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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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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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역모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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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nese_killed_by_Japanese_Army_in_a_ditch%2C_Hsuchow.jpg
마닐라에서 학살당한 필리핀인
쉬저우에서 학살당한 중국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2px-LeonardGSiffleet.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Ws_Burma_Thai_RR.jpg
1943년, 일본군에게 참수되기 직전의 호주군 중사 레나드 시플릿(Leonard Siffleet)[1]
버마철도에서 학대당한 연합군 포로들[2]
파일:일본의 전쟁 범죄_난징 대학살.jpg
강가에 쌓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일본 군인의 모습
파일:440px-Japanese_bayonet_practice_with_dead_Chinese_near_Tianjin.jpg
실제 포로를 이용해 총검술 훈련을 하는 일본 군인의 모습

일본군의 포로 만행과 포로 탈출기

언어별 명칭
영어
War crimes of Imperial Japan
Japanese War Crimes
Japanese War Atrocities
Asian Holocaust
한국어
일본의 전쟁범죄
중국어
日军战争罪行, 日本战争罪行
일본어
日本の戦争犯罪

1. 개요
3. 포로 대우
3.1. 포로 학대
7. 세뇌와 옥쇄를 빙자한 자살 강요
8. 한국인 및 아시아 각국 강제징용 노역
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범죄
9.1. 기타 학살
10. 관련 일본군
11. 관련 단체
12. 관련 인용구
13.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룬 작품들
13.1. 일본
13.2. 일본 밖의 국가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War crime). 학자에 따라서는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이 완성된 이후 자행된 모든 종류의 학살, 침공, 점령 및 식민 통치 행위를 '광의의 전쟁 범죄'로 아우르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37~1945년 사이에 전투 과정에서 수반된 사건만을 일컫는 '협의의 전쟁 범죄'를 의미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단죄하고 현재 UN 적국 조항에 규정된 것 역시 후자에 해당한다. 다른 이름으로 '아시안 홀로코스트(Asian Holocaust)'라는 말도 존재하나, 이에 대하여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군대에 의한 학살보다는 '인종주의에 기반해 유대인에게 저지른 사회적, 조직적인 말살'을 의미하므로 이를 일본의 경우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3] 사실 당대 일본의 인종주의 자체는 일본인의 경우 당시의 유럽 못지않게 심했고 그 차별의 화살이 주로 한국인이나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인들이나 피점령지인들에게 향했다는 차이점이 있다.[4]

이 전쟁범죄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역사관은 크게 세 가지(소극적 인정론, 적극적 인정론, 부정론)로 나뉘는데, 이 중 일본인 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은 "개전(開戰)과 전쟁중 일어난 범죄사건의 비도덕성・비인간성은 인정하되, 일본 뿐 아니라 모든 열강이 힘의 논리로 전쟁을 일으키고 패권을 다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당시 국제 정세는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현대사는 과거사로서 학문의 영역에서 연구하고, 현실에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추구하자."는 '중립 이론' 내지 '소극적 인정론'이다.

즉, 일본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당시 백인 문명들도 매한가지였으니, 마지막 패잔병인 일본에만 굴레를 씌워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이러한 소극론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 원인은 뚜렷한 주관이나 신념을 가지는 것을 꺼리는, 일본 사회 특유의 양비론적 태도와, 거기에 더해져 2010년대 이후 일본이 점점 우경화되면서 '기존의 패배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우익계의 정치선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역사 문제가 한국이나 중국을 제외한, 경제적 의존도 때문에 친일 성향이 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또 같은 침략자 역사를 가진 유럽과 미국에서는 피장파장의 입장이라 큰 비판을 받지 않는다[5]는 것 역시 일본인이 받는 '세계인의 시선'을 희석하는 데 한 몫을 했다.[6] 한일기본조약에서부터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 또 21세기 이후 이루어진 고이즈미 담화간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내비친 과거사에 대한 입장도 이 소극적 인정론에 해당한다. 일본의 황실 역시 당 전쟁범죄의 지휘자[7]로서 전후에 간접적인 사죄 의사[8]를 내비친 적 있다.(관련 기사)

이 밖에 '일본은 확실히 아시아 국가들에 죄를 지었다. 일본의 과오로 인해 고통받았던 주변국에 충분히 사죄하고, 그 피해 규모를 조사하여 배상해야 한다.'는 '적극적 인정론'과, '전쟁 범죄라는 굴레 자체가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에 짊어진 패널티로서, 일본군의 범죄 행각은 개인적 일탈이거나 날조된 자료이며, 일본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인을 위해 싸웠다. 따라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전쟁범죄 부정론'이 있다. 전자는 리버럴좌익 진영에서, 후자는 대개 극우 진영에서 지지하는데, 1980년대 호황 당시에는 적극적 인정론이 고개를 잠시 들었다면, 오늘날에는 동네 작은 서점에서도 극우적 색채를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일본 사회에서 전쟁범죄 부정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점점 대두된다.

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庻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미영 양국에 선전포고를 한 바는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는 쇼와 덴노옥음방송
(이 대목은 전후 일본에서 전쟁책임론을 부정하는 우익 사상가들이 식민지 경영과 태평양 전쟁을 변호하는 레퍼토리로 쓰였다.)


전쟁범죄 부정론을 주장하는 극우들의 경우, 전범재판을 전쟁에서 진 일본에 연합국 측이 보복하기 위해 만든 사법살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전쟁범죄'라는 말조차 다른 단어로 순화하거나 최대한 그 뜻을 좁혀서 말한다. 당연히 이들의 의도는 일제의 범죄 행각을 축소, 왜곡하기 위함이다.

1996년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미국인들을 비롯한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시청자들에게 방영되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가기록원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서의 학살(한국어 번역본)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학살 등이 지금도 사회적으로 이슈이다. 중국 역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각종 전쟁범죄 행위로 인해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참고로 나무위키의 편집지침상, 일본제국전쟁범죄를 옹호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고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다.[9]


2. 나치의 전쟁 범죄와의 비교[편집]


일본군의 만행은 나치 독일 같은 근대적인 문명 국가의 조직이 관료적으로 했다기보다 오히려 관료제의 부실한 부분들이 봉건적인 조직문화와 시너지를 일으킨 것에 더 가까우므로 정치, 사회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집중할 대목이 적다는 의견이 있다.[10]

