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군사관학교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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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陸軍士官學校 / 陸軍士官学校 (にほんりくぐんしかんがっこう)

도쿄에 있던 일본육군사관학교

1. 개요
2. 역사
3. 교육방식
4. 패전 후
5.1. 조선인(한국인)
6. 유명 동문
6.1. 일본인
6.2. 중국인



1. 개요



1937년의 일본육사 기록영상.

일본 육군장교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다.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가 기원이다.

사관학교 예과는 2년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3월에 졸업하여 4월부터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0월에 본과로 진학하는 구조가 된다. 37기부터 적용된 일이다. 본과에 가면 1년 10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에 견습사관(상사)이 되어 다시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

일본해군병학교는 철저히 학력주의에 근거하여 성적을 공표했고 진급 순서도 졸업 성적대로 했다. 하지만 육사는 성적을 공표하지 않았고, 육사 성적도 일본 육군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 육군의 경우 육사 교육기간의 문제 때문에 초급장교들의 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예과의 경우는 군사교육이 살짝 들어간 고급교육과정이라 정말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은 1년 10개월짜리 육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육군에서는 양성기관이 아닌 보수기관인 육군대학교 진학여부와 육군대학의 성적이 더 중요했다. 육대 우수 졸업자는 천황이 직접 하사한 군도를 받았다. 육대는 장군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대좌까지밖에 진급할 수 없으며 고급 지휘관이나 주요 참모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육대 입학 자체도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한 사단에서 육대 입학자를 몇 명이나 냈냐가 사단장의 인사 고과에 반영될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평시에 소대가 없었기 때문에 위관급은 중대에 배치된 신병들을 교육 시키거나 당직 근무를 서는 일만 했는데, 똘똘한 위관급들의 경우 일체의 과업을 면제시키고 입시 공부에만 전념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부대 별칭은 상무대(相武台)였다. 한국광주광역시에 있는 그 상무대(尙武臺)와는 관계 없다. 한자도 다르게 쓴다. 그냥 작명방식을 일본군에게 배웠을 뿐이다.

2. 역사


상술했듯 기원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이다. 1869년에는 오사카로 이전하고 1871년엔 도쿄로 이전한다.

1874년에 육군사관학교 조례가 생기면서 1875년에 사관학생 1기가 입교한다. 이 제도는 11기까지 지속됐고 1,285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교육기간은 병과마다 달라 보병이나 기병은 2년이었고 1876년엔 3년으로 변경되었다. 포병공병은 3년이었지만 1881년에 5년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교육 방식은 프랑스의 사관학교를 본 뜬 것이었다.

1887년에는 프로이센 식으로 사관생도를 받게 된다. 1889년에 제 1기가 입교한다. 이들은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이들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잠시 복무를 하다가 들어간다. 중학교 출신자는 12월에 생도 일병으로 입대해 이듬해 6월에 상병으로 진급한다.

참고로 1909년 일본 정부대한제국군의 장교 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하고 이들은 육군 유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 26기와 27기에 나눠서 입교시켰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를 둘로 나누어 육군사관학교 예과라고 불리게 되고 육군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는 졸업월의 차이로 유년학교 졸업생은 상등병으로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일등병으로 근무하다가 상등병이 된 이후 얼마 뒤 예과에 들어가는 체계였는데 이미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 적응에 큰 지장이 없던 유년학교 출신들에 비해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생판 맨바닥에 그대로 헤딩하는 꼴이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기 때문.

1937년엔 본과가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간다. 예과는 육군예과사관학교라 불린다. 육사는 가나가와현의 자마로 이전하고 1938년엔 교육기간이 1년 8개월로 단축된다. 1941년에는 1년으로 단축된다. 전쟁에 인원이 부족하니 막 줄인 듯 하다. 웨스트포인트도 전시에 6개월 빨리 임관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3년 6개월은 교육시켰다. 한편 육군예비사관학교라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예비 군장교들을 교육시킨다.

항공병과는 1937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시킨다. 이들은 병으로 근무를 하지 않았다.

3. 교육방식


5년제인 구제중학교(심상중학교에서 명칭 변경) 4학년 2학기(16세) 부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응시 할 수 있었으나, 보통을 5학년 졸업하면서 응시하였고 육사 과정도 이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격 요건 때문에 조선인들이 다니던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은 지원 자체가 불리했다. 또한 중학교에는 교련과목이 있어 육사 입시에 도움이 되었지만, 고보는 교련 과목이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말기인 1933년부터 조선인도 입교 가능했는데 주로 조선반도내에 일본인을 위해 설치된 구제중학교에 다니던 조선인들이었고, 고보 출신도 소수나마 있었다.

