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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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실태 및 사례
3.1.1. 아랍에미리트
3.1.2. 모로코
3.1.3. 사우디아라비아
3.2. 비이슬람권 아프리카
3.4. 그 외 지역
3.5. 한국
3.5.1. 전근대
3.5.2. 근대
4. 여권(女權)
5. 환상과 현실
5.1. 정력 문제
5.2. 경제적 측면
5.2.1. 자녀 양육비, 결혼지참금 증가
5.2.2. 재산/유산의 평등한 분배
5.2.3. 세금 문제
5.3. 아내들 간의 평등 문제
5.4. 성비 문제
5.5. 여성들의 입장
5.6. 생물학적 관점
6. 현대 사회에서의 부활 가능성
7. 동물들의 경우
8. 각종 매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Polygyny[1]

한 명의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두는 결혼 형태.

일처다부제의 반대이다.


2. 기원[편집]


본래 인류는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를 병행하는 종이었다. 신분이 낮은 하층민은 일부일처제를 하지만 상류층은 일부다처제를 따르고 있었다. 신분 유지를 위해 상류층은 정략결혼이 보편적이어서 첩을 두는 것이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결혼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어느 쪽도 우세한지 명확하지 않다가, 최근 몇천년간 급격하게 일부일처가 우세해졌다. 왜냐하면 당장의 생존이 우선되는 환경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많은 자손을 퍼트리기에 유리한 반면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여, 환경의 변화에 따른 종의 멸종을 막는 역할을 한다. 즉 인간이 일부일처제를 주로 하게된 원인에는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수렵 채집 시대에는 뛰어난 사냥꾼이나 족장의 경우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고, 문명이 발현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시대의 지배자들은 못 해도 수 명, 심한 경우 수천 명에 달하는 하렘을 유지했다. 한국만 해도 수백 명의 후궁을 거느렸던 왕들은 물론이고, 양반들에게도 이 일상적이었고, 혼인하지 않고 여자 노비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가 도입된 이후 유럽 지역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주류였으나, 종교개혁 시기에 구약성경의 사례를 들며 일부다처제를 부활시키자고 주장하던 세력이 일부 있긴 했다. 뮌스터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거한 재세례파가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공인하고 실제 시행하기까지 했는데, 이들이 진압된 뒤로는 최소한 주류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주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한때 뉘른베르크에서 30년 전쟁의 여파로 성비가 무너지자 일부다처제를 인정했다는 설이 나돌아 영미권 웹에서도 쉽게 검색되지만 학자들은 이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뉘른베르크 칙령에 대한 설은 19세기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 최초 주장자가 근거로 했다고 주장하는 프랑코니아 회의록이란 게 존재 자체가 의심되고 있기 때문.

이슬람권은 일부다처제가 7세기 아랍에서 빈발했던 전쟁과 각종 사고로 가장이 죽은 경우, 가족의 아이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입양을 허가하지 않는 나라가 많다.

이렇게 인류의 보편적인 제도였던 일부다처제였지만 현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소한 명시적으로는 사라졌는데, 민주주의의 보급으로 권력이 다수의 손에 넘어간 까닭이 크다.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이득이 집중되는 일부다처제는 존속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있어도 살아남을까 말까인데, 일부일처제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생존이 보장된 환경에선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에 비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를 이룩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큰 마찰 없이 폐지되었다.

3. 실태 및 사례[편집]


현대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라진 형태로 몇몇 국가에만 남아 있다.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나라들 분포도

일반적인 이미지는 중동의 이슬람을 믿는 국가들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불교 국가인 미얀마스리랑카, 기독교 인구가 많거나 대부분인 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아프리카 나라들과 인도 등도 일부다처제를 인정 내지 관습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기니, 보스니아, 아제르바이잔, 알바니아, 터키튀니지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다만 여기도 시골로 가면 볼 수 있으나, 정부기관이 알면 단속거리라고 한다.

이혼이 일상적인 국가들, 특히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이혼을 통해 약한 형태의 일부다처제를 이룬다는 주장도 있다. 능력이 있는 남자는 한 번 이혼하고 나서도 다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이 통계적으로 더 많기 때문. 물론 마이너한 주장이고 엄밀히 정의하면 일부다처제가 아니고, 난혼에 더 가깝다.[2]


3.1. 이슬람권[편집]


쿠란에 따르면 4명까지 두는 것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정통 교리에 따르면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일뿐이고 '권장'하지는 않는다.

초기 이슬람에서 아내를 4명까지 둔다고 하자 당시 귀족들이나 부자들은 "겨우 4명이냐?"라며 불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아랍에서는 수십여명의 아내를 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은 거친 사막환경에서 남자들이 전쟁으로 픽픽 죽어나가는 시대였기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이슬람권의 초창기 일부다처제는 전쟁으로 과부가 돼서 먹고 살 길이 도저히 없던 과부들을 거둬서 먹고 살게끔 할려고 했던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그 시대의 사회복지인 셈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율법에 맞춰 하려면 남자가 생각보다 많은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샤리아에서 남성은 결혼을 원하는 여성에게 일정 이상의 자금을 주어야만 한다. 샤리아의 관점에서 결혼은 '신성한 계약관계'이며 반드시 신랑과 신부 본인의 자발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슬람의 결혼은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신부측에게 지참금을 지급함으로써 유효화된다. 또한 쿠란에는 신부의 지참금은 오로지 신부만의 것으로 남편이나 신부측 집안 사람들이 맘대로 운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남편과 아내의 사유재산권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3] 결과적으로 아내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지출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지참금은 남편의 3~4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현금 혹은 현물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인데, 아내가 4명이라고 치면 최대 16년치 연봉을 일시불로 지급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슬람권에서 율법상 보장된 권리를 막을 수는 없으니 실질적으로 못 하게 한 것이다.

또한 아내를 더 맞으려면 기존 아내들의 동의가 필요하고, 남편은 모든 아내들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평등하게 대우할 율법상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 만약 아내들 중 누구 하나만을 편애하거나 반대로 누구 하나만을 홀대하거나 했다고 아내들이 느낄 경우 이는 명백한 이혼사유이며, 남편측 과실이기 때문에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줘야 한다. 사람 감정이라는게 딱딱 계량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지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쿠란에는 "장담하건대, 이거 절대 못 지킨다. 그러니까 아예 하지마라!"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어도 이걸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남자는 극히 적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실제 통계를 보면, 1907년 이집트에서는 6%의 남성이 두명 이상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이 비율은 20세기 후반이 되면 2.8%(1992)까지 떨어졌다. 참고로 인근의 알제리는 1.0%(1998), 모로코는 1.1%(1994).# 맨시티 구단주로 천하의 기름수저 만수르마음만 먹으면 여자를 수십명 이상 거느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아내는 고작 2명 뿐이며 그것도 두바이 왕족과 정략결혼으로 맺은 사이라고 알려져있다.

물론 율법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해석해서 "4명? 닥쳐, 내 마음대로 결혼할거야!"라는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2016년 나이지리아에 사는 모하메드 벨로 아부바카르(무려 92세!)는 나이지리아 현지 매체인 뱅가드와 인터뷰에서 "아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 성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아내를 늘려갈 것임을 밝혔다. 그는 무려 아내는 97명이지만, 이혼한 아내 10명을 포함하면 결혼식만 107번 치렀다. 슬하 자식은 185명이다. 무슬림이라고 하지만 이슬람 율법은 4명의 아내까지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탓에 2008년 이슬람 지역교구로부터 4명의 아내를 두고 나머지 아내와는 이혼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는데, 대부분 아내들이 자의로 결혼했다는 탄원을 올리면서 무마됐다. 물론, 나이지리아 이슬람 성직자들은 여전히 비난하면서 93명의 아내를 포기하고 율법대로 4명만 남겨두라고 반발하고 있다.

90년대에는 카자흐스탄에선 사이비 이슬람 신교 단체가 쿠란에선 아내를 4명만 두라고 했으니 그 다음 숫자부터는 다르게 여긴다면서 5번째 딸을 아내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다가 당연히 근친상간으로 쿠란을 모독한다는 기존 이슬람계의 반발을 샀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박살낸 적도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무슬림 국가들은 거의 1세기를 공산주의 하 소련의 가맹국으로 살아온 만큼 보다 세속적이고 개방적일텐데 저런 주장이 통할지도 의문이다.

무슬림들의 일부다처제에 대한 인식은 지역마다 크게 다른데, 보스니아(85%)나 터키(73%), 카자흐스탄(62%) 등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일부다처제에 대해 "부도덕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압도적이었으나, 니제르(87%), 세네갈(86%)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용납 가능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요르단이나 이집트 등 중동에서는 찬성이 반대보다 높았으나, "도덕과 상관없는 문제다"라는 응답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성별로 봤을 땐 남성이 여성보다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이었으며, 그 격차는 파키스탄에서는 29%p에 달했다.#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와 옆나라 말레이시아(무슬림 한정)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지만, 일부다처제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서양과 일본에서 사촌간 결혼이 합법이지만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것처럼 아내가 2명 이상인 정치인은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2007년에는 인니의 여성단체가 부인이 2명인 국회의원들의 명단을 공개해 망신을 주기도 했다.로이터 기사.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첫번째 아내가 동의하거나 장애 혹은 불임이있는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아서 할 수 있다. 허가를 받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두 여성과 동시에 결혼한 인니 20세 남성의 사연

3.1.1. 아랍에미리트[편집]


아랍에미리트에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현지인 남편이 동의도 없이 2번째 아내를 맞으려 했다가 친형들에게 두들겨 맞고 친가에서 2번째 결혼은 없었던 일로 만든 바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아내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둘째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무효이기도 하지만, 남편이 결혼할 때 쿠란을 들고 나와서 알라에게 가문의 명예를 걸고 일부일처를 약속하는 비디오를 남겼는데, 이 상태에서 두 번째 아내를 들이면 알라에 대고 가문의 이름을 건 약속을 어긴 것이 되니 이슬람권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의 명예'와 '알라에게 한 맹세'를 한꺼번에 건드린 꼴이기 때문[4]. 그 남편은 첫째 부인까지 갈 것도 없이 자기 형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2번째 결혼을 무효로 하고, 상대 집안에 결혼 무효에 대한 보상금도 따로 내줘야 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자기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온 동네에 알리고 다녀야 했는데, 갑자기 결혼이 깨졌으니 혹시 둘째 아내가 될 뻔했던 여자 쪽에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루머라도 퍼지면 애꿎은 여자 하나의 혼삿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입소문이 엄청 퍼져 신나게 까이며 아주 개망신을 두둑히 당했기에 남편은 다시는 2번째 아내 들인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있단다. 그 미국인 아내는 20년도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그걸 이야기하면서 남편을 놀린다고 했다.

