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령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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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도
昭南島

일본 제국의 군정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국기[1]
존속 기간
1942년 ~ 1945년
위치
싱가포르
정치체제
군정#군정청
국가원수
천황
정부수반
사령관
언어
일본어
통화
일본 발행 달러
주요 사건
1942년 일본군 점령
1945년 일본군 철수
성립 이전
해협식민지
멸망 이후
말레이 반도 영국군 정부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싱가포르일본 제국이 통치한 시기이다. 이때 싱가포르는 일본에 의해 쇼난도(昭南島)로 강제 개명당했다.[2] 화교들은 신가파일점시기(新加坡日佔時期)라 부른다.


2. 역사[편집]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영국홍콩을 통해 중화민국을 돕는다고 여겨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탓에 손쉽게 식민지를 뺏겨버렸다.

여기에 기세를 몰아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 전 지역으로 확대해 필리핀미국으로부터 빼앗고 또 다른 영국령인 말레이 연방까지 쳐들어가 말레이 반도 본토를 순식간에 차지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령 말레이 연방의 최대도시였던 싱가포르까지 침략하여 싱가포르 전투를 치렀지만 영국군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특성 상 손쉽게 패배했고 싱가포르 주둔군이던 영국 해군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호주로 패퇴해야 했다.

싱가포르는 이후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간다. 이름부터 쇼와의 남쪽 섬이라는 의미의 소남(昭南)으로 바뀐다.

이곳을 일본군이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많은 물자를 얻게 되어 사기가 올라가고 물자 전달 방식을 현지 조달, 손쉽게 말해 약탈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싱가포르에 굉장히 많은 패악질을 부린다.

이때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적국인 중화민국과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이는 말레이 반도 본토인 말라야도 해당된다.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에 대한 탄압은 거의 없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자유 인도 임시정부 관련해서 잘못 퍼진 루머로 일본군에게 항복을 거부한 인도계 싱가포르인 영국군 장병과 군무원, 영국령 말레이 연방 경찰공무원 및 총독부 소속 공무원들 상당수가 수감되거나 살해당했다.[3]

현재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벌인 숙칭 대학살[4]은 일본 군부가 18~50세의 중국계 싱가포르인 게릴라 또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자행한 학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추산 5000명, 학계 추산 약 5만명, 중국계 싱가포르인 커뮤니티 추산 10만명 정도의 화교가 학살당하였다.

이 학살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및 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2. 중화민국에 재정지원을 한 자.

3.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활동을 하거나 반일행동을 한 자.

4.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5.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경찰관 및 식민지 주둔 영국군 군속.

6.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7.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8. 하이난성 (海南省) 출신자.[5]

9. 일본군의 검문 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출처

위의 기준에 따라 어마무시한 학살이 벌어져 문자 그대로 중일전쟁 때 난징에서나 볼 법한 인간 도축장이 섬 전체에 펼쳐졌다. 이때 중국계는 하도 괴롭힘을 당해 호주로 돈 싸들고 도망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웅크렸다 온 사람도 많으며 특히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풍골 비치, 창이 비치 등 동부 해안가의 경우 현재 목 없는 중국인 귀신이 대거 출몰한다는 도시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일본군이 난징에서처럼 학살 때 사람들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계 학살 역사는 싱가포르 교육에서 전 인종을 통틀어 제대로 배우며 특히 중국계는 밥상머리 교육 등으로 젊은 세대도 일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확실히 일본 문화보단 한류가 더 영향력이 강하며 특히 F&B에선 한국 브랜드가 압도적으로 인기인게 바로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 때문이다. 오히려 35년[6]을 지배받은 한국보다 더 반일 성향이 짙은데 짧은 시간에 너무 잔혹한 괴롭힘을 당해서이다. 시간이 오래 흘러 싱가포르에 국빈 방문한 일본의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싱가포르 국빈 방문 당시 싱가포르 외무장관인 라자나트남으로부터 일본인은 반성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거 같다며 극딜당하기도 했다.

