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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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어: 日本航空123便墜落事故
  • 영어: Japan Airlines Flight 123 Crash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 시각
1985년 8월 12일 18시 56분 26초 경(UTC+9)
유형
정비 불량에 의한 유압계통 이상
발생 위치
일본 군마현 다카마가하라 산 능선
탑승인원
승객: 509명[1]
승무원: 15명
사망자
520명
생존자
4명
기종
Boeing 747SR-46
항공사
일본항공
기체 등록번호
JA8119
출발지
도쿄 국제공항[2]
도착지
오사카 국제공항

1. 개요
2. 사고기
4. 사고 경과
4.1. 이륙
4.2. 사고 발생
4.3. CVR(Cockpit Voice Recorder) 조종실 음성 녹음
4.4. 당시 기내의 상황
4.5. 추락
5. 늑장 구조작업
6. 생존자
7. 희생자
7.1. 연예인 희생자
7.2. 한국인 (한국계) / 외국인 희생자
8. 사고 원인
9. 사고 후
10. 예방?
11. 관련 동영상
12. 기타
13. 미디어에서



1. 개요




もう、だめだ!

이젠, 끝이야!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마지막 외침[3]


1985년 8월 12일[4] 오후 6시 57분 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기체 등록번호 JA8119) 여객기가[5]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 현 부근의 타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 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인원 524명 가운데 520명이 숨진 참사이다.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이며 항공기 탑승객 총 사망 순위로는 세계 2위, 아시아 1위의 참사이다.[6]

사고 이후 123편은 당연히 영구결번되었으며 현재 하네다-오사카 노선에서 121편 다음은 125편이다.[7] 그러나 2020년 8월,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편성된 JL123편이 35년만에 포착되었다.[8]


2. 사고기


사고기의 기종은 보잉 747SR-46이다. 보잉 747SR은 보잉 747-100을 일본 국내선용으로 커스터마이징하여 제작된 버전으로, 일본항공전일본공수 두 항공사에 의해 운용된 기종이다.

일본 국내선의 막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일본항공이 보잉에 발주하여 제작된 사양으로[9], 3시간 미만의 단거리 비행에 알맞게 연료 탑재량을 줄여, 이륙 최대 중량을 줄이고, 수송량을 극대화시키고, 잦은 이착륙 환경에 맞게 일부 구조와 랜딩 기어를 보강한 기종이다. 사고기의 경우 정원이 총 528명이었는데, 원판인 보잉 747-100의 일반적인 3클래스 좌석 배열 정원이 366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기(기체 등록번호 JA8119)는 1974년 1월에 생산되었으며, 1978년 일본항공 115편 불시착 사고테일 스트라이크기체 후미가 파손되었다.[10] 하지만 이 사고 후 수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결국 참사의 원인이 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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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 12일 사고 발생 1시간 전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는 사고 기종인 JA8119. 사고 바로 직전, 마지막 착륙 시의 비행기가 사진으로 남은 것은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12] 그뿐만 아니라, 아래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사고가 일어난 그 비행을 위해 택싱하고 이륙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후쿠오카에서 하네다로 돌아온 후 오사카로 갈 때 찍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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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4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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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 3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테일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 1년 전이다.

파일:external/www.tailstrike.com/JAL123_2.jpg
테일 스트라이크 수리 후 추락 사고 전에 찍힌 사진이다. 기체 뒤 끄트머리 부분이 뭔가 지저분해 보인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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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일 다른 노선으로 비행하던 중 탑승객[13]이 찍은 우측 주익 상단에 새겨진 기체번호다.(JA8119)


3. 승무원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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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高濱 雅己[14], 49세, 운항부분 지도 교관, 총 비행시간 12,423시간 41분)
부조종사 : 사사키 유타카 (佐々木 祐, 39세, 기장 승격 훈련생, 총 비행시간 3,963시간 34분)
항공기관사 : 후쿠다 히로시 (福田 博, 46세, 엔지니어 부분 교관, 총 비행시간 9,831시간 3분)

수석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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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노 쥰 (波多野 純, 39세, 총 비행시간 10,225시간)
당시 이 비행기는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겸하였기에 사사키 유타카(佐々木佑) 부기장은 기장석에서 비행기 조종과 승무원에게 지시를 하고,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은 부기장석에서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지도하며 관제탑과의 교신을 주로 맡았다. 때문에 아래의 교신 내용을 들어보면 기장이 교신을 담당하고, 엔진 출력 조종 등 원래 기장의 역할은 기장이 직접 하지 않고 부기장을 독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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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항공 123편 승무원 배치도. PUR은 사무장(Purser), AP는 부사무장(Assistant purser), STW는 스튜어디스(Stewardess)를 의미한다.

4. 사고 경과



4.1. 이륙


사고일은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 내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봉(お盆) 전날로, 탑승객은 샐러리맨들과 귀향객, 여행객들이었다. 또한 기체는 사고당일 삿포로 1 왕복, 후쿠오카 1 왕복 비행을 한 후 오사카(이타미)까지 왕복하여 하네다로 돌아온 다음 그날의 비행을 마칠 예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항공기관사는 오랜 시간 동안 조종실에 탑승하고 있었다(도쿄(하네다)~후쿠오카 왕복편으로 탑승). 부기장은 다른 비행기에서 기장 승격 시험을 마친 다음 123편을 타게 됐고, 기장은 그 날 첫 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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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의 123편 비행기 티켓. 이 티켓은 생존자인 카와카미 케이코의 티켓이다.

사고기는 18시 정각에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56분의 비행을 거쳐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15]이륙 예정 시간보다 4분 늦은 18시 04분에 이륙했으며, 이후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기체의 모든 계기는 정상 작동했다. 연료는 약 3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양이 탑재되었다.


4.2. 사고 발생


당일 123편은 도쿄 국제공항을 출발. 예정대로 비행을 하고 있었으나 이륙한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7315.2m) 상공에 도달한 직후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된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렸으며 경고 50초 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쿼크 7700'[16]을 발신.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한다.[17] 하지만 이때 벌크헤드가 날아가고 수직 꼬리날개가 찢겨 날아가면서,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어나가[18] 조종 불능에 빠진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의 채널로 구성하지만,[19] 123편은 불행하게도 4개 모두가 찢겨나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보잉 747은 꼬리날개 바로 밑에 모든 유압장치 파이프가 지나가는 구조이기에 꼬리날개가 부서지면서 유압장치 파이프가 날아갔기 때문이다.[20][21]

조종 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여 9000 ft(2743.2m)를 내려와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며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 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이는 더치 롤과,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게 되면 고도는 상승하고 속력은 감소 / 어느 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 속력은 상승/ 속력이 붙은 기체의 기수는 다시 위로 향하는 휴고이드 운동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승객들이 남긴 유서의 필체가 상당히 휘갈겨진 상태로 적혀있다. 더불어 엔진 출력차와 플랩을 이용한 조향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서 기체는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고 만다.

실속 상태만 간신히 막으며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방향 조절은 완전히 불가능해지고, 비행기는 항로를 이탈해 하네다와 요코타의 정반대인 후지산으로 날아간다. 최초 이상 발생 약 30분 뒤 가능한 한 최대의 수단들을 이용한 승무원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체는 양력을 완전히 잃고 급강하하며 6시 56분경,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공중 분해가 시작되었다.[22] 그 다음 기체 후부가 분리됐다.[23] 그리고 가까스로 잠시 상승했으나, 조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마지막으로 123편은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최종 추락, 충돌했다.

4.3. CVR(Cockpit Voice Recorder) 조종실 음성 녹음


내용 글 링크[24]

일본 운수성은 비공개 자료였던 본 기체 조종실의 음성 녹음 자료를 1999년 11월에 모두 폐기 처분했다고 발표했는데[25] 누군가가 이를 녹음하여 2000년 8월에 방송국에 공개해서 큰 파장이 일었다.[26]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특히 재난 관련 PTSD가 있는 사람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이 음성 기록에 경고음과 충돌음이 녹음되어 있는데다가 처절한 상황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어 상당히 섬뜩하다.

