 독일군들이 공황에 빠질정도로 얻어 터쳤는데도 미국 폭격기 단일종에게 이정도 타격을 주었다.

일본 본토의 방공능력이 얼마나 능력 이하였는지는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있다. 커티스 르메이가 중국 전선에 있을 당시 특기인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을 시전하여 만주에 있는 일본군의 방공망 한가운데를 날아보았다. 그랬더니 요격기는 B-29의 순항고도에 미치지도 못했고 대공포도 르메이의 기체에 한발 명중했지만 기체 손상이 없다시피했다. 만주는 관동군의 본거지인지라 그 전략적 중요도가 상당히 큰데도 이런 판이었다. 훗날 마리아나 제도에 날아온 르메이가 폭격 전술을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5.6. 피해를 줄이지 못하는 빈약한 방재 능력[편집]


폭격 자체를 막을 수 없더라도, 적절한 도시 계획과 방재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피해를 줄이고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국 본토 항공전, 독일 본토 항공전 때 각각 주요 목표였던 런던이나 루르 공업 지대도 이러한 방재 능력을 갖춰서 폭격 전의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도시와 산업 시설의 기능을 유지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일본군 및 방재 당국은 방재 능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마침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도시들은 밀집된 목조 가옥으로 인한 대화재가 역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도시 화재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방재 대책을 강구했다.

도시의 구획을 나누어서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는 '방화대'라는 빈 공간을 마련하고[11] 시내 곳곳에 물을 채운 참호와 방화 수조를 설치했다.[12]

하지만 이런 방책은 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커티스 르메이가 '가내 수공업'이라고 반조롱조로 지적했듯이 시내 자체가 주거 지역과 군사 시설, 공업 지역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시적인 방화대 구축으로 도시 구획을 정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소방차 등 소방 설비도 열악해서 화재 진압 중 상당수는 반상회 조직 등을 통해 동원하는 민간인들이 인력으로 물을 퍼다가 뿌리는 수준이었다.

그런 와중에 웃기는 미신이 퍼지기도 했다. 무너진 집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용케 빠져나온 도쿄의 한 부부는 이 행운을 폐허 더미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금붕어 1쌍이 주인을 위해 대신 죽은 덕분으로 여겼다. 부부는 금붕어들을 가까운 절에 들고 가서 정성껏 묻었는데, 이 소문이 퍼지자 도쿄에 있는 금붕어란 금붕어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순식간에 다 팔려 버렸다. 진짜 금붕어처럼 색을 입힌 가짜 금붕어도 날개 돋친 듯 팔릴 정도. 물론 효과가 있었을 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미군의 폭격 전력은 이런 노력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6. 결과[편집]



필리핀 탈환 이후 일본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으나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은 전쟁의 끝을 최소 1년 이상 앞당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남방 점령지와 본토가 유리(분리)되자 온갖 똥철을 긁어모으고 비축자원을 쏟아부으며 발악에 나섰지만 대규모 폭격으로 산업시설을 모조리 날려먹었다. 그리고 산업시설에서 일할 노동자들 다수가 죽거나 다치고, 생존자들도 겁에 질려 시골로 피난길에 떠났다.

이처럼 폭격받은 주요 도시 시민들은 이 전쟁은 뭔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처절히 깨달았다. 왜 도시 한정이냐면, 미군의 폭격을 받지 못한 외딴 동네에서는 항복 이후에도 '싸울 수 있는데 왜 항복하나요!' 하는 분위기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 대표적으로 1945년 8월 하순에 있었던 마츠에 소요 사건이 있다. 마츠에 소요 사건이 벌어진 시마네현의 경우는 폭격할 가치도 없어서 그냥 건너 뛴 경우라 전쟁 의지가 여전했다.

이처럼 전쟁의 참화를 느끼지 못하는 쪽은 아무리 전세가 불리해져도 항복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1차 대전 직후 독일의 여론이 그 예. 군부도 마찬가지였는데, 본토의 일본군은 대부분 항복의 불가피함을 인정한 반면, 남방 점령지의 일본군 지휘관들은 아직 부대도 멀쩡하고 싸울 수 있는데 왜 항복하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본토와 국민들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오히려 황거까지 폭격받음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참고로 황거 폭격은 우연이었고, 오히려 미국은 발악하는 일본을 괜히 더 자극할까 싶어 황거 폭격을 금지했다. 이렇듯 미군은 전쟁 도중에도 쇼와 덴노의 안위를 보호해주었다.