무슬림이라고 무턱대고 일부다처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무슬림은 한 아내와만 평생 지낸다. 두 아내를 둔 어떤 중동인은 집안의 결정으로 두 아내를 두었는데, 아내가 1명도 아닌 ½ 명이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일부일처라도 마누라 등쌀에 돌아버릴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2명은 오죽할까.


3.1.2. 모로코[편집]


모로코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까다롭게 허용했다. 모로코에서 법적으로 2번째 아내를 들이자면 첫 번째 아내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에 법정에서 최종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남편의 수입 여부, 첫번째 아내를 협박했는지 여부 같은 걸 법정에서 자세하게 조사한 다음에서야 허락한다. 그런데 이게 1년 이상이 걸리고 당연히 돈이나 여러 모로 깨지니, 웬만한 부자 아니라면 어림도 없다. 당연히 아내가 3번째 아내를 받아들일때도 똑같이 이 모든 과정을 기존 두 아내를 상대로 되풀이한 다음 역시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모로코에선 일부다처제는 정말 부자거나 권력이 빵빵한 사람이 아니라면 구경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덤으로, 부자이더라도 왕실 눈치를 봐서 그냥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국왕인 모하메드 6세부터 귀족이나 명문가 딸이 아닌 여성과 결혼하면서 공식적으로 "알라 앞에서 맹세하거늘 짐은 오로지 그녀만을 아내로 받아들일뿐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현재까지도 아내를 한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법하다. 게다가 왕이 대놓고 알라 앞에서 맹세했다고 하니, 현 아내와 사별하지 않는 한 다른 아내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왕족은 폐하께서도 알라의 이름을 들고 맹세하셨는데 다른 왕족이 눈치없이 아내를 여럿 두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느냐며 그래서 자신도 아내를 하나만 두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3.1.3. 사우디아라비아[편집]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 왕이라든지 여러 왕들이 아내를 수십여 명 두었는데, 물론 공식적으로 어디까지나 4명까지만 허용하기에 4명이 넘어가면 기존의 아내와는 이혼하고 새 아내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아내를 늘린다. 물론 서류상으로만 이혼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아내로 취급받으며 같이 사는 식이다.

현대의 사건 사례로는, 두 아내를 둔 어느 부자가 3번째 아내를 두 아내 몰래 맞이하려다가 두 아내가 이걸 알고 유리컵과 병으로 남편 얼굴을 까서 수십 바늘을 꿰매게 한 실화까지 있다. 사우디 법원은 남편의 잘못을 탓하며 두 아내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하늘을 찌르는 동네인데도! 사실 이 두 아내의 친정집도 꽤 부자였던 데다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되 기존 아내(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등의 안전장치가 있는 이슬람권이라 가능했던 일.[5] 그 밖에 파키스탄에서도 아내가 거부하는데도 새로운 아내를 계속 맞이하려고 강요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어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렸지만 역시 무죄로 판결난 실화도 있다. 그만큼 일부다처제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3.2. 비이슬람권 아프리카[편집]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아프리카에선 이슬람이 아니라도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나라가 많다. 그 예로 남아공 대통령(2009년 취임)인 제이콥 주마는 2012년 시점에서 아내가 4명이다[6]. 2010년엔 부인이 3명이었는데, 이 때 영부인 자리에 아내 3명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남아공에선 이슬람은 극소수이며 주마도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 법적으로는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지 않는데, 관습법적으로는 허용되기에 큰 문제로 삼지 않는 듯하다.

이처럼 아프리카 여러 부족들은 부자이거나 족장같은 권력자는 아내를 무한으로 둘 수 있기에 자이르(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있던 바쿠바 족 자치구역, 자칭 쿠바 왕국(Kuba kingdom) 왕이던 르켕 왕이 현대에 보기 드물게 진짜 하렘을 이룩한 적이 있는데, 60년대만 해도 르켕 왕은 아내를 무려 800명씩이나 둔 적까지 있다. 그는 식민지 시절에는 벨기에 측이 그냥 얌전히 바쿠바족을 다스리며 대들지 않으면 매달 돈도 두둑히 주고 당신의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두면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했다. 아들딸이 무려 2천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벨기에로부터 이 나라가 독립한 60년대 들어서 자이르 정부가 이건 해도 너무하다고 그 부족마을로 가서 지나친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던 일[7]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하진 못해도 여전히 엄청나게 아내를 두는 경우가 있는데, 2000년대 중반에 케냐에서 마사이족 마을로 간 한국인 아내와 프랑스인 남편[8]은 아내를 30명이 넘게 둔 마을 촌장을 봤다고 한다. 한술 더 떠 촌장의 아들들도 각자 아내를 10여명씩 두고 있는데 그나마 촌장인 아버지[9]가 가진 아내의 수를 넘기면 안 된다는 법칙이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도 거저 아무나 아내를 저렇게 가지는 게 아니다. 주로 를 비롯한 가축이나 생필품을 지참금으로 처가에 내줘야 하는데, 아내의 외모와 여러가지를 따져서 지급할 지참금이 달라진다고 한다.[10]

여행자가 "보통 아내에게 주는 소가 몇 마리냐"고 묻자, "마지막에 맞이한 아내는 꽤 미인인데 소 30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마을 보통 서민들은 소를 보통 몇 마리 수준으로 기르고 있었고, 촌장의 집안은 2천 마리가 넘는 소를 가지고 있었단다.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가 지내던 남수단도 마찬가지라서 남수단 다수 기독교인들도 이슬람을 욕하더라도 일부다처제는 욕하지 않고 당연시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교리가 아닌 전통풍습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덕분에 부족장이나 잘 사는 부자들은 아내를 여럿 데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아내들 역시 지참금으로 받아먹은 신세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아센투스 오그웰라 아쿠쿠는 100명의 아내와 일부다처 관계를 유지하며 210명의 아이를 두었다.

3.3. 유대교팔레스타인[편집]


성경의 구약에서도 일부다처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카인의 아들 에돔이 세운 에돔에서의 일부다처제가 최초의 일부다처제고 라멕도 아내가 두명이다 아브라함은 3명 야곱은 4명이다 일단 솔로몬만 해도 아내가 700명에 첩 300명을 데리고 있었다. 다만 이건 솔로몬이 행했던 외교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기보다는 이웃 나라의 왕족 및 귀족들과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을 자신의 속국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11]

이렇듯 구약성경에 묘사된 고대 유대교 시절에는 이스라엘 지방에서도 일부다처제가 있었고, 중세 때도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섞여 유지되다가, 서기 11세기에 프랑스의 대 랍비인 게르솜 유다가 유대교에 일부일처제를 도입하자는 교리를 공표한 이래로 대다수의 주류 유대교에서는 정통파 진보파를 가리지 않고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다.

다만 이런 동네도 전쟁에 휘말리고 남성이 감소하면 오히려 제도가 사라지거나 약화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의 경우 여성이 간통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경멸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12] 남성이 극히 부족하고 여성이 이거 저거 해야만 가정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의 요구를 무시하다가는 공동체가 망하기 때문이다.[13]

성비 문제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위너들을 위한 정책 or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로, 여성은 좀 더 좋은 조건의 남성을 '선택'할 수있고 '선택'받지 못한 남성들은 자연히 도태되기 때문. 물론 선택받지 못한 남자들이 반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예: 출산이 불가능하다거나) 여자 하나를 데리고 사는 일처다부를 받아들이는 수도 있다.


3.4. 그 외 지역[편집]


홍콩에서는 영국령 홍콩 시절이었던 1970년대까지 홍콩 거주 중국인들에 한해서 합법이었다.

티베트와 같은 지방, 특히 유명한 저서 <오래 된 미래>에서도 나온 인도라다크에선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를 모두 허용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두 부인 사이에서 시달리던 부유한 남자가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유언장 내용은 두 부인 중 누구도 장례식에 못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살 실패 후 병원에서는 두 부인에게 연락해 남편 데리고 가라고 했다나.

부탄왕족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 단 현 부탄 국왕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은 평생 왕비제선 페마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선언해서 당분간 일부다처제를 볼 일을 없을 듯하다. 오히려 선대 국왕인 지그메 싱계 왕축이 위엄이 넘치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왕비가 4명이었다. 그냥 4명도 아니라 이 4명 모두 다 자매다!!이유는 선대 국왕이 결혼 전에 4자매 중에 맏언니를 사랑했고 결혼하려고 했는데[14], 문제가 있었으니, 저 맏언니가 자신의 여동생 3명도 함께 아내로 안 받아들이면 자기도 결혼 안 하겠다고 난리를 피워 결국 그 고집에 져서 어쩔 수 없이 4명을 한꺼번에 아내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나머지 3명의 아내들과도 사이가 좋고 사랑해서 현재까지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 현 국왕 남기엘 왕축은 3번째 왕후의 아들인데 나머지 3명의 왕후와 배다른 형제자매들 모두 남기엘 왕축의 승계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고.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1890년대까지 일부 성도들을 상대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887년, 미국에서 일부다처제 시행을 금지하고 이를 지원하는 법인을 해산시키는 에드먼드-터커법이 시행되고 1890년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 관련 법인의 재산 압류를 승인하자 교회회장의 결정으로 일부다처제를 폐지하였다.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기 이전에 쓰여진 소설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주홍색 연구쥘 베른80일간의 세계일주[15]에서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일부다처제 폐지 이후 교회의 새로운 정책에 반발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파문조치를 당했으며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한 교회 중 현재 미국 사회에서 가장 물의를 빚는 집단은 FLDS가 있고, 이 교회의 지도자이자 아동 성범죄자인 워렌 제프스는 대저택에서 50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반면에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지만 사회적으로 별다른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분파도 여럿 있다. 이런 분파는 유타주에서 자기들끼리 작은 신앙촌을 형성하여 조용히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공권력도 일부다처제 시행하는 것 외에는 법을 어기지 않는 분파는 크게 터치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이런 온건 분파에서 FLDS 피해자들을 지원하기도 하며, FLDS 피해자들과 교단의 막장 짓거리에 학을 떼고 나왔지만 신앙은 유지하고 싶어하는 교인들이 온건 분파로 가 여전히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국의 경우,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지만, 의외로 하류층 남자가 부인을 여러 명 두는 경우가 많다. 육아 지원을 최대한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고. 전형적인 복지정책의 부작용(부정수급)이 낳은 결과이다.