굳이 사고 당시의 상황을 알고 싶다면 항공 사고 수사대사상 최악의 참사의 해당 에피소드를 보는 것이 그나마 정신적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런 다큐멘터리는 그 특성상 최대한 상황을 순화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교신 과정과 기내 상황을 각종 기록을 참고로 하여 극화 형식으로 대단히 급박한 분위기로 표현했고, 후자는 타임 테이블 형식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27]


극화 버전

플래시 버전


사고 전부터 추락까지 전체 버전[28]

CAP: 기장(타카하마 마사미) COP : 부기장(사사키 유타카) F/E : 항공기관사(후쿠다 히로시) ACC : 항공 관제센터 YOK : 요코다 진입관제소 APC : 도쿄 진입 관제센터 PUR: 기내방송(부기장) PRA: 기내안내방송(자동)


비행 재현

4.4. 당시 기내의 상황


파일:ena9E4Y.jpg
사고 당일, 그리고 그 사고 당시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아직까지는 멀쩡했던 일본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사진이다.

아직까지는 기내의 분위기가 침착해보인다. 카메라필름은 무사히 보존됐으나 안타깝게도 촬영자는 사망했다.

여기 실린 사진에 따르면 기체 중간 부분이다.

(네이버 파파고 번역본)

다만 링크된 블로그의 게시물은 '군사물자 수송'이라느니 'MIG-25 전투기'라느니 하는 내용을 볼 때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기내 사진 외의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비상 강하)중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디드 어나운스[* Pre-Recorded announce. 긴급시 자동적으로 흐르는 방송으로 좌석 벨트 착용과 마스크 착용을 지시한다. 링크된 영상은 일본항공의 보잉 767기가 여압계통 이상으로 비상강하를 할 때 찍힌 것으로, 구버전의 방송이기에 123편이 비상강하를 할 때에도 나왔던 방송이라고 한다.]가 일본어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29] 비상 대책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 착용도 이루어졌다. 생존자인 승무원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인지할 수 없었으며, 이상 발생 직후부터 추락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 초~수 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으나 현 사고에선 30분 동안 비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서를 남길 시간이 생긴 케이스이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30]'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를 동반한 부모와 유아 옆 승객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 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하나 조종 불능으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사이타마현 쿠마가야(熊谷)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이때 기체는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 산 방면으로 향하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위에 있는 CVR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하네다로의 귀항을 요청했지만, 조종 불능으로 인해 하네다 공항과 정반대쪽으로 계속 멀어진다.[31]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사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조종을 하기로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상호간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 동체는 완파되었으나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경으로 "もう、だめだ!(이젠 끝이야!)"라는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32] 충격음이 들린 후 CVR가 종료되었다.


4.5.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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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추락한 현장)

추락 직전 상승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추락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km/h)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33] 충돌 과정에서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 나갔고, [34]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를 만들 수 있었다. 본체에서는 생존자가 없었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 기장의 시신은 거의 완전히 불타버려 확인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 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다.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장녀 요코는 보이스 레코더가 공개되기 전까지의 15년간을 '519명을[35] 죽여놓고는 뻔뻔히도 잘도 살아있구나'라는 전화를 정말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2000년에 보이스 레코더가 공개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기장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고.[36] 참고로 요코는 아버지가 못지킨 항공 안전에 헌신하겠다는 목표로 아버지가 근무하던 일본항공에 현재도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5. 늑장 구조작업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 생존해 있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된다. 특히 사고 수습 이후의 부검 과정에서 기체 후미의 탑승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추락 이후 사망했음이 드러난다.[37]

참고로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자위대 헬기 조종사가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한 것이 일본 정부가 늑장 구조 작업을 결정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많았고 헬기 소리가 들렸을 때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헬기는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해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당시 현장 환경은 퍼붓는 비, 산에 추락하여 구조하기 불리한 지형, 저녁 무렵에 추락하여 시계가 확보되지 않는 등 구조 활동이 극히 어려운 지역이었다. 당연하지만 무리한 구조 활동은 2차 피해를 유발하므로 구조 인력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에는 구조 활동을 진행할 수 없음이 상식이다.[38] 시계도 확보되지 않는 와중에 울창한 수목 지대, 그것도 산악 지형에서 레펠 강하같은 무리수를 감행했다간 희생자만 늘리는 꼴이다.[39]

헬기가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다고 증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JAL 123편이 추락한 시간은 오후 6시 56분경이고 8월 12일 도쿄의 일몰은 오후 6시 30분경이다. 산악 지형에서 해가 더 빨리 짐을 고려하면 헬기가 출동한 시점에서는 이미 시계 확인으로 생존자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대를 넘어서버렸다. 계기 확인이 가능한 장비가 탑재된 핼기였다면 더할나위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구조대원이 강하할 수 없는 지형임을 알고 있는 헬기는 시계 확인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밖에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걸 보인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듯,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고 수습을 방해했다는 음모론부터 구조 활동 자체가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와 여기에 온갖 살을 붙여 재생산된 음모론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제기되던 기장 개인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일본 사회가 이 사건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40] 사고 당시 보도 및 이후 제기된 무수한 음모론 중에서 특히 많은 주목을 받은 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락 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성자탄에 의한 테러라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신빙성에 대해서는 각자가 판단하자.[41]]