그러므로 이른바 옥음방송으로 알려진 항복방송 당시 군부나 일반 국민들이나 큰 반발 없이 항복을 받아들인 것도 계속된 전략폭격에 따른 패배감에 기인한 것이다.


7. 여담[편집]



7.1. 공습 전 사전 예고[편집]


“일본국민에게 고함!!”
파일:/pds/1/200601/10/25/b0043125_22253092.jpg
미군의 폭격 사전 경고 삐라
"일본인들은 궐기해서 독재자들을 몰아내라"는 내용도 쓰여 있다.[13]
미군은 일본 시민들에게 일종의 예고장, 혹은 경고장을 보낸 뒤 해당 지역에 폭격을 감행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십시오' 같은 부류의 경고장이었다. 그야말로 일본을 손아귀에 쥐고 쥐락펴락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원자폭탄을 매개로 한 히로시마의 경고문 자체는 도시전설이지만,[14] 공습 대상 도시들의 리스트를 좍 나열해 놓고 그 도시들을 골라서 해당 도시 거주민들에게 폭격 경고 삐라를 날린 후, 리스트에 적힌 도시들을 정말로 모조리 폭격한 건 절대 도시전설이 아니다.

유럽에서의 경험에 따라, 일본에서의 시가전도 가급적 피하려 했다. 일본군이 미군에 대항하기 위한 본토결전인 1억 총옥쇄, 즉 결호작전도 크게 보면 시가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의 일본은 국민들에게 총도 한 자루 쥐어줄 수 없어서 목창이나 죽창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측은 '공업지대 겸 일본 본토에서의 일본 제국 육군의 군사적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도시 리스트를 정해 놓고서, 그 리스트에 따라 하나씩 도시를 소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 리스트를 전단으로 만들어서 일본 본토에 뿌리기까지 했다. 링크

하지만, 일본군이 국민들의 피난을 막았기 때문에 민간인의 희생을 막지 못했다. 대도시 밖으로 나가면 얄짤없이 형편없는 배급체계 때문에 굶어 죽어야 했던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당시 일본의 동원 체제상 징병이건 노역이건 군수 물자 생산이건 쓸 만한 인원들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한 남녀인원은 이탈을 강제적으로 막고 엄벌에 처한 사정도 있다.

이러한 전단살포가 일본인의 전쟁수행의지에 준 타격은 엄청난 것이어서, 전쟁 후 연합군의 조사에 따르면 군수품을 납품하던 어느 기업가는 연합군 조사관에게 "당당하게 폭격할 곳을 지정하고 그걸 실행하는 미군에게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자각해야 했다. 덤으로 만일 폭격이 가해질 경우 입을 피해를 생각해서 공장의 중요한 공작기계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고 생산이 중단되고 생산효율도 저하되었다"고 진술했다.

또 그 와중에 일본 측의 방어태세에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그중 어디부터 어떤 순서로 폭격할지는 적어 놓지 않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한마디로 "어디 어디를 작살낼 건데 어디부터 어떤 순서로 작살날지는 미국 맘대로"라는 것이다.

대상 도시의 거주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러시안 룰렛보다 더한 캅카스 룰렛 수준의 공포의 랜덤빵이었다.[15] 게다가 천운이 따라주면 불발돼서 살아날 희망이라도 있는 룰렛과 달리 일본의 부실한 대공능력은 불발시킬(=폭격을 저지할) 가능성도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기에 안 적힌 곳도 폭격했다. 즉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것. 그래서 몇몇 대도시가 폭격을 맞으면서 일부 도시는 시민들이 시골로 이주해 나가는 바람에 실제 폭격 당시 거주하는 시민이 거의 없는 유령 도시일 정도였다. 덕분에 일본 전체의 공업생산량은 40% 이하로 떨어졌다.

