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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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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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부문 감독상
제11회
(1975년)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변장호
(망나니)

임권택
(왕십리)


임권택
(낙동강은 흐르는가)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제14회
(1978년)

임권택
(왕십리)

임권택
(낙동강은 흐르는가)


김호선
(겨울여자)
제18회
(1982년)


제19회
(1983년)


제20회
(1984년)

이원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임권택
(안개마을)


변장호
(사랑 그리고 이별)
제32회
(1996년)


제33회
(1997년)


제34회
(1998년)

박철수
(학생부군신위)

임권택
(축제)


정지영
(블랙잭)
제35회
(1999년)


제36회
(2000년)


제37회
(2001년)

강제규
(쉬리)

임권택
(춘향뎐)


박찬욱
(공동경비구역 JSA)


{{{#white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대상
제13회
(1992년)


제14회
(1993년)


제15회
(1994년)

[1]

임권택
(서편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감독상
제11회
(1990년)


제12회
(1991년)


제13회
(1992년)

정지영
(남부군)

임권택
(개벽)


박종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제15회
(1995년)


제17회
(1996년)


제18회
(1997년)

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임권택
(축제)


이창동
(초록물고기)
제22회
(2001년)


제23회
(2002년)


제24회
(2003년)

송해성
(파이란)

임권택
(취화선)


박찬욱
(올드보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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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제16회
(1977년)


제17회
(1978년)


제18회
(1979년)

최인현
(집념)

임권택
(족보)


정진우
(심봤다)
제19회
(1980년)


제20회
(1981년)


제21회
(1982년)

이장호
(바람불어 좋은 날)

임권택
(만다라)


이장호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제24회
(1985년)


제25회
(1986년)


제26회
(1987년)

배창호
(깊고 푸른 밤)

임권택
(티켓)


임권택
(연산일기)
제25회
(1986년)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9년)

임권택
(티켓)

임권택
(연산일기)


김호선
(서울무지개)
제30회
(1992년)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김호선
(사의 찬미)

임권택
(서편제)


장선우
(화엄경)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연도
2002년
이름
임권택
분야
영화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1989년
이름
임권택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맹호장 정장.png
연도
2016년
이름
임권택
분야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체육훈장 맹호장(2등급)




임권택
林權澤 | Im Kwon-taek


출생
1934년 12월 8일 (89세)[1]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단광리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본적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2]
본관
나주 임씨[3]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가족
아버지 임종영, 어머니 전주 이씨
배우자 채령 (1951년생 / 1979년 결혼 ~ )[4]
장남 임동준 (1980년생)[5]
차남 권현상 (1981년생)[6]
학력
월평초등학교 (졸업)
장성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중퇴)
직업
영화