지원자들은 지방의 연대 본부로 가서 3일간 시험을 치렀다. 이틀은 국어, 영어, 수학, 기하,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작문 등 학과 시험이었고 마지막날은 신체 검사였다.입교 전에 헌병대에서 가정 환경을 엄격히 조사하며 술집, 극빈자 등을 제외한 중류 이상을 선발한다.

일제 말기에는 한 기수에 2천 몇백명씩 뽑았다. 원래는 예과 2년 + 본과 2년 구조였으나 이 역시 말기에는 예과 1년 + 본과 1년 8개월로 대폭 단축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제 말기부터 입교 가능해졌으니 모두 이과정이었다.[1]

특이하게 일본은 병종, 병과, 부대가 예과를 마칠때 결정된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희망 병과/부대를 밝히나 TO등을 고려해서 배정되다. 그리고 예과 교육이 끝나면 4개월간 해당 부대로 가서 '대부(隊付)'을 받는다. 1개 연대에 평균 5~6명의 생도가 배정되는데 전선에 있는 부대까지 가서 교육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연대의 생도까지 대신 받아 1개 연대에 15명씩 파견된다.

대부교육은 대위급인 훈육중대장이 담당하며 처음에는 상등병 계급장을 달지만 일반 병사와 구분하기 위에 상의 목 깃 오른쪽에는 계급장, 왼쪽에는 별을 달았다. 실습이 끝날 때는 오장(하사)을 거쳐 군조(중사)로 진급한다. 이 기간중 계급에 맞추어 분대장을 맞거나 교대로 병사들과 내무생활을 하며 병사들에 대한 실정과 심리를 파악하게 된다.

다만 생도 숙소는 따로 있었고, 식사는 철저하게 장교 식당에서 선배 장교들 사이에 앉아 실시하였다. 교대로 매일 한명씩은 연대장과 식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본과로 올라가면 2년 과정인데 중일전쟁(1938년)이 발발하여 1년 10개월로 단축되었고, 이는 다시 1년 8개월까지 줄었다.

본과를 졸업하면 견습사관이 되는데 조장(상사) 계급장을 달고 대부교육을 받았던 그 부대로 배치되어 신병들을 교육[2] 시키거나 당직근무를 서다가 약 8개월 후에 정식 소위로 임관되게 된다. 이 기간중에 자신의 병과 학교에 가서 교육도 받게 된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예과 1년+본과1년 8개월으로 순 교육시간은 짧으며, 대부교육+견습사관 기간까지 합쳐야 보통 4년이었다.


4. 패전 후


주일미군이 점령하여 현재는 주일미군의 기지인 "캠프 자마(座間)"가 되었다. 2007년에 마이클 잭슨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육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후쿠오카에 새로 자리잡았다.

1961년 12월 12일엔 육사 출신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려고 한 것이 발각된 3무사건(三無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왜 3무냐면 이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란데서 내건 게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쿠데타를 기도했는지 알 수 없고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도 일본도와 소총 몇 개가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이었다.~아무래도 5.16 군사정변 쿠데타에 고무 받아 즉흥적으로 기도한 듯 하다~ 이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타쿠타로(桜井徳太郎, 당시 64세)로 육군 소장 출신이었다. 미카미 다카시(三上卓, 당시 53세)는 5.15 사건에 참여한 일본군 해군 장교로 중좌 출신이었다.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 1936-)[3]은 당시 25세로 참여했는데 중의원이었던 바바 겐지(馬場元治, 1902-1968)의 비서가 된지 2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문제가 됐는데 용케 잘 빠져나가고 지금은 불교에 입문하여 승려로 활동하고 있다. 이케구치 에칸은 당시 총리를 암살하고 군국주의일본을 부활시키려던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정작 2012년엔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수교가 이뤄져야하며 식민지배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 인간은 아베 신조와도 친분이 있다.


5. 조선인 일본군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의 창군 멤버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

초대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2대/4대 채병덕(49기), 3대 신태영(26기), 5대 정일권(55기 상당[4]), 6대/8대 이종찬(49기), 9대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즉 7대/10대 육참총장인 백선엽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육사 출신.

계급으로 보면 이응준은 일본 육군 대좌, 채병덕과 신태영, 이종찬은 중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으로 가보면 초대 이형근(56기), 2대 정일권(55기 상당), 3대 유재흥(55기), 4대 백선엽 순서이다.

