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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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 현대 일본
7.2. 1950년대~1960년대: 55년 체제와 고도성장
7.3. 1970년대: 안정성장의 시작
7.4. 1980년대: 거품경제의 시대, 대중문화의 발전, 쇼와 시대의 끝
7.4.1. 1980년대 일본경제의 실상
7.5. 1990년대: 헤이세이 시대 개막, 잃어버린 10년과 장기정체의 시작
7.6. 2000년대: 고이즈미 개혁과 정치 혼란기
7.7. 2010년대: 동일본 대지진과 아베의 장기집권
8. 일본 내 공교육에서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문서.


2. 선사시대[편집]


구석기 시대 일본은 빙하기로 인해 한반도타이완, 남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시기에 인류가 일본에 첫 발을 딛었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본은 섬이 되었고,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일본의 구석기 시대는 약 12만 년 전에 시작했다.[1] 그 시기의 유물과 화석인류는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는데, 일본은 판 경계 특성상 지각 변동이 심하다는 점, 산성 화성암 토양이기 때문에 유골이 남기 어렵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2]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고, 드문드문 발견되는 수준.

시즈오카의 화석인류인 하마키타(浜北)인, 1946년 발견된 군마의 이와주쿠(岩宿) 구석기 유적이 유명하다.[3] 1946년까지는 일본 열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와주쿠에서 타제석기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일본 구석기 문화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조몬 시대는 길게 보면 기원전 1만 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청동기시대철기시대는 기원전 400년경을 전후로 한반도에서 유입한 도래인으로부터 급격하게 시작되었다.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기원전 400년 경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긴 세월동안 원시 수렵 채집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조몬인과는 달리 야요이인은 한 단계 더 발전한 문명인 농경 문화, 금속 제련 기술을 보유한채로 일본 열도에 진출했고, 그들에 의해 일본 열도는 단기간에 매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또한,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4]

이후, 기타큐슈혼슈 서부 및 남부[5]를 중심으로 소국들이 세워졌으며, 이합집산을 거쳐 4세기 경에는 현재의 나라현에서 미약하게나마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춘 야마토가 등장하였고, 주변 소국들을 하나하나 복속시키며 외교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고훈 시대(古墳時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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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고사기에서는 신화로 일본의 건국을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포함한 연대상의 논란으로 교차검증 없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경제, 군사, 문화 교류를 시작함으로써 존재감을 알린 것은 기원후이며, 그 때 일본은 '()'라는 이름으로 중국사와 한국사의 문헌에도 등장하게 됐다. 왜국 문서 참조.

일본삼국시대 초기의 백제, 임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였고, 신라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동남해안을 수시로 노략질했다. 그 시기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에 대해서는 수 많은 학설들이 난립하고 있어서 쉽게 저술할 수는 없지만, 삼국 통일 전과 후가 확연히 대비될 정도로 많은 교류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특히, 백제와 가야의 정치적 혼란 및 멸망 시기에는 일본 열도행을 택한 많은 이주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에서 일본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일본 사신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서 왜국전에서는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幷敬仰之恒通使往來, 즉 백제와 신라가 일본을 섬기는 것처럼 나와 있는데, 당연히 근거 없는 허세라고 봐야겠지만, 이를 볼 때 일본은 백제와 신라를 각각 '밀접하게 교류하는 국가', '자주 충돌하는 국가' 정도라면 몰라도 상국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어디까지나 일본쪽 학자들의 의견이지만.

다만, 일본은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것 자체는 수많은 언급과 기록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기에 아직도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기록과 백제쪽 기록을 대조해보면 사실상 상국으로 대우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본 사학계에서 이걸 인정할리가 없으니 논쟁이 끝날리가 없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왕신라로 병력을 움직여 가야()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단순히 가야가 왜를, 혹은 왜가 가야를 똘마니로 부렸다고 볼 게 아니라 그만큼 가야와 왜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큐슈에 있던 친가야 세력이 가야를 지원해 신라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조몬 시대조몬인이 일본 열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후 야요이 시대에 농경 문화와 금속 제련술을 알던 한반도 도래인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되어 기존에 살고 있던 조몬인을 밀어내었고, 야요이인이 되었다.

이후 세워진 국가인 야마토는 당시 삼국시대였던 한반도(그 중에서도 백제와 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야마토는 한반도로부터 전수받은 문물로 일본 열도 안에서 군사적·문화적으로 매우 강한 국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6] 점차 동쪽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조몬인 계통의 부족들도 정복하고 흡수하면서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이 때 야마토 정권에게 밀려 혼슈 동북부와 홋카이도로 내몰린 조몬인 계통 세력이 에조(에미시)이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혼슈 동북부가 완전히 일본으로 통합되었고, 홋카이도의 에조 세력인 아이누인들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일본에 통합됐다.


3. 고대[편집]


파일:japan-history-yamato-map.png


일본이 국가로서 틀을 잡은 6~7세기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견수사가 파견되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의 선진 문화를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는 용자 짓을 보여주었다. 보낸 사신은 놀랍게도 살아 돌아왔다. 상대가 수양제였는데도 말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7]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문화학자들은 이를 일본영국 같은 섬나라가 가지는 공통 특성으로 보기도 하는데 로마, 프랑스, 바이킹의 숱한 침입을 겪은 영국에 비해서도 일본이 이 점에서 더 유리했다.