파라과이의 경우, 삼국동맹전쟁의 참화로 인해 극심한 여초 국가가 되자[16], 19세기 내내 일부다처제를 유지해서 인구 수를 늘리려고 했다. 물론 이쪽은 자국의 남자들의 상당수가 죽어서 성비가 처참하게 무너진 탓에, 여자들이 길가던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강간하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긴 했다.

러시아의 경우 일부다처제가 불법이고, 여러 명의 처를 주민등록 기록에 등록할 수 없고 사실혼 관게도 인정되지 아니하나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처벌하지는 않는다. 물론 러시아 자체가 미혼모나 과부가 너무 만연한 사회고, 체첸무슬림이 많은 북캅카스 지역은 권력자들이 아내를 여러 명씩 두는 등 전혀 지키지 않는다.

3.5. 한국[편집]



3.5.1. 전근대[편집]


한국의 경우에도 과거에는 지위가 높을 수록 많은 여자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정실부인은 1명이 권장되었다. 유교 경전에선 은 1처에 9첩, 대부(=벼슬아치 정도)는 1처 2첩, 선비는 1처 1첩. 즉 왕은 10명, 대부는 3명, 선비는 2명의 여자를 둘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를 부계혈통으로 이어야 하는 특수한 신분인 왕은 제외하면[17]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정실'을 1명 두었고 그 외엔 이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일부일처다첩제' 혹은 줄여서 '처첩제' 라고 말한다. 간혹 고려 때는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서희 등 고려 초중기 인물들도 서자가 있었음을 보면 어떤식이었든 엄밀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8]

한국에서는 '정실'이 여럿 있기가 힘든 구조였는데, 우선 전통적으로 처가와 사위 간 연대가 강했다. 부부별성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장인어른의 파워가 강했다는 의미다. 결혼 후 여자가 출가외인이 되는 것은 최근 300년 정도 일이고, 그 전엔 천 년도 넘게 차라리 데릴사위제에 가까웠다. 중국이나 중동 등등이 일단 결혼하면 딸은 거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하고 시집가서 남편이 죽으면 끈 떨어진 나룻배가 되는 것과 다르다. 남자 입장에선 결혼하면 최소 몇 년은 처가에서 살고, 이게 길어져서 처부모 3년상 모시는 일도 허다했다. 장인어른이 고위관직에 있으면 사위 자격으로 음서의 혜택을 볼 수도 있고, 재산상으로도 본가에서 물려받는 재산 못지않게 (아들 딸 구분없이 균분상속하므로) 처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내를 통해 상속받는 재산도 비중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정실'이 여럿이 되기는 힘들다. 상식적으로 일단 결혼하면 'OO가의 사위'란 정체성이 상당히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동등한 정실부인을 다시 맞이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거다.

그러나 여성의 권한이 커서 위와 같이 된 것이 아니기에, 은 있었다. 즉 장가든 후 메인 주거지가 처가가 되는 건 맞는데, 실질적으로 여자는 친정에서 계속 살고, 남자는 처가와 본가를 오가면서 산다. 이 대표적인 표본이 서울강릉을 오락가락했던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같은 사람[19]. 그리고 흔히 이럴 때 본가 근처에는 첩을 두고 사는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상류층 남자의 생활상이었다. 소위 현지처(...)의 전통은 긴 역사 면면한 셈이다.

고려 말 충렬왕 때, 오랜 여몽전쟁으로 남녀 성비가 무너졌다든지 원래 해동 땅은 음기가 세다든지(...) 하는 이유를 들면서 박유의 건의로 일부일처다첩제를 시행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제안을 한 대신 박유를 두고 도성 여인들이 "을 두자는 자가 저 요망한 늙은이다!!!!"라며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든지, 그 소식을 들은 여인들이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는 시위를 했다고도 고려사에 전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는데, 일부 다처를 일부 일처 다첩제로 바꾸어 적서의 구분을 두려한 탓에 나온 반발이라고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이미 고려 말에는 왕이 아닌 경우에도 일부다처를 한 경우가 확인된다. 특히 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람의 경우 경처와 향처라 하여 고향과 개경에 처를 따로 두었다.[20] 종래에는 이를 고려 시대 전반의 풍습으로 확대해석했으나, 지금은 전란이 계속되어 남녀성비가 무너진 고려 말엽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주류이다. 사실 이성계중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저 관습이 고려시대의 일반적 관습이겠거니라고 생각한 것도 크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경외(京外)에 양처(兩妻)를 함께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도로 선처(先妻)와 합한 자도 있으며, 먼저 취첩(娶妾)하고 뒤에 취처(娶妻) 한 자도 있고, 먼저 취처하고 뒤에 취첩한 자도 있으며, 또 일시(一時)에 삼처(三妻)를 함께 둔 자도 있어서, 그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게 되니 쟁송(爭訟)이 다단(多端)하였으나, 그 때에는 처(妻)를 두고 취처(娶妻)함을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3일

당장 조선왕조실록에 해당 부분이 언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시기를 고려시대 말기의 혼란상으로 제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처를 두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맥락상으로 다처를 허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금지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일부일처가 당연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경처와 향처 부분이 고려 말이라는 증거가 하나 더 있는데, 중혼의 결과 양처, 혹은 심하게 3처까지 둔 사람이 나오면서, 그 자손들이 모두 적자가 되었다. 이 부분은 조선시대에 일부일처 다첩제가 되면서 누가 첩이 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당장 고려 말부터 재산분할 관련으로 소송으로 시작된다. 본관이 있는 향처의 자손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경처는 개경에 거주하는 유력인사들과 정략 결혼을 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이 때문에 경처의 지위가 오히려 높았고, 이에 대해서 향처의 자손들이 반발하는 양상이었다. 사실상 왕자의 난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산으로 둔 유산싸움인 것이다.

조선 태종 이후로 왕도 한 명의 왕비만 둘 수 있게 되면서 일부일처다첩제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아직도 남았다고 한다. 조선 중순, 숙종 때까지 제주도 부유층들은 일부다처제를 그대로 유지해 당시 제주목사이자 청백리로도 유명한 이형상이 금지시킬 정도였다.


3.5.2. 근대[편집]


그러다 구한말, 개화기 이후 처첩제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일제 식민지 체제는 처첩제의 실질적 철폐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관습적으로 처첩이 잔존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은 초대 헌법 이래 헌법에 혼인의 양성 평등을 규정함으로써 처첩제를 부정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말 그대로 아내남편이 1명씩만 있는 일부일처제만 인정한다. 특히 국가재건최고회의박정희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공무원 축첩 근절에 칼을 빼들었고 축첩이 적발된 공무원은 가차없이 파면했다. 대한민국 국군 간부들의 경우 일부다처제, 내지는 축첩행위를 하면 현역부적합심사 대상이 된다. 1950년대에 일명 하늘집 유아 학대 사건이라 불리는, 이종국 육군 준장이 첩과 짜고 전처의 딸을 굶겨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을 계기로 이후 첩을 둔 군간부에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다.

또한 첩 제도와는 별개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도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부인을 2명 두는 경우가 있었다. 어렸을 때 가문에서 정해줘서 결혼하게 된 아내는 고향집에 두고, 도시에서 새롭게 본인이 좋아하는 '신여성'을 만나서 연애하여 결혼하는 형태. 물론 공식적인 제도는 아니다. 결혼의 개념이 집안 간의 결혼에서 개개인의 연애 결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인 면모이다.

90년대 후반 토요미스테리 극장에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6.25 전쟁실향민 남자가 피난 도중에 부인과 아이를 잃고 몇년 후에 재혼을 했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부인과 아이를 다시 만났다. 처음엔 기뻐하다가 이내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두 집 살림을 하다가 결국은 들통났다. 이것도 황당한 경위로 들통나게 되는데, 남한 쪽 부인과 북한 쪽 부인의 팬티 취향이 달랐던지라 두 집을 오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급한 김에 골목길에서 팬티를 갈아입게 되었는데 마침 순찰중이던 경찰에게 걸려서 풍기문란죄로 잡혀가는 바람에 두 집 살림이 들통났던 것.[21] 어찌어찌 해서 두 부인과 자식들을 모두 끼고 살게 되지만, 틈만 나면 마누라들이 머리 끄댕이 잡고 싸워서 문제였다. 그러다 두 부인들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나서였는지 대폿집 마담과 바람이 났는데(...),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부인들이 남편과 마담을 둘 다 쥐어 팼다.[22]

남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본인은 죽을 때까지 "하나도 안 좋아..."라고 했다고.[23] 얼마나 시달렸는지, 죽은 이유도[24] 2명의 부인이 화투를 치다 싸움이 붙은 것을 말리던 와중에 풍이 와서 사망한 것. 심지어 죽은 뒤에도 자신의 옆에 묻힌 부인들이 싸우는 바람에 결국 자식들 꿈에 유령으로 나타나서는 마누라들 무덤과 좀 떨어진 위치에 무덤을 이장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고자 이장을 결정했는데, 두 어머니의 무덤과 떨어진 위치에 어느 한 쪽으로 1mm라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25]

덧붙이자면,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참 적절하게도(?) 아버지는 DMZ였다. 당시엔 행정 시스템도 빈틈이 매우 많았고, 전쟁통에 사람 행방을 모르게 되는 일이야 흔하다 보니, 재혼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담과 바람 핀 건 죽도록 맞아도 모자란 일이라 실드조차 불가능하다.중립국으로 간 게지[26]

무한도전 명수는 12살에서 12살로 돌아간 멤버들이 각자 자기 집에 뭐 있다, 뭐 있다 자랑을 늘어놓는 와중에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다 이렇게 가족 자랑으로 이어졌는데, 이 굉장히 담담하게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두 분이셨어"라는 멘트를 날려서 멤버들 입을 다물게 하기도 했다.[27] 길의 말로는 어떤 할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어린 마음에 고민이 많이 되었다고.[28] 특별히 부끄럽다거나 숨길 생각은 없는지 나중에 무한상사 뮤지컬편에서도 한 번 더 써먹는다.#


4. 여권(女權)[편집]