조선말기 관비 유학생으로 약간명씩 유학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육군무관학교가 1909년 폐지되며 일본중앙유년학교-일본육사 강제 편입된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안병범 대좌, 신태영 중좌, 박승훈 소좌(만주군 중교),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등 13명은 일본육사 26기[5],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위 등 20명[6]이 일본육사 27기로 마지막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 왕족이나 이형석(45기)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한동안 일본 육사입학의 길이 막혀 있다가 조선무관학교의 아들 세대인 49기(1933년)에서 채병덕, 이종찬 등 조선인 2명이 입교 한다. 이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조선에 살던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매 기수별로 약간명씩 조선인들이 입교 한다.(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은 별도)

몇 안되는 일본 육사 출신 끼리는 매우 친했는데 유승렬(26기) 대좌의 아들이 유재흥(55기) 대위, 신태영(26기) 중좌의 아들이 신응균 소좌(53기), 김준원 대위의 아들이 김정렬(1917)(54기), 안병범(26기) 중좌의 아들이 안광수(58기), 김석원(27기) 대좌의 아들이 김영수(57기)였고, 이응준(26기) 대좌의 사위가 이형근(56기), 백홍석(26기) 중좌의 사위가 채병덕(49기)으로 서로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 약간 경우가 틀리지만 이응준 대좌의 장인은 일본육사 15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이다. 즉 이들은 가족같은 사이도 아니고 그냥 가족이었다.

또한 이하영 자작의 아들이 이종찬(49기) 대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입교가 허락된 49기 이후의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사상이 검증된 친일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학창시절 일본인 학교를 다닐 때, 조선인이 자신 빼곤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얘를들어 함경북도 경흥에는 일본인이 다니던 심상소학교 1곳, 조선인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1곳 있었다. 이중에서 유승렬 대좌의 아들 유재흥은 삼상소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육사에 갈 자격이 있었고, 반면에 동급생격이었던 경흥 보통학교에 다니던 정일권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가야만 했다.(한동네이긴 하지만 학교가 달라 서로 모름. 이후 정일권은 성적우수로 일본육사로 유학오게 되어 유재흥과 같은 55기가 됨. 다만 교육을 따로 받아 서로 모름)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뻘로 기수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해방 직후 일본 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김석원 대좌, 신태영 중좌, 백홍석 중좌, 이대영 소좌, 장석륜 중위등이 모여 안방에 앉아 신생 조선인 부대 창설을 위해 논의 하였을 때, 그 아들/사위들인 채병덕, 김정렬, 유재흥은 옆방에 모여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아들 사위/아들 세대에서는 가장 선배인 채병덕이 소좌이고, 동기인 이종찬은 대위이며 나머지 전원 그 이하계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채병덕이 자신보다 7기수 아래이자 계급도 대위인 이형근이 장인빽으로 대한민국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분노한 것이다.

그리고 장군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육군대학 졸업이 필수인데 조선인들은 여기에 갈 수 없어 대좌가 진급 한계선이라 '대좌정지'라는 말까지 존재 했었다. 다만 홍사익 만은 시범 케이스로 유일하게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승진 가능했다. 다만 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조선 왕족들은 예외이다. 막판에 조선인 육대 제한 규정이 풀려서 유재흥 대위가 1945년 5월에 시험을 보았으나... 일본패망.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엔 초대 공군참모총장김정렬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며 장지량도 육항사 출신이다. 김창규는 일본 육사 출신이다. 8대 박원석 또한 육항사 출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에는 간도 특설대 출신으로 이뤄졌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설립 주체가 일본군과 무관했고[7], 또 일본 해군 역시 조선인에 대한 문호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8] 일본군 출신 참모총장이 없다.

11대 송요찬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다. 12대 최영희는 일본 센슈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학병으로 소위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장도영은 토요 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 김종오도 일본주오대 재학 중에 육군 소위로 끌려갔다. 민기식은 만주건국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16대 참모총장인 김용배도 일본 육군 소위 출신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계원도 일본 육군 소위로 전선에 갔다. 1969년에야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19대 서정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볼 것.

일반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임에도 일본군을 거부하고 독립군으로 가거나 일본군 내에서 공작활동을 하여 독립군을 이롭게 한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전원 조선 시대 유학가거나 한일병탄으로 강제 유학가게된 케이스.

대표적인 예가 노백린(11기)과 지청천(26기), 김경천(23기) 등이 있다. 노백린은 경술국치 전에 졸업해 대한제국군에 소속되었다가 군대 해산 후 망명, 지청천은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소속했다가 1919년에 만주로 망명, 김경천은 경술국치 전에 입학해 1911년 졸업 후 일본 육군 소위 임관을 거부했으나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군에 들어가 군사 기밀을 빼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위로 복무중 1919년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조선인 입교가 다시 허가된 채병덕, 이종찬의 49기 이후로는 이렇게 독립군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사상검증이 끝난 조선귀족 또는 조선인 일본군들의 자제들로 일본학교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자라 조선말 조차 잘 못하였다.