사실 수양제도 일본을 칠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시도했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원을 다스리는 수양제로선 당최 먹어봐야 뭐 나올 거 같지도 않을 나라였을 뿐 아니라 수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려면 어떻게 하든 배를 타야 했는데 문제는 수양제는 중국 본토만 먹은 상태였던지라 당연히 당시 기술로 일본까지 배 타고 원정하는 데 아주 오래 걸렸다. 당시에는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해류와 바람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약간의 경험과 나머지는 운을 믿고 최대한 잘 떠내려가는 수준에 그쳤던 터라, 육지를 따라 연안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원해를 건너 항해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급품이며 병사며 모든 것을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배가 침몰되기라도 하면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다. 게다가 몇 달이나 항해하고 오는 병사들이 과연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8]

또한 일본이 왜라는 기존 국명을 버리고 '일본'이라는 두 글자의 국명을 채택한 것은 중국에 한 수 깔고 들어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반도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두 글자 국명을 채택하고(혹은 고구려의 세 글자. 고구려도 5세기에 두 글자 국명 '고려'로 개칭.) 중국사 왕조들이 한 글자 국명을 채택한 이유는 한 글자 국명의 국가는 천자국이고 두 글자 국명의 국가는 외왕내제건 어쨌든 중원 왕조에 숙이고 들어가는 제후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이 요, 금, 원이라는 한 글자 국명을 내건 것도 이들이 중원 왕조를 표방했기 때문이라는 점. 따라서 중원 왕조 입장에서도 왜가 두 글자인 일본으로 국명을 고친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뜻 자체는 조금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천자국은 한 글자 국명을 쓰고 오량캐들이 여러 글자 국명을 쓴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다. 물론 일본은 중원의 화이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 국서 내용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다. 해당 표현은 단순히 "동쪽에 있는 나라가 서쪽에 있는 나라에게"라는 관용어구적인 표현이지, 일본 중심 세계관을 어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학설. 후한의 승려 용수가 지은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0에는 "불경에 이르길, 해 뜨는 곳은 동방이라 하고, 해가 지는 곳은 서방이라 하고, 해가 이동하는 방향을 남방이라 하고, 해가 가지 않는 곳을 북방이라 한다(如經中說,日出處是東方,日沒處是西方,日行處是南方,日不行處是北方)."라는 구절이 있다.

만주와 한반도에 위치해 있었기에 대륙의 정세를 살피고 중윈의 정권과의 외교 관계에 신경 써야 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와는 달리, 고립된 섬나라인 일본은 그러한 당대의 보편적 트렌드와 상관 없이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의 세력은 중화 중심의 세계관을 외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실익을 도모하는 위치에 있었던 반면,[9] 일본은 지리 조건으로 인해 중국 문물을 들여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상대적인 한계가 있었던 반면, 직접적인 중화질서의 일원에서는 한 발짝 비켜 서서 동아시아에서 고립적이고 독자적이며 자주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에는 한결 유리했다.

쇼토쿠 태자 사후 다이카 개신과 삼국시대가 끝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이주를 거치면서 일본은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됐는데, 그때 쯤에 덴무 덴노가 국명을 '일본'으로 바꾸고 천황(天皇)이라는 군주의 칭호를 확립하였고[10]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조쿄(현재의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본격적인 율령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나라 시대까지는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다.간무 덴노가 다시 헤이안쿄(현재의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자주적인 국풍 문화를 일으키고 번성함으로써 헤이안 시대를 이루어냈으나, 점차 외척과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천황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특히 후지와라 가문의 200년에 걸친 세도 정치가 유명하다. 그 시기 도다이 사를 포함하여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정토종, 선종 수용은 후의 지방 분권화를 촉진하게 됐다. 특히 와카 등 괄목할만한 문학 작품이 등장한다.

4. 중세[편집]



4.1. 가마쿠라 막부[편집]


이후 12세기 겐페이 전쟁을 거치며 무사들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천황과는 별도로 쇼군이 통치하는 막부가 세워지며 쇼군이 사실상의 실권을 잡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가의 교토에서 떨어진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해 약 150년간 일본을 다스렸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과 1293년 가마쿠라 대지진을 겪으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쇠퇴, 붕괴되었다. 허나 가마쿠라 막부 붕괴 이후에도 약 600년 동안 19세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무사들의 실권장악은 지속되었고 쇼군과 천황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4.2. 무로마치 막부[편집]


이후 잠시 겐무 신정이 있었지만 곧 황실이 둘로 쪼개진 남북조시대가 도래했고 교토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졌다. 한편 이 시기 남북조시대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지방 통솔력이 약해졌고 이러한 배경에서 왜구가 창궐하여 주변국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중세 일본 경제 발전의 시기이기도 했는데 견당사를 통해 유입된 모내기법(= 이모작)이 보급되어 농업생산량이 증가했고 우경이 시작되었으며 상업이 발달하여 이후의 새로운 문화 수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11]


4.3. 전국시대[편집]


무로마치 막부의 붕괴(오닌의 난) 이후 본격적인 사무라이, 다이묘들이 군웅할거의 시대에 돌입한다. 특히 전란으로 유명한 이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때의 영향이 너무 컸던 탓에 이후 일본은 이때와 직후인 에도 시대에 생겨난 생활 풍습과 문화 등에 지금까지도 곳곳에서 가장 많은 관습적 영향을 받고 있다.

흔히 말하는 무사도 문화의 기원이 바로 이 시대이며 일본인들의 사회적 규범과 암묵적인 규율을 칭할때 빠지지 않는 혼네다테마에 문화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고착화되어 갔다고 보고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시대의 예절 및 풍습을 비롯한 성리학적 문화가 여전히 사회적 관습으로 잔재되어 짙게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과 전국시대-에도 막부는 시기적으로도 서로 비슷하게 맞물린다.