결국 부유층 남성은 여러 명, 중산층은 1~2명, 하위층은 아예 한 명과도 결혼하지 못할 수 있다. 즉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아내의 수는 남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일단 어떤 사회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한다고 치면, 그 사회는 곧바로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안정시킬 방법부터 고민하게 된다. 여러 아내, 그리고 그들의 배다른 자식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 있기 때문.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문화권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어 왔다. 다음은 그 중 몇몇 방법을 열거한 것이다.
  • 자매 (?!)가 아닌 공동 아내들은 거처를 분리시키되, 자매인 아내들은 함께 지낼 수 있게 한다.
  • 각 아내들은 모두 부부관계와 경제권, 재산의 소유권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 가장 연장자인 아내가 가정 내에서 특별한 권위 또는 특권을 갖는 것을 인정한다.
    • 이와 함께, 어린 아내를 편애하지 않게 하는 관습이 동시에 시도될 수 있다.[29]
그러나 정책적 관점에서 볼 때 어찌되었건 간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는 나라들, 근대화가 덜 이루어진 국가들에서 여권을 제대로 보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각 부인을 공평하게 사랑하라는 계율[30]은 그저 계율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 배우자가 '다수'가 됨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역시 상당히 떨어진다. 배우자를 다수 거느리는 경우 각 아내를 '스테이터스'나 '재산'으로 볼 수는 있을지언정 인격적인 동반자나 반려로 여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일부다처제 등에 대해 관대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는 아직도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자살해야 하는 등 고대 악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일부다처제와 연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나, 여권 경시 풍조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


5. 환상과 현실[편집]


암사자 "무리들"을 피하는 숫사자.영상
예나 지금이나 일부다처제가 존재하기는 해서 그렇다 치지만, 은근히 기록이 많은 덕분에 에로게 등에서는 남자의 로망으로 포장되어 나오고 오덕뿐만 아니라 뭇 남성들 중에도 이를 동경하는 사람이 깨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고 영원한 장밋빛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 허용이 되는 나라에서도 처를 여럿 두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 있다고 해도 보통 권력층이나 부유층 정도나 가능하고, 가능하더라도 여러 피곤한 일 때문에 선택하지 않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후술하겠지만 특히 기존 본처[31] 및 처가와의 갈등, 후계자 선정 및 재산 상속 문제, 여론 등의 이유로. 따라서 혹자는 남성들이 일부다처제 제도를 선호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정작 결혼한 사람들의 의견은 다르다. 사람이 24시간 섹스만 하고 살 순 없기 때문이다.


5.1. 정력 문제[편집]


제일 중요한 문제. 부부간의 원만한 성생활은 혼인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데, 일부다처제가 되면 남자쪽의 체력 소모가 단순 계산상으로도 최소한 2배이상 심해지게 된다. 한국이 일부다처제는 아니지만, 대법원 판결에서도 성생활을 혼인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판단했을 정도로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2010므1140) 특히 일부다처제는 인정하지만 반드시 모든 부인을 동등하게 대할 것을 명시한 이슬람교권에서는 모든 아내에게 차별없는 성생활이 의무이다. 한 여자에게 무엇을 해주는 순간 나머지 여자들에게도 동등하게 대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게 제대로 안 된다? 남편을 착즙해서 죽여버리는 결말도 존재한다. 이슬람권 남성들이 실질적으로 일부일처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정력왕이 아니다.


5.2. 경제적 측면[편집]



5.2.1. 자녀 양육비, 결혼지참금 증가[편집]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사회 진출을 생각하거나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이 독립해 사는 것만 해도 상당히 많은 지출을 요구한다. 일부다처제 국가들의 특성상 가장이 가정을 부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 처에 자식 둘만 딸려도 가장은 자신의 취미에 들일 금액을 가급적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부분에서 넉넉하게 돈을 쓰기도 힘들고 거의 대부분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하고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와 마음을 써야 하는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처가 넷에 1인당 자식을 2명만 둔다고 생각 해보자. 부양가족이 단숨에 12명이 된다. 게다가 그 12명이 각각 3명씩 거주할 수 있는 집을 도합 4채 지어야 한다.

사실 중동의 일부다처제 국가도 진짜로 일부다처를 두는 남자는 갑부밖에 없다. 오사마 빈 라덴만 하더라도 52남매 중 17번째로 태어난 아들이다. 이는 라덴 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왕실과 큰 관련이 있을 정도로 조만장자 재산을 가지고 권력으로 오랫동안 사우디 왕가와 연루된 명문귀족가 대갑부였기 가능했던 일이다. 오사마 빈 라덴 항목에 나오듯이 라덴 일가는 그를 절연하고 호적에서 지워버렸다. 아무튼, 그 정도 갑부가 아닌 이상 일부다처는 어지간하면 안 한다.

감당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그 부를 자수성가를 통해 획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잘난 집 자녀의 배우자가 되길 꿈꾸지 배우자를 여러 명 두는 쓸데없는 짓은 안 할 것이다. 대부분은 부모의 증여 혹은 상속으로 부를 이룩하기 때문에 당연히 총각 시절에 본인 집안과 엇비슷한 집안의 딸과 정략결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이 부를 갖춘 특권층이라 해도 본처를 무시하며 여럿 부인을 거느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당연히 그 부모는 자신들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반대할 것이다. 그래서 보통 배우자를 여러 명 둔 사람이 노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배우자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도 불가능해져 오히려 일부일처제보다 자녀 양육비가 적게 들 수도 있다.


5.2.2. 재산/유산의 평등한 분배[편집]


일부다처제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대체로 아내들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아무리 사정이 안 좋아도 집은 무조건 따로 마련해 주는 게 보편적이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국가에서도 아내를 여럿 맞이 한다는 건, 한 마디로 부의 상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꾸란에서도 '정 할거면 이런 특수한 상황이라면 이까지 해도 되겠지만, 대신 모든 아내에게 같은 대우를 해 줘야 하고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 떫으면 그냥 하지 마라. '라고 적혀 있다.[32] 즉, 중동식의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율법이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중동 풍습 때문에 대놓고 금지는 못하지만, 지양할 풍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기존 아내의 허락[33]을 받아야 하고 신 앞에서 차별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해야 한다. 물론 근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은 국가일 경우에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형해화된 계율로 다루는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여성의 인권은 시궁창에 처박힌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도 부자거나 권력자 아니라면 일부다처제는 이 항목 여러 예시에서 보듯이 어림도 없다.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를 주로 돕던 한국인 목사가 쓴 책에 이런 예시도 나왔었다. 방글라데시인 노동자에 대해 쓴 글인데 그 외노자는 종교야 이슬람이지만 한국 교회에 나와 종교적 토론도 하고 목사와 이야기도 자주 하며 목사나 교인들이랑 사이도 좋았다. 한국말도 잘하고 적응 잘하던 사람이지만 공장일을 하다가 크게 다쳐 그야말로 죽을뻔했다. 병원비는 자신이 좀 벌어둔 돈을 통해 썼지만 이젠 일도 못하고 조국으도 돌아가자면 나나 아내와 다섯 아이들이 다 굶어죽는다고 그가 슬퍼하자 목사와 교인들이 열심히 나서서 돈도 모아주고 해서 수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모아 다 줬다고 한다. 무척 기뻐하면서 그 노동자는 이 돈이면 조국에서 그 10배가 넘는 값어치이니 가게를 해서라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헌데....감동적인 이야기에 초를 치던 게 ...그 노동자는 "그래, 먹고 살 걱정도 없어지고 여유롭게 되었으니 조국에 가서 2번째 아내도 맞이해야겠어요"라고 말하는 통에 다들 무안해졌다고. 물론, 모아둔 돈이 현지에서 꽤 큰 돈이라 둘째 아내를 맞이할 경제력이 된 셈이지만, 졸지에 현대의 한국 문화와는 맞지 않는 일부다처제를 후원해준 셈이기도 하니 목사나 교인들 기분은 꺼림칙했을 듯 하다.

간혹 2번째로 맞은 부인이 남편의 가정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케이스도 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과거에는 밥집을 운영하는 여자가 손님으로 온 남성과 눈이 맞는 경우가 있었는데, 밥집을 운영해서 번 돈으로 본처 자식들까지 부양한 사례도 간혹 있었다고.

내전으로 성비가 파괴된 에리트리아에서는 젊은 남성에게 강제로 일부이처를 강요하려다가 남성들의 반발로 취소된 적이 있다. "한 여자와 그에 딸린 애들 먹여 살리기도 벅찬 상황에서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이냐, 이건 총맞아 죽냐 처자 먹여살리다 등골휘어 죽냐 선택하라는 말이냐"는 항의에서였다고.


5.2.3. 세금 문제[편집]


그리고 세금도 대폭 늘어난다. 실제로 한국 여행전문가가 정말 힘들게 이집트 아내가 둘인 부유한 사업가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건 좀처럼 어려운 일인데,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권 나라들에선 외국인들이 취재하는 것을 이슬람 모독으로 연결한다고 기분 나빠하기에 외국 언론이나 여러가지 취재가 자세히 된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내를 2명 두자 세무서 직원이 와서 그만큼 수입을 인정받으시니 세금이 늘어난다고 정식 통보까지 하더란다. 뿐만 아니다. 이집트에도 여성부가 있고, 여성부 직원이 와서 두 아내를 만나는 자리에서 "남편이 한 아내를 차별한다면 이를 알리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이는 이혼 사유가 되기 때문. 그 사업가도 아내가 둘인 것에 환상 가지지 말라고 쓴소릴 하는데, 그게 절대로 배부른 투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집트는 결혼한 사람들이 아직도 아이를 네다섯씩 가지는 경우가 많고, 아내가 여러명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인지라 해마다 인구가 200만씩 늘어나는 골치아픈 상황임을 감안해야한다.

참고로 이집트는 그나마 이슬람권 내에서는 그럭저럭 여권이 존중되는 나라다. 사실 세속의 전통이 오래 된 상황에서 가난한 이슬람 국가일 경우 여성들의 인권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애시당초 열악한 여성 인권 자체가 남편이 갑인 동네여야 가능한 거니까. 중동에서 여권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들은 대체로 석유가 안 나온다. 여성도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이 때문. 자원부국인 사우디카타르에서는 여성은 경제 활동에 참여할 기회도, 그럴 이유도 없다. 거꾸로 자원부국이 아닌,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레인은 여성 공무원 비중이 가장 높고 여자들도 밖에서 나가 일하도록 정부에서 배려한다. 그래서인지 바레인은 아라비아 반도에 들어간 나라에서 드물게 돼지고기을 먹을 수 있는 이슬람권 국가 중 하나다. 다만, 이집트 역시 의외로 제법 산유국이다. 다만, 정제기술이 없어 원유를 싸게 팔고 해외에서 정제한 휘발유를 비싸게 역수입해와야 하기에 자원부국은 절대 아니다.