여담으로 일본육사에서는 일요일 주간에 휴식을 주었다. 동경 출신들의 경우 집에 가서 쉬지만, 지방 생도들은 각현에서 출자한 '일요 하숙'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요 하숙은 현별로 사관 학교 주변에 방 1~2개를 얻은 것으로 푹 자던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목마른자의 샘물 같은 곳이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49기 부터 채병덕, 이종찬 등은 이런 일요 하숙이 없어 곤란해 하였는데, 선배인 이형석(45기)의 안내로 히로시마 현인회인 초수회에 몇 차례 간 적은 있었으나 1933년 6월에 이형석이 졸업하면서부터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일본군 교육총감부 중좌였던 영친왕 이은이 육사의 조선인 생도들이 일요하숙 문제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부 무관 김인욱 소좌를 보내 도쿄의 요쓰야에 이들을 위한 일요하숙(고토 운송점 2층)을 마련해주었다. 이 때 채병덕은 이종찬과 함께 친목모임을 결성했는데, 신라의 옛 이름을 따 <계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조선인이라고 해도 한 기수가 2천여명에 달해 선후배는 물론 동기라도 병과가 다르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리 수 밖에 안되던 육사 재학중인 조선인들은 모두 일요일마다 계림회에 모여 친목을 다졌고, 이때문에 일본 육사 출신자들은 돈독한 유대관계는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친왕 이은은 1년에 한번 이들을 불러 중국집에 불러 포식시켜 주고, 참석 할 수 없을 때는 시종 무관(이형석)을 보냈다. 그리고 육사 생도들은 정월마다 이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의 집에 들러 세배를 하였다. 이때 이은의 집은 너무도 웅장해서(일제패망 후 프린스 호텔로 개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족 중 제일 부자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다만 만주군관학교에서 유학온 정일권, 박정희등은 조선인 생도들과는 전혀 교제가 없었고, 계림회에 왔다는 기록도 없었다.


5.1. 조선인(한국인)


일본 육사는 1874년 개교하였는데 1883년 박유굉(사관생도 11기)이 그 예비코스인 육군 '유년생도', 1886년 '사관생도'로 진학한 이래 1945년까지 60년간 조선인 114명을 배출 하였다. 여기에 1940년대 전반에 2년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초급장교 3명과 4년제 만주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24명을 추가하면 모두 141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 육사 총 졸업생 5만2천명 에 비하면 약 0.27% 가량.

이들은 크게 초기 - 조선시대 말기 관비유학생들
중기 -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육사 26기, 27기로 넘어간 육군무관학교 출신들
말기 - 그리고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의 아들/사위 세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다만 중기와 말기 사이에 왕공족과 그 어학우(조선귀족) 등 6명이 입교 했었으며, 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이러한 흐름과는 별개로 입교 하였다.


<초기 - 관비 유학생>
관비 유학은 관비 유학인데 박유굉 처럼 조선의 지원이 끈겨 구걸하다 시피 하며 살거나, 강제 귀국 후 사형당한 경우 있다.
이 당시의 조선인 육사 출신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복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자 군내 요직에 대거 진출 한다. 하지만 군대 해산(1907년)으로 대부분 강제 전역 당하고 한일합방(1910년)으로 예우상 일본군의 고위직 계급을 받거나,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왕공족의 무관으로 오랜기간 복무하여 일본군 고위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교 하고 나서 조선이 망해 일본군이 된 중기, 처음부터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육사에 입교한 말기 조선인 생도와는 차이점. 다만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군동에 헌신 하였다.

-사관생도 11기-
박영효가 수신사로 도일할때 수행원으로 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9]]에서 일어를 속성으로 공부했다.
1883년 1월 유년생도로 입교, 1886년 사관 생도로 승격.
  • 박유굉 : 본국의 탄압으로 졸업 1년을 앞두고 자살(1988년 5월 27일).

(사관생도 11기 다음 기수부터 사관후보생 1기로 개편됨)

-사관후보생 7기?-
무과출신으로 의화군(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일.
1895년 5월 육사 입교, 1896년 3월 10일 수학증서 받음.
이 시기는 청일전쟁으로 수학연한이 단축되어 기수가 불분명함.
7기와 8기는 귀국후 주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

-8기?-
1896년 한국의 육군장교 6명(부위 2명, 참위4명)과 관비유학생 4+1명 입교. 장교들은 아관파천으로 인한 정세 혼란으로 전원 회국 명령. 관비 유학생은 1895년 게이오 의숙을 거침. +1에 해당하는 이희두는 군출신이긴 하나 장교는 아니어서 회국 명령은 안받아 관비유학생들과 함께 졸업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연표에는 아래 11명이 최초 조선인 입교생이라고 하지만, 이들 전에 박유굉, 이병무가 있었음. 기수 불분명.
1907년 군대 해산기준 군부대신 이병무, 연성학교장 이희두, 무관학교장 조성근.
  • 성창기 : 대한제국군 참령
  • 조성근 :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
  • 권태한 : 대한제국군 부령
  • 왕유식 :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소장
  • 이대규 : 대한제국군 참령
  • 김상열
  • 박장화 : 대한제국군 복무
  • 장명근
  • 최병태
  • 박희병 : 중퇴 후 도미.
  • 이희두 :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소장