  • 추락 확인 직후, 미 공군C-130 수송기가 탐색에 나서 20분만에 기체를 찾아냈으며, 탐색 구조 헬기가 2시간 후에 기체 추락 현장에 도착했다. 즉시 가장 가까운 주일미군 기지인 요코타 기지에 경보를 발령했고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구조 활동은 자위대의 책임이라며 거절하고 탐색 구조 헬기의 이탈을 요구했다. 당시 미군 측의 요청은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구조를 개시하겠다'가 아닌 '많은 부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태이니 의료반과 헬기를 준비해두었다'였다는 모양이고 이에 자위대 측은 '감사한다. 대기 바람.'이라 답했을 뿐이라는데, 사고 직후 미군의 헬기가 현장에 도착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 헬기가 구조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에 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라는 당시 구조 헬기 승무원의 증언이 있으며 이 사실에 대해 함구령까지 떨어졌다고 한다.[42]
  • 도쿄 국제 공항에서 자위대 측에 구조대 파견 요청을 한 것은 비행기가 추락한 후 약 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유는 '정확한 추락지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조 요청을 낼 수 없다.'였다고. 그나마 123편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는 추락 이전부터 자위대 측에 전해진 상태였고, 덕분에 자위대의 대책 본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개설돼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항공 자위대의 탐색 구조 헬기가 추락 후 1시간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해당 헬기의 전문 분야는 해상구조였고 적외선 장비 등의 야간 구조 장비를 탑재하고 있지 않아 생존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철수했다. 덧붙이면 자위대의 제1공정단장이 사고 지점의 야간 강하를 제안했지만 울창한 수목 지대상의 야간 강하는 극도로 위험했기에 기각당했다. 이 제1공정단장은 정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독자적으로 부대를 움직였기에 모반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훗날 좌천되었다.
  • 헬기로 추락 지점을 파악한 항공자위대가 육상 자위대에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를 전했지만, 항공 자위대와 육상 자위대의 지휘 체계가 판이하게 달라 육상 자위대가 정확한 추락 지점을 파악하고 도보로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고 만다. 추락 지점 파악에 민관경이 모두 투입됐지만, 서로 추락 지점에 대한 정보가 달라 구조대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 결국 구조대가 도보로 추락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추락 후 14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전 9시였다.
  • 일본 정부는 사고가 난 직후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인명 구조보다 사고 기록 수집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상술한 구조대 도달 지연까지 겹치면서, 사고 직후 도착한 의료진들은 많은 이들이 쇼크와 추위로 사망했음을 확인한다. 추락한 직후 비가 내려 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살아 남았으며 상기 항목에도 나오는 생존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고 한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는 것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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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조 활동을 벌였을 당시 뉴스와 신문에 생존자가 7명이라고 보도되어 있었다. 먼저 생존자로 보고된 4명 이외의 다른 3명을 더 구출하였다는 것인데, 4인이 생존한 현장에서 200m 급경사를 오른 지점에서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지금 막 3명의 생존자 구출! 1명은 들 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하며 구조대원에게 안겨있다"고 무선으로 보고한 것이다. 후지 테레비의 뉴스 레포트(ニュースレポート)에서도 "현장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곧이어 들것에 실린 7, 8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 실려오고 있습니다."라고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추가로 발표된 생존자 3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디어에서 온데간데 없이 언급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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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된 3명의 생존자 중 들 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한 1명은 사진으로 보이는 소년으로 추정되며 뉴스에서 언급된 들것에 실린 7, 8세 소년과 동일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생존자는 8명이라는 얘기이며, 의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사진 상으로 (근육이 접힌 방법으로 볼 때)자력으로 팔을 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 소년은 무사히 살아있던 것으로 보이나 이 이후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으며 생존자 명단에도 사라져있다.(공식 생존자 4명은 여성뿐이다.) 음모론을 떠나서도 참으로 기묘한 일. 과거에 구출 8명, 생존 4명이라는 자료도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에는 생존하였으나 어떤 문제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 또한 8월 13일 오전 9시~10경 소방대원이 추락 현장에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중학생 정도의 남자를 포함한 남성 4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충격적인 현장에서 내려왔음에도 인사해도 대답 없는, 아무 말도 하지않는 수상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이이즈카 사토시 [飯塚訓]저, '추락 현장, 남겨진 사람들' p119, 5행) 사실 워낙 끔찍한 사고로 수많은 시체들이 실종되었기에 밝혀지지 않은 생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이 없던 것일 수도 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시체를 실제로 보면 기겁하며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이 사고의 시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불에 타거나 잔해 등에 훼손이 심한 시체들도 많았다.
  •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서투른 사고 처리를 두고 자위대의 오인으로 인한 격추, 무인기와의 충돌, 또는 미국이 알면 좋지 않은 물건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는 등의 음모론도 돌았지만, 대개는 그냥 관료주의에 의한 사고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생존자가 적은 원인중에 하나는 추락 지점이 일본에서도 손꼽는 오지 군마현에서도 오지인 지역에 위치한 험한 산 중턱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변 인가도 없고 교통도 불편하고 구조인력이 접근하거나 생존자를 후송하기에 지극히 불리한 환경이어서 추락 후 무려 14시간이나 지나서야 구조가 시작되었다. 비행기가 조종불능이 된 후 30여분 동안 하네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느니 스로틀을 조종해 되도록 구조가 쉬운 평지 지역에서 선회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6.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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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편의 좌석표. 붉은색이 비행기의 앞부분이다. 보라색이 생존자들의 좌석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출처)
(생존자 여성 4명의 구출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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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케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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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부터 요시자키 미키코, 요시자키 히로코, 오치아이 유미

생존자는 JAL 스튜어디스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 요시자키 히로코(吉崎博子, 35세)와 장녀 미키코(美紀子, 8세),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12세). 기체 맨 끝 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상태로 발견된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큰 부상없이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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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당시 12세). 생존자 4인방 중 가장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아, 많은 언론들이 그녀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30년이 지난 지금 외부 언론과 일절 취재를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신 사고당시 야구부 연습 때문에 가족들이랑 홋카이도 여행을 못 간 케이코의 오빠인 카와카미 치하루(2015년 시점 44세)를 30주기를 맞이하여 겨우 취재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26일 결혼해서 2004년 6월 첫 출산하고 어머니 카와카미 카즈코(사고당시 향년 39세)의 뒤를 이어 간호사를 했지만, 언론 때문에 육아도 어려울 뿐더러 등교 거부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사고 당일인 8월 12일은 희생된 여동생 카와카미 사키코(향년 7세)의 생일이라서 더욱 비극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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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 요시자키 히로코(吉崎博子, 당시 35세), 우측: 미키코(美紀子, 당시 8세).
미키코 양은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진으로 보다시피 치아나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했으며, 고등학교 수학 여행을 제외하면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비행기를 단 한번도 못 탔다고 한다. 미키코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으며, 엄마인 히로코가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취재진한테 안부만 묻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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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번 승무원이었던 생존자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
사고 당시 비번 승무원으로 일반 승객으로 탑승하여 자기 담당 비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승무원들을 도와 승객들을 구명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 후 2012년에 일본 항공 직원들 세미나에 당시 상황과 사고 직후 삶에 대해서 강의했다. 30년이 지난 2015년에 오사카부에 거주하고 있는 게 확인되었으며 그녀 역시 다른 3명의 생존자와 마찬가지로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다. 유일하게 미디어에 나온 것은 항공사고수사대에서 성우가 읽은 인터뷰 뿐이다.

7. 희생자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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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코(マリコ), 츠요시(津慶), 치요코(知代子).
부디 사이좋게 힘내서 엄마를 잘 도와주거라. 아빠는 유감스럽지만 확실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이제 5분이 지났다. 이제 비행기는 타고 싶지 않아. 제발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공백)
어제 모두 모여 한 식사가 마지막이라니..
뭔가 기내에서 폭발한 듯 연기가 나고 강하하고 있어. 어디로 어찌되는 건지.
츠요시 확실히 부탁한 거다. (공백)
(아이)엄마 이렇게 될 줄이야 유감이다. 안녕 아이들을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다.
비행기는 회전하면서 급속히 강하 중이다. 정말 지금까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감사하고 있어.

  • 카와구치 히로츠구(河口 博次, 당시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 걸쳐 쓰여진 유서.[44] 장녀 마리코(河口真理子)는 당시 대학원 재학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학업 탓에 5일 뒤 현장에 가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고 수첩을 가져왔다고 증언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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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해 주세요.
벨트를 풀어서 소지품을 확인해 주세요.
짐은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하이힐은 벗어 주세요.
짐은 들지 말아주세요.
주변에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중략)
  • 객실 승무원 중 부사무장 츠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당시 29세)가 불시착에 대비해 남겼던 메모.
미친듯이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도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노력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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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도와줘. 기분이 안 좋아. 죽고 싶지 않아. 마리코.
  • 시라이 마리코(당시 26세), 비행 시각표의 여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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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가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18:30 급히 하강중. 수평 비행중이다.
일본 항공 18:00 오사카행 사고.
죽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료헤이.
모두 건강히 지내세요. 안녕. 스미코(須美子), 미키(みき), 쿄코(恭子), 켄타로(賢太郎)
18:45 기체는 수평으로 안정해 있다. 산소가 적어 기분이 안 좋다.
기내에서 "힘내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기체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18:46 착륙이 걱정이다. 스튜어디스는 냉정하다.