일단 양 국가의 정부 체계가 달랐다. 나치 독일최고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체계였던 반면, 일본 제국최고 지도자가 상징적인 정점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와 달리 히로히토는 전쟁에 딱히 의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밑의 군부들이 천황을 압박해서 전쟁결의를 받아냈다. 히틀러는 다른거 없이 오직 자신의 망상과 욕망에 의해 전쟁을 일으켰고 각종 전쟁범죄들을 저질렀으며, 그 모든 과정도 자신이 직접 주관, 주도, 지휘하였다. 반면 히로히토는 전쟁결의조차 군부들의 주도로 이뤄진 마당에 전쟁범죄에 관여할 틈세 자체가 없었다.[11][12]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주 목적도 다른데 나치는 우생학에 기반한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앞세워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를 지구상에서 아예 절멸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반면 일제는 ‘아시아 인종의 해방‘이라는 기만적인 구호 아래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문화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13] 물론 그 과정에서 학살을 비롯해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들이 있었지만 나치같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전쟁 수행의 과정에서 다소 우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저지른 경우가 많았다.[14]

즉, 계산적이고 조직적으로 저질렀느냐, 우발작이고 무분별하게 저질렀느냐의 차이가 있다.[15]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극우들이 자국의 만행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성 여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 역시 나치 독일에 조금 못 미치는, 거의 대등한 정도의 인명피해를 야기했다는 사실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기 나치 독일에 의한 피해자 수 총합은 최대 4,000만 명에 달하며,[16] 일본 제국의 피해자 수 총합 역시 최대 3,000만 명에 이른다.[17][18] 이는 일본 제국이 나치 독일과 같이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음에도 전쟁범죄의 성격 자체가 유사한 파시스트 이탈리아보다 나치 독일과 비교되는 주요 원인이다.[19]


3. 포로 대우[편집]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 대우는 개전 초기부터 매우 잔인했고[20] 대다수의 포로들이 교량 건설, 기지 건설 등의 노동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재미로 이들 포로들 중 아무나 지목해서 처형하기도 했다. 상단에 실린 호주 군인에 대한 참수 장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에 사로잡힌 포로들의 생존 확률은 서유럽에서의 포로 생존율과 비교해서 너무나 낮은 수치를 보였다.[21][22] 실제로 일본 해군 소속 잠수함 I-8의 경우에는 포로로 잡은 미군을 갖은 도구를 사용해서 죽이거나 함정 밖에 세워놓고 잠항하면서 이들을 죽여버리는 짓을 당당하게 했다. (잠수함 I-8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또한 버마 철도에서 전쟁포로들이 받은 대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포로에 대한 처참한 대우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소련의 굴라그와 비견될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중립국이나 적십자를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했던 서구 연합국 포로들에 비해서 중국이나 만주에서 잡힌 항일 게릴라나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 극심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는 것이 운명이었고 그것은 한동안 서구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3.1. 포로 학대[편집]


어느날 오노 소위가 말했다.

"너희는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못했으니 오늘은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중국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고양이로 여겨라. 용감해져라!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할 사람은 앞으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소위는 자제력을 잃었다.

"이런 비겁한 놈들 같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대일본 제국의 군인이냐? 그럼 내가 지목하겠다! 오타니, 후루카와, 우에노, 타지마!"

세상에 내 이름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에 총검을 꽂고 소위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따라 공포에 질린 중국인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판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난 속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소위의 욕설을 들으며 불쌍한 중국인을 향해 돌진했다. 눈을 뜨니 중국인 포로는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

'살인자!'

나는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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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본문 中 학살의 숨은 동기들 - 88페이지/아이리스 장[23]

의 저서


1943년 3월 19일. 내일 철도 작업을 위해서는 600명이 필요하다. 신발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일을 견뎌 내야 한다. 이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여기(수용소)와 싱가포르에 엄청난 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작업을 하면서 생명이나 건강은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망가뜨리려는 온갖 의도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계획적인, 냉혹하고 무자비한 반인륜적 범죄라 간주할 수밖에 없다.

1943년 5월 17일… 요즘 각기병에 걸려 부풀어 오르고, 니코틴산 결핍증이나 이질, 말라리아에 걸리거나 구역질 나는 종기에 시달리며 점차 여위고 가없은 몰골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른다. 구역질나고 증오스러운 원숭이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이 짐승들에게 항복해선 안 됐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얻은 쓰라린 교훈이다.

1943년 6월 22일… 말라리아 증세로 몹시 아픈(그는 일하다가 실신했다) 할렘 하사는 병실에서 끌려나와 기관병 하사와 다른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매질을 당했다. 놈들은 이런 짓을 했다. 주먹으로 때리기, 얼굴과 머리를 나막신으로 내려치기, 소방관처럼 어깨로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심하게 메치기, 배와 사타구니와 늑골을 발로 차기, 대나무와 나무 그릇으로 머리 때리기… 이 역겹고 잔인한 짓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할렘 하사는 열이 39.7도까지 오르고 얼굴과 목, 가슴, 사지에 심한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채로 완전히 실신했다.

1943년 6월 26일… 할렘 하사는 상처 때문에 죽었다. 그는 으로 쏜 것보다도 더 확실히 저 일본인 사디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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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군 에드워드 던롭 중령, 포로 수용소에서 몰래 남긴 일기 中


구타와 더불어 일본군의 사디스트적인 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포로 학대이다.

일본군은 1930년대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일단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 명분은, 난징 시민들 중에 중국군 잔당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저항 없이 항복한 중국군 병사조차도 처리하기 귀찮아서 학살하기 일쑤였고, 포로를 이용한 인체실험도 거리낌 없이 행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처음으로 치른 웨이크섬 전투에서 잡은 포로를 배로 수송하다가 포로가 허락 없이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즉석에서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필리핀 전투 이후 대규모로 미군-필리핀군 포로를 잡자 이들을 포박한 채로 식량이나 물도 없이 수백 km를 행군시켜 아사하거나 낙오자의 즉결처분으로 만 명이 죽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 이때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총검으로 찔러서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은 무려 약 37%에 달하는 포로 사망률[24]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독일군의 포로관리 역시 30%를 넘기는 포로 사망률을 기록했다.[25]

포로 수용소에서도 식량보급 없이 중노동에 종사시켜 연합국 포로 수만 명을 죽였고, 사소한 규칙 위반을 이유로 참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잠은 얕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점호 때문에 정렬하거나 특별 작업반에 뽑히거나 매를 맞기 위해 오두막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라도 집합에는 무조건 나가야 했다. 집합은 몇 시간 동안이나 한나절, 심지어는 밤새도록 계속될 수도 있었기에, 아픈 환자들이 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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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초커, 싱가포르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포병.


"너희는 잡석이나 다를 게 없는 것들이니까, 뒈지면 시체는 철로를 놓을 때 잡석과 함께 밑바닥에 깔아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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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노블[26]

, 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영국군 소위,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 받았던 협박에 대한 회상


일본군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가 이렇게 말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내 이름과 계급, 군번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일본군 심문관은

"뭐? 제네바 협정? 우리는 전쟁 중이야! 그걸 몰라?!"