-11기-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10]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졸업은 했는데 본국의 지원이 끊겨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참위'계급을 받았으며, 사정사정해 겨우 귀국 했지만 일심회 사건으로 다수가 처형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는 등 어렵게 살았다.
  • 강용희 : 대한제국군 정위
  • 권승록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중좌
  • 권호선 : 대한제국군 참위
  • 김관현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교선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규복 : 대한제국군 참위
  • 김상설 : 대한제국군 부위, 경무청 경무관, 중추원 참의
  • 김성은 : 대한제국군 부령
  • 김형섭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대좌
  • 김홍남 : 대한제국군 정위
  • 김홍진 : 대한제국군 참위
  • 김희선 : 대한제국군 정위, 임시정부 군무차장
  • 노백린 : 대한제국군 정령, 임시정부 국무 총리 및 초대 군무총장
  • 방영주 : 대한제국군 참령
  • 어담 :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
  • 윤치성 : 대한제국군 부령
  • 이기옥 : 대한제국군 정위
  • 임재덕 : 대한제국군 참령
  • 장인근 : 대한제국군 정위
  • 장호익 : 대한제국군 참위
  • 조택현 : 대한제국군 참위

-15기-
대한제국 정부의 국비생 혹은 사비생으로 도일한 유학생 8명이 세이조학교를 거쳐 1902년 12월 육사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육사 졸업후 도쿄 근위사단에서 견습사관 생활 할 때 러일전쟁이 터져 일본군 부대를 따라 관전장교 자격으로 전선 시찰함. 이러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사실상 일본이 장악하자 그들의 지원으로 근대 교육을 받지 않은 무관들이 대거 군직을 떠나고 육사 15기 등이 요직에 등용됨.(11기중 일부 망명한 자들도 이때 귀국.) 특히 육군무관학교, 연성학교(구식장교 재훈련기관), 유년학교(무관학교의 예과과정에 해당) 등 3대 군사교육기관을 장악했다... 인데 꼴랑 2년 후 군대해산(...)

군대 해산후에는 1931년까지 '헛총 메고 빈 대궐 지키던' 1개 대대 규모의 '조선보병대'의 고위대원으로 남거나, '조선군사령부부'라는 이름으로 왕공족부무관이 되었다. 아래 일본군 대좌 어쩌구는 일본군으로 전공을 세워 받은게 아니라 수십년간 조선 왕공족의 무관을 하며 받은 계급.

이중에서 독립군인 유동열은 육사출신 독립군의 대부로 해방 후 국군 창설의 산파역할은 한 3인 중 하나.[11]

  • 김기원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
  • 김응선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 남기창 : 대한제국군 참령
  • 유동열 :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및 군무총장, 미군정 통위부장
  • 박두영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중추원 참의
  • 박영철 : 대한제국군 참령, 중추원 참의
  • 이갑 : 대한제국군 참령, 독립군
  • 전영헌 : 대한제국군 부령


<중기 - 대한제국의 유복자들>
여기서부터는 일본 육사로 넘어간 후 대한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대한제국군이 되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생활하게 된다.
대부분이 3년제 육군무관학교 재학중 1909년 폐교되어 도쿄중앙유년학교로 편입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된 케이스이다. 이후 1933년까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육사의 문호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조선 왕공족이나 그들의 어학우로 조선귀족 등 극소수가 개별적으로 입학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위까지만 근무하며 군사기술을 익힌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은 김광서, 이청천, 조철호, 이종혁, 이동훈 등 5명이다. 나머지중 반절은 1925년 대규모 군비축소 때 군대를 떠났으며, 해방 당시 군직에 있던 사람은 10명 내외로 홍사익/영친왕은 중장, 유승렬/이응준/김석원 등 3인은 대좌, 나머지는 중좌에 그쳤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육사 졸업 8년 안으로 3년제인 육군대학교(이하 육대)에 진학해야 하는데 왕공족 3총사 외에는 홍사익만 육대에 갈수 있었다. 홍사익은 학구파로 원래 성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어차피 성적도 좋은거 그냥 영친왕 이은의 어학우 삼아 입학 허가가 났다는게 다수설이다.

"일본군 장교라도 전원 친일파는 아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도 있다."라는 주장은 이 시절 육사생을 뜻한다. 이들 대부분이 대한제국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라가 망해 어쩔 수 없어 일본육사로 진학한 경우였다.

-23기-
대한제국의 황실 장학생으로 1909년 12월 입교, 1911년 5월 졸업.