중국계는 물론 백인들도 괴롭힘을 당한 건 물론이고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일본군으로부터 터무니없는 망신소리까지 들어야 했으며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백인들 중 일부는 망신소리와 조리돌림 끝에 자결하기도 하고 일부는 호주로 피신해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싱가포르를 영국이 탈환한 후에나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은 이곳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속칭 바나나 달러라 불리는 일본 발행 달러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는 해협 달러가 더 많이 쓰였으며 화폐의 발행과 현지 공장의 가동 중단, 영국령일 때 인도 제국호주에서 수입하던 식량이나 자원을 수입하지 못해서 생필품 가격이 오르는 턱에 겁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연합국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 공군미국 해군 항공대가 맹공격으로 해안가의 일본 해군기지에 대규모 폭격을 퍼붓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등의 본격적 탈환 시도는 없었고 일본 해군도 해안선 방비를 철저히 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선 곳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미합중국 해병대에 밀리며 하나둘씩 점령지를 뺏기기 시작하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전멸해버려 전쟁이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자 영국군은 말라야 반도와 홍콩에 상륙해 두 지역은 일찍이 해방시켜 버린다.

이후 끝까지 일본군이 버티는 싱가포르의 경우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탈환할 지퍼 작전과 조석 작전을 영국 해군이 입안한다. 그러나 그 전에 미국이 원자탄 2방을 일본 본토에 선물하고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한반도 북부, 만주, 내몽골,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모두 쫓아내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이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여 항복한 뒤에도 한 달 동안이나 싱가포르에선 일본군이 버티는 바람에 싱가포르만 계속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영국 해군이 전함 두 척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일본군을 설득하여 현지 사령관이 받아들임으로써[7] 영국은 싱가포르를 되찾게 된다.

싱가포르는 한반도 남부와 함께 그나마 패망한 일본군이 곱게 물러난 케이스인데 소련이 탈환한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 사할린 등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비참한 꼴을 당하며 끔살당하거나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미국이 일본에게서 빼앗은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민간인 희생이 매우 컸고 미국이 탈환한 필리핀이나 괌 등에서도 일본군은 대거 미군의 압도적 공세에 끔살당하는 베드앤딩을 맞았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선 일본군이 현지인 게릴라들에 의해 꼴사납게 쫓겨났다.

리콴유는 유소년 시절 이 일을 모두 겪었는지라 일본에 대해 생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싱가포르 독립 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날을 민방위의 날로 지정하는가 하면 싱가포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Singapore)에 일본군이 점령했을 당시 벌인 학살극을 자세히 언급하고 관련 유물도 모두 전시해 박제해놨으며 싱가포르 역사 교과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잔혹 행위를 벌였다며 날을 세운다. 사석에서도 일본의 재무장은 알콜중독자에게 알콜이 들어간 초콜릿을 주는 격이라며 재무장을 꿈꾸는 일본을 정신병자에 비유해 극딜하기도 했다.

민간에서도 특히 중국계 사회에선 반일 감정이 상당하여 서구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식집에 걸린 욱일기가 싱가포르에는 없으며 욱일기나 일본군 미화 등은 금기시된다. 현재까지 생존한 그 시절 학살에서 살아남은 중국계 노인들도 꽤 많으며 이들은 아직까지 앙금이 남아서 일본 요리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젊은 층도 일본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와 별개로 감정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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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정부인만큼 군기욱일기일장기만큼 많이 쓰였다고 한다.[2] 쇼와 시대에 차지한 남쪽 섬이라는 뜻이다.[3] 물론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 중 일부는 일본군과 함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 대해 쌓인 감정 때문에 학살에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중국계도 이에 응수해 서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싱가포르 해방 후 리콴유가 민족 갈등을 없애고자 인종/사회 통합책을 쓰는 이유가 된다.[4] 현재 싱가포르 MRT 동북선 차이나타운역 앞에 숙칭 대학살이 벌어진 장소가 유적지로 지정되어 안내문이 붙어 있으며 젊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도 어렸을 때부터 이를 배우고 일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5] 왜 하필 하이난성이면 일본군은 이들 대다수를 공산주의 활동가로 보았기 때문이다.[6] 을사조약을 기준으로 하면 사실상 40년이다.[7] 다만 이건 그나마 온건히 나온 케이스여서 일본군 300여 명이 항복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