"제네바 협정에는 분명 포로에 대한 규정이…"

"닥쳐! 우리는 어디에서나 우리의 규정대로 한다!"

뺨을 때리며 말을 잇는 심문관.

"한 가지 더 말해두겠는데, 오늘 오후에 널 죽일 수도 있어. 그래도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몰라. 알겠나!"

그리고 그 심문관은 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훗날, 그 심문관은 연합국에게 가장 먼저 포로가 되자

"이보시오! 나는 포로요! 제네바 협정을 지켜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연합국 장교는

"포로가 된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고함을 친 뒤, 그 심문관을 함선 프로펠러에 던져버렸다.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만도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지원도 없었다. 거기다 끔찍한 작업 환경과 거주 시설, 그리고 말라리아, 뎅기열, 이질, 콜레라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다. 결국 약 1만 2천 명의 연합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징발당한 9만 명의 강제 노역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목적은 미국영국의 전쟁 포로들을 조선에 억류함으로써,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럽아메리카 숭배 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심리적 선전 활동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우리 제국의 힘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에게


더욱이 이런 야만적인 포로관리를 조선인들에게 맡게 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몰려 연합국이 처형한 조선인[27]들도 꽤 많다.

바다에서 일본군의 포로 수송선 역시 열악한 대우 때문에 포로들이 죽어나가서 헬 쉽이라고 불렸다. 저 단어 자체는 이전에도 사용된 단어였지만 2차 대전을 거치며 일반적으로 헬십이라고 말하면 일본군의 포로수송선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비좁은 수송선에 포로를 넣을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넣어 수송했고 포로수송선엔 아무런 표식도 하지 않아서 미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침몰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아리산마루(ArisanMaru)가 미군포로 1,781명을 수송중에 미군잠수함 Uss Snook의 뇌격을 받아 9명의 포로만 살아남은 사건이 있었다.[28]

항공기 조종사/승무원에 대한 대우도 열악하여 미드웨이전투에서의 미군조종사 처형뿐만 아니라 전쟁초기 웨이크섬의 와일드캣 해병대 조종사들은 포로수송선에서 총검술 훈련에 사용되어 죽었다. 격추되어 잡힌 폭격기 승무원들도 관리하기 어렵다거나 단순 재미용으로 처형되었다.

1945년 항복 직전에도 일부 항복 반대파들은 자국 내에 있는 연합국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일본의 의지를 보이자는 정신나간 소리도 했다. 물론 이 때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 더 이상 이런 미친 짓은 안 했다. 만일 해당 소리를 천황이 받아들였다면 분노에 찬 연합군으로부터 천황도 절대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부는 이런 미친 짓을 무사도로 포장해서 포로는 불명예스럽게 항복을 했으니 비겁하고 한심한 군인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군들이 착각한 사실로 사무라이는 사실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걸 불명예로 여겼다. 심지어 사무라이가 최고로 명예롭게 죽는 할복도 센코쿠 시대 시미즈 무네하루가 부하들 항복 후 목숨보장을 해주기 위해 할복한 게 그 시초이다. 당연하지만 이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일본 문화를 왜곡하여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긴 게 문제였다.[29] 게다가 더 황당한 사실은 항복한 자들을 군인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라고 비웃던 자들이 정작 그 상황에서 자신들도 군인답지 못한 모습으로 비겁하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는 것이다.


4. 학살강간[편집]


여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모두 강간당할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중략) 석탄 트럭들을 도시 중심가와 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트럭마다 강간을 하기 위해 15명에서 20명씩 군인들을 배분했다.

우리가 그녀들을 강간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우리는 항상 그녀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난징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 114사단 퇴역병 아즈마 시로 등의 증언 中


전투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탈인데, 상관도 제 일선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중대장은 "볼 일이 다 끝났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어 주든지, 아니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도록 해라."며 몰래 강간을 한 뒤의 처리방식까지 가르쳐주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하나하나 조사했더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범죄자들뿐이다.

-

― 1939년 2월 육군성 비밀문서 제 404호, '사변지에서 귀환한 군대와 군인의 상황' 中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그 유명한 일본군 위안부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후에도 양민학살강간을 일삼았으며[30] 막장 전설은 "시베리아 출병" 이후로도 지속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지속된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에는 미쳐 날뛰는 일본군들이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어난징 대학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난징강간(The Rape of Nanjing)이다.[31]

만주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은 점령지 어디에서나 초지일관하게 대량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특히 중국전선에서는 중국인들은 미개한 인종이라고 선전 세뇌하던 일본 군부의 세뇌 교육 탓에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을 같은 사람이 아닌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여겼다.

우린 달아나는 여자들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아나면 그제야 등에 총을 쐈다. 강간할 때는 여자로 보였고 죽일 때는 돼지로 보였다.

-

― 다코코로 코조 114 사단 병사


2차 대전 당시 드러난 일본군의 인명 경시는 군부독재 이전 제국주의 시절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례로 3.1 운동 중에는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서양인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을 외치던 한국인 초등학생 소년의 오른손을 총검으로 베어버리자 그 아이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번엔 다른 일본군이 왼손을 잘라버리자, 그 아이는 목청껏 독립 만세를 외쳤고 세 번째 일본군이 가슴을 총검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기자는 아이가 죽은 이후에도 일본군이 계속 총검으로 시체를 유린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일본군은 이 서양인 기자에게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사진기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키 다나카가 저술한 일본군의 범죄 행위를 고발한 책인 '히든호러'에는 당시 일본군의 동맹국 국민들에 대한 학살 행위가 자세히 묘사된다. 1943년에 파푸아뉴기니의 Kavieng에선 동맹국 국적인 독일인 목사 약 10여 명과 독일인 수녀들을 매달아 놓고 기관총으로 쏴 잔인하게 학살했다. 연합군이 상륙하면 같은 백인이니 협력자가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32]# 게다가 당시 현지에 민간인들이 몇 명 정도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호주군이 전후 민간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조사하다가 2년만에 학살을 밝혀냈고, 이때 체포된 일본군 장교들은 전부 다 책임회피하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또한 1945년 필리핀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마닐라에서도 친추축국인 스페인의 영사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미군의 무차별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해명했지만, 당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격노했고 스페인은 즉시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당시 스페인은 형식상 중립국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세력이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로부터 지원받은 인연 때문에 추축국과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당연히 일본과도 공식적인 동맹 관계만 아닐 뿐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친 추축국 성향을 보인 스페인이 단교할 정도로 당시 일본군의 행각은 막장이었다.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 연쇄강간살인마 코다이라 요시오(小平義雄), 전후 7명의 일본인 여성을 강간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한 진술에서

심지어 중일전쟁 당시 강간 살해에 맛이들려 전후 일본에서도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던 퇴역 군인이 체포된 사건마저도 있을 정도였다.