-26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2학년 생도 18명이, 1909년 일본 육군유년학교 3학년에 입교. 1912년 12월 육사 진학. 13명이 1914년 5월에 졸업
또한 후배인 27기를 합쳐서 유학생 총 10명이 한국 병합 반대, 질병, 성적 불량등으로 중퇴함.
육사 26기~27기 생도들은 처지가 같아 사이가 매우 돈독했는데, '전의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었고 그 회장에는 선배인 김경천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중위를 달면 다 같이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은 김경천과, 26기에는 지청천, 조철호, 27기에서는 이동훈, 이종혁뿐이다.
  • 권영한 : 일본군 중위
  • 김준원 : 일본군 대위, 육군 준장
  • 민덕호 : 일본군 중위
  • 박승훈 : 일본군 소좌, 만주군 상교, 육군 소장
  • 신태영 : 일본군 중좌, 육군중장, 3대육군총참모장, 4대 국방부장관
  • 안병범 : 일본군 중좌, 육군 명예 준장
  • 염창섭 : 일본군 중위
  • 유승열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이대영 : 일본군 소좌, 육군 준장
  • 이응준 : 일본군 대좌, 육군 중장, 초대 육군총참모장
  • 지청천 : 일본군 중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 조철호 : 일본군 중위, 6.10 만세운동 중 체포
  • 홍사익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B급 전범으로 교수형

-27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1학년 생도 25명이, 1909년 도쿄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1913년 12월 육사 진학. 20명이 1915년 5월에 졸업
  • 김석원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김인욱 : 일본군 중좌
  • 김종식 : 일본군 대위
  • 김중규 : 일본군 중위
  • 남우현 : 일본군 중좌
  • 박창하 : 일본군 대위
  • 백홍석 : 일본군 중좌, 육군 소장
  • 서정필 : 일본군 중위
  • 원용국 : 일본군 대위
  • 유관희 :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
  • 윤상필 : 일본군 소좌
  • 이강우 : 일본군 중좌
  • 이동훈 : 일본군 소위, 3.1 운동중 물고문으로 사망, 건국훈장(애족장)
  • 이동혁 : 일본군 중위, 독립군
  • 이희겸 : 일본군 중위
  • 장기형 : 일본군 중위
  • 장석윤 : 일본군 중위, 육군 대령
  • 장성식 : 일본군 중위
  • 장유근 : 일본군 중위
  • 정훈 : 일본군 중좌

-29기-
영친왕은 1907년 일본의 학습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11월 육사 입교, 1917년 5월 졸업. 어학우로 이완용 내각의 대신 조중응의 아들 조대호와 본인의 외사촌 엄주명이 따라갔다. 다만 후자는 중앙유년학교 시절 신병으로 1년 휴학.
  • 영친왕 이은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 조대호 : 일본군 소위, 조선귀족 자작

-30기-
  • 엄주명 : 일본군 중위, 한국군 준장

-42기-
의친왕의 장남 이건 역시 일본의 학습원과 토쿄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26년 4월에 육사 입교, 1930년 7월 졸업

-45기-
의친왕의 차남 이우는 운현궁 호주권 상속으로 왕공족이 됨. 역시 학습원과 도쿄유년학교를 거쳐 1929년 4월 육사에 입교, 1933년 7월 졸업. 다만 44기로 입교한 이형석은 신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로 졸업
이형석은 이시기에 특이 케이스인데 본인 말로는 "본격적인 조선인 입교를 압두고 시범적으로 나를 선정한게 아닌가 싶다."라고 증언하였다.
  • 이우 : 일본군 대좌(추서), 육군대학교 54기, 원폭으로 전사
  • 이형석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

<말기 - 조선인 입교 가능>
만주사변이 일어난지 2년 후 부터 일본측의 입장이 바뀌어 조선에 있는 일본인중학교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 학생들에게 학교장과 배속 장교들이 간절히 권유하여 그 중 일부가 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4학년 1학기를 마치면 입학자격이 부여되었고, 이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도 간간히 보인다. 처음에는 매년 2~3명씩 입학하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1942년)에 6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들은 선배인 육사 26기~27기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라는 점에 착안하여[12], 만약 독립이 되면 우리나라 군대에 신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이 기술병과를 선택 하였다. 초기, 중기에 대한제국에서 유학온 생도들과 달리 이들은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일본육사에 온 순수한 친일파. 그러나 장차 독립된 조국의 군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술병과를 지원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청년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첫 기수인 49기의 채병덕과 이종찬은 영친왕 이은의 후원으로 일요일에 외출하여 쉴 수 있는 하숙을 얻었고, 그 이름을 '계림회'로 등록하여 학교측에 신고 하였다. 이곳은 육사 26기, 27기 선배들이 쓰던 일요 하숙집과 같은 건물이었다. 그럼으로 채병덕과 이종찬 이후 후배들은 모두 계림회원에 속하며 총 45명이다.

