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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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당시 응원단장으로 활약했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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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초기 생애
3. 해태 응원단장 시절
4. 은퇴
5. 기타



1. 개요[편집]


1945년 만주 지린성 출생.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으로 활동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응원단장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초기 생애[편집]


부모를 따라 광주광역시에 정착한 임갑교는 공군에 입대하여 병역을 마쳤고 그 곳에서 응원을 배웠다.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본사 냉동 수리실에서 일을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공군에서 응원을 닦은 실력으로 회사 야유회에서 응원을 이끄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러다가 한국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후 첫 경기가 된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구덕 야구장 원정경기를 위해 본사에서 버스 5대를 대절하여 관람을 하러 내려간 것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되었다. 이날 해태가 롯데에게 지면서 해태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주눅이 들었다. 야유회에서 갈고 닦았던 그의 응원도 빛이 바랬다. 그러자 좀 더 관중들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응원 방식을 개발하여 관중들의 응원들을 집중시켰고, 아예 해태에서는 임갑교를 정식으로 타이거즈 응원단장으로 임명했다.


3. 해태 응원단장 시절[편집]


임갑교의 응원방식은 호루라기를 이용한 박수와 디스코 댄스, 그리고 트럼펫 또는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현재의 각 선수들에게 응원가를 붙여주고 빵빵한 앰프를 동원한 화려하고 세련된 응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현재에도 응원에 쓰이고 있는 3-3-7 박수나 기차박수를 임갑교가 먼저 응용하여 응원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 외에도 응원단장의 화려한 응원복을 입는 등 이 때부터 응원단장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임갑교의 신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 결함을 커버하기 위해 화려하게 입은 것. 임갑교 단장은 해태제과의 직원임과 동시에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을 겸했기 때문에 아예 직장을 타이거즈로 바꾸라는 권유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응원방식은 응원단장을 필두로 해태제과 임직원들이 응원에 투입되어 단체응원을 하는 방식이었다. 현재는 이벤트 업체에서 응원팀과 계약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진 지 되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모기업의 임직원들이 단체로 응원에 투입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임갑교가 있는 동안 해태는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1995년까지 무려 7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1980년대 정치·사회적으로 억눌려 살았던 호남지역 시·도민들의 슬픔과 한의 정서가 응원의 바탕에 더해지면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이 되었다. 단상에서 그가 연주하는 악기 반주에 맞춰 박수를 치며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모습은[1] 그 당시 해태 팬들을 상징하는 광경이었다.

지금도 타이거즈 팬들의 응집력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과 더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인데, 이는 임갑교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이거즈 팬들은 유독 해태 시절부터 똘똘 뭉쳤는데 당시 시대의 정서상 호남 지역은 경제 발전에 철저히 소외되었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야구장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2] 임갑교 단장이 이끄는 해태의 응원은 탈출구와 다름없었고, 결국 팬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용이했던 셈이다.


4. 은퇴[편집]


임갑교는 1995년을 끝으로 단장직을 사임했다. 이유는 해태제과 소속 근로자 신분인 상황에서 '파견근무' 형식으로 응원단장을 이끌었는데, 이를 이유로 아예 해태 타이거즈 홍보실로 옮기면 퇴직금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인 것. 때마침 1995년에는 해태의 가을야구 진출이 좌절되면서 그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1996년부터는 '붐붐 아저씨'라고 불리던 김창규에게 응원단장직을 물려주고 다시 일반 근로자 신분으로 해태제과에 돌아왔으며 2000년 정년퇴직을 끝으로 해태제과를 퇴사한다.

퇴직 이후에는 냉장실 설비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극장, 롯데마트를 거쳐 현재는 영등포 한 모텔의 시설담당 팀장으로 근무중이다.


5. 기타[편집]


그의 해태 응원단장 시절에서 모티브를 얻은 연극 하이타이가 제작,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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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포의 눈물을 부른 뒤 어김없이 관중석에서는 선수가 아닌 한 정치인의 이름이 연호됐다. 이것이 당시 해태 팬들의 응원 패턴이었다.[2]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광주시내에 시민 모두가 모여서 즐길 만한 놀거리라고는 야구장이 유일했다. 아울러 광주 이외 지역에서는 "마음 놓고 전라도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곳은 야구장의 해태 응원석 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사회에서 억눌렸던 호남 출신 사람들이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이 야구장 외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