현재도 일본 정부는 당시의 만행을 부정하거나 축소하지만[33], 일본 제국은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공개적인 잔혹행위를 장려했다.

일본군의 학살과 집단 강간의 대상은 추축 동맹국도 가리지 않았다. 마닐라 대학살 당시 일본 제국군은 뭐 학살 과정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었는지 동맹국인 나치 독일의 갈고리십자 깃발이 당당히 걸린 마닐라 독일인 클럽에도 처들어가서 당당하게 건물에 불을 질렀고 800명 가량의 사람들을 학살했다.출처는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ABC(스페인어) 당시 20여 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독일 클럽 내 여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강간했으며, 소녀 한 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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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식인[편집]


우리는 300마일 덜어진 곳에 끌려가 하루 12시간 작업을 했죠. 먹을 게 거의 없었어요. 포로들은 풀과 나뭇잎을 먹었는데 뱀, 개구리, 그리고 다른 곤충들까지 먹었어요. 여기서 일본군은 매일 포로 1명을 잡아먹었어요. 약 100명의 포로가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어요. 나머지는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10명이 병으로 죽었는데, 일본군은 또 포로를 고르기 시작했어요. 선택된 포로는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산채로 살을 잘라내고는 그대로 도랑에 버렸어요. 선택된 포로에게서 살이 잘려 나갈 때, 버려진 뒤 도랑에서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 왔어요.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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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2/15 파키스탄 군인 하탐 알리-43년 뉴기니 마노콰리 비행장 건설에 투입.[34]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는 놈은 엄중히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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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제 18군 사령부 (1946년 12월 11일 도쿄 재판 기록)


식량 부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 몰린 군대에서 아주 흔하며, 일본군의 식인 행위의 원인 또한 식량 부족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군 보급 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식인 행위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밀리환초 학살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35]

다만 너무도 임팩트가 엄청난 한 식인 사건 때문에 이러한 보급 문제가 있다는 점은 거의 잊혀지는데, 관련 사건으로는 1945년 2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진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사기 진작 차원에서 현지 지휘관이었던 다치바나 요시오가 직접 나서 식인을 했는데 이는 공문서로도 남아있다.

일본군의 식인 행위들을 일부의 일탈로서 극소수의 사례로 보는 견해나 아예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당대 일본군의 식인 행위는 꽤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같은 일본군마저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선별하여 매일 1명씩 죽인 후 먹었다. 나는 직접 그 광경을 봤는데, 일본군은 그곳에서 100여명의 포로를 먹었다. 나머지 포로들은 약 80km 떨어진 다른 장소로 데려가 그 곳에서 10명의 포로들이 병사하였다. 거기서 일본군은 또 다시 포로들을 선별하여 먹기 시작했고, 선택된 포로를 오두막으로 데려가 산 채로 살을 몸에서 도려내었다. 그 후 나머지 몸을 구덩이에 버렸고 포로는 구덩이 안에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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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 포로인 랜스 나익 하탐알리의 증언


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의 대부분은 약탈자였습니다. 먹을 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어요. 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기로 한 거죠. 그러나 진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를 쏘았어요. 그는 결국 잡아먹혔어요. 당신은 아마도 우리들 중 다수가 현지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으로 생각되었어요. 우리는 성욕이 없었어요. 강간을 하는데는 힘이 너무 많이 듭니다. 우리가 꿈꾼 것은 먹을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가져가는 군인들을 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게릴라가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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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 헌병 대장 노기 하루미치 회고록


우리 부대는 시체를 빼내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희생자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3세트의 호주군 웹장비, 부츠 2켤레, 옷 2벌, 다른 잡동사니를 발견했다. 추가 수색으로 00에 의해 00의 것으로 쉽게 인지되는 두피를 찾아냈다. 창자는 통나무에 걸쳐져 있고, 불에 탄 살 조각, 탄약갑에는 간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있었다. 300야드 정도 떨어진 오두막 밖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되었다. 100야드쯤 떨어진 다른 오두막 밖에서 다리, 허벅지, 어깨뼈 등이 사람 살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었다. 또 다른 오두막 밖에는 00의 머리가 있었다. 두피를 벗긴 머리와 등뼈로만 구성된 그 시체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 잔해 옆에는 타서 숯이 된 손목과 손이 놓여 있었다.

-

― A.B.카슨 중위


일본군과 대만인은 따로 식사를 준비했다. 일본군은 고기를 개고기라 주장했다 그는 섬에서 개를 본 적이 거의 없던지라, 매일 개고기를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W[36]

가 본 고기는 껍질이나 털이 거의 없었다. 그가 아는 개고기는 껍질이 두텁고 털자국이 빽빽하게 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고기는 구워서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944년 6월 PW와 다른 13명의 대만인이 연합군에 투항하러 가는데,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대만인 8명이 죽었는데, 그가 죽은 척 하고 있는 동안 PW는 일본군이 죽은 대만인에게서 빼낸 창자를 자기 음식 그릇에 넣는 것을 보았다. 일본군은 곧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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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비행장 측량 및 건설부대 2중대, 대만인 노동자 PW, JA는 1944년 8/28 보로키에서 미군에 투항.


미국에서는 일본군식인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 책의 제목은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이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추락한 미군의 조종사들을 일본군이 살해하여 먹었다는 내용이다. 주로 간과 허벅지 살을 먹었다고 하며 군의관이 해부를 했다고.# 사건이 벌어진 곳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시마'라는 섬이다.[37]

아버지의 깃발로 유명한 제임스 브래들리도 이와 관련한 책을 낸 적이 있다. 제목은 <플라이 보이스>.관련서적


6. 인간 방패[편집]


일본군사이판 전투오키나와 전투 당시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문 위키피디아 인간 방패 항목 참조.[38]


7. 세뇌와 옥쇄를 빙자한 자살 강요[편집]


사이판 전투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카미카제 같은 자살돌격에서 볼 수 있듯 천황에 대한 충성 세뇌가 당대 일본 내에 팽배했다. 오죽하면 천황이 종전 선언을 했을 때 그걸 듣지 못했다고 혹은 그 선언 자체를 막기 위해 반란을 저질렀다.[39] 반자이 돌격 역시 근본적으로 군중심리를 이용한 세뇌였다.

이는 자국 민간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수많은 일본인들 및 점령지 주민들이 미군에게 농락당할까봐 자결한 원인이었다.