한창 전국시대였던 1543년 최초의 서양인이 일본에 발을 딛게 되는데 이들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이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전국시대부터 일본은 조총을 비롯한 다양한 서양 문물을 직접 접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 즈음하여 일본은 포르투갈철포(조총)를 도입하고 분석하여 개량했으며,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일본의 조총 보유 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보다 많았다고 한다.[12]


4.3.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편집]


오다 노부나가가 뛰어난 지략과 조총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새로운 전술로 연승을 거두면서 거의 일본의 전국 통일을 완수하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노부나가의 부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빠른 행동으로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이 완수되면서 전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이후 내부의 불만을 잠재울 겸 기세를 몰아 임진왜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이후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가 떠오르며 일본의 판도가 뒤바뀌게 된다. 전국시대 중에서도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 시기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한다.


5. 근세: 에도 막부[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새로이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이 시점에서 일본의 중심이 긴키의 교토-오사카에서 간토의 에도(현재의 도쿄)로 옮겨간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 한정하여 조금씩 교류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쇄국 정책이 시행되었다.[13]

에도 막부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하여 소위 무사도 또한 중앙 통치에 알맞게 격식화되었으며, 조선으로부터 성리학을 수입하여 통치에 활용하고, 조선 통신사를 통해 쇼군의 정통성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경제 발전에 힘입은 서민 층의 쵸닌(町人) 문화와 병존하였고 이 균형이 깨질 때 즈음 19세기 제국주의 확장을 더욱 가속화하던 서양 세력이 다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막부타도파, 복벽파가 에도 막부에 반발하여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이 무진전쟁이다. 에도 막부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하고 일본사의 막부정은 종료된다.


6. 근대: 일본 제국[편집]



6.1. 메이지 유신[편집]


왕(천황)을 드높이고, 외세(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14]를 명분으로 내세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다시 천황에게 실권이 돌아오게 된다.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구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매우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며, 당시 일본은 세계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

다만 근대화 성공을 무작정 일본의 위대함, 일본의 저력 등으로 포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시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서태평양 일대를 식민화하던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잠시 손을 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한 측면도 존재한다. 일본이 근대화를 하던 1860~70년대에 하필 서양 열강들이 남북전쟁, 그레이트 게임, 보오전쟁, 보불전쟁,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등의 혼란상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 내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무런 역량 없이 단순히 시기만 잘 타고났다고 보는 시각 역시 곤란하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 역시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는 이미 흑선내항 이전부터 소위 난학이라 부르던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기관을 설립하였고 농업, 상업, 무역의 발달로 부의 축적을 이루어 일개 번들이 서양군함 수척을 사들여 굴릴 정도로 근대화를 일궈낼 기초 역량이 뛰어났다. 이렇듯 일본은 19세기 중반 이전에도 근대화를 받아들일 자본적, 정신적 준비가 되어있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운과 실력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역량이 준비된 나라에 약간의 운과 시대적 상황도 따라주었다고 보는 시각이 객관적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1869년 판적봉환과 도쿄전도, 1871년 폐번치현, 사민평등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면서 1890년에는 국회을 개설, 1889년 헌법도 제정하였다. 식산흥업정책을 표방하며 산업 발전에도 박차를 가하면서 관영 공장과 철도, 제철소 등을 세우고 은행제와 금융제를 도입하였다.


6.2. 제국주의[편집]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압박하여 강제 개국시키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동아시아의 기존 패권국인 청나라에 승리하여 타이완섬관동주를 얻었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 승리하여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다가, 결국 한반도는 일본에 강제적으로 합병되었다.

이후 서구 열강들과 함께 패권을 부리며 대놓고 제국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친선관계였던 영국에 도움을 준 사례를 들어 승전국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지 않고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게 된다. 미크로네시아칭다오를 비롯한 독일 제2제국의 아시아권 구 식민지들을 추가적으로 차지한 것도 이 시기.

현 시점에서 보통 일본 제국을 말할 때, 메이지 시대 ~ 다이쇼 시대를 전성기로 본다. 이후 일본 제국이 1923년 관동대지진을 기점으로 사회상의 동요가 시작되었고 1930년대 들어서면서 군국주의화 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사상적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같이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권의 신 사상들이 크게 퍼진 첫 시기가 1910~1920년대였다.


6.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그러나 다이쇼 시대로 대표되는 좋은 시절도 잠시였다. 점차적으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점점 높아졌고, 상황이 다급해진 농민들은 도쿄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한다. 당시 관동 대지진 때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 거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을 이룬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아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면서 마침내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은 기본적인 경제적 체급이 이미 전 유럽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공공 건설을 늘리는 뉴딜 정책이 성공하면서 다시 극복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 열강들은 막대한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을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이들 국가에 비해 미약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1차 대전에 패배하면서 안그래도 부족한 식민지를 전부 잃어 큰 위기를 맞이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결국 나치당에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기며 나치 독일로 재탄생, 1차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기껏해야 배상금 일부와 티롤 지방 정도만을 받은 이탈리아 왕국도 공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군부가 정권을 획득하며 2차 대전의 씨앗이 싹튼다.