만약 몰락 작전까지 진행됐다면 미군이 진격할 때 방해되는 곳은 일단 공격기가 떼로 몰려가서 총알과 폭탄과 로켓, 때로는 75mm 전차포탄[16]으로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시골도 안전지대는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7.2. 기아 작전[편집]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은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의 해안을 기뢰로 도배해서 일본의 해상 수송망을 마비시키는 작전이었다. 해당 작전을 벌이던 당시 미군이 노렸던 해상 수송이란 한반도 및 중국으로 부터의 물자 공출/입수선과 일본 본토 내해의 해상운송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기뢰전은 직접적인 폭격에 비해 눈에 보이는 전과는 낮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오히려 더욱 뛰어났다.

커티스 르메이 전에 일본 본토 공습을 맡고 있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 소장이 철도와 도로 같은 교통망에 대한 정보를 갖고 이들 교통망을 노린 정밀 폭격을 했으면 이 기아 작전급 봉쇄력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작전을 하려면 교통망에 관한 정보와 함께 위에서도 언급된 제트 기류 문제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을 거다.

일본 본토와 동남아 점령지 사이의 수송은 이미 1944년에 절단나 버렸기 때문에, 1945년 들어서 외부로부터의 물자, 그 중에서도 점령지에서 수탈한 식량의 수입은 중국과 한반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 내에서의 물류 이동의 상당 비중을 해상 운송이 차지하는데, 이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철도와 자동차 도로가 발달한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지경이다.

이 작전으로 인해 일본과 해외와의 해상 수송 및 연안 해운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것들을 막아버리는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부산항인천항 등 주요 항구들이 기뢰로 폐쇄되고, 경부 축선과 호남 축선이 고속도로, 철도 할 것 없이 죄다 끊긴 것과 마찬가지. 이는 모든 자원 수급이 한계에 다다른 일본에겐 또다른 치명타였다. 그나마 기뢰밭을 뚫고 간신히 운항하던 극소수의 항로도 1945년 6월에 들어서는 사실상 끊겼다. 이 때가 되면 미군 잠수함대가 동해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기아 작전은 도시 폭격과는 별개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해안가에 시체들이 가득하다는 흉흉한 얘기가 나돌았다. 그 시체들이 무엇에 당한 건지는 뻔할 뻔자다. 한편, 전쟁 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 노년층들은 이 시기를 '소카이(疏開)'라고 부르며 치를 떤다. 폭격을 피해서 낯선 곳에 온 것도 모자라서 먹을 것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당연지사. 절대적인 식량의 양 자체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있는 식량도 해운이 마비되면서 제대로 운송하지 못해 식량 공급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일본 해상자위대의 소해 전력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데 그 이유가 이 기아 작전에 데인 경험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루머에 가깝다. 자위대의 비정상적으로 강대한 소해 전력은, 냉전 시기에 소련 해군 잠수함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대잠 능력을 몰아준 결과이다.


7.3. 한반도 공습[편집]


위에 잠시 언급했지만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외지인 한반도에도 소규모 공습이 있었다. 물론 커티스 르메이가 고안한 도시와 시가지에 대한 저고도 융단폭격은 아니었고 원산, 신의주, 함흥, 인천, 부산 등에 있는 산업시설, 군사시설, 철도역, 부두에 대한 정밀폭격이나 신의주, 목포, 군산, 제주 등 항만을 목표로 한 소규모의 기뢰 살포 작전과 함재기를 동원한 인근 해상을 통과하는 전함, 화객선을 상대로 한 통상파괴 작전이 주를 이루어 민간인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영토인 중국을 기지로 한 폭격기 편대가 일본 본토로 향할 때 한반도를 통과하면서 조선 시내에 사이렌이 울리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방공훈련 진행과 조선 주둔군의 대공포나 항공대가 폭격기대를 추격한 사례도 있으나 폭격기대가 격추된 사례는 전무하다.