  • 무라카미 료헤이(村上 良平, 당시 43세), 회사명이 적힌 봉투에.[46]

  • "마치코(まち子), 아이들을 부탁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타니구치 마사카츠(谷口 正勝)의 장남 아츠시(篤志)(당시 13세)는 사고 소식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했다. 죽음의 개념조차 잘 다가오지 않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 후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일본 열도를 슬픔에 빠뜨린 바 있다. 훗날 장성한 아츠시는 아버지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아버지라기보다는 항상 촐랑대는 좀 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 무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힘을 주려고 가족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유서를 남긴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회고했다. *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고시엔[47]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연락회라는 유족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여성은 33주기를 맞은 2018년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비행기가 추락한 오쓰타카 산 속에 위치한 위령비와 희생자들의 묘역, 그리고 812연락회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48]

  •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中埜 肇)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우승기를 바치자는 일념으로 의지를 불태워 그 해 21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데 이어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49]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 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었고, 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었다고 한다. 사고가 났던 날 선수들이 받은 충격은 다음날 경기로 이어졌고, 결국 사고가 났던 다음날 경기부터 일주일 뒤의 경기까지 한신은 모두 패배하면서 6연패에 빠져버렸다.[50] 또한 사고 닷새 뒤 시신 확인 시 그 해가 한신타이거즈 창단 50주년이라 특별히 제작했던 호랑이가 그려진 넥타이 핀을 착용하고 있어 불탄 넥타이 조각으로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사고 이후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들, 특히 모든 팀이 도카이도 - 산요 신칸센 연선에 몰려 있는 센트럴리그 팀들은[51] 신칸센을 주로 이용해서 원정을 다니게 되었다. 다만 홋카이도와 큐슈 양 끝단에 팀이 있는 퍼시픽리그의 경우는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 또한 오키나와에 경기가 잡히거나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경우에도 당연히 비행기다.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으로 협박을 받던 하우스 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浦上 郁夫)도 사건 종결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고 오사카 본사로 가던 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몇 인사들이 123편을 탔다가 목숨을 잃었다.

  • 사고 다섯 달 전부터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서[52] 열리고 있었던 1985 츠쿠바 엑스포[53], 사건 전날 도쿄에서 개최 되었던 코믹 마켓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가자, 구경꾼들과 당시 동인계에서 촉망받던 동인 작가 히모토 코린(緋本 こりん, 본명:이코마 아야코 生駒隆子)도 목숨을 잃었다.

일본에서 대뇌 생리학에 한 획을 그은 대뇌 생리학의 권위자이자 오사카 대학교 전임 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아키라(塚原仲晃)도 1986년부터 문부성의 주도하에 시작 예정이었던 대뇌 가소성 연구를 대비해 사고 당일 협의를 하러 갔다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향년 51세로 변을 당했다. 실제로 츠카하라 나카아키라는 당시 세계적인 뇌 신경학자여서 일본 뇌 생리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 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책이 발간되었으며 사고 발생 25년 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또한 일본 브레인 과학 진흥재단에서는 츠카하라 교수의 사후 업적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츠카하라 나키아키라 기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해오고 있다.

참고로 사고당시 츠카하라 교수와 위에 상술한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같은 좌석에 탔다. 미야지마군과 츠카하라 교수 사이에 탔던 여성은 당시 도쿠시마 현에 거주했었던 노닌 치에코(能仁 千延子 당시 향년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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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유카와 다이애나
희생자인 유카와 아키히사와 왼쪽이 다이애나의 친모

  • 현역 바이올리니스트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중인 혼혈인 유카와 다이아나의 아버지 유카와 아키히사(湯川 昭久) (향년 56세)도 이 당시 비행기를 타고 희생되었는데 사고 발생 한달 후 1985년 9월 16일 부인 수잔느 베일리는 유복녀 다이아나를 출산했다. 다이아나의 엄마는 남편을 잃은 후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생전 남편의 뜻이었던 음악가의 길을 따라 딸인 다이아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2000년에 데뷔를 시켰다. 다이아나는 유복녀였기 때문에 유카와라는 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영국 법이 바뀐 뒤인 2009년 영국 고등법원 판결로 현재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54] 다이아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09년 8월 12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520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반도 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7.1. 연예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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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큐 (본명 : 오시마 히사시)
키타하라 요코 (본명 : 요시다 유미코)

  • '위를 보며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로 아시아인 최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사카모토 큐도 이 사고에 휘말려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건 지인의 선거유세차 오사카로 향한 것인데, 늘 이용했던 전일본공수의 여객기에 탑승하려 했지만 하필 만석이라 할 수 없이 123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 타카라즈카 가극단의 67기생, 유키구미의 키타하라 요코(北原遥子)[55]는 장래가 촉망되던 배우였으나 이 비행기로 오사카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


7.2. 한국인 (한국계) / 외국인 희생자



  • 한국계 미국인 전옥자(당시 42세)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외국인 학교를 다니던 아들 크리스토퍼 킴 한가위(당시 16세)와 스코트 킴 한솔(14세)를 데리고 남편이자 당시 오사카 중앙일보 판매 위원장이던 김종욱을 만나러가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56] 사고 당시 남편 김종욱의 이종사촌 형이자 서울특별시청 뒤에있는 뉴 국제호텔 회장이었던 김유만이 전옥자의 친정 식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세 모자가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연락했고, 전옥자의 남동생 전유식이 도일하여 세 모자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김종욱의 식구는 68년 결혼 후 72년 미국으로 이민해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77년 귀국하여 외국인 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외국인 학교 교우 바비킴은 크리스토퍼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명횡사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 한국인 희생자는 3명이다. 안시오(安時燠, 당시 52세), 정순덕(鄭順德, 당시 47세), 이혜경(李惠慶, 당시 21세)이며
안시오는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 한국인으로 살다가 사고 발생 10년 전부터 계속 한국을 오가며 송이버섯을 취급하는 식품 수출업을 하였다. 이후 사고 발생 5년 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당시 나이 32세)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당시 4세), 차녀 안연정(당시 3세), 아들 안도영(1세)을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 수출민 지문 날인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 변을 당했다.

정순덕은 당시 큰 딸인 정화(당시 28세)와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업을 했다. 실제로 정순덕은 전 영화배우 최지희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의 초청으로 큰 딸과 의류상을 했으며 작은 딸 영화(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였다. 정순덕의 여동생 정영순(당시 38세)는 일본에 있는 조카 정화로부터 정순덕이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이혜경은 도쿄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유학생으로 1984년 12월 유학길에 올라 생활하던 중 사고 당일 오사카에 있는 셋째 친언니를 만나러 가는 도중 변을 당했다. 1985년 9월 귀국 예정이었으나 귀국을 1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국제 결혼한 영국인 킴블 매슈즈와 니시구치 마사코(西口 昌子) 부부가 신혼 여행을 마치고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만석이었던 만큼 외국인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다. 중국인독일인 희생자가 각각 1명, 미국인 희생자는 6명.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인 희생자 6명중 3명은 한국계이다. 상기한 3명의 한국인과 합하면 한국 혈통의 사망자는 6명이다.[57]


8. 사고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가 파손되어 제작사인 보잉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격벽(벌크헤드)이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58]해야 하는데, 보잉의 기술자(정비 총 담당자)는 수리하면서 보강판을 쪼개서 고정한 탓에 2줄의 리벳과 1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 두 개로 고정하는 효과가 나게 되어버렸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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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수리와 JAL123기에서 이루어진 수리의 차이를 설명한 사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만한 태도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수리 이후 비행을 계속하면서 기압 변화에 따른 금속 피로가 누적되다가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자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가 날아가버렸다. 이 때 승강타,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 분배기인 토크 박스까지 터져 유압이 새어나갔고, 결국 유압과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TBS 테레비에서 이 부실한 수리에 참여한 40여 명의 수리공 중 한 명을 인터뷰했는데, 자신들의 수리가 원인이 아니며 그 근거로 사실 이중 철판은 자신들이 수리하기 이전에 애초에 두 장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1978년 테일 스트라이크 때문에 동체가 약간 변형됐는데 수리 후에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기체가 이미 뒤틀려 생긴 문제로 당연히 정상이 아니다. 벌크헤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고가 날 기체였다. 이를 스크랩(항공기를 분해해서 고철로 매각하는 절차.)하지 않고 노선에 계속 투입한 일본항공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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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크헤드의 위치와 추락하기 전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서 JAL 123편을 확대한 모습, 수직꼬리날개 전체가 날아간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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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크헤드의 자세한 위치

다만 사고의 주 원인은 벌크헤드 파손이지만, 이후 폭발적인 감압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폭발적인 감압이 없었다고 하는 측에서는 조종실 음성 기록을 근거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 여유가 있었음을 지적하지만, 폭발적인 감압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조건 그 직후 기내의 사람들이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보통 이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 수증기 응결이 일어나므로 감압을 알 수 있으며 자동(수동 가능)으로 산소 마스크가 좌석 근처에서 터져나온다. 때문에 아무리 감압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을 잃기 전 산소 마스크를 쓸 정도의 여유는 있다.