결국 이 세 국가들은 파시즘군국주의에 물든 채로 1930년대를 맞이하였고 서로간의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이 된다. 군부 세력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더욱 더 미쳐간 일본은 중국을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일전쟁, 난징대학살을 일으키며 온갖 패악, 깽판을 벌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점 폐단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아시아 확장정책에 반감을 느낀 미국이 '계속 그렇게 놀면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안 팔겠다'는 초강수로 나서자, 이성을 잃은 일본 군부는 미 해군의 중핵인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전격 기습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본격적인 대미전쟁을 일으켰다(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권 전체를 순식간에 침략하여 싸그리 식민지로 만드는 등 야심을 키웠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대패,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중추 전력을 이때를 기점으로 상실했다. 또한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압도적인 체급으로 버티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술, 전략적인 성과를 내며 선전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이 중국 전선에 묶이게 되었고, 의미없는 소모전이 강요되었다.[15]

이후 이미 전쟁을 수행할 만한 물자와 기반이 한계에 다다른 일본과는 달리 타국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생산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미 공군의 공습에 본토가 유린당했으며 반자이 어택카미카제와 같은 기행을 반복하며 전력만 소모했다.[16][17]


일본이 정신나간 기행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자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터뜨린다. 사실 도쿄 대공습이 있었던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본토의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일본은 일상적으로 폭격을 당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대놓고 미군기가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면서 안전하고 쉽게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 소련군이 한반도 근처까지 진격해 오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소련군이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8월 8일로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8월 6일 후의 일. 사실 미국은 친소 성향의 루즈벨트 행정부 당시 소련이 전쟁에도 참여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반소 트루먼 행정부가 들어선 후 극동에서의 소련의 지분을 최소화하려 하였고 소련 견제가 원자탄 투하의 여러 목적 중 하나가 맞긴 했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아도 절대 항복하지 않고 죽창을 잡을 것이며, 일본군의 저항도 상당하리라고 미국이 과대평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미 원폭이 먹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시나리오로 1946년을 겨냥한 올림픽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자마자 곧바로 항복하면서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경험했던 격렬한 일본군의 저항과 이로 인한 미군의 큰 손실과는 다르게 이미 독소전에서 지옥을 맛봤던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던 만주의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까지 진격했고 해상에서도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여 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역을 차지했다.[18]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정은 제2차 세계 대전 항목 참조.

이로써 일본 제국은 패망하고 강점하였던 식민지와 점령지가 해방되었으며,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연합군 점령하에 들어간다.


7. 현대 일본[편집]



7.1. 1945년: 연합군 점령하 일본[편집]


패전 후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군정기를 거치면서, 경제나 식량사정이 피폐해져 있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UN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전쟁특수로 공업기반을 재건하였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어 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주권을 되찾았다.

패전 이후 향후 10년 동안 전국의 복구화를 발빠르게 추진하였고 반공정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며[19] 냉전기에 들어서 공산주의 확산에 예민해져 있던 미국의 신뢰를 다시금 얻어갔다.

덕분에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7.2. 1950년대~1960년대: 55년 체제와 고도성장[편집]



이후 진무경기를 맞이하며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54년 12월부터 1957년 6월까지 31개월 동안 이어진 전후 첫 번째 대형 호경기. 진무 경기 동안 일본은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하는 발전을 이뤘다. 이름도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 덴노에서 따왔다. 일본 정부1956년 경제백서에서 '이제 전후(戰後)는 끝났다'[20]고 선언할 정도였다. 이 시기 이루어진 자유당 -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 만년 여당이 되는 55년 체제가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서독을 제치며 미국소련에 이어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도달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에 이어 오키나와에 미군의 장기 주둔을 인정하는 개정을 1960년에 자민당이 강행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본의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이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를 위한 개발붐이 일었고, 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였음을 알렸다.


7.3. 1970년대: 안정성장의 시작[편집]



1970년대의 신주쿠
뒤이어 일본 전후 최대, 최장기 호황으로 1965년 11월~1970년 7월의 5년 8개월 동안의 이자나기 경기 등 일련의 대호황을 거친다. 1970년대 초반에는 국제통화위기(1971년)가 발생하였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금본위제 폐지, 복지원년 선언을 기점으로 일본의 경제는 고도성장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접어든다.

또한 1960년대~70년대 초반까지 일본은 단순한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1964 도쿄 올림픽, 1970 오사카 엑스포와 같은 전 세계적인 스포츠, 국제행사를 각각 아시아/동아시아 최초로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위상과 소프트파워를 성공적으로 과시했으며 이를 통해 그 이전까지 서구권 국가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동양이라고 무시당하거나 추축국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던 부분들을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도 일본의 경제는 이전과 같이 순조롭게 성장하였으며 그 성장세는 구미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것이었다. 이미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마이크로 전자공학(microelectronics) 혁명이 발생하여 전자산업 등의 신기술 혁신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산업구조에 들어가는 자원과 비용이 과거에 비해 적어져 더 큰 이득을 본것이다. 십수년에 걸친 장기적 경제호황과 신기술의 보편화에 의해 1970년대 후반기의 일본은 안정적인 경제체제에 돌입하였다.

한편으로는 2차 대전 이후 한 세대가 지나자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반감이 테러리즘으로 나타났던 시절로 2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극좌 테러 조직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각종 전범 기업에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7.4. 1980년대: 거품경제의 시대, 대중문화의 발전, 쇼와 시대의 끝[편집]



1980년대는 단카이 세대(團塊世代·1947~50년생)가 3~40대에 들어선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은 1980년대에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아니지만 연평균 4~5%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하였다. 1984년, 일본의 1인당 GNP는 1만 474달러에 달하였다. 동시기 미국은 1만 5,949달러의 GNP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일본은 1984년 기준으로 개인 소득에서 미국의 66%까지 추격하며 질적인 경제성장에서도 대성공을 보인 것. 그리고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가치가 수직상승하면서 일본은 1987년에 국민소득 2만불을 달성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추월했다.