당시 일반 조선 시민들 중엔 이런 소규모 폭격과 일본으로부터 들은 대규모 폭격에 대한 소문 때문에 미군이 한반도 또한 폭격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2년 전에 연합군 수장들이 한국은 일본과 별개의 국가로 보아 일본 항복 후 독립시키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하여 선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제 사정을 아는 조선 사람들은 '미군이 우리를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7.4. 대만 공격[편집]


일본의 다른 식민지이자, 중국 남부에 대한 군사 거점인 대만 섬에도 항구와 산업 시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공습이 있었다. 특히 전략 폭격이 없었던 한반도와 달리, 대만에서는 위에서 서술했듯이 타이베이가 전략 폭격을 받아 3,000여 명이 사망하는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당시 타이베이 인구가 30~40만 명 내외였으니 3,000명이면 상당히 큰 인명피해이다. 인구가 10배 가까이 많았던 오사카의 인명피해가 타이베이의 3배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으므로,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로만 따지면 오사카보다도 훨씬 큰 인명 피해를 입은 것이다.


7.5. 공습 피해가 적었던 지역[편집]



7.5.1. 교토[편집]


교토가 공습과 원폭 투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문화재 보호의 목적이 컸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었다는 이유의 실제 언급은 원자폭탄 표적선정 위원회의 1945년 5월 30일 회의. 맨해튼 계획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특히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은 당대 미국인 중에선 보기 드물게 일본 경험이 꽤 많은 사람이었고, 1920년대 필리핀 총독 부임 당시 여러차례 일본을 방문했는데, 특히 교토의 학구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 때문에 핵폭격 표적 관련 논의 현장에서도 아름다운 교토를 파괴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이 오히려 "일본인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나마 문화인인 교토 시민들이 아니면 핵폭격의 의미조차 못 깨달을 거다"라고 반론할 정도였다.[17]

결론적으로 교토가 재래식 공습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향후 핵폭격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고 최종적으로 핵폭격 대상에서 벗어난 건 스팀슨 개인의 의견이 주효했다. 그는 교토를 지키기 위해, "맨해튼 계획에서 내가 최고 책임자였던 일은 아직 없지만, 이 일만은 내가 결정권자다. 당신들은 내게 보고서만 가지고 오면 된다."라고 말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후 투하 직전까지 그로브스와 거의 매일같이 교토 핵폭격 문제로 싸움을 거듭했다. 아무리 그로브스가 극비 프로그램의 책임자로서 막강했어도 일개 젊은 투스타 장성이 전체 육군을 책임지는 아버지뻘의 육군 장관에게 함부로 대들 수 없었다. 그래서 훗날 교토부지사와 교토시장이 스팀슨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참배를 올렸다.

교토가 폭격에서 제외된 다른 이유는 본토 결전 계획이나 향후 연합국의 일본 통치에 있어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단지 미국이 일본의 문화유산을 지켜주기 위함만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미국 정부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다. 교토는 고중세 헤이안 시대부터 근대 메이지 시대 초까지 1,00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으며 전쟁 시점인 1940년대에는 수도 지위를 잃은 지 불과 7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교토는 단순히 도쿄, 오사카, 나고야와 같은 '대도시1'이 아니라 일본 문화와 역사를 응축한 고도(古都)이자, 언젠가 덴노가 다시 돌아올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이렇게 상징적인 도시가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다면 오히려 일본인들의 저항 의지에 불을 붙일 지 모른다는 판단이 있었고, 일본 본토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추후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도 있기에 따라서 미국 역시 교토 폭격으로 잠재적 부담을 안기 보다는 안전하게 다른 공업도시를 노리는 방안을 선택했다.

이외에도 교토에 폭격할 만한 산업시설이 많지 않아서 순위가 밀렸다는 관측도 있지만 교토는 당시 일본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도시로서 많은 산업시설 및 대학시설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술했듯 1945년 6~8월에는 교토와는 비할 수도 없이 작은 중소도시들에도 B-29가 대거 출현했기 때문에 교토만 놔둘 이유도 없었다.

다만, 교토에 대한 폭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1월 16일, 3월 19일, 4월 16일, 5월 11일, 6월 26일의 공습이 대표적. 총 폭격 회수는 20회가 넘으며, 이중 5월 11일에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황궁인 교토 어소(京都御所)를 폭격하기도 했다.[18] 또한 교토대 이화학 연구소(京都大理化学研究所)는 당시 일본 원자폭탄 개발계획의 중추 중 하나였으며 해군의 직접자금지원을 받아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의 사이클로트론(입자 가속기)이 건설 중이던 곳이었고, 당연히 폭격을 받았다. 5월 11일 공습을 제외하면 전부 저런 대학 연구소를 노린 폭격이었다. 다만 교토 시내에 대한 포격 강도가 분명 타 도시들의 그것에 비해 현격히 약했던 것은 사실이며 교토의 유수한 문화유산이 남을 수 있었다.