오키나와 전투를 다룬 드라마인 사탕수수밭의 노래에서도 나오는데 미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는 말을 하며 걱정하는 말을 하는 장면이나 주인공 집에 시집온 여교사도 아이들에게 Do You Kill Me? 라고 가르칠 정도였고 드라마 후반 미군에 방공호가 들통나자 안의 주민들도 희롱당할 바엔 자살하자는 말을 했다.


8. 한국인 및 아시아 각국 강제징용 노역[편집]


태평양 전쟁 중기가 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징용에 동원했는데, 태평양 전선에서는 태평양 해군기지 건설, 내지에서는 석탄 다산지에서의 탄광업, 탄약 및 무기 부품 제조에 동원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한국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한국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 강제로 징용되었다.[40]

징용된 인원들 중 한반도 안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약 15만 명의 인원이 강제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석탄 채굴 등의 강제 노동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사모아와 같은 적도 근처에 있는 섬까지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대우는 아우슈비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우 박했고, 반항자나 굶어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생기면 갱도 구석에 몰아다가 불태워버리는것은 기본이었다. 징용된 한국인들은 일본, 남양 군도[41], 버마,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군수공장, 토목공사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으며,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강제노동과 구타로 한국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일본은 공사가 끝난 평양 비행장의 공사장에서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한국인 징용노동자 800여 명을 집단으로 학살했고, 지시마 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 방지라는 이유로 학살했다.[42]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한국인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후퇴하자 한국인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에는 광산 노동 중 수많은 한국인이 사망했다.

또한 맛있는 고기라면서 무언가를 대접했다는데 그것이 죽은 동료의 인육이었다는 것이 이쪽 생존자 증언담의 클리셰 중 하나이다. 이 경우 밀리환초 학살사건에서 실제로 이런 증언이 나왔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및 전쟁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했다. 중국인의 경우 4백만 명 가량이 강제징용을 위해 동원되었고.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미쓰비시 등 기업들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밑에서 노역을 했다. 약 4백만 명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군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물론 노동은 무척 고된 작업이였고 10만 명의 포로들이 미얀마에서 철로 건설 중 사망했고, 다른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출된 27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에서 고작 5만 7천 명만 살아 돌아왔다. 대만도 마찬가지라서 86만 명이 넘는 강제징용자가 끌려나가사 40만 명이 살아오지 못했다. 그밖에도 대만 원주민들도 12만 명이 끌려나가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다. 더러는 이들은 유럽 전선까지 끌려나갔다.

게다가 일본군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갔다. 그렇게 학도병제와 징병제 등으로 21만 명의 한국인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그 대다수가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했다.


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범죄[편집]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을 상대로 자행한 생체실험. 일본 우익들은 죄수와 전쟁포로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고 날조하지만 피실험자 상당수는 임산부였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 피해자를 죄수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생체실험 피해자들이 흉악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하는데 사망자 목록에서 윤동주와 같은 온건 성향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도 발견된다.

일본군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 진입한 이후 약 20만 명의 중국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43] 대학살 과정에서 벌어진 100인 참수 경쟁도 유명하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도 연합국 포로들에 대한 유사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 대표적으로 암본 전투에서 잡힌 포로 227명을 라하비행장에서 일본도로 처형했다.

일본군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필리핀인 10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태평양 마셜 제도에서 일본군이 한국인 100여 명을 학살한 사건.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가 연합국 상선 베허호를 침몰시키고 선원들 100여명을 참수한 사건. 자세한 내용은 베허호 사건 항목 참조.

사이판 민간인 22,000여 명 상당수가 미군에 투항하지 않고 자살을 강요당했으며, 거부하는 자는 사살당했다. 이런 참극이 벌어진 원인은 쇼와 덴노가 사이판의 민간인들에게 칙명을 내려 자살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판 전투 자료 참조.

보르네오 수용소에서 연합군 포로 2,500여명 학살

중국식 명칭인 삼광 작전으로도 알려졌다.

  • 싱가포르 화교 학살 (1941)
싱가포르 점령 후 6,000여 명 처형한 사건. 츠지 마사노부가 주도적으로 행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시작으로 1945년 패전 때까지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사건.


단, 민간선박을 격침한 일은 추축국은 물론이고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유독 일본 잠수함에서 많았다. 전쟁범죄에 가담한 생존 함장들은 대부분 4~8년형 정도를 선고받았다.
  • I-8의 상선격침, 승무원 학대 후 살해 사건
  • I-177의 호주 병원선 AHS 센터우르 격침사건 참고 자료
  • I-37의 격침한 상선 포로 납치,학대,살해 사건
  • I-26의 격침한 상선 포로 납치,학대,살해 사건
  • I-12의 격침한 상선 승무원 살해 사건

  • 저장성 장쑤성 대학살(1942)
둘리틀 특공대의 일본 공습을 도운 중국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18만의 병력을 투입해 저장성과 장쑤성 일대에서 약 25만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했다.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인데 선전포고가 안 된 상태에서 공격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44]

연합군 포로와 버마 민간인 20만여 명을 징집하여 건설 노동에 투입한 기간동안 8~10만여 명 사망.

문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은 사건이다. 같은 일본군의 장성들조차도 미친 짓이라고 일갈했는데 다른 식인과 달리 이건 순전히 재미로 식인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충칭 공습으로 인한 중국 민간인 11,000여 명 사망했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라바울 일대에서 벌어진 미네카제급 구축함 아키카제 승무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학살 이유는 "연합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애매한 논리였다. 피해 민간인들의 국적도 다양했는데 여기까지는 흔한 일본의 전쟁범죄였겠지만, 어이없게도 이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동맹국이었던 독일 국적의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역에 병원을 건립하고 의료기술을 전파하던 선교사, 수녀들이었다. 원출전은 다나카 유키의 <히든호러>. 자세한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아키카제 참조.

1944년 12월, 필리핀 팔라완 섬에서 자행된 미군 포로 집단학살.

2차 대전 기간 포로수송선을 일본군이 고의침몰시킨 사건.


9.1. 기타 학살[편집]


하술하는 사건들은 1937~1945년 일본 군국주의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연장선이지만 2차 대전 이전에 발생한 제국주의적 만행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주류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식민지에서 행해진 제국주의적 범죄에 대해서는 서구권에 공범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성격이 후행하는 2차 대전기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상당히 맞닿아 있다.

청산리 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거주 한인 3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사로잡은 사건.

일본군 및 일본 경찰이 직접 학살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된다.


  • 대한제국 의병 전쟁 중 민간인 학살 (1897)
대한제국의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천, 충주, 제천, 양주, 원주 등 의병이 발생한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모두 몰살했다. 당시 한국에 거주해 있던 영국기자 매켄지가 발간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일본군의 학살을 증언했다. 1909년에 발생한 남한대토벌도 유사했다.