5.3. 아내들 간의 평등 문제[편집]


계집 둘 가진 놈의 창자는 호랑이도 안 먹는다.[34]

한국 속담.

해외 출장 가서 사오는 선물도 반드시 2개를 같은 것을 사줘야 한단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하나라도 다르면 서로가 상대 쪽 선물이 더 좋게 여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어느 스튜어디스가 쓴 책자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랍권 한 나라에서 아내를 둘 데리고 있던 한 현지인 남성이, 면세점에서 똑같은 고급 기념품을 구입하길 원했는데 하나밖에 없어 난감해하던 걸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른 걸 사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남성은 "안돼! 두 아내에게 공평하게 대하자면 같은 것으로 사줘야 한단 말이오!"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도 사정을 이야기하자 마지못해 아내 둘에게 "그럼 같은 값으로 둘이 원하는 걸 고르라"고 하여, 최대한 비슷한 값으로 두 사람이 원하던 걸 고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남성도 미소를 보이며 수고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반대로 저 평등을 핑계로 아내들 간 평등하게 대충 박하게 해줄 수도 있다. 즉, 아내의 욕심을 제어하는 용도로 저 평등 문제가 쓰일 수 있다.


5.4. 성비 문제[편집]


게다가 일부다처제의 또다른 문제점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것은 바로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허가하고 시행을 할시 남자들도 일처다부를 시행하지 않는 이상[35] 결혼을 못하는 남자들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쟁 등으로 인해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에 비해 매우 높았기에[36]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남녀의 사망률이 그렇게 크게 차이나지 않게 된 현대에는 사정이 달라진 것.

다만 문명이 발달하며 전쟁으로 인한 남성 사망률은 낮아졌다. 징집 규모가 근대 이후 국민국가만큼 크지도 않거니와, 영토 확보 등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군주들은 자기 땅에서 수입을 안겨줄 노동력을 제거할 이유가 없었다.(반면 농경 기반 국가를 경영해본 적 없는 몽골 제국[37], 이질적인 문명을 대상으로 십자군 전쟁을 벌였던 유럽인들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바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아동기에는 워낙 남아의 사망률이 높고, 기근 등의 불안정한 환경에도 남성이 취약하여 여성에 비해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흔히 생각하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모성사망률은 생각 외로 낮아, 전근대에도 여성이 그렇게 취약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오히려 모성사망률이 폭증한 것은 근세에 접어들어 불결한 병원이 일반화되면서이다.

가뜩이나 남녀의 보편적인 성비는 자연적으로 남자 쪽이 조금 더 많이 태어나는데[38], 이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4명, 아니 2명의 여성과 결혼을 한다고 쳐도 어딘가의 어떤 남자 둘, 셋 이상이 결혼을 할 기회와 상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 때문에 남성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39]

MBC 뉴스데스크로도 바로 이집트 같은 경우가 보도되기까지 했다. 외국 기자들 카메라 앞에서 나온 이집트 남성들은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돈많은 자들은 아내를 넷이나 두는데, 우린 아내 하나 두기도 벅차다!" 그래서 외국 여성에게 치근거리면서 치한 짓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간혹 운 좋게 하나 걸려서 결혼하면 비 이슬람 신자인 외국 여자들은 지참금을 요구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어차피 무슬림이고, 이들 입장에선 땡잡은 셈이다. 다만 이건 로또와 같은 확률이고, 되려 여자 관광객 자칫 잘못 건드리다가 경찰이나 사복경찰에게 걸려 작살나기 십상이다.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 바레인 등 걸프만 산유국들처럼 부유한 국가에 주거하는 총각이라면 인도나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자들과 결혼해서 지참금을 아낄 수도 있지만[40] 이집트나 레바논, 요르단, 알제리, 튀니지, 이란, 이라크 같이 썩 부유한 나라가 아닌 국가에서 살면 언감생신일수밖에 없고 몇년간~십몇년 넘게 고생하며 지참금을 모으는 것 밖에 답이 없기는 하다. 또한 이들나라는 청년실업률이 30~40%대는 기본적으로 찍을 정도로 매우 높은 상황이다보니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고생이 필요하고 그렇지못한다면 지참금을 부모한테 손을 버리거나 빚을져야되는데 이것도 부모가 가난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결혼적령기가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노총각들이 넘쳐날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 골칫덩어리이다.

해외 여행자들이 이런 치근남들을 피하고자 반지를 낀다든지 유부녀로 위장하고 들어온다고 반지를 끼거나 남자들을 데리고 와 남편이라고 말해도 결혼사진 보여달라며 치근거리는 이집트 남성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인 신혼 부부가 이집트 여행을 갔다가, 이런 치근거리던 호텔 종업원을 만난 적이 있다. 빡돈 남편이 멱살잡고 '내가 남편인데, 어디 경찰서 가자.'라고 분노하자 종업원이 굽신거리며 빌었는데, 그 호텔 사장이 와서 사정을 듣더니 죄송하다면서 그 사죄로 하루 식비를 받지않았다고 한다.[41] 그 대신 그 직원은 사장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더니만 그는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다. 이 내외가 그 호텔에서 나올 때 그 치근거리던 종업원이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지나가는 걸 봤는데 다른 직원이 말하길, 사장이 뜨거운 불벼락을 내려 그 직원의 정신상태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이럴 경우엔 경찰도 사장의 손을 들어준다면서. 이처럼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지역에서 이런 일이 꽤 자주 벌어지는데 이런 남성들은 가난하고 지참금이 없어 도저히 결혼하지 못하고 그나마 만만한 외국여성에게 이런 치한 짓을 많이 저질러 이런 원인도 일부다처제가 원인 중 하나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인도방글라데시터키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인데, 이러다가 걸리면 경찰이 제대로 반 죽여놓는다.[42]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이런 관광이 발달된 국가중에는 여행수입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가 많은데 국가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경찰입장에선 나라의 주수입인 외국인 관광객을 찝적대다가 국가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그대로 국가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 감히 관광객&외국인을 건들어?라는 마인드로 엄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이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 한국처럼 체계가 발달된 나라라서 경찰폭행이 수면위에서 법에 따라 처벌받기보단 상황에 따라 평가하고 여론에 따르는 분위기가 강하다. 국민여론 역시 굳이 외국인 추행하다 걸린 놈을 경찰이 좀 팼다고 문제 삼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위에 나온 나라 가운데 여성이 엄청 불평등한 나라인 파키스탄도, 부자거나 하다못해 그 지역에서 그나마 제법 힘이 있는 수준의 권력자가 아니라면 아내를 여러명을 두는것은 극히 어렵다. 파키스탄을 여행한 한국인 여행자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파키스탄에서 길을 잃어서 정말 외딴 마을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 외딴 마을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들 투성이였고, 한국의 중산층 수준 정도의 촌장이 그나마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 그리고 촌장은 아내가 셋이었고 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노총각이었다고 한다. 위에 밑에서 2가지 사례는 국내에서 책으로 나온 여행자들의 해외 여행기 책자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는 그런 일은 없지만 과거 부족국가 시절에는 이에 대한 성비를 맞추기 위해 고의로 전쟁을 일으켜서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 병사들을 어떻게든 전사시켜가면서 성비를 일부다처제의 기준에 맞게 맞춰나가기도 했다.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영토도 넓힐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라는 발상인 것이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전쟁이나 기근, 질병 등으로 인해 성비가 극단적으로 무너질일이 거의 없는 현대사회에 이르러서 일부일처제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작게는 상위 5%내외에서 20%정도에 속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남성들을 같이 보호하는 제도라고 볼 여지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부다처제 하에서는 아예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까지 결혼의 기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기회만 돌아간다지 저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5.5. 여성들의 입장[편집]


우선 과거의 시점에선 대부분의 국가의 여성들이 부정적이였다. 여초 현상이 극심하다는 체첸에서조차 일부다처제 도입은 결국 여성들의 극렬한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정도.[43] 고려에서도 박유가 인구 격감과 여초 현상을 이유로 일부일처 그만두자고 했다가 오만 욕을 다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무슬림 여성들도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이지는 않은데, 한국인 대학생들이 전세계 대학을 찾아가서 자매결연하고 현지 대학생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걸 쓴 <캠퍼스 로드>라는 책에 나온 일화에 따르면 이러하다. 이란 테헤란 대학교에서 남녀 학생들과 대화하다가 일부다처제 이야기가 나오자 남학생들은 "돈만 있다면 꿈꿀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 이란 여학생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이런 말을 한 남학생에게 화를 내면서 욕설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성별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첩이나 여러명의 남편 중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일부다처제를 모든 여자들이 무조건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서의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경우는 긍정적이다. 이런 이유는 낮은 신분인 여성일 경우 이라도 승강혼이기 때문이다. 단지 부정적이라고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정도 많다. 일례로 유럽 난민 사태 때는 요르단인의 아내가 되면 그 인척들까지 요르단 국적을 주기에, 몸만 챙겨 피난온 난민 여성들이 요르단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일부다처의 형태로라도 요르단인 남성과의 결혼을 희망한 일이 있다. 현지인에게 일부다처제를 하자면 여러 사항들을 깐깐하게 점검해야 하지만, 돈도 시간도 법적 지위도 안전도 부족한 난민들은 지참금이고 뭐고 일단 딸을 그냥 팔아넘기려고 한 것이다. 난민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왜 딸을 버리냐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딸들이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여서 수십만명에 이르는 시리아이라크 난민들이 요르단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지리적인 요건이라든지 환경에 따라 여성들이 오히려 권장하기도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이자 만화가인 프랑스인 에마뉘엘 기베르와 프레데릭 르메르시에가 1980년대 소련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 산악을 의료차 들렀을 때를 그린 평화의 사진가(한국에서는 세미콜론을 통해 정발되었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프랑스 여의사가 험한 산가를 어렵게 가서 거기 사람들을 의료봉사하면서 거기 사는 비슷한 나이를 가진 여인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3년 뒤에 그 곳에 다시 가보니 그녀에게 낯선 젊은 여자가 곁에 있기에 "친척인가요?"라고 물어보니 "내 남편의 둘째 아내에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거 아닌가? 놀란 프랑스 여성이 "그리도 금실좋던 부부였는데 왜 둘째 아내를 맞이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 첫째 아내가 말하길, "내가 둘째 아내를 빨리 맞이하라고 남편에게 말했죠. 그러자 남편은 '뭔 헛소리야? 난 그럴 마음도 없고 당신이면 충분해. 뭐하러?'라며 거부했죠. 그 마음은 기뻤지만 그래도 내가 1년 넘게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편이 백기들고 2번째 아내를 맞이했어요."라며 웃으며 자랑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산골 마을이라 여성이 좀처럼 없고 그나마 있는 다른 여성들도 나이가 훨씬 많아서, 이 첫째 아내가 외로움을 못 견뎌서 친구 겸 식구로 받아들이고자 남편에게 1년이나 설득했던 거였다. 그래서, 프랑스 여성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 여성은 "여보, 당신을 위해서 둘째 아내를 맞이하라는 게 아니에요, 바로 저를 위해서 맞이하라는 거에요. 예. 부탁이에요. 제발."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 프랑스 여성은 동료인 이 책 지은이들에게 '프랑스에서라면 별 미친 소리 같지만 여기에선 이런 게 정상인 현실이지. 뭐, 우리 프랑스도 이런 역사와 지리를 가졌더라면 똑같아졌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이 남편은 그 지역에서 꽤 부자였기에 양과 말이 100 마리가 넘고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척박한 곳에서 가축을 몇십 마리 가지는 것도 엄청난데 이 정도의 부자였던 터라, 아내도 저렇게 새 아내를 맞이하라고 할 여유가 있었다.