7.5.2. 홋카이도와 남사할린[편집]


당시 일본의 내지였던 홋카이도와 가라후토(현 사할린 남부)에도 공습이 적었다. 애초에 일본 제국 내지 중에서도 가장 깡촌이었고, 이렇다 할 중요시설도 전혀 없었으며, B-29 발진기지인 마리아나 제도와도 멀어 미국이 공격하기 애매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습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 덕분에 미군 공습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군건너와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점령하고 소련의 강역으로 편입했으며 홋카이도까지 위협했다.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

다만 홋카이도의 경우 남사할린에 비해 인구가 많았고 산업이 발달했으며 미군의 발진 기지였던 마리아나 제도에서 비교적 가까웠기에 소규모 공습이 종종 있었으며 무로란, 네무로, 구시로 등 주요 항만 시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폭격이 있었다. 또한 남사할린의 경우 미군의 공습은 없었지만 2차 대전 말미 소련군이 최대 도시인 도요하라에 대해 공습을 감행했다.


7.5.3. 핵무기 투하 목표 지점[편집]


최초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도 이 융단폭격의 리스트에 있었지만, 핵무기 개발이 완료됨에 따라 제2안으로서의 핵무기 투하 목표지점이 되면서 소이탄 세례를 면했다. 따라서 재래식 폭격을 맞지 않은 이유는 교토와 일치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핵폭탄을 맞은 이유는 교토와 같은 고도(古都)가 아니었고 고쿠라와 같이 운이 좋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고쿠라의 거주민들 중 상당수는 다른 도시가 여러차례 폭격을 당할 동안 한 번도 공격받지 않은 것에 의아해했다. 시마네 현 청사가 있는 도시인 마츠에와 같은 곳도 있긴 했지만, 이 지역은 정말 산업적 가치가 없어서 안 때린 것이다.

불길한 소문이 돌아서 적지 않은 거주민들이 시골로 이사가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한 번도 공격받지 않은 안전한 도시라는 소문을 듣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일부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기 직전, 핵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며 해당 두 도시가 왜 통상 폭격을 맞지 않았는가에 대한 까닭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반면 교토와 고쿠라는 각각 역사와 날씨라는 이유로 공습과 원폭 모두 운좋게 빗겨나갔다.


7.6. 영국군의 참여 계획[편집]


영국 역시 독일 항복 이후 유럽에 배치된 중폭격기들을 오키나와로 재배치하여 '타이거 부대'로 이름 붙이고 일본 본토 폭격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항복이 조금만 늦었어도 B-29 못지않은 또다른 괴물 아브로 랭커스터가 일본의 그나마 남은 도시들을 날려 버렸을 터였다.

이외에 영국 태평양함대는 미군과 더불어 전쟁말기에 공습에 참가했다. 구레 군항 공습 당시 오사카 등 다른 군항을 공습하던 중, 카미카제 공격에 장갑항모와 함재기 일부가 손상을 입기도 했다.


7.7. 소련군의 공습[편집]


미군의 본토 공습에 가려져 인지도가 낮지만 2차 대전 말미에 소련군도 일본 본토 공습에 참여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한반도, 가라후토(남사할린),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에서 항공 작전을 전개했는데 이중 가라후토와 치시마 열도는 엄연히 ‘내지’, 즉 일본 본토였다.

특히 가라후토의 청사가 있던 도요하라 시가지에 진입하기 직전에도 혹시 모를 일본군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홋카이도로 탈출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모여있던 도요하라역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다만 소련군의 공습은 어디까지나 후에 소련에 편입될, 소련군의 작전 지역에 한정되었고, 홋카이도 침공안이 무산됨에 따라 현 일본의 영토에 대한 공습은 실행되지 않았다.


7.8. 2차 공습 계획(취소)[편집]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항전을 택했다면 실행되었을 몰락 작전의 기획안을 보면, 사실 이전까지의 공습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주요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동안의 공습과 달리 8월 17일부터 일본 본토 전 지역에 대규모 전략폭격이 예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육군 항공대와 RAF의 폭격기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전에 주력했던 항모 기동부대와 전함들이 일본에 한층 가까이 접근할 예정이었다.