  • 뤼순 대학살 (1894)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뤼순을 함락하고 패잔병을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관민 2만 명을 몰살했다. 당시 일본군은 시체를 파묻기 위한 36명만을 살려두었으며 일본 정부는 이하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해당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930년 타이완 섬에서 일어난 대만 원주민들의 항일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

청일전쟁 직후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하고 일본군 한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 등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



10. 관련 일본군[편집]


  • 기무라 헤이타로
  • 고이소 구니아키
  • 다치바나 요시오[45]
  • 도조 히데키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 이시이 시로[46]
  • 오카무라 야스지
  • 츠지 마사노부
  • 쇼와 덴노[47]


11. 관련 단체[편집]




12. 관련 인용구[편집]


" 그들은 강한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이 교육받은 것은 그들이 백인들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이었지요. 인도인들이나 그리고 남향에 사는 여러 민족인들 인도차이나인들 그리고 중국인보다도 말입니다. 그들은 또 백인들이 결국 일본인들을 주인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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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 파셸


" 사변이 해결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일본인이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폭행을 저지르면서 무슨 일본군이냐. 현지의 일반 민중을 괴롭히면서 성전이란 또 뭐냐. 대륙에서 일본 관민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폐하의 마음에 합치한다고 생각하는건가?"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참모대위시절 장성 영관급이 참석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검토회를 열었을 당시 했던 말.[48]


" 미군필리핀에 진격해 들어오면서 또 다른 일본군의 만행이 발견되었다. 마닐라에서 1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것이다."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을 해서 죽이고 파괴를 하는데 마치 정신병자들이었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어 대었죠. 그들은 또 에르미타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서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날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 731부대나 100부대 같은 세균전을 담당하는 특수 부대가 있어서 탄저병이나 기타 질병들을 옮기는 세균들을 분무액으로 만들어 중국인 마을과 부대에 살포했다. 만주국 핑판에 있었던 특별한 의료시설에서 일본군들이 수용한 포로들에 대한 생체 실험은 나치 독일생체실험을 능가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마루타, 즉 통나무라는 불리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폭격이나 총격에 노출시켜 군의관들에게 상처를 연구하게 하면서 탄환의 성능을 실험했다. 사람을 얼려 죽이며 동상치료에 대한 연구를 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해서 견습 의사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인체 기관을 관찰하도록 했다. 또한 매독에서 장티푸스 등 온갖 출혈열까지 가능한 질병들을 포로들에게 감염시켜 3천여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

- 로드 파셸


" 원자폭탄은 모든 전쟁포로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적이 진주해 들어오기 전에 모든 전쟁포로들을 처형하고 또 모든 흔적들을 없애버리라는 명령들을 하달 받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렇게 악질이든 사람들이 원자탄 이후로는 얼굴을 바꾸고 있습니다. 죗값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 산더미를 불태웠고 악질 감시병들에게는 잠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생체실험부대에 있던 포로들과 노무자들은 모두 학살했고 질병에 걸린 쥐들은 모두 풀어 주었지요."

-

- 프랭크 푸, 후지타 포로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1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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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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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KBS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미국 의회 도서관 미군 정보문서 참고. 731부대 다큐멘터리 22:45초



13.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룬 작품들[편집]



13.1. 일본[편집]


  • 바다와 독약
엔도 슈사쿠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큐슈 의대 전쟁포로 생체실험 인육사건을 다뤘다. 영화판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

  • 악마의 포식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731부대 관련 르포.

작품 전개 중 난징대학살을 묘사한다. 다만 전쟁범죄를 주로 다룬 작품은 아니고, 30~40년대 시기 일본을 배경으로 한 픽션.

일본의 전쟁범죄를 묘사하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궁극적으로 천황과 정부의 탓임을 고발하는 만화.

작중 악당 히카와 쇼고731 부대처럼 생체실험을 하던 전범이었다. 만화판에선 더 자세히 나오는데 만주국을 그리워하며 온갖 생체실험하던 기억을 추억한다. 또한 일본 도쿄에 비스트를 풀어넣어 자위대가 치안유지를 하게 쇼를 벌인다. 또한 자신을 도와주며 정치계에 제일 영향력있는 거물로 나오는 인물 역시 일제침략과 전쟁범죄에 중요 관련자로 나온다.

  • 머더 라이센스 키바
라스트보스격 흑막인물로 나오는 구키 요도가 731부대 출신. 원작자인 히라마쓰 신지는 일본의 전쟁범죄와 우경화를 작품 속에서 꾸준히 비판해 왔다.


후자의 경운 미즈키 시게루 본인이 동남아시아에서 직접 목격한 위안부의 피해 배상에 대해 그 풍경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꼭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미즈키 시게루는 태평양전쟁에서 현재 뉴 브리튼 섬인 라바울의 전선 증원부대로 참전한 참전자이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심각하게 망가진 한쪽 팔을 절단해야 했다.




13.2. 일본 밖의 국가[편집]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한 중국[49] 영화. 입장과 국적을 떠나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묘사가 조금 있지만, 중일전쟁 시기를 다룬 다른 중국 영화에 비하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 사실상 국가가 미디어를 통제하는 중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수준이다. 되려 인간적으로 묘사된 일본인 장교 캐릭터가 있어 중국에서 시비가 되기도 했다. 비뚤어진 애국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난징대학살 사건의 참혹함을 잘 전달하여 해외(특히 서구권)에서도 평가가 아주 높다. 로튼토마토에서 무려 93% 스코어를 받았다.

난징대학살 중 많은 중국인을 구한 독일인 욘 라베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 독일, 프랑스, 중국의 합작 영화이다. 욘 라베의 당시 행적에 대해선 다른 어느 영화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욘 라베를 재조명하였다는 장점이 있으나 <난징!난징!>에 비해 완성도면에서 비판하는 의견도 일부 있다.

난징 대학살을 다룬 중국의 영화. 장예모가 감독하고 크리스천 베일이 출연했다. 장예모 답게 영상미는 뛰어나지만, 중국군의 애국심을 너무 강조하고 항일의식에 기반한 애국심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러다보니 해당 사건의 당사국이 아닌 외국(특히 서구권)의 평가가 박한 편이다. 게다가 주제가 주제이다보니 거의 유일한 장점인 뛰어난 영상미마저도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731 부대를 다룬 한국 소설.

중국이 제작한 위와 731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다룬 영화 시리즈. 해당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마루타를 소재로한 고어영화나 다름없다. 마루타 실험의 끔찍한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취지는 좋았지만, 실험자의 해부 장면을 실제 시체 해부 장면을 넣는 등 너무 적나라한 묘사의 영화라서 문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영화 감독은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또 문제였다.