9. 사고 후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발했으나 기각당했다.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 엔[60]을 조의금 명목으로 지급했으며 회장은 퇴임했다. 그리고, 115편 테일스트라이크 사건당시 기장과 부실한 수리로 520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정비 총 담당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에서도 부실한 수리 방법을 제안했던 정비 주임이 자살했었다. 만약에 정비 총 담당자가 사죄만 하고 생존해 있었으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 징역을 구형받았을 수도 있고, 설령 출소를 한다고 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격렬한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얼굴조차 못 들고 평생을 괴롭게 살았을 확률이 더 높다.
위버링겐 상공 공중 충돌 사고 직후, 결정적인 과오를 저지른 항공 관제사인 페테르 닐센이 유가족의 복수로 살해당한 사례가 있었다. 피의자의 주장으로는 살해하려 의도한 것은 아니나, 힘들게 찾아간 닐센의 집에서 신경질적인 응대를 받아 우발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곤 하나, 이미 자신이 흉기를 들고 찾아간 것부터 신빙성은 없었다. 하지만 스위스 사법부는 사고의 여파로 인해 우울증을 앓던 피의자의 정신상태를 정상침작하여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2년 형만 집행했으며,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암암리에 영웅 대접을 받았고 본국의 건설부 차관까지 임명받게 된다. 대형 사고 유발자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어떤지 정확히 알려주는 일화다.
이 사고의 정비 담당자도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본 최악의 항공 사고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잉 측의 정비가 올바르지 못했음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 동안 시달려야 했다. 보잉이 주요 고객인 일본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다만, 일본항공의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기체변형이 일어나 화장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는 민원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사고가 일어난 비행기인 만큼 더 신경 써서 관리를 해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사족으로, 이 사고로 인하여 일본항공은 물론이고 일본의 모든 항공업계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내선 항공의 수요는 25%나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일본항공 대신 전일본공수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고 이전에도 일본 항공은 경쟁사인 전일본공수보다 신뢰가 떨어졌고 국내외에서 추락사고가 많았으며, 당장 이 사고로 사망한 사카모토 큐도 원래는 일본항공을 신뢰하지 않아 전일본공수의 항공기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

이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일본항공은 이 사고 이후 현재까지 인명사고를 단 1건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원가절감을 이유로 정비를 아웃소싱하는 상태며, 이 사고 20주년 기념으로 위령제를 지낸 2005년 8월 12일 후쿠오카에서 호놀룰루로 가던 JALways(JAL 소속의 저가항공사)의 DC-10이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화염을 내뿜으며 부품을 시가지에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 후 40년 가까이 지난 2020년에 이르러서도, 이 사건과 더불어 한번 파산한 JAL을 신뢰할 수 없어 전일본공수(ANA)만을 이용하거나, 가격이 비싸 ANA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JAL이 아닌 저가항공기를 사용하는 일본인도 여전히 많다. 그정도로 일본인들의 기억속에 큰 충격으로 남은 사건인지라, 굳이 항공에 관심이 없는 사고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이라도 '123편' 이 사고 하나만은 대부분 알고 있다.

2012년 10월 일본 WOWOW 방송에서 <능선의 저편에~아버지와 아들의 일본항공 사고>라고 하는 제목의 2부작 드라마로 이 사고를 각색하여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여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큰 줄기인 사건의 내용이나 중요한 에피소드들은 세세하게 사실로 배치하고, 주 스토리가 되는 세 가족의 이야기는 가상의 가족으로써 행복한 모습을 극대화 시켰다가 사고 이후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좀 더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쿠니무라 준, 이시다 유리코, 하기와라 마사토, 히로스에 료코, 마츠자카 토리, 칸지야 시호리 등 연기파와 스타 배우들이 총 출동하는 화려한 라인업을 보여주었고, 드라마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는 평. 2부작임에도 합동분향소와 유가족 대기실 세트장을 크고 그럴 듯하게 잘 만들고, 엑스트라들도 아낌없이 투입하여 실제의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잘 살렸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치비 VIP 시스템이나, 13살 소년의 현장에서의 실신, 812 유가족 모임 등도 보여주면서 내용 자체에 자연스레 사실을 녹아내리게 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느낄 수 있다.

2015년 8월 12일 8시 사고 30주년을 맞아 TBS 테레비에서 "8.12 일본 항공 점보기 추락 사고 30주년의 진상"을 방영했다. 1편 2편

10. 예방?


이 사고 이후 조종사들을 모아서 모든 유압이[61] 상실된 상태의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시뮬레이션했는데, 단 한 명의 조종사도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지 못했다. 참고로 모든 유압을 상실한 기체가 그대로 추락하지 않고 아무튼 착륙이라도 한 경우는 1989년 7월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와, 2003년 11월 22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는 DHLA300 화물기가 이라크 반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피격당해 왼편 날개 일부 손상으로 3계통의 유압을 모두 상실한 후 바그다드 국제 공항에 비상 착륙한 두 건 뿐이다. 이외에는 미국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s-4 폭격기도 비행 시험 중 수직 꼬리 날개가 통째로 뜯겨나간 일이 있었으나 이쪽은 유압 계통은 무사해서 제어가 가능한 덕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각각의 해당 문서 참조.

NASA 드라이든 연구소는 Propulsion Controlled Aircraft(PCA)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는데 유압이 상실되었을 때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만을 통하여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으나 항공기가 유압이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이유로 이의 채용은 항공사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이 장비를 장착한 항공사는 2014년 시점에도 한 곳도 없다. 다만 이는 항공업계의 안이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프로그램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모든 유압이 나간 상태에서 좌우 엔진 출력으로 선회하고 상승과 하강을 조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정상인 상황에서 '유압회로'만 전멸한 경우에 쓸 수 있다. 하지만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DHL기 SA-7 피격 사고를 볼 때 어느 정도 항공기에 손실이 있어도 엔진 출력만으로 비상착륙 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DHL기는 날개가 손상되어 항력이 비대칭적으로 발생했고 연료가 새어 나가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JAL 123편이 유압 계통 완전 소실 후에도 30분이나 비행한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이 때문이다. 만약 비행 균형 유지에 이상을 끼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고 발생 직후 회복 불가능의 회전을 일으켜 즉시 추락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때 추락했으면 항공유를 가득 실은 B747이 도쿄 한복판에 추락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은 더 끔찍한 사고가 되었을 것이다.