당시 일본의 위상이 어땠냐면 전 세계 10대~50대 대기업 랭킹에서 일본 기업이 최소 절반, 많게는 3분의 2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으며[21] 197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패배,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여파와 오일 쇼크의 직격탄을 맞아 여러모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적으로 우울했던 미국에서 일본의 고속성장에 위기를 느껴 블레이드 러너, 로보캅과 같은 영화에서도 일본에 의한 패권침탈 관련 내용들이 쏟아졌을 정도이다. 1970년대까지 총 GDP에서 엇비슷한 체급을 가진 서독을 1980년부터 크게 따돌리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유럽 3대장인 서독, 프랑스, 영국의 GDP를 모두 합쳐야 일본을 겨우 능가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경제 규모를 갖추게 된다.* 한 마디로 일본 역사상 최대, 최고의 전성기였다.

많은 일본의 우익들이 "패전 이전의 일본 제국 시기가 황금기였다" 주장하고 상당수 그리워하지만 실상 일본의 진정한 황금기는 1980년대였다. 일제 시절은 겉으로 보기엔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식민지 개척, 군비 확장,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부리는 등 그럴 듯한 제국주의 강대국이었으나 실상은 당시 구미 열강들 사이에서 경제력이든 인프라든 공업 기술력이든 여러모로 밀리는 후발주자였다. 게다가 서민들은 전쟁물자나 징병제로 인해 끊임없는 수탈의 연속이었고 여전히 굶거나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이었으며 , 국가시스템도 전근대적인 잔재들이 강하게 남아있었기에 인권과 언론이 심각하게 탄압당했다.

문화적으로도 1980년대는 활황이었다. 대중음악시장에서는 1970년대부터 조금씩 등장한 일본 아이돌 시장이 80년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남자 아이돌은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히카루GENJI 등이다. 여자 아이돌은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가 가장 유명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쿠도 시즈카, 아사카 유이, 나카야마 미호, 미나미노 요코가 아이돌 4대천왕으로 불리며 영화드라마까지 진출하였다. 장르적으로도 시티팝, 시부야계 음악들이 역으로 서구권에 수출되기도 하였으며 후대의 일렉트로니카J-POP 형성에 큰 공헌을 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는 서구권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대중음악의 전성기를 견인할 락 뮤지션들이 오버와 언더그라운드를 가리지 않고 급격히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도 80년대이다.

버블시기에 망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내수요도 늘어나 일본 서브컬처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건담, 드래곤볼, 지브리 계열의 극장 애니메이션등이 있다.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일본의 문학이나 건축, 만화가 해외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흐름은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까지도 생명력을 잃지않고 이어진다.

미국에서 시작된 비디오 게임 시장은 정작 1980년대 일본을 통해 세계적인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가 기존의 비디오 게임 시장 1위를 지키고 있었던 미국의 아타리를 제치고 슈퍼마리오, 젤다의 전설 등을 연속 히트 시키던 닌텐도가 업계 1위를 차지한 황금기이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4,000톤급 하츠유키급 12척[22]과 7,200톤 시라네급 헬기구축함을 2척, 4,900톤 아사기리급(DD-151 ~ DD-154)4척, 5,900톤 하타카제급 방공함 2척을 도입한 시기였다. 거품경제시기 일본은 해군력도 폭발적으로 증강시켰다.

허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한 엔화의 상승이 시작된다. 나름 풍족한 자산을 갖춘 1억이 넘는 인구를 바탕으로 내수가 탄탄해졌지만 일본의 근본적인 경제구조이자 캐시카우였던 '가성비 좋은 전자제품 수출'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 동시에 국내 금리가 하락하여 버블 경제를 초래하는 기반이 마련된다. 동시기 서구의 국가들은 실업과 인플레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85년 엔화 강세로 일시적인 위기를 겪는다. 일본의 거품 경제(バブル景気 ←버블 경기)의 기준을 1986년부터 1991년까지로 정하는 구분도 있다.[23] 수요감소와 설비과잉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정부는 엔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국내 수출산업과 제조업의 경쟁력을 지원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시작한다. 1987년 2월, 일본은행은 시준 은행들에게 정책금리를 2.5%까지 낮추었다. 시중 금리의 하락을 유도한 것이다. 일본의 저금리 정책으로 환리스크를 보유한 미국 채권 등이 일본 국내시장에 침투한다. 이로 인하여 부동산주식이 급등한다.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평균주가(日経平均株價, にっけいへいきんかぶか)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38,915엔 87전에 도달하였다.

겉으론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일본 역사상 가장 휘황찬란했으나 알게 모르게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한 1980년대는 쇼와 시대가 막을 내리고,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며 종결된다.


7.4.1. 1980년대 일본경제의 실상[편집]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규모를 일찌감치 따돌리고 초강대국인 미국의 턱끝까지 추격하며 경제력 세계정상을 넘보는 공업선진국 반열에 도달한다.