194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 Days of Infamy 시리즈[50] (소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 소설로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하와이 점령전을 다루고 있다. 식인생체실험을 제외한 일본의 모든 만행이 하와이에서 벌어진다. 여자 주인공은 일본군에게 강간당하고 위안부가 되었다가 분노한 미국이 하와이를 탈환하면서 자유가 된다.

  • 가스 이니스[51]의 배틀필드 - '빌리에게'(Battlefields: Dear Billy) (만화)
주인공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영국인 여성으로 일본군들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군병원에서 낮에는 간호사로 활동하면서 밤에는 병원에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물의 이야기와 혼란스런 세계정세 사이에서 고통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전후 연합군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위해 일본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분노하며, 국제관계 속에서 뒷전으로 보내진 피해자들의 고통을 상당히 리얼하게 묘사했다.리뷰글[52]

일본의 대표적인 강제노역 유적인 군함도 끌려온 한국인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정서운 할머니가 위안부에서 당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일본 군대로 끌려가 카미카제로 출격을 해야하는 한국인을 주제로 만든 영화.

실제로 일본군에 있었던 곤도 하지메, 네모토 쵸우즈가 일본 군대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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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시플릿 중사가 특수부대원으로 적의 후방에 잠입해 사보타지 및 교란공작을 벌였기에 교전권 없는 스파이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특수부대원은 엄연한 정규군이지만 특전사나 그린베레 등이 펼치는 각종 공작은 교전권이 인정되는 행위라고 보기에 어려운 것들이 많다. 제네바 협약에 의하면 간첩은 교전권이 없는 존재이므로 즉결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오해다.[2]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 갇힌 연합군 포로들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물자가 부족한 탓에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포로를 사람 취급하지 않은 일본군의 문화를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다.[3] 일본의 전쟁범죄가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독재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일본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전체주의에 의한 것인가 하는 논란과 궤를 같이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조.[4] 물론, '네덜란드 포로를 위안부로 삼은 행위'나 '죽음의 행진'과 같이 백인을 향한 인종주의도 존재했으나,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이 대부분이었다.[5] 특히 UN에 지불하는 막대한 분담금이라든지, 국제적 로비 행위,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이 일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했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보수 진영은 일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편이며, 미얀마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현대 일본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근대 일본 제국의 악행에 대해서는 철저히 교육한다.[6]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지정학적 정세를 역으로 이용하여, "중국, 북한, 한국 이 세 나라만 일본을 미워하고, 이를 제외한 다른 전세계 사람들은 일본을 사랑하니까 이들 세 나라만 이상한 거다!"라는 '특아(특정 아시아 국가) 이론'을 주장하며 엄연히 친미/친서방 국가인 한국을 북중러 등 반서방 불량국가 진영에 은근슬쩍 묶으려고 한다.[7]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 참조.[8] 직접적으로 침략이나 식민 지배, 학살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 국민의 총의와 통합의 상징'이라는, 천황의 발언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말을 조심했을 가능성이 크다.[9] 이 외에 나무위키 편집지침으로 작성을 금지하는 내용은 홀로코스트 허구설, 이슬람 극단주의, 5.18 민주화운동/왜곡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10]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Soldaten), 2015 참고.[11] 가장 적절한 예를들면 생체실험이 있다. 나치는 히틀러의 주도아래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지에서 유대인, 슬라브족, 폴란드인, 그리고 독일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150만 명 이상을 실험했고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이시이 시로라는 사령관 한 명이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은 731부대'의 부대장으로 취임한 후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고싶다는 개인적 야망으로 부대를 생체실험장으로 바꿔 극비로 운영했다. 4,000명 이상을 실험했고 나치보다 폐쇄적이고 비밀리에 운영된 배경에 의해 생존자는 단 1명도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천황은 물론 거의 아무도 몰랐다.[12] 다만 20세기 후반 이후 쇼와 덴노가 전쟁범죄 행위를 일부 승인하거나 묵인한 사실이 알려져 히로히토에 대한 평가 또한 달라지는 계기를 맞이했다. 물론 히틀러처럼 전쟁범죄를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수뇌부의 정점으로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범죄를 막지 않고 때로는 종용한 부분은 크게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다만 이미 그가 죽은 뒤에 밝혀진 내용이라 외교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13] 특히 독일은 타국 뿐만 아니라 T4 작전처럼 심지어 자국에서 열등하다고 여긴 "장애인, 노인, 환자" 등에게도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데, 때문에 독일은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일본의 도쿄 전범재판과는 달리, 반인륜적 범죄 (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해 추가유죄를 인정받는다.[14] 그나마 731 부대, 일본군 위안부 등이 일제가 정부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저지른 전쟁범죄이지만 이 역시도 홀로코스트나 슬라브 멸절에 비해서는 규모가 훨씬 작았고 특정 인종의 멸절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15] 나치 독일은 철저했다는 것이 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독소전쟁과 당시 전쟁범죄에도 해당되는데 독소전쟁 당시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대놓고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도록 명령하자 국방군과 아인자츠그루펜, 슈츠슈타펠 같은 학살전문부대까지 운영해서 철저하게 학살했다. 또한 유럽전역에 수십개의 전문적인 살인공장을 건설하고(이 중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아우슈비츠는 무려 축구장 수십개 면적이었다.) 소, 돼지 같은 육가공업체에서 효과적인 도축방법을 연구하듯이 효과적인 대량살인 방법까지 연구하였고, 동유럽에선 전체 인구에서 죽여야 할 인구 비율까지 세세하게 계획하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이 학살이 계획적 살인이라면 일본 제국의 학살은 우발적 살인의 면모를 띄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나치가 희생시킨 인구가 일제보다 약 1,000만 명 가량 많았다.[16] 소련: 2,600만, 폴란드: 600만, 남유럽: 300만, 서유럽/북유럽: 200만, 기타 동유럽: 200만, 유대인/장애인/동성애자 등 독일계 홀로코스트 피해자: 100만.[17] 중화민국: 2,200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220만, 미국령 필리핀: 100만, 기타 동남아: 100만, 일본령 조선: 50만.[18] 다만 이 수치는 기근, 전염병 등 간접적인 피해자를 합한 수치이며 직접적인 피해자에 한정하면 나치즘의 피해자가 훨씬 더 많다는 데에 있어서는 학계 대다수가 동의하는 편이다. 