자녀 셋을 한 번에 잃은 다부치 싱고씨와 그의 부인의 사연이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다부치 요코(향년 24세), 미치루(향년 20세), 준코(향년 14세) 세 자매는 여름방학을 맞아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123편에 탑승했다가 모두 사망했다. 모친은 딸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술로 해소하며 살았고, 남편은 그런 부인을 돌보며 심신이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그맇게 27년이 지난 후 2010년, 계속된 폭음으로 쓰러진 부인이 꿈 속에서 장녀인 요코를 만났는데, 딸은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면서 강하게 질책했다고. 이에 마음을 고친 어머니는 그 이후로 술을 끊고 뒤늦게 812연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2018년 33주기때 부부 모두 8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험한 오쓰타카산에 올라 딸들의 묘를 찾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11. 관련 동영상


http://kakaotv.daum.net/embed/player/cliplink/v6a98GGkxcukjgjHHdjjHMH@my
http://kakaotv.daum.net/embed/player/cliplink/vd3ac1TNxxuNWjQUUqS1oRS@my

후지 TV에서 사고 30주년을 맞아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생존자 요시자키 히로코의 발언을 토대로 드라마 형식으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12. 기타


  • 민간 항공 업계의 1985년도는 항공 사건사고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85년은 사상 최대 항공 재난의 해(1985년 12월 13일자 경향신문)[62]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대형 항공 사건사고가 4건[63]이나 터졌던 해가 1985년이었으며,[64] 그리고 29년 후 같은 참사[65]가 반복되었다.[66]

  • 개그맨이자 국민 MC 아카시야 산마도 원래 일본항공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전일본공수로 갈아타서 화를 면했다. 그리고, 아카시야 산마는 이 때의 트라우마로 1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도쿄와 오사카를 왕복할때는 신칸센을 이용하게 되었다. 산마의 좌우명 '生きてるだけで丸儲け(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득)'는 이때 생겨났고, 딸 이마루의 가명도 저 좌우명을 줄여 붙인 것이다. 하지만 코이즈미 쿄코는 사고 당일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올 때 123편을 이용했다고 저녁 음악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밝혔다.

  • 희생자를 늘린 원인으로 당국의 늑장대응이 지목되는 점이 훗날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하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 두가지중 하나는 세월호 참사의 승무원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 탑승객들을 외면한 채 가장 먼저 탈출한 반면 123편 추락사고의 승무원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이 사고의 경우 애초에 사고 당시에는 구조하기가 상당히 힘들고,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상기한 바와 같다.


  • 산의 날이 지정될 당시 사고가 났던 8월 12일로 정하려 했다가 군마현 측에서 반대하여 8월 11일로 변경됐다.

  • 2017년 8월 12일, 도쿄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오사카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ANA 윙스 37편 비행기가 기체 이상으로 인해 긴급 착륙하는 일이 있었다. 링크 놀랍게도, 이 사고와 날짜, 사고 시각, 비행 경로가 정확히 일치한다. 본 영상 유튜브 댓글에는 123편의 희생자들이 비행기의 안전추궁으로 항공안전에 경종을 울리고 더더욱 안전한 비행을 원하는 희생자들의 마음이라는 댓글과 우연에는 분수가 있다며 기묘하고 오싹해하는 댓글도 있었다. 영상 대부분의 댓글들 중 123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고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만약, 사고 기체가 산이 아닌 운 좋게 바다로 미끄러지듯이 착륙을 했다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520명씩이나 사망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허드슨 강의 기적과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다만 문제점은 이 사고 기체가 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한 벌크헤드 손상으로 조종이 불가능했고 방향타의 파손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바다에 착륙하는 기술은 상당히 어려우며 이때 사고기가 추락할 때 속도는 시속 600km가 넘었고 이 상태로 바다에 착륙하면 땅에 충돌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며 바다의 특성상 전부 수장되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안 나올 확률도 높다. 일례로, 에티오피아 961편 사고에서도 바다에 착수했으나 동체가 부서지는걸 피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다만 이 사건은 승객들이 너무 이르게 구명조끼에 공기를 불어넣은 것이 사망자 확대의 화근이 되었긴 했지만.

  • 야후 재팬이나 구글에서 해당 항공기명을 검색하면 사망자 시신의 사진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 언론사들이 모자이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송이나 기사 등을 통해 사진들을 올려버렸기 때문.[67] 심신미약자 등은 해당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


13. 미디어에서


  • 추락 후 30분이 지나고 나서 일본 방송에 속속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링크는 저작권 문제로 삭제됨.
    • TV 아사히(ANN)에서는 쇼 프로그램 '월요 스페셜 90'이 방송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479명이 탄 하네다 발 오사카 행 일본 항공 여객기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고, 쇼 프로그램 도중에 뉴스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소식을 전했다.#
    • 니혼 TV(NNN)에서는 생방송인 '더 톱 텐(ザ・トップテン)'[68]이 막 시작되고 남녀 진행자(사카이 마사아키, 사카키바라 이쿠에)가 참가자를 소개하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해당 방송이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남자 진행자가 '잠시 긴급 뉴스 때문에 뉴스 스튜디오로 장면을 바꾸겠으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보도국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추락 장소(나가노 현 키타아이키무라촌) 등 상세한 정보를 전했다. 이런 상황이 프로그램 진행 중 3~4번 반복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코이즈미 쿄코는 방송 당일, 123편에 사용한 것과 같은 비행기(JA8119)[69]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왔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 종료 후 바로 뉴스 속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
    • NHK에서는 다큐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고,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해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라는 방송을 했다.#
NHK를 포함해 주요 방송사들은 사고 직후 철야방송을 통해 사고 속보를 전했다.

  • 항공 사고 수사대 3편에서 이 사고에 대해서 방영하였다. 한국어판 제목이 "늑장 대응의 대가"인데 상당히 비유적이다.[70][71]
  •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고를 모티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명으로 2009년에 와타나베 켄 주연의 영화, 2016년 WOWOW에서 카미카와 타카야 주연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 소년탐정 김전일유키야샤 전설 살인사건의 비행기 사고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의견이 있다.
  • 사이코메트러 에지의 에피소드 중에서 비행기 사고로 자폐아가 된 소녀의 이야기도 이 사건을 모티브 삼는다.
  • 갓핸드 테루마히가시 테루가 겪은 천하 항공기 추락 사고 역시 이 사건을 참조로 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 사이코 닥터 시리즈 중 1부에서 주인공 카이 쿄스케가 대학 시절에 사랑했던 여대생의 죽음을 조사할 때 이 사건이 언급된다.


  •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72]도 있다.
파일:external/file.mk.co.kr/l9788937834233.jpg