그러나 화려하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제투성이였다. 국가의 주요 기업인 및 공무원화폐 빌려주는 은행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세계적인 경제 흐름을 빠르게 읽고 제대로 된 신진 산업에 돈을 투자하거나 기술개발을 적극 추진하여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경제호황을 통해 벌어놓은 돈들을 가지고 싼 땅이나 저렴한 주식 사놓고 값 오르길 기다리거나 물밑 작전에만 몰두한 투기꾼들처럼 실질적인 생산 없이 그저 돈 놓고 돈 먹기인 머니 게임에만 수 년 내내 빠져버렸고 그에 띠른 거품을 한없이 부풀려나갔다. 문제는 이러한 거대 규모의 도박을 정부, 기업, 대다수의 국민들을 전부 포함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속한 것이다.

거품경제의 붕괴는 이러한 국가 규모의 머니게임이 대실패로 끝난 후에야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품이 꺼지면서 자국내 부동산과 주식을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 돈을 불리기 위해 투자해온 국민들의 재산이 멈출 줄 모르고 폭락하기 시작하였고 높아진 엔화의 가치로 세계에 영향력을 뿌리던 일본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나마 경제호황기였던 1960-1980년대 초반까지 악착같이 쌓아올린 탄탄한 기술적 노하우를 바탕으로 거품경제가 박살난 이후에도 한동안 국제무대에서 업계 선두자리를 유지한채로 오래 버텼지만 결국 일본의 전성기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캐시카우이자 과거 업계 최첨단을 자랑하던 가전 및 전자제품 시장에서 신제품 및 기술 개발과 마케팅에 실패한채로[24] 한때 내로라하던 전자기업들의 체급과 경쟁력이 급축소하는 충격적인 모습마저 보이기도 했다. 획기적인 제품과 서비스들을 마구 생산하면서 세계를 놀래키며 다방면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제끼던 "뭘 해도 성공해온 젊고 트렌디한 CEO" 일본은 현재 과거 전성기에 쌓아올린 국가적 명성과 자산 및 준기축통화로서 엔화가 가진 위력을 중심으로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예전에 무지막지하게 벌은 큰 돈으로 버티고 있는중인 중노년 아저씨"가 되어버린 셈이다.

결국 시대적인 천운과 당대 산업 트렌드를 주도하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경제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이후로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다시금 예전만큼의 호황을 절대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면서 경제성장률이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며 급기야 동아시아 경제의 패권을 중국에게 재차 넘기게 되고, 고도성장기에 구축한 거대 인프라와 내수시장으로 경제를 순환시킨채로 유지하는 중이며, 거품경제 시절과 같이 국가 경제 자체가 계속 성장하면서 이를 외부로 확장시켜 나가는 모양새의 진취적인 발전은 더 이상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7.5. 1990년대: 헤이세이 시대 개막, 잃어버린 10년과 장기정체의 시작[편집]


1989년 1월 쇼와 천황의 죽음 이후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헤이세이 시대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버블붕괴 이후 근 10년간의 디플레이션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직전까지의 호황과 대비되는 암울한 시기였다. 특히 일본은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 부동산과 주식이 순식간에 폭락하였고 1990년대 후반기에는 기존에 쌓아올린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덮치며 일본 경제의 활력이 상실된다.

1990년, 일본은 440조 1249억 엔(약 4400조 원)의 GDP를 달성하였고 1인당 GDP는 미국의 81%까지 추격한다. 1991년 2월부터 닛케이 평균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19일, 주가는 12,879엔 97전을 기록하였다. 이것은 1989년 최고치에 비교하여 67%나 폭락한 수치였다. 1990년, 도심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는 5400만 엔이었다. 1995년에 그 지역의 아파트는 2800만 엔으로 폭락하였으며 1998년 들어서는 2100만 엔 정도에 매입이 가능했다. 대략 8년 동안 50% 이상 폭락한 것이다.[25]

일본 정부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기를 부양시키려 노력했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게다가 버블경제의 후유증으로 남은 악성 대출들이 은행들을 위기에 빠트렸는데, 정부가 은행들이 파산하기 시작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져서야 개입하기 시작하다보니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기업과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기 시작하고 투자와 소비는 점점 줄어,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디플레이션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일본 경제는 외환위기 같은 갑작스런 추락을 겪는 대신 완만하지만 꾸준한 내리막길을 탄다. 정부의 대책은 대규모 공공 공사를 통한 경기부양 정책을 펼치지만 빚만 잔뜩 늘려놓고 쓸모없는 인프라나 세운 걸로 끝났다.

다만 이때까지는 'J-POP'라고 불리는 대중음악이 일본의 거대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음반시장은 더욱 성장하여 시장규모에 있어서는 최전성기였다. 1980년대의 정통 아이돌 황금기가 끝이 나면서 에이벡스 계열의 뮤지션들이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중에서도 코무로 테츠야 군단으로 불렸던 TRF, 아무로 나미에 같은 뮤지션들이 크게 활약했다. B'z, 미스터 칠드런 등의 밴드 뮤지션들이 수천만장을 판매하여 음반판매량 1, 2위를 기록한 시기 역시 1990년대였다.

에이벡스계 뮤지션과 락밴드에 밀려 잠시 쇠퇴했던 아이돌계도 다시금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돌로는 2010년대까지 국민 아이돌로 불리며 큰 활약을 보였던 SMAP을 선두로 쟈니스계 남자 아이돌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여자 아이돌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히로스에 료코SPEED 그리고 90년대 후반엔 불황시기에 희망적인 가사의 LOVEマシーン을 히트시킨 모닝구 무스메가 유명하다.