즉, B-29가 못 때린 곳은 함포와 타이거캣, 헬다이버로 때려부수고 잔존 전투기와 카미카제들은 베어캣을 포함한 함재기 부대가 본격적으로 작전에 투입될 계획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방공호에는 그 강력하다는 그랜드슬램보다 두 배나 무거운 T-12 클라우드메이커가 투하될 예정이었다.


8. 전후 영향과 매체[편집]


도쿄 대공습을 포함한 일본 본토 공습은 현대 일본 최대의 정신적인 PTSD 중 하나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미국인들에게 Remember Pearl Harbor를 각인시킨 것처럼 당시 미군의 대량 폭격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한국인이 전쟁하면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부대의 일방적인 기습이나[19] 인민재판, 전쟁 피란민, 피 말리던 산악 고지전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듯, 많은 일본인들에게 전쟁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비가 대도시를 불태우고 박살내는 모습으로 각인시킨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여전히 이 방법 외에는 일본 본토에 다른 나라 군대가 상륙해 직접 군대나 민간인을 공격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피해 묘사도 폭격이라는 원 패턴 묘사가 대부분이다.

고지라 시리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인트로 부분에서 거신병들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장면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중간 부분에서 하울이 검은 새로 변신해 전장 상공에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 후반부에서 소피의 마을이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는 장면 등이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 특촬물 등에서 거대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모습들이 일본인에게 내재된 전쟁 트라우마를 보여준다는 시각도 있다.

당연하게도 아베 신조 같은 일본 극우세력들은 본인들의 과오를 고려하지않고 일본 본토 공습이나 도쿄 대공습만 책임을 물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은 미국에 의해 일본 본토 공습을 당하기 전부터 중화민국에 대해 충칭 대공습 같은 민간인 무차별 전략 폭격을 가했다.

오히려 김태우 교수처럼[20] 미국이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소이탄 대공습에서 영감을 얻어서 일본 공습 때 똑같이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9. 일본 본토 공습 묘사가 등장하는 관련작[편집]


아래 내용은 도쿄 외의 일본 공습 관련작 목록이다. 도쿄 대공습 관련작은 도쿄 대공습 문서 참고 바람.



10. 말말말[편집]


우린 매캐한 잔해 속에서 숯덩이로 발견된 일본인들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ㅡ 헨리 '햅' 아놀드 장군의 편지 "축하하네, 이번 일로 자네들이 무엇이든지 해낼 용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에 대한 커티스 르메이의 답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커티스 르메이

커티스 르메이의 이 말은 근현대 전쟁에서 총력전의 개념을 단적으로 묘사한 말로 손꼽힌다. 쉽게 말하면, 이러한 총력전은 결국 국민방관협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다만 이 말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는 게, 당시 일본에도 후세 다쓰지 등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간 반전주의자들은 제법 있었고, 일본군에 잡힌 포로나 강제징용된 한국인들 등등 전쟁과 무관하거나 반대하던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들에겐 죄가 없다.

정보가 제한되던 시절 일반인이 군부 정권에 저항할 수단이란 기껏해야 불복종 정도인데 그것조차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 게 현실이었다. 르메이는 6.25 당시 한반도 폭격도 주도한 바 있는데,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당시 민간인 학살도 별 문제가 아닌 게 될 수 있다.

Killing Japanese didn’t bother me very much at the time…. I suppose if I had lost the war, I would have been tried as a war criminal….. every soldier thinks something of the moral aspects of what he is doing. But all war is immoral and if you let that bother you, you are not a good soldier.

(나는 그 당시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략) 만약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나는 전범으로서 기소되었을 것이다. (중략) 모든 군인은 도덕적인 측면을 고민한다. 하지만 모든 전쟁은 비도덕적이며, 만약 이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한다면, 당신은 훌륭한 군인이 아니다.)

커티스 르메이

다만 위에 발언했듯이 A급 전범 마냥 민간인 학살을 당연시 하진 않았으며 전에 있던 발언을 비교하면 단순 무기만능주의에 가깝다.