일례로 루돌프 럼멜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독일은 2,094.6만 명, 일본은 596.4만 명을 학살하여 독일의 학살 규모가 4배 정도 더 크다.# 실제 일제의 경우 전염병, 기근 등 완전한 간접적 피해자나 곡물 수탈, 강제징용, 포로 학대 등 직접적 피해자라 할지라도 다소 우발적이고 비계획적인, 미필적 고의에 해당하는 성격의 피해자가 많았다. 반면, 나치즘의 경우 홀로코스트 및 동유럽 내 슬라브 학살 계획 등, 보다 직접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의 비중이 더욱 높았다.[19] 독일과 일본이 각각 4,000만 명과 3,000만 명의 인명피해를 야기할 때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 북아프리카 전선, 발칸 침공을 포함해 최대 100만 이하의 사망자만을 야기했다. 오히려 소련 등 연합국이나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마이너 추축국이 자행한 전쟁범죄가 더욱 심각했다.[20] 당초 제네바 협약을 준수한다고 공언했지만 그걸 지킨 적은 사실상 없었고, 또한 전쟁 중에 쇼와 덴노중국군 한정으로는 의무 준수 폐지를 승인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영국미국은 악마들의 국가라고 국민들을 세뇌해서 영국군미군 포로에 대한 인간 이하의 대우를 정당화했다.[21] 일본군의 잔인함에 더하여 태평양 전쟁의 주 무대가 된 중국동남아, 북태평양, 적도 일대의 섬 등의 자연조건이 매우 가혹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단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군부터가 전투 과정에서의 사상자보다 전염병에 걸리거나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점이 일본군의 잔인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일본군의 포로 대우는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포로는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졌다.[22] 사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포로 생존률은 이것보다 더 낮았는데 이 경우는 양쪽 모두 증오심에 제네바 협약은 개나 주고 포로도 안 잡거나 잡은 포로들을 가스실에 넣거나 시베리아로 보내서 죽였기 때문이다.[23] 중국계 미국인. 난징 대학살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일본 우익의 지속적인 협박을 당했으며 결국 우울증을 앓아 권총 자살을 했다. 다만 실제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일본 극우들의 협박에 의한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24] <제2차 세계 대전의 숨은 영웅들> 370쪽에도 언급되어 있다.[25] 영미군의 사망률에 비해서 전체 사망률이 훨씬 높은 이유는 독소전 때문이다. 학자들은 독소전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이 25~30% 정도로 추정하며 영국의 학자 니얼 퍼거슨은 최대 57%까지 잡았다. 70%라는 수치는 러시아 학자들도 주장하지 않는 수치로 독일 패전 후 다시 굴라그로 끌려가서 죽었던 소련군 포로들의 수치까지 전부 포함한 결과값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26] 노블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군 소위였으며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전쟁이 끝날때까지 모진 수용소생활을 견뎌내야 했으며 버마 철도공사에도 강제로 동원되어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수용소 생활동안 몰래 일기를 남겼고 천만다행으로 전쟁이 끝날때까지 살아남아 본국으로 무사히 생환했고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몰래 썼던 일기를 바탕으로 책도 펴냈다.[27] 물론 이렇게 처형당한 포로관리자가 전부 선량한 조선인이라는 보장은 없다.[28] 다만 당대 일본 수뇌부는 포로를 마구 밀집 수용한 것은 딱히 가혹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은 자국군도 비슷한 수준으로 밀어넣어서 수송한 덕분에 수송선이 격침되면 4자리수로 죽어나가는 경우가 심심하면 발생했고 전쟁 후반에는 니킨마루(Nikkin Maru)에 23군 소속 병력 3,200여 명을 쑤셔넣었다가 미 잠수함 USS 탱에 의해서 격침되면서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배경이 일제의 악행을 희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되도 않는 변명이라도 가능한 포로와 달리, 자국민 병사들마저 이따위로 대우했다는 점에서 일본군의 병폐를 짐작할 수 있다.[29] 사실 전국시대에도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해도 칭찬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30] 원래 전쟁에서의 강간은 성욕의 문제가 아닌 생존본능의 문제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아군이나 적군을 직접 보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라는 공포에 매일매일 시달리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성관계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병사들의 공포감을 해소하면서, 전쟁범죄라는 문제도 막기 위해서 병사들을 나누어서 배치를 주기적으로 바꾸거나, 충분히 휴식할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대 내부에서 구타나 가혹행위가 만연할 정도로 막장이었고, 이런 과정에서 쌓인 병사들의 불만과 공포감을 해소하기 위한 휴식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유독 강간과 학살이 자주 일어났다. 즉, 군대 내부의 근본적인 부조리와 시스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위안부를 징집해도 학살과 강간 사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31] 이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난징 대학살을 피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난징의 강간>은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들의 끊임없는 협박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2]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 내에서는 동맹국인 독일의 음악조차 금지했다.[33] 일단 무라야마 담화에서 전쟁범죄와 잘못을 인정하기는 했고 현재까지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총리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간혹 망언을 일삼거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며 주변국들을 자극한다.[34] 알리도 오두막으로 끌려갔지만 도망쳤고 그는 15일간 정글을 돌아다니다 호주군에게 구조되었다.[35] 이때는 어처구니없게도 일본 육군과 해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36] 이니셜.[37] 이 때 잡힌 미군 조종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조지 H. W. 부시였다. 바다를 표류하다 미군 잠수함이 구조.[38] 한국인 노동자에게 강제로 일본 군복을 입혀서 미군 저격수를 사살하는 데도 이용했다.[39] 이 반란에 대해서는 궁성사건마츠에 소요 사건 참고.[40] 물론 복수 징병도 포함되었기에, 이보다 수가 적을 가능성이 있다.[41] 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만도가 끌려간 곳이다[42] 전략적인 이유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미군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경우 재미로 학살했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양심 선언을 한 일본군 병사들도 있었다.[43] 참고로 난징대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최소 10만 이하에서 최대 30만 이상까지 거론된다. 현 중국 정부의 경우 30만설을 채택한다. 한편 주류 학계의 경우 추정치의 중간값인 20만설을 채택한다.[44] 사실 일본 정부는 선전포고를 시도했다. 다만 암호화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 결국 진주만 공습 이후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물론 선제공격 전이 아닌 후 선전포고는 큰 의미가 없다.[45] 치치시마 섬의 식인귀 살아 있는 사람을 술안주 삼아 잡아먹은 사건의 주동자.[46] 바로 아래 항목의 731부대 책임자다.[47] 그의 부하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전쟁범죄를 묵인하거나 국가원수로서 허가하기도 했다.어차피 직위가 직위인 만큼 최종적인 책임은 피할 길이 없다.[48] 이렇게 말하자 거기에 참석했던 장군이나 장교들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49] 이 영화를 비롯하여, 이하 소개하는 작품들이 제작된 국가에서 '중국'이란 '중화인민공화국'이다.[50] 번역하자면 '치욕의 나날들'.[51] 퍼니셔 맥스와 퍼니셔, 더 보이즈의 작가로 유명하다.[52] 중간중간에 일본군의 여러 전쟁 범죄들도 제법 리얼하게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