  • 한국에서 본 사건를 소재로 한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가수 루이(LUEY)[73] "루(淚)-그대가 힘들면"이라는 이름으로 2001년 말에 제작되었다. 앨범 발매 전에는 약 6~7분 가량의 긴 분량의 버젼이 엠넷 등의 케이블 방송에서 파일럿 형식으로 사전 공개 되었다. 사고과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조종사들이나 탑승객들의 모습이 조금 더 비중있게 나오며, 이의 배경 음악으로 '루'의 MR 파트가 중간에 추가로 삽입된다. 하지만 후에 나온 버젼에서의 시작과 끝부분에 들어가는 신문보도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문구가 없던지라, 해당 항공 사고를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냥 뮤직 비디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극본 정도로만 생각할 정도다.
그리고 앨범 발매 이후에는 위의 영상과 같은 원곡의 길이에 맞춰 재편집되고 전반부의 신문보도 자료와 후반부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문구가 추가로 삽입된 5분짜리 버젼으로 정리되었다. 이 사고로 한국인도 여섯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이 위 뮤직 비디오에서 하지원이 연기한 인물인데, 이 인물이 가수 루의 소속사 빅캐스트 스타플러스 사장 이규덕의 조카인 이혜경이라는 사연이 1집 활동 당시 소속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뮤직 비디오 초반부에 하지원의 배역 소개에서 한문 자막으로 나오는데 실제 인물의 본명이다.
실제 이 인물은 재일교포로 연극을 공부했으며 귀국 한달을 앞두고 홀로 항공편에 올랐다가 안타깝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나, 사귀던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뮤직 비디오에서의 극적인 연출을 위한 설정이었을 뿐 모델이 되는 이혜경은 당시에 애인이 없던 평범한 20대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수가 맡은 이혜경의 애인으로 나오는 김태우라는 캐릭터는 사실 가공인물이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속 영원한 루저 나카무라 쇼토쿠가 자위대에 있을때 이 사고의 처리에 참가했다는 뻥을 쳤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처음 작품을 그릴 당시에는 나카무라가 직접 경험담이랍시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중에 들춰보니 그 이야기는 나카무라의 선배의 경험담으로, 나카무라 본인은 파견나간 적이 없었다. 뽀록 난 후 나카무라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JAL123기 관련 자료와 위 만화를 실은 겐분 매거진(고바야시 모토후미가 부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개인지) 특별호가 발매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료집 용도로는 다소 부족한 편. 이외에 JAL123기 파편과 희생자들 사진이 실린 사진집이 발매된 적도 있었으나 엄청난 항의에 못이겨 바로 절판되었다. 넷상에서는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실제 희생자 사진을 적나라하게 실었으므로 열람은 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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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 탑승객은 6명이였으며 전원 사망.[2] 당시에는 하네다 공항이었다.[3] CVR 내용이 글로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판독 불능으로 쓰여있었으나 이렇게 말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 이외에도 あーだめだ!(아, 틀렸어!)로 해석한 프로그램도 있다.[4] 델타 항공 191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지 열흘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열흘 뒤 영국 항공 투어 28편 화재사고가 터진다.[5] 사고기는 1974년 1월에 첫 비행 후 일본항공에 인도되었다.[6] 사망 순위 1위는 테네리페 참사로 이쪽은 2대의 747 항공기가 충돌하는 바람에 총 583명이 사망했다.[7] 홀수는 하네다 출발편, 짝수는 도착편이다.[8] 실제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고, 직원이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비행기와 관제탑의 통신 테스트 작업 중 더미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그냥 쓰기 편한 '0123'을 입력해서 발생한 문제로 밝혀졌다. 즉 아무 의미 없는 숫자였던것이다. 더미 데이터다 보니 비행 정보가 비정상적이었고 마침 시기도 오봉 직전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일본항공은 직원의 실수를 사과하고 향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직원을 교육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참고로 더미 데이터를 부여했던 실제 해당 항공기의 편명은 'JL712'[9] 일본은 1970년대에 항공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공급이 따라기지 못하는 상황이였다.[10] 보는 사람에 따라 껄끄럽거나 소름돋을 수도 있으니 사진을 볼 시 주의. 붉은색은 피가 아니라 도색이다.[11] 보강판을 대충 수리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정상적인 수리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리하였다.[12] 다른 예로 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 사건과, 파키스탄 국제항공 8303편 추락 사고영국해외항공 911편 추락 사고가 있다. 이쪽은 마지막 비행을 위해 이륙하는 장면 또는 복행하는 장면이 사진에 담겼다. 또한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도 마지막으로 본토에서 착륙하는 장면이 잡혔고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 비록 이착륙 장면은 아니지만 이 사고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어 최악의 항공사고라고 불리는 테네리페 참사도 충돌 몇 시간 전 두 비행기가 주기되어 있는 모습을 KLM 4805편 승객이 찍은 사진이 있다. SNS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사진도 잘 찍지 않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항공기 동호인들이 크게 늘어나 항공기가 찍히고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졌으며 SNS의 보급으로 굳이 항덕이 아니더라도 여행 인증을 위해 항공기 사진을 많이 공유하기에 드문 일이 아니다. 일례로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사고 당시에도 ‘내가 죽는다면 그 때 사라질 비행기는 이렇게 생겼어’라는 트윗과 함께 사고기의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13] 삿포로에서 돌아오던 중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14] 바로 위 사진 파일에는 "己(자기 기)"가 "巳(뱀 사)"로 나와있으나 오타이다. 다만 일본 웹사이트 내에서도 더러 발견되는 오타인 듯.[15] 이 사고 또한 18시에서 56분이 지난 18시 56분에 일어난 사고임을 생각해보면 뭔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16] 트랜스폰더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상태 번호. 이건 민항관제용 레이더에서 비행기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코드를 발신하는 장비. 이륙하기 전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4자리 번호를 장입한다. 항공기 식별 번호로 절대 주지 않는 코드 중 7500은 공중 납치(하이재킹), 7600은 무전기 고장, 7700은 기체의 고장이다.[17] 당시 도쿄 컨트롤에서는 나고야 공항까지 72마일(120km)정도 떨어져 있어 나고야에 비상착륙이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기장은 하네다에 착륙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하네다의 활주로가 나고야보다 더 길어서 그나마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18] 유압계통은 유체의 특성 덕에 작동한다. 유압에서 유압액이 사라지면 유압계통은 그냥 고철덩어리가 될 뿐이다. 더 이상 유압계통으로써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 한다. 전력계통을 예로 들 경우 회로가 직렬 구성일 경우 단 한가닥의 전선 혹은 전도체만 단선되어도 해당 회로계통은 무력화된다. 차가 고속도로에서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핸들과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과 비슷하다.[19] 통상용 3개, 비상용 1개로 구성된다.[20] 파손 직후에는 잠시 동안 항로 이탈 없이 잘 날았으나, 일본 시간으로 6시 25분 기준, 항로를 이탈하며 조종 불능이 되었다.[21] 사실 수직미익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미익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추락하지 않은것(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DHL 611편이 대표적 예시)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만약에 즉시 추락했다면 기체내에서 생존자가 나올확률은 사실상 0%고, 연료를 가득채운 보잉747이 도쿄도심에 떨어져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것이다.[22] 수직·수평꼬리, 오른쪽 주 날개가 기체에서 분리.[23] 분리된 객실 후부와 뒷날개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실 후부는 능선과의 충돌을 면하고, 경사면에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접촉하여 천천히 감속했다. 이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을 덜 받았다. 또,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객실 후부의 좌석에 앉아 있던 여성 4명은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은 즉사 혹은 거기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튿날 아침에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 사망했다.[24] 많은 부분이 해독불능으로 적혀 있으니 아래 영상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25] 원래 사고의 영상이나 음성 파일은 유족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므로 외부에 유출시키지 않으며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에서도 붕괴 당시 영상이 있지만 공개하지 않는다고 경찰이 못 박았다.[26] 아래가 해당 녹음자료이다.[27] 참고로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CVR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흘러 나오고 일본 경찰과 자위대가 NTSB의 조사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는 뉘앙스의 전개를 보여준다.