일본의 도시란 이런 식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모든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순서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 폭격 직전에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보고.

말 그대로 일본 군부 내 통치 상황상 모조리 강제참여한 기업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1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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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실제적인 피해 규모와 별개로 둘리틀 공습도 일본인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2] 참고로 태평양의 크기는 지구상의 모든 대륙이 들어갈 수 있을만큼 넓다.[3] 육군항공대 항공부참모장 겸 제20공군 참모장이었다. 당시 제20공군은 합참 직속으로서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대사령관이 직접 제20공군사령관을 맡았고, 태평양해역 육군항공대사령관이 부사령관을 맡았다.[4] 반면 3주전 드레스덴 폭격땐 어마어마한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5] 사진 하단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에 있는, 옆으로 눕힌 日자 모양 건물이다.[6]
파일:二戰時被轟炸過的臺灣總督府.jpg
당시 폭격으로 인한 파손과 화재로 매우 심한 손상을 입어, 전후 1948년까지 3년에 걸쳐 수리를 진행해야 했다.
[7] 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등. 나중에 시즈오카시와 합병된다.[8] 햄덴 같은 구식 기체까지 박박 긁어모아 투입했고 정비공장에서 파손된 기체까지 살려내어 총 출격 대수는 1,034대가 되어서 밀레니엄 작전이라고 부른다. 이 중 폭격기는 총 868대로 나머지는 호위 전투기까지 다 합친 숫자.[9] 물론 당시 핵의 존재가 철저히 기밀이었는지라 르메이를 포함한 미군 지휘부 역시 첫 핵폭격 이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10] 이런 예는 사실 전쟁 말기 독일에서도 있었다. '엘베 특별공격대'라는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작전은 폭격기 요격작전을 상당히 많이 해본 독일 공군 수뇌부와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조차 전투 인력을 1회성으로 소모한다며 반대하였고 투입도 일본과는 달리 투입한 자원 대비 효율이 나쁘다는 이유로 1회성에 그쳤다. 다만 일부 요격 특화 부대의 경우 최악의 경우에 한해 동체 충돌을 권고하기도 했다.[11] 맨발의 겐 2권에서 원폭투하 후 불길을 피해 도망치던 시민들이 여기 들어갔다가 타 죽은 시체가 된 장면이 몇 번 나온다.[12] 참고로 서울의 세운상가는 당시 일제가 종로 일대에 조성했던 이 방화대 위에 세워졌다. 6.25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이 이 곳 일대에다가 판자촌을 짓고 살기 시작하고, 점차 이 지역이 홍등가로 변하면서 무질서해지자 1960년대 이 지역의 무허가 건축물들을 철거하고, 그 위에다 세운 주상복합건물이 현 세운상가가 되었다.[13] 이 삐라를 줍는 자는 징역 3개월형에 처해졌다. 경고문의 자세한 내용은 히로시마의 경고문 문서를 참고.[14] 그런데 나가사키의 경우 기상 문제로 2차 목표로 지정돼서 투하된 거긴 하지만 진짜로 경고문을 보내고 원자푹탄을 투하했다.[15] 캅카스 룰렛은 6연발 리볼버에서 다섯 발을 실탄으로 채워넣는다. 업그레이드판 러시안 룰렛인 셈.[16] B-25, A-26 일부 파생형과 A-38은 전차포를 장착하고 공대지 포격(...)을 가하기 위한 공격기로 쓰였다.[17] 육군 장관 헨리 커티스 르메이는 교토야 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스팀슨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으며 뒤이어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도 이를 두고 스팀슨과 갈등을 빚었다. 다만 후술하듯 르메이는 교토를 재래식 폭격하지 않는 이유를 전혀 모르면서 작전 수행을 한 반면 그로브스는 교토의 핵 투하를 두고 스팀슨과 대립한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소 다르다.[18] 단, 도심 폭격을 우려한 일본 측에서 교토고쇼를 해체한 후 따로 보관했기 때문에 주요 전각들은 폭격을 면할 수 있었다.[19] 한국 국민과 국군의 트라우마 중 가장 큰 것이 이 북한이 끌고온 T-34-85다.[20]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역사를 정리했고 무턱대고 미군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