이들중 해방 당시 육사 또는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 59기, 60기, 61기생을 제외한 선배들은 대다수가 참전 경험이 있으며 전사자도 다수. 해방 후 육사 26기~27기가 국군 창건의 산파 역할을 했다면 6.25를 겪으며 육군과 공군의 최고 간부층을 형성 한 것이 이들 육사 말기생들이다.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49기~53기는 소좌, 54기~56기 대위, 57기 중위, 58기는 소위였고 59기~61기는 육사 또는 예과사관학교 재학중 이었다.

일본군 계급 뒤 전사 표기는 물론 일본군으로 전사한 것이며, 국군 계급 뒤 전사는 6.25중 전사. 추서는 전사 후 1계급 특진 한 경우로 역시 전사자이다.

-49기-
1932년 겨울 당시 평양중학교 4학년 채병덕과 조선귀족 이하영(1858) 자작의 손자이자 경성중학교 학생인 이종찬이 응시 합격하여 이듬해 4월 예과에 입교 하였다. 이후 1937년 6월 졸업.
  • 채병덕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추서), 초대 국방부 참모총장 및 2대/4대 육군총참모장
  • 이종찬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 6대 육군참모총장

-50기-
1934년 4월 입교, 1937년 12월 졸업. 지인태는 1938년 6월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이용문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추서)
  • 지인태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2기-
1936년 4월 입교, 1939년 9월 졸업
  • 박범집 : 일본군 소좌, 공군 소장(추서), 초대 공군참모부장
  • 최명하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3기-
1937년 4월 입교, 1940년 2월 졸업.
  • 신응균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
  • 박재흥 : 일본군 소좌

-54기-
학제 개편으로 육군사관학교 예과가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바뀌어 패망 때 까지 유지됨
1937년 12월 육군예과사관학교 입교, 1940년 9월 육사 본과 졸업.
  • 강석호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정렬 : 일본군 항공 대위, 공군 중장, 초대/3대 공군총참모장, 국방부장관
  • 노태순: 일본군 중위, 전사

-55기-
1938년 12월 입교, 1941년 7월 졸업.
  • 김창규 : 일본군 항공 대위, 공군 중장, 5대 공군참모총장
  • 유재흥 : 일본군 대위, 육군중장, 3대 연합참모본부총장
  • 전원상 : 일본군 항공 대위, 전사.

-56기-
1939년 12월 입교, 1942년 12월 졸업

-57기-
1941년 4월 입교, 1944년 4월 졸업.
  • 김영수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호량 : 일본군, 육군 소령, 전사
  • 정상수 : 일본군, 전사

-58기-
1942년 4월 입교, 1945년 6월 졸업
  • 박원석 : 일본군 항공 소위, 공군 중장, 8대 공군참모총장
  • 신상철 : 일본군 항공 소위, 육군 준장, 공군 소장
  • 안광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 정래혁 : 일본군 소위, 육군 중장, 국회의장
  • 최복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전사
  • 한용현 : 일본군 소위, 공군 대령

-59기-
1943년 4월 입교, 1944년 10월 본과 진학
  • 김재곤 : 패망 직후 일본인 구대장이 사살
  • 장창국 : 육군 대장, 9대 합동참모의장
  • 홍승화 : 행적 불분명(도일?)

-60기-
1944년 3월 입교, 1945년 7월 본과 진학
  • 김태성 : 육군 대위
  • 이성구 : 행적 불명
  • 이연수 : 공군 준장
  • 이재일 : 서울대 물리학과
  • 장지량 : 공군 중장, 9대 공군참모총장
  • 조병권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61기-
1945년 4월 입교.
  • 김은수 : 감사원 국장
  • 김중환 : 행적 불명
  • 김차경 : 한국전력회사 근무
  • 오일균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 정만영 : 한국통신기술연구소장
  • 조병하 : 카이스트 이학교수
  • 조철형 : 행적 불명
  • 최용기 : 도일함
  • 성명 미상 1명 : 한인준?


<만주 육군군관학교 유학생>
만주사변 당시 만주의 지배자였던 장쉐량빤스런 할 때 버리고 간 6만 병력을 베이스로 삼아 일본은 치안유지 독립군 토벌 목적의 만주군을 만들었다. 기존의 만주인 장교들의 보충 교육을 위해 2년제 봉천 군관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일본 육사를 모방하여 4년제 신경 군관학교를 만들었다.(합쳐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문서에 표기)

만주군관학교 입학생 T/O를 반띵하여 일본계 반, 만주계(대만, 조선인 포함) 반으로 구성하였다. 일본계는 일본 육사 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까지 간거고, 조선인은 대체로 한반도 북쪽에 살던 고등보통학교 출신자들이었다.