[28] 교신 내용을 보고자 할 경우 HD 영상으로 전환 후 전체 화면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지막 ATC의 경우 CC버튼을 누르면 자막 확인이 가능하다.[29] 당시는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 이는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에서 중화항공의 정비불량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30] 앞좌석에 양 손을 짚고 머리 부분을 끌어안듯 숙여 전신을 긴장시키는 자세.[31] 당연히 요코타와도 점점 멀어진다. 요코타와 하네다는 같은 방향에 있었기 때문.[32] 그리고 경고음(Whoop Whoop Pull Up!)과 함께[33] 대략 추측해보면 앞 부분은 250~300G 정도고, 뒷 부분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34] 위 영상 CVR에서 추락 직전 들린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오른날개가 부딪히는 소리이다.[35] 기장 본인을 제외한 희생자 수[36] 과거에 한국에서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에서도 선장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생존한 것 때문에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언론을 통해 퍼지며 유가족에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선장은 도주는커녕 마지막까지 구조 요청을 하다가 사망했음이 밝혀졌으나 유가족들의 상처는 영원히 남았다.[37]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밤 동안 생존자들의 신음소리가 점점 사라져갔다고 한다고...[38] 당장 천안함 피격 사건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잠수부가 사망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무리한 구조활동의 결과물이다.[39] 당장 병 월급이 100만원도 안 되는 나라인 대한민국 육군조차 패스트로프, 레펠 훈련 한번에 2010년대 기준 30만원 수준의 생명수당이 나온다. 한번 탈 때마다 이렇게 주는데 당연히 위험하지 않으면 줄 이유도 없는 돈이다.[40] 당연하지만 해외에서는 사고의 경위가 파악되고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지면서 어떻게 유압을 다 잃고 30분을 버텼지? 식의 칭찬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일본 사회에서 기장의 명예 회복은 상당히 더뎠고 사고기의 블랙박스 녹음 파일이 유출되면서 유가족은 겨우 명예를 되찾게 된다. 더 소름돋는 사실은 사실 유출본은 이미 일본경찰 쪽에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이유로 삭제한지 오래였다. 만약 제보자가 따로 녹음한 사본이 없었다면 진실은 영원히 어둠속으로 묻혔을 수도 있다.[41] 당시 방사능이 검출된 이유는 123편이 RRW(저급 방사성 물질) 화물과 RRY(고급 방사성 물질) 화물을 운반중이었기 때문이다.사고 발생 전 지상 교신내역[42] 다만 미군의 제안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는 몰라도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 파악이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긴급구난 메뉴얼에 따르면 이러한 구조대 활동은 국지적인 재난보단 광역적인 인재 및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 재난에 효과를 더 발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같은 이유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한국 또한 미국과 러시아의 구조대 파견 제안을 거부한 바 있다.[43] 후술할 유언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이는 사고 발생부터 추락까지 30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44] 본 유서는 국내 도서 중, 아빠의 수첩에서 일부 내용이 각색되어 나온다. 참고로 아빠의 수첩 중, 아빠가 당한 사고는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를 모티브로 하였다.[45] 니혼게이자이신문 2010-08-10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속에 간직한지 25년..."[46] 야마사키 토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는데, 픽션이기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 유서는 그대로 나온다. 무라카미의 장녀인 미키는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하여,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강히 지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현재 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라고 한다.[47] 참고로 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포수로 활동했던 타케시타 모토아키도 고시엔에 참가한 아들을 응원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48] 사카모토 큐 항목에 언급된 '천국에 있는 내 아이에게'라는 드라마가 이 여성의 시점으로 전개된다.[49] 그런데 이 우승 때 커넬 샌더스의 저주 사건이 생겼고 그 이후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하고 있다.[50] 이 때문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잠시 1위를 내주면서 우승실패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상단에 적혔다시피 다시 의지를 불태워서 결국 우승에 성공했지만.일본어 위키백과에 기록된 나카노 하지무 항목에 따르면 한신 선수들이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동할 때 탔었던 비행기가 사고기였었다고 한다. 당시 후쿠오카에서 한신과 주니치가 경기를 했기에 한신 선수들이 이용했던 것. 위에 서술된 대로 사고기는 당일 사고 몇 시간 전 하네다~후쿠오카 노선에서 비행했다. 만약에 선수단이 탔을 때 사고가 났다면...어쩌면 야구판 뮌헨 비행기 참사샤페코엔시의 비극이 일어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51] 사고 터지고 얼마 안 있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원정경기 이동시 항공기 탑승을 재검토하겠다는 취지의 언론발표를 했다. 당시만 해도 신칸센 속도가 느려서(210km가 최대 속도였고 도쿄-오사카 구간은 3시간 걸렸다. 노조미는 당시 있지도 않았고 제일 빠른 게 히카리였다.)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52] 당시엔 군이었음.[53] 일본 항공은 이 엑스포의 스폰서 중 하나였다.[54] 여담으로 혼외자라고 한다. 유카와 아키히사는 영국에서 수잔느 베일리를 만날 당시 일본에 다른 부인이 있는 상태였는데, 수잔느 베일리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언니인 유카와 캐시, 유카와 다이아나 자매를 출산했다고 한다.[55] 본명은 요시다 유미코(吉田由美子)[56] 전옥자 씨와 두 아들의 묘는 현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묘역 가장자리에서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57] 물론 귀화한 재일교포나 혼혈은 제외한 수치.[58] 더 정확히 설명하면, 보잉의 수리 매뉴얼 상 두 면을 접합할 때 두 면 사이에 보강판을 덧대고, 보강판에 평행한 3줄의 리벳을 박아 위, 아래면 각각 두 줄의 리벳이 박혀야 한다.[59] 이렇게 되면 실런트 한 줄 만으로 압력을 지탱해야 한다![60] 산술적으로 사망자 520명으로 나누면 150만엔이지만 법적인 배상과는 별도다.[61] 유압 계통은 비행기의 방향 전환 장치인 엘리베이터, 러더 등을 조정하는 구동계이다. 자동차 수리점의 리프트나 포크레인의 팔을 보면 은색 막대가 달린 부품이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이게 유압 계통. 물리를 배우면 나오는 내용인데, 유압 계통을 달면 더 먼 거리를 이동하는 대신 힘을 줄일 수 있다. 파스칼의 원리 참조. 간단히 생각해 비행기 핸들의 파워 스티어링과 비슷한 것으로, 힘을 줄여준다. 하지만 자동차의 파워 스티어링은 없어도 파워 핸들로 극복할 수 있지만 비행기의 유압 계통이 고장난다면 아예 조종을 못 한다. 자동차로 따지면 핸들과 바퀴가 연결이 끊겨서 핸들을 아무리 돌려도 소용이 없는 상황. 결국 123편은 핸들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쓴 것이다. 747-400 전의 기종들은 완전 동력식 조종 장치라서 유압이 상실되면 그대로 끝이지만 747-400은 파워 어시스트라고 해서 케이블과 푸시 풀 로드의 백업으로 파일럿이 젖먹던 힘까지 내서 어떻게 해볼 수 있긴 하다. 또한 과거 KBS 스펀지에서 1962년 12월 27일 닛토항공의 오사카 발 니이하마행 그루먼 말라드기의 사례가 방송되었는데, 승객들의 오줌으로 상실된 유압을 살려 무사히 비상 착륙에 성공하였다. [62] 링크의 지면에서는 옆에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사고를 보도하고 있다.[63]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 아에로플로트 7425편 추락사고,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사고[64] 200명 이상 사망자 발생 사고를 기준으로 해서 저 중에는 빠졌지만 이베리아 항공 610편 추락사고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영국 항공 투어 28편 화재사고 또한 큰 사고였다.[65]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추락 사고, 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 사건, 에어 알제리 5017편 추락 사고, 에어아시아 8501편 추락 사고[66] 다만 2014년은 의외로 항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최악 수준은 아니었고, 이후 2015년, 2016년, 2017년은 사망자 수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항공기 승객 수와 운항편이 꾸준히 증가하는 걸 생각하면 항공기 안전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항공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72년이었고, 2위인 1973년을 이어 1985년은 3번째로 사망자가 많았다.[67] 멀리갈 필요 없이 이 사고 두 달전 있었던 도요타상사 사건의 주범이 살인당하는 모습과, 1년 뒤 일어난 오카다 유키코 자살모습도 모자이크 없이 보도해 논란이 일었다.[68] 라이벌 방송국더 베스트 텐이 유명해지자 이에 질세라 만든 가요 프로그램. 후에는 가요 톱텐(歌のトップテン)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회자도 토쿠미츠 카츠오, 이시노 마코로 교체했다.[69] 항공 관련 지식이 있다면 알겠지만, 항공기는 기체 식별번호와 편명이 따로따로다. 같은 편명이라도 다른 기체를 사용할 수도 있고, 왕복할 경우에 같은 기체를 사용하더라도 편명이 바뀐다.[70] 123편의 마지막 이륙 영상이 나온다.[71] 구조 작업이 조사 착오 및 추락 현장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추락 12시간 후에야 시작되어 추락 당시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다수가 죽고 4명만 살아남았다는 걸 포인트로 잡은 것 같다.[72] 군마지역의 신문사를 중심으로 해당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다.[73] 본명은 남경호이며 현재는 배우 박해진의 일본 활동 및 공연 기획 담당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