모리 카오루신부 이야기에도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여성은 외간 사람과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풍습 탓에 다른 사람과 교류도 못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정말 너무 외롭게 지내던 여인 아니스가 목욕탕에서 만나 친해진 또래인 시린이 남편과 사별한 뒤 아이와 늙은 시부모까지 돌봐야 하는데 벌이도 없어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의 남편에게 부탁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슬람이랑 상관도 없이 파라과이도 꽤 오랫동안 일부다처제를 한 바 있다. 1870년 삼국동맹전쟁에서 대패하면서 파라과이 남자들이 거의 다 죽거나 상대 국가로 끌려가 노예 신세가 되면서 극소수밖에 안 남은 형국[44]지라 이 당시 파라과이 여성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전국민의 92% 상당이 여자이니 결혼을 하려면 일부다처제로 가든가 아니면 평생 미혼으로 살다 죽든가 해야 했다. 파라과이는 이때, 너무나도 다급해서 그동안 사람으로 안 보던 밀림 속 원주민 남자들에게 가서 이제 도시로 와서 파라과이인으로 받아둘테니 다 같이 살자고 요청할 정도였다. 심지어, 돈벌려고 와 일하던 인도인 외노자들에게까지 돌아가지 말고 남아서 파라과이인으로 귀화해 살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들에게도 당연히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고 유혹할 판국[45]이었다.

파라과이 여자들은 이게 싫으면 이웃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가서 그쪽 남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이때, 파라과이는 이 두 나라와 치열하게 싸워 패한 전쟁 패전국이다. 당연히 파라과이 여자들에 대해 첩실도 아닌 일개 창녀 수준이나 성노리개 수준으로 인식될 터에 이웃 나라들에 가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었다. 자국은 전국의 남성들이 다 죽거나 끌려가 없어진 상황인지라 금수저가 존재해도 여기도 극소수 중의 극소수이니 이런 금수저들에게 선택받는 것도 보통 여성은 불가능했다. 이러니 대다수 여성들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따위 없었다.[46]

이래서 파라과이는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제를 1950년까지 시행해야만 했다. 이런 극한상황인데도 일부다처제가 싫다면 그냥 평생 결혼을 못하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시대상으로도 여성이 혼자 생활하기 무척 힘든 시대이고 파라과이는 전쟁으로 박살난 상황에 여자들이 일할 곳도 정말 없었다. 부숴진 집 철거나 복구공사 위해서라도 남자가 많이 필요한 와중이라 여자들이 독신으로 살자면 이런 힘든 일을 스스로 해야했다. 게다가 여자들이 군대도 가야하고 총칼 잡고 또 모를 이웃 나라들의 침략도 대비해야 하고....이러다보니, 독신 여성들도 결코 살기 좋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파라과이 정부는 아이를 하나라도 더 낳고 인구를 늘려야하는데 독신 고집하면 여자들은 군대도 가고 힘든 일을 맡아야 한다라고 강요했는데 이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정부로서도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적어도 군대로 보내지 말거나 특혜라도 줄 수 밖에. 이러니, 독신 여자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군대 가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주변 나라들 상황에 불안해하고[47]힘든 노동도 같이 해야하기에 도중에 포기하고 첩실이라도 좋으니 결혼하겠다고 하던 여성들도 많았다...게다가 이 당시 파라과이에선 여자를 대상으로 벌인 강간조차도 넘어가는 일도 많았는데 피해 여성 상당수가 독신 여성이었다.

21세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부다처제가 허용될 경우 능력있는 남자 한 명에게 여러 명의 여자들이 몰빵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이재용이나 정의선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인의 본처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첩으로 들어가면 매월 생활비 명목으로 몇 천만 원씩 들어오기 때문에 평생을 일 같은 거 안 해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반면 월수입이 부실한 남자의 본처가 되면 같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평생 뼛골 터지게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21세기 이후에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면 많은 여성들의 후궁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도 있다.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온 사연인데 본처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스스로 자신의 친구를 남편에게 첩으로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에게서 남편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아무튼 닥치고 일부다처제는 죄악이라느니 미개하다느니 비난할 수는 없다. 위에 서술하듯이 많은 사정과 조건들 때문에 마지못해 살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걸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셈이다. 여자들의 입장에서도 승강혼, 전쟁으로 인한 성비 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오히려 여자가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깊이 있는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심히 비난하는 것은 쓸데없는 오지랖일 뿐이다.


5.6. 생물학적 관점[편집]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일부다처제는 일부일처제에 비해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리하다. 보통 일부다처제 형식을 따르는 동물들은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들이 번식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짐으로 인하여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어 한 방향으로 진화하는데, 이 경우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 유전적 다양성의 부재로 인하여 종 자체의 생존이 위험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드는 대신 열등한 유전자 역시 소멸한다. 여자가 1명씩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우수한 남자에게 몰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동물들의 경우에는 도태되는 유전자의 비율이 적어지기 때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어느정도 항시 확보된다. 즉, 주어진 환경에서 당장의 생존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난혼관계가 유리하지만, 환경 내 생존이 논외시되는 수준이 되면 일부일처제가 유전적 다양성의 보장으로 인하여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서 종의 생존에 더 유리해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하버드 대학교연구도 있는 등, 일부일처제가 단순히 사회적 통제의 결과물이 아닌 유전적 영향이 있다고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단기적 생존과 번식을 위한 일처다부제에서 장기적인 종의 생존을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위시한 일부일처제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일부다처제는 보통 수컷의 몸집과 정소가 크게 발달하고 일처다부제는 반대로 암컷의 몸집과 난소가 크게 발달한다. 일처일부제 동물은 수컷이 여러 마리 암컷과 교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정소가 작은 편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몸집이 크지만 정소는 난혼하는 동물에 비해선 작고 그렇다고 일부일처제 동물보다는 좀 더 발달한 편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신체적 특성으로도 애매하게 일부일처제 경계선에 있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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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대 사회에서의 부활 가능성[편집]


몇몇 남학생들이 일부다처제가 없어져서 슬퍼하던데, 일부다처제가 없어진 건 다 너네를 위해서야. 일부다처제가 시행되면 다들 송중기의 백 번째 부인이 되고 싶어 하지, 너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되고 싶진 않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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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의 발언

20세기 말 이후로 애정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허용하자는 말이 있다. 간혹 더 개방적인 사람들은 다처다부제를 허용하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두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반대로 두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나오기도 한다.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선진국에서는, 혼외자의 권리가 적출자와 거의 같이 취급되게 되고 사실상 관계의 권리도 강화되는 흐름을 거치면서 점차 결혼제도의 지위가 변하고 있다. 결혼을 했을 경우 얻는 어떤 배타적인 이득이 비혼이나 혼외 관계에 대한 인권적 배려를 강화하면서 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미국 등 동성혼 합법화를 거친 나라에서는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 합법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유타 주의 경우 동성혼 금지와 일부다처제 금지에 모두 위헌 판결을 내리는 위엄 넘치는 행동을 했다. 다만 유타주의 특수성은 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게, 유타주는 애초에 몰몬교에서 개척했다가 미국에 흡수된 주로 현재에도 몰몬교도가 가장 많은 주이다. 동성혼 허용이 나온 것도 몰몬교가 다른 기독교에 비해서는 동성애에 너그럽기 때문이고, 일부다처제는 더한 것이 애초에 몰몬교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종교다.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일부다처제를 포기한 것이 현재의 몰몬교다.

사실 일부다처제는 윤리적 문제를 떠나서 일부일처에 비해 너무 비효율적이라(특히 성비가 고른편인 인간에게 있어서) 합법화한다면 몇몇 능력있는 남성들의 취미성 제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48] 물론 양성평등의 문제도 발생하지만, 일부다처제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다. 국가적으로 허용하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섣불리 허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과거에 비해 결혼 제도의 지위가 낮아지고 혼외자가 혼내자와 거의 비슷하게 취급받아지는데 굳이 당사자간 합의 하의 일부다처제를 허용할지 여부를 따져야 하냐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양육 복지가 잘 된 국가에서는 하류층이 일부다처를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폴리아모리도 참고할 것. 현대 사회에서는 법으로 명시된 일부다처제가 아닌 이쪽이 차라리 더 현실성 있다. 아무리 1대1의 부부/연인 관계에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굳이 법적인 혼인을 해서 경제적/법적[49] 부담을 장기적으로 지는 것보다는 아예 결혼 자체를 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

7. 동물들의 경우[편집]


포유류의 경우 90% 이상이 다부다처제 혹은 일부다처제이다. 포유류의 경우 다부다처제는 흔히 난교형이라고도 하는데, 점박이하이에나가 대표적. 조류의 경우 90%는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나 다른 상대와도 성적 관계를 갖고 10% 정도는 부성불일치이다.

종종 오해되는 점으로, 문명발생 이후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남성이 서로 다른 집안의 여러 여성들을 외부에서 들여와 자신의 가문에 합류시켜 거느리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동물들의 경우 혈연관계인 다수의 암컷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수컷이 외부에서 들어와 무리의 암컷들과 짝짓기를 하는 모계사회인 동물이 흔하다. 코끼리, 범고래, 보노보, 아프리카물소 등이 대표적.