2년제 봉천 군관학교 출신 3명(김석봉, 석희봉,정일권)은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한체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것이며, 4년제인 신경 군관학교 출신자의 경우 2년 교육 후 일본인 전원과 만주계 중 우수 학생들은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생대 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유학생들은 제복에 '만'자 표지가 있었고, 육사생도와 섞이지 않은채 자신들끼리만 교육 받고 성적도 따로 매겼다. 그리고 신경학교 5기생 부터는 조선인들은 일본계로 인정 받아 전원 일본 육사로 유학갈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 재학기간이 엿가락 처럼 변경되는 시절이라(1년10개월~1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기수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만주 유학생 출신은 총 27명.

졸업 후에는 물론 만주국으로 돌아가 만주군이 되며, 관동군 산하의 일본군들이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꼭두각시 군대였다. 장점이라면 일제 패망후에 소련군이 관동군을 시베리아로 끌고 갔지만, 만주군은 군대 취급도 안하여서 그냥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서 2년 유학했음에도 일본육사계열로 분류되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만주군계이다.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은 만주계, 일본육사계, 학병계라는 3대 파벌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정일권과 백선엽이 수장격.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오랜 기간 정부와 군의 권력을 장악한다. 단적인 예로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주일이 부의장, 박임항, 박원석, 최주종, 김윤근이 위원이다. 반면에 순수 일본 육사 출신의 최고위원은 정래혁만 있다뿐.

말기의 일본육사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의에 의해 일제에 부역한 빼도박도 못할 친일파. 그중에서 일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악명높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다.

-54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 졸업 후 만주군으로 임관한 다음 1939년 3월 육사 본과 편입

-55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나 만주군 기병학교를 거치느라 1년 늦은 1940년 4월에 육사 본과 편입
  • 정일권 : 만주군 상위, 육군 대장, 5/8대 육군참모총장, 2대 연합참모본부총장

-56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1기 예과 수료, 1941년 8월 본과에 편입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11명 중 무려 6명이나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에 올 수 있었다.
  • 김민규 : 육군 대위
  • 박임항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이주일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조영원 : 사망
  • 최창언 : 육군 중장
  • 최창륜 : 만주군 항공장교, 인민군 보병공급 부장, 육군 대령, 전사

-57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2기, 1942년 10월 본과 편입
  • 김재풍 : 행적 불명
  • 박정희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5대~9대 대통령
  • 이섭준 : 부산해운사장
  • 이한림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58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3기, 1944년 5월 본과 편입
  • 강태민 : 육군 준장
  • 최주종 : 만주군 중위, 육군 소장

-59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5기, 1944년 10월 본과 편입. 이 기수부터 일본계로 인정 받아 5명 전원 일본 육사 편입했음.
  • 강문봉 : 육군 중장
  • 김태종 : 행적 불명
  • 이용술 : 행적 불명
  • 황택림 : 육군 대위, 숙군으로 사형
  • 이00 : 행적 불명

-60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6기. 9명 중 7명 1945년 7월 본과 편입. 한달 후 일본 패망.
  • 김기준 : 사망
  • 김석권 : 사망
  • 김세현 : 육군 중위
  • 김윤근 : 해병 중장
  • 김학림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당한
  • 이우춘 : 사망
  • 정정순 : 육군 중령, 전사

6. 유명 동문





6.1. 일본인



6.2. 중국인




[1]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때 넘어갔던 조선인들의 경우, 당시는 육사예과가 아니라 일본중앙유년학교 졸업후 본과로 넘어갔다.[2] 일본군은 신병교육대가 없고 자기 부대에서 고참들과 섞여 자면서 교육 받는다. 조낸 쳐 맞으면서[3] 법명으로 속명은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였다.[4] 만주국육군군관학교예과 2년 교육후 성적 우수자에 대한 특례로 일본육사 본과로 유학갔다.[5]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지청천, 김경천 장군 포함[6]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이종혁 포함[7]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중화민국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과 독일 상선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등 창설 멤버 대부분이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었다.[8] 1943년에야 수병에 한해 지원을 받았고, 그나마 함정에는 배치하지 않고 육전대나 설영대(시설대), 항공대, 육상 경비대 등에만 배치했다. 해군병학교는 패전시까지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으며, 소수가 일본인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입학 및 임관한 바는 있다.[9] 후쿠자와 유키치가 도쿄에 만든 사립 학교로 현대의 게이오대학의 전신. 구한말에 조선인 유학생 수백명이 도일하였는데 상당수가 게이오의숙에서 1년 가량 일본어와 기초학과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공부했다.[10] 일본 중앙유년학교와 동격의 학교로 명성이 높음. 1885년에 창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세이조학교 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자만 육사에 갈 수 있었다. 1897년에야 육군보충조례에 의해 5년제 심상중학교 출신자도 육사 입교 가능[11] 다른 2명은 육사 26기 이응준 대좌, 만주군원용덕 중교. 다만 결과적으로 이응준이 주도하고 두 사람은 독립군과 만주군의 대표 자격으로 한다리만 걸친 수준.[12] 33명중 3명만 기병. 나머지는 전원 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