1993년~1999년, 군사적으로는 해상자위대에서 9,500톤 공고급 이지스함 4척, 6,200톤 무라사메급 4척, 14,000톤 오오스미급 강습상륙함 2척[26]을 도입하여 아시아에서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로 올라선 시기다.


7.6. 2000년대: 고이즈미 개혁과 정치 혼란기[편집]


1990년대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불황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경기부양책, 복지예산의 증가로 일본은 국채가 GDP 대비 100%를 넘어 800조 엔 정도로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최고급이 되었다. 물론 불행 중 다행히 국채 중 상당액(90% 가량)이 일본 자국 내부의 지분이기 때문에 디폴트 상황까진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자국 국민들에 잘게 쪼개어 직접 국채를 파는 대신[27]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대행하여 매수를 시켰기에 좋을 때야 대마불사지만, 국채 상환에 못 맞출 경우엔 미국과 같은 투자대란이나 불량 채권이 문제가 아니라,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게다가 저출산이랑 고령화와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의 휴유증으로 경제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었다. 일본 정계에서는 2000년 ~ 2001년 4월 까지는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정권이었고, 2001년 4월 말 고이즈미 내각이 본격 출범한다. 드문 카리스마를 보여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부에서 대중수출 증가와 우정개혁, 불량채권 정리로 미진한 호황(이자나미 호황)을 이어갔다. 고이즈미가 임기를 마치고 총리직에 오른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의 정책을 계승하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다음 해에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잠깐의 중흥도 잠시였고 2008년에는 리먼 쇼크로 경제 면에서는 미국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고이즈미, 아베의 후임 총리들은 잦은 내각교체로 인해 제대로 된 정책을 수행하지 못했고 국민들만 실망시켰다. 2007년 9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1년에 한 번 총리가 바뀌는 정책 없는 혼란의 시대였다.

2009년 9월 16일, 드디어 자민당이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민주당에 의해 무려 54년 만에 이루어졌다.[28]


7.7. 2010년대: 동일본 대지진과 아베의 장기집권[편집]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2011/Japan Tsunami 2011 - Ocean Overtops Wall - 海嘯 - सुनामी - تسونامي - বেলোর্মি - цунами - 津波

HD Flight over Fukushima I NPP-25%slowdown-stabilized(2011년 3월 22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영상)
간 나오토 내각 시기인 2011년,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사고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민주당이 자멸하고, 자민당의 아베 신조가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2013년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로 단기 경기부양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아베노믹스가 장기 고용, 소득 확대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결국 경기 불황 속에 물가만 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아베노믹스는 현재까지도 긍정과 부정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간의 침체를 멈추고 성장한 점에서 다시 일본 경제가 호황을 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다만 계속되는 저출산, 인구 자연감소는 여전히 일본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해결되지 못하였다.


7.7.1. 2019년: 헤이세이 시대 끝, 레이와 시대 개막[편집]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고 나루히토 천황이 즉위하였다. 이에 따라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내리고 레이와 시대가 막을 열었다. 2019년 4월 30일까지는 헤이세이 31년, 2019년 5월 1일부터 레이와 원년(元年)이 된다.

2019년 6월 오사카부에서 2019 G20 오사카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미중 무역 전쟁에 따라 제1세계 진영과 제2세계 진영이 대립하였다.

2019년 7월 아베 정부는 한국에 수출 규제를 건다. 이에 한국은 반발하며 일본을 WTO에 제소했고,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까지 하였으며, 이 시기 양국의 관계는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가장 안좋은 상태가 되었다.


7.8. 2020년대[편집]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일본도 이에 피해를 입었다. 아베는 일본 총리 중 최장기 집권을 기록한다. 그러나 8월 말에 지병 악화로 사임 의사를 밝힌다. 9월 중순 스가 요시히데가 차기 자민당 총재 및 새로운 일본 총리로 선출되었다.

코로나19에 따른 팬데믹으로 1년 연기된 2020 도쿄 올림픽이 많은 일본 국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무관중으로 개최되었다. 일본은 개최 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개최를 하고 무사히 패럴림픽까지 폐막을 하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후 2021년 9월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임기 1년 만에 총재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새 총리로 기시다 후미오가 선출되었다.

8. 일본 내 공교육에서[편집]


(일본 내 역사교과서를 참고하여) 일본의 공교육은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지 다룰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교에서 사용하는 역사교과서 한 권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책의 앞 페이지에 있는 목차 부분을 끌어내서 설명하기로 한다.

일단 근대사 부분에서는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의외로 일본 주류 역사 교과서들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딱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뒤 한국 측의 저항운동이 있었고 일본군이 이를 탄압했다 정도. # 다만 한국 측 교과서보다 축소된 부분이 있다.

NHK에서 학생을 위해 제공하는 역사 관련 정보 초등학교용 중고교용

예시)상설 일본사-야마카와출판사

제1부. 원시,고대[구석기시대~헤이안 시대 중기]
제1장. 일본 문화의 새벽(あけぼの)
제2장. 율령국가의 형성
제3장. 귀족정치와 국풍문화

제2부. 중세[헤이안 시대 말기~센고쿠 시대]
제4장. 중세사회의 성립
제5장. 무가사회의 성장

제3부. 근세[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제6장. 막번체제의 확립
제7장. 막번체제의 전개
제8장. 막번체제의 동요

제4부. 근대,현대[에도 시대 말기~헤이세이 시대]
제9장. 근대국가의 성립
제10장.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아시아
제11장. 점령하의 일본
제12장. 고도성장의 시대
제13장. 격동하는 세계와 일본


9. 관련 문서[편집]