한편 다수의 수컷이 무리를 구성하고 소수의 암컷이 외부에서 합류하는, 가부장제의 인간 사회와 거의 똑같은 부계사회 동물도 있다. 고릴라, 아프리카들개, 침팬지, 망토개코원숭이 등. 그러나 이들도 무리의 많은 수컷들 중 강한 소수의 개체만이 암컷과 교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50] 수컷이 무리를 구성하느냐 암컷이 구성하느냐의 차이.

8. 각종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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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환상이라 그런지 미디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하렘물 참조. 예를 들어 카니발 판타즘의 경우 주인공이 히로인들과 그야말로 문어발 데이트 약속을 잡았는데 이것도 일부다처제라 하면 일부다처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꼼수를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후 발각되면서 말 그대로 작살이 났다.

한국 사극드라마에선 남자주인공이 왕이 아니라면 일부다처제를 하지 않는다. 중국 사극드라마에선 남자주인공이 평민이어도 일부다처제를 하는 경우가 가끔 존재한다. 입신양명이 주제일 때 평민의 일부다처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처다부제 드라마보다는 인기가 없다. 사극드라마가 매년 수백작품이나 제작되는 국가라서 가능한 일이다. 한국사극에선 조연도 일부일처인 경우가 많은데 중국사극에선 주인공측 조연이 수십명의 처첩을 두는 경우도 있다.

빠삐용은 두 아내를 거느리고 그것도 자매덮밥을 했지만 따로 집을 지어준 게 아니라 옆에 동굴을 파고 살았다. csi 라스베가스에서도 일부다처제 부부사건을 다룰 때 한 집에서 지내고 그것도 한방에 침대 2개가 있는 예를 보여준다. <맹수와 사냥꾼>에서도 천막 하나 안에서 부인 3명을 거느리고 사는 몽골인이 등장한다.

스탠라 큐브릭의 고전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는 핵전쟁 이후 인구 복원을 위해 일부다처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남자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블랙코미디적인 연출로 나온다. 이의 영향인지 2010년대 일본 서브컬쳐계에서는 2010년대부터 일본의 초저출산률 및 인구 감소를 핑계로 근미래에 정부에서 일부다처제나 출산의무제를 도입한다는 설정을 꽤 자주 차용하고 있다. #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나제 터빈이 전함급으로 실현한다.

은하영웅전설 6에서 립슈타트 전역 시나리오에서[51] 귀족들의 연합인 립슈타트 연맹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리텐하임 후작이 확률적으로 자기 딸을 라인하르트의 아내로 바칠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는데, 둘 다 들어주면 라인하르트의 아내가 황녀로만 둘이 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물론 원작 스토리에서는 그딴 거 없고 리텐하임 후작은 부하의 배신으로 저승길, 브라운슈바이크는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결국 음독자살했다. 은하제국 황제는 후궁을 합법적으로 수백 단위로 들일 수 있었다. 로엔그람 왕조를 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정식 황후 외의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렘 혼은 드물게 일본의 한 지역에서[52] 일부다처제를 시행할 경우에 대해 다소 현실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했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일부다처제를 다룬 만화로 민법개정 ~일본은 일부다처제가 됐다~가 있다.[53] 이 만화도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할 경우에 대해 다소 현실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했다고 알려졌다.