[1] 중국 대륙한반도보다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70만~80만 년 전 유적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뜨기도 했지만, 죄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날조라는 것이 밝혀졌다.[2] 대신 석회암 지대인 오키나와는 거짓말 보태서 섬마다 선사시대 인골이 나오는 수준. 자세한 건 오키나와/역사/선사시대 문서 참고.[3] 이와주쿠 유적을 발견한 고고학자 아이자와 타다히로(相沢忠洋)는 불우하고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낫토 장사를 하면서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다. 고고학계의 인간 승리들 중 하나.[4]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5] 마찬가지로 이곳들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 가장 용이한 장소이자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인접한 일본의 지역이다. 당시 이곳이 일본 문명의 직접적 기원이 된 반도 출신 야요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고 인구를 늘려나간 시작점이라고 봐도 좋다.[6] 당시 큐슈 서남부 일대에 소국들을 이루며 살던 종족들을 하야토라고 한다.[7] 수양제가 고구려를 넘어 섬나라인 일본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에게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8] 단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후 왜는 실제로 중국의 침입을 두려워해 큐슈 지역에 방어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최후의 보루인 신라와도 우호관계를 다졌다. 당은 일본을 공격할 계획도, 능력도 없었으나 이는 결과론적 시각일 뿐, 당시 왜국 조정으로서는 충분히 경계할 사안이었다. 특히 동맹국 백제 역시 황해를 믿다가 당의 해상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왜 역시 백강 전투에서 깨진 후라 왜는 당나라를 매우 두려워했다.[9] 그러면서도 다들 자기네들 중심의 세계관을 대외적으로가 아닐지라도 안으로는 구축했다. 가령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속국 취급했고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남만이라 부르며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통일신라 역시 본인들을 '왕성국'이라 여겨 일본을 얕잡아 보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자기네 섬들에 사는 이민족들을 오랑캐라 불렀고 베트남도 후한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참파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결론은 사람 사는 동네는 다 같다.[10] 그 전엔 공식적으로는 대왕(大王, 오키미)이었다. 단, 일본서기에서 천황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 스메라미코토는 대왕호를 쓸 때에도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11] 한반도의 국가들 역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타국과의 문물 교류와 상업 활동이 활발히 성행했으나 원나라의 간섭이 커진 고려 말부터 권세가 약해졌고 첩첩산중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사농공상의 구별이 심해지고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 중 가장 폐쇄적인 명나라가 들어서 해금령을 실시하며 해상 교역을 사실상 금지했기에 외국과의 무역이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을 겪고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완전히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이 기조는 구한말까지 이어진다.[12] 포르투갈과는 다이묘를 비롯한 고위층들만이 제한된 지역에서 교역하였고, 일반인들은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13] 그마저도 본토에서는 교류하지 못했고, 인공섬에서 교류했다.[14]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15] 중국(중화민국)은 이때의 공으로 전후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미국의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오키나와를 넘겨준다고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거절하였다.[16] 일본군은 MXY-7 오카, 가이텐, 신요 등의 대표적인 자살공격 병기로 미해군을 공격하였다. 결과는 알다시피 무용지물이었고 실상 이미 고갈되어가던 소중한 인적, 물적자원들을 낭비하고 버리는 기행의 연속이었다.[17] 일본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20세기 초반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지만 여전히 무사도, 정신수련, 할복 같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숭상하는 전근대적인 국민성과 그로 인해 나타난 정치, 군사시스템의 후진성이 이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겉으로 보기엔 구미권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권국이었으나 내실은 텅 빈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런 단점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1960~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뒤늦게 바뀌어갔다.[18] 당황한 미국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소련에게 한반도 38도선 양분을 제의하고, 이것은 한반도 남북 분단의 시초가 된다.[19] 단, 일본의 반공정책은 한국보다는 당연히 약했다. 195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일본의 70~80대 이상의 노인들을 보면 대부분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러한 반공정책은 일본이 1960년대부터 경제자립도가 높아짐에 따라 미국의 지원이 필요없어지자 자연스레 공산당에 대한 제한이 빠른 시일 내에 풀어졌다. 애초에 공산국가와의 내전을 겪고 국가가 완전히 분단되어 현재까지 잠재적 전쟁 준비 상태인 한국과 냉전 시기 공산국가들의 위력을 목격했지만 엄연히 제3자의 입장이었던 일본의 사례를 직접 비교하는건 사실상 무리가 있다.[20] 원문: もはや戦後ではない。[21] 다만 당시 순위권을 차지했던 일본 기업을 살펴보면, 통신사나 은행 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시점부터 거품이 많이 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2] #[23] #[24] 특히 전자 및 가전제품 B2C 시장에서 국제적인 점유율과 판매량이 급하락한것은 2000년대부터 가시화 되었고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 했던 '메이드 인 재팬' 물품 중에서도 자타공인 우선으로 뽑히던것이 전자제품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의 제조업에서 대표적으로 꼽히는 토요타를 위시로 한 자동차 산업보다도 더 임팩트 있던 시장이 바로 일본의 전자산업 시장이었다.[25] (20년 전 일본 경제의 교훈)법무법인 광장 다마키 타다시 고문이 겪은 1990년 이후 일본 경제[26] #[27] 물론 일본 은행은 마이너스 채권을 팔긴 한다.[28] 사실 1993년에도 공산당을 제외한 야당들이 총집결해서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내분으로 인해 사회당, 신당사기가케가 떨어져 나가면서 채 1년을 못 넘기고 자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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