인간은 아니지만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룡종 몬스터인 리오레우스리오레이아[54]의 경우 몬스터헌터 월드 이전 작품들의 무대가 되는 현대륙에서는 일부일처제로 살아가지만 월드의 무대가 되는 신대륙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형태가 아닌 암컷인 리오레이아들이 수컷인 리오레우스의 본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여 승리한 개체가 리오레우스와 함께 고대수의 숲에서 살고 패배한 개체들은 개밋둑의 황야로 쫓겨난다고 한다. 이렇게 쫓겨난 개체들은 혼자서 육아를 부담[55]해야하기 때문에 고대수의 숲에 서식하는 개체에 비해 성격이 사납다고 한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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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리저니"로 읽는다. 흔히 polygamy로 번역되기도 하고 혼동해서 쓰이는데 엄밀하게 polygamy는 한 사람이 여러 배우자를 갖는 모든 결혼 형태의 총칭이므로 일부다처제(polygyny), 일처다부제(polyandry), 다부다처제(이건 때에 따라 영어 번역이 다르다), 집단혼(group marriage), 그리고 기존 배우자와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재혼을 통해서 새로운 배우자를 맞게 되는 것(serial monogamy)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polygamy의 경우 위키백과 한국어 및 일본어판에서는 '복혼(複婚)'으로, 중문판에서는 '다배우제(多配偶制)'라고 옮겼다.[2] 당연하지만 이렇게 할 권리는 남성만 주어지는게 아니라 여성에게도 주어진다.[3] 물론 대부분의 법들이 그렇지만, 그 법을 해석하는 인간들의 정신상태에 따라 법의 본래 취지를 훼손하기도 한다. 지참금을 받은 신부가 친정에 그 돈을 증여하는 형식으로 빼앗기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데서는 어린 딸을 팔아서 지참금으로 가계빚을 해결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친정이 지참금으로 살아가는 건 뭐 이슬람이 아닌 인도 힌두교 및 동남아 불교 지역(기독교로 개종해도 이 인식은 여전하다고 한다)에서도 엄청 자주 있는 일이다. 막말로 한국도 1950년대까지는 불법이었지만 암묵적으로 일부다처 내지는 지참금 지급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쟁으로 기존 사회의 상류층이 개박살나면서 조선시대부터 이어오던 암묵적 관습()이 없어졌을 뿐.[4] 명예살인을 주로 여자만 죽인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아랍권에서는 남자 피해자도 꽤 있다. 그나마, 이 아랍에미리트인 형들은 남편을 패주고 돈을 내주도록 한 것으로 끝난 온건적인 처사를 보여준 거다[5] 오히려 만약 다른 세속 국가였다면 두 아내는 중상해죄로 최소 징역형을 받았을 것이다.[6] 참고로 그에겐 사별한 부인과 예전에 이혼한 전(前) 부인이 있다.[7] 군대로 밀어붙여서 협박하듯이 없애려다가 부족이 저항하면 양 측 피해가 클테니 아내들에게 자발적으로 뜻을 밝히자고 합의를 봤다. 르켕 왕은 400명으로 줄이겠다고 한발 물러났으나 결국 700명이 넘은 아내들이 이혼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결국 자이르군이 나서서 억지로 그녀들을 이혼시켰다. 르켕 왕은 분개했으나 그래도 10%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엄청나다. 참고로 60년대 당시 그의 나이는 70대였으며 이 쿠바 왕조라고 불리던 바쿠바족 지역 인구가 5만명이었는데 이 중 무려 2천여명이 그의 자식이었으니...[8] <미애와 루이의 버스 여행>이란 책자.[9] 그것도 당시 나이가 84살이었고, 마지막에 맞이한 아내는 19살이었다.[10]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매매혼의 성격을 띈다. 현대에 와서 혼수라는 명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11] 한국 역사의 고려 태조 왕건이 시행한 혼인정책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12] 예외는 이스라엘 혹은 친이스라엘 매국노가 간통 상대였을 경우.[13] 탈무드를 보면 유대교에 대해서 하레디같은 꼴통들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줄 법한 진보적인 내용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부분이다. 가령, 부인의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던가, 전쟁 등으로 인해 성비가 심하게 불균등해진 상황에도 여성에게 피임을 허용한다던가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14] 물론 이분도 아들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얘기를 했다.[15] 주인공 일행이 유타주를 지나가고 있을 때 부부싸움 끝에 도망쳐 온 남편이 헐레벌떡 기차로 도망쳤고, 파스파르투가 '대체 아내가 몇 명이길래 그렇게 도망칠까' 싶어 물어보자 그 남자는 "고작 1명이지만, 1명도 지긋지긋했다"고 답한다.[16] 전체 파라과이 남성들의 무려 90%가 사망했고, 당시 대통령이 적군인 브라질군에게 전사하고, 영부인이 직접 총으로 무장해서 대통령 관저 안에서 교전까지 벌였을 정도로 무척이나 참혹하고 손실이 많았던 전쟁이다.[17] 진흥왕처럼 정실부인이 이미 있는데 외교적 문제로 새로운 정비를 들이기도 하고, 극단적인 사례로 왕건은 정실부인이 6명에 후궁이 23명이었다. 즉 왕에 한해서는 일부다처다첩제. 물론 이는 고려 초기의 호족연합체적 특수성 때문이고 아무리 조선 이전의 왕이라도 정실부인은 기본 1명에 많아야 2~3명 정도가 대부분이다.[18] 사실 현대까지도에 이르기 전까지 사회적 지휘가 높은 남성들은 첩의 형식이든 애인이든 여러 방법으로 세컨드를 두는 일이 흔했다. 이는 교회가 일부일처를 강요했던 중세 유럽도 마찬가지였다.[19] 근데 이원수는 이런 상황에서 아내 신사임당에게 갑이 되기는 커녕, 아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내내 을의 위치에 있어야만 했다(...). 그 이유가 이원수의 장인이자, 신사임당의 친정아버지인 신명화강릉시 지역의 명문가 출신의 대부호였고, 그런 그가 차녀 신사임당을 너무나도 사랑한 탓에 딸이 사위에게 눌려 지내는 꼴은 못 보겠다면서 일부러 한미한 집안 출신의 무능력자 노총각과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원수는 아내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나 첩을 들일 수 있었고, 아내의 생전에는 셔터맨 생활이나 해야했다. 어찌나 그가 신사임당에게 눌려 살았는지, 아들인 이율곡은 아버지가 첩을 들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겠다면서 아버지를 쌩깐 일도 있었다(...). 고개 숙인 남자[20]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 태조 이성계다. 고려 말 그는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함경도의 본가에 아내 신의왕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개성 유력자의 딸인 신덕왕후와 결혼해서 살았다.[21] 이 에피소드에서 경찰 역으로 특별출연한 사람이 80년대 후반에 활동한 듀오 그룹 '도시의 아이들'의 멤버 출신으로 후에 솔로로 독립해 가요 선녀와 나무꾼으로 잘 알려진 가수 김창남이다. 여담으로 김창남은 본인이 실제로 겪었던 한 불치병 소녀와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제보하기도 했고, 이 이야기는 '종이학'이라는 제목으로 극화되어 소개되었다.[22] 극중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평소에는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두 부인들이 남편과 마담을 응징하는 장면에서 그야말로 환장환상의 팀플레이를 보여주었다(...).[23] 남편이 나이가 들어 성관계시 정력이 딸리게 되자 부인들이 경쟁적으로 부자이중탕과 십전대보탕을 구해 남편에게 먹였는데, 하필 그 약들이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약이라 고열에 시달려 며칠을 앓았고, 후유증으로 대머리(...)가 되었다.[24] 1990년 6월 25일이었는데, 심지어 일요일이었다.[25] 이렇다보니 작업 시간이 거의 한밤중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인부들이 "대체 이게 뭐하자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였다.[26] 그 외에도 드라마 육남매에도 육남매들의 고모와 실향민인 고모부가 재혼을 했는데 고모부의 원래 부인과 서울대생 아들을 뒤늦게 만나는 일이있다.[27] 노홍철은 "니가 이겼다."라며 말문을 닫았고, 유재석은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되냐"라며 난감해 했으며 박명수는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어. 암암리에 그런 게 인정이 됐어."라고 수습했다. 길이 1978년생이므로 길의 할아버지 연배면 1910년대생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며, 정부 수립(1948년)은 고사하고 해방(1945년)되기도 전에 결혼했을 테니 축첩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흠 잡힐 일까지는 아닌 시대였다고 할 수도 있다.[28] 여기에 대한 박명수의 대답은 "용돈 많이 주는 할머니가 짱이야."[29] 예를 들자면, 남편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의무적으로 최고령 아내의 방에서 묵게 하는 관습 등이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내들 간의 분쟁과 알력을 방지하려는 것.[30] 물론 일부다처제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 만든 계율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사람들조차도 일부다처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31] 기존 본처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본처가 들어오게 되면 본인 및 본인 친자에게 상속될 재산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 본처가 순순히 일부다처제에 동의할 리가 만무하다.[32]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들은 결코 많은 아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다. 이므란(가족)장을 읽어보자. 한마디로 일부다처제 하지 말라는 소리다.[33] 아내의 친정이 명문가거나 부유층이라면 더더욱 어려워진다.[34] 처첩을 거느리고 살자면 속이 썩어 편할 날이 없다는 말. 비슷한 얘기로 "장사꾼의 똥은 동네 똥개들도 안 먹는다."는 말도 있다.[35] 일부일처제 국가가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순간, 일처다부제도 자연스럽게 허용될 수밖에 없다. 물론 남편이 늘어난다고 한 여성이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가 비례해서 느는게 아닌지라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시행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부다처제와는 달리 일처다부제가 대대적으로 시행된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다가 남자는 70%여자를 사정권에 두지만 여자는 오로지 30%의 남성만 바라본다는 이야기도 있기에 설령 두 제도가 같이 실행되어도 대부분 일부다처가 많이 발생했다. 그야 현실은 우월한 알파메일들이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여성향이 아닌 알파메일 하나가 여성 여럿을 후리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조차 안되는 남성은 어떤 제도를 시행하든 대상에서 제외되겠지만 중하류~중류층 남성 다수는 당장 경제적 상황이 급박한 여성 하나랑 일처다부를 형성할 수 있기는 하다.[36] 전근대기에는 전쟁을 비롯해 들짐승을 사냥, 퇴치하는 일이나 위험한 노동 등도 거의 남성들이 했다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이 여성들의 사망률보다 압도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중세까지도 잔 다르크같이 굉장히 특이한 사례가 아닌 이상 여군은 존재하기 힘들었고 그 결과 전쟁터에서 남자들이 기본 10,000 단위로 죽어나갔다. 이에 일부다처제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37] 정복지의 인프라를 최대한 보존시켜 정복당한 이들을 생산 활동에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수탈 방법이지만 몽골은 이를 몰랐다. 사실 이러한 몽골의 방식으로는 거대한 제국을 오래 유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몽골은 새로운 시대를 설계할 줄 알았던 재상과 포용적인 지도자가 있어서 세계 제국이 됐다.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와 몽골의 제2대 황제인 우구데이(오고타이·窩濶台)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야율초재는 서하와 호라즘의 예를 들어 결국 도성으로 인해 얻은 것은 넓은 폐허였고 그것은 제국의 발전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몇날 며칠 우구데이를 설득했다. 습관적으로 반복돼온 도성을 막기 위해 애쓴 야율초재와 신하의 의견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인 우구데이는 신하와 황제를 넘어 서로를 진심으로 위할 줄 알았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의 의기투합으로 몽골은 무지막지한 정복 국가에서 진정한 세계 제국으로 변화하게 됐다.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24&t_num=10392[38] 약 104~106:100 정도 된다. 물론 남자들은 많이 태어나는 만큼 또 쉽게 죽어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2007년도 경에 나온 외국의 조사 프로그램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4천만명 정도 더 많다고 한다.[39] 보통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남성들의 경우 재력이나 권력, 혹은 둘 다가 갖춰진 기득권층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를 갖추지 못한 비기득권층 남성들은 자연히 결혼 시장에서 도태된다. 여성들의 경우에도 좀더 잘 사는 삶을 선호할 경우 아내가 여럿임을 감안하고도 경제력이 보장되어 보이는 일부다처제 가정에 들어가길 선호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역으로 여성들의 권력이나 경제적 자립도가 높을수록 여성들은 일부일처나 아예 다부일처제나 독신을 더 선호하는 경향성이 높아진다. 남편의 권력과 재력에 의존할 이유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때문.[40] 다만 이들나라에서도 지참금을 아낄려는 목적으로 외국여자랑 결혼하는것은 자국 노처녀의 증가를 불러일으킬수있다는 이유로 제한 하고있어서 무조건 쉬운 일은 아니기는하다.[41] 경찰에게 가는 것보단 이게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물론 종업원을 확실하게 매장시킬 수 있지만 대신 경찰이 올 것이고, 숙박시설이 영업금지를 한동안 당할 수도 있다. 당연히 피해가 훨씬 크니까 하루 식비 안 받고, 종업원도 적당히 두들겨 준 뒤 그냥 용서하는 게 싸게 먹히는 셈. 사실 종업원 입장에서도 성범죄자로 빨간줄 긋고 신상 공개되는 것보다 그냥 처맞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종종 해외여행 블로그나 책자에서도 이런 숙박시설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로 경찰에게 신고하면 며칠에서 길면 1달까지 영업정지당한 경우가 간혹 나오는데, 사장에게는 엄청난 피해가 되는 셈이다.[42] 해외여행 기행책자라든지 블로그에서 꽤 종종 보인다. 외국 여성에게 성추행을 저지르다가 걸렸는데 경찰이 정말 죽어라 구타한다. 피해자인 외국 여성이나 지인들이 처음에는 잘한다 하다가 나중에는 정말로 때려죽이는 분위기에 기겁하고 됐다고 말리는 일까지 있다. 한 한국인 여행자가 인도에서 목격했는데 피투성이로 기절한 가해자를 아예 죽이려는지 계속 구타하여 피해자인 백인여성이나 그 친구들이 경찰들을 잡고 필사적으로 이제 됐다며 그만하라고 말렸다고 한다. 이 여행자는 누가 봐도 저 성추행범, 몇달 병원 가던지 후유증이 장난아니라고 후기로 썼다.[43] 물론 고위층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 당장 수장인 람잔 카디로프도 아내가 셋이고, 아내와 장성한 자식이 있던 57세의 경찰청장이 17세 소녀를 협박해 납치혼을 했음에도 조용히 무마되었다.[44] 전쟁이 6년이나 길게 이어지다보니 많은 남자들이 죽자 파라과이는 남자는 10살만 넘어도 군인이라고 아이들이나 청소년까지 징병했기 때문이다. 이들 대다수도 죽거나 패잔병으로 잡혀 노예로 끌려갔다. 게다가 전쟁 상대국도 남미에서는 넘버원급인 국가들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연합군에 거기에 우루과이까지 낀 3국인지라 이 세 나라 중에서 파라과이보다 약한 나라가 없다는 게 문제다.[45] 파라과이와 사정이 다르고 일부다처제랑 관계없으나. 근대 포르투갈이 인구가 크게 줄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외노자나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까지 해방시켜서 포르투갈 민간인으로 살게하여 가정을 이뤄 인구를 늘리게 했던 일.[46] 다만 이 와중에도 흑인이 많은 브라질군들에게 강간당해 태어난 흑인 아이들은 죽여버리기도 했다. 인도인이라든지 원주민들은 흑인이 아니라서 아기 피부색을 보면 구별이 가능했지만. 물론, 파라과이도 극소수 흑인도 있었기에 적어도 이들 신분 파악이 가능한 아버지가 확실한 일부 극소수 아이들은 살수 있기는 했지만 이 일은 파라과이 역사에서 더러운 또 다른 모습이었다.[47] 아이러니 하게도 3국 동맹 당사자나 그와 주변국들은 파라과이를 내버려뒀다. 남자 다 죽고 여자만 남은 동네 쳐들어가봐야 얻을것도 없고 오히려 "여자 상대로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하니 말이다.[48]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일부일처제라면 고스란히 자기 자식을 위해 사용될 남편의 소득을, 남편의 배다른 자식과 나눠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자녀들의 양육비 때문에 부부들의 출산율이 크게 낮아지는 추세인 지금, 남성 쪽이 크게 부유한 남성이 아니라면 힘들다는 이야기다.[49] 그리고 아내들간의 관계 문제 역시 여기 포함된다.[50] 이나 개미처럼 한 암컷이 엄청난 출산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번식에 비효율적인 일처다부제는 동물에게서 보기 힘들다.[51] 은하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과 관련된 내전이 벌어졌다. 이때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셋이었는데, 은하제국 우주함대 사령장관인 라인하르트를 위시한 군부는 오래전 암살당한 황태자의 외아들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지지하며, 귀족세력은 두 패로 나뉘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딸이자 황제의 외손녀인 중 하나인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계승을 지지하거나, 리텐하임 후작의 딸이자 죽은 황제의 또다른 외손녀인 자비네 폰 리텐하임의 즉위를 원하는 세력으로 갈려 벌어진 내전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귀족측의 완패 및 라인하르트의 정권 장악의 기반이 된다.[52] 작중에서 주인공인 코하루의 고향에 일부다처제를 허락하는 이상한 조례가 시행되었다는 언급이 있다.[53] 글작가는 아카호리 사토루, 그림 작가는 타케우치 사쿠라이다.[54] 둘은 같은 종으로 리오레우스가 수컷, 리오레이아가 암컷이다. 꿩을 수컷을 장끼, 암컷을 까투리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55] 리오레우스와 리오레이아는 기본적으로 새끼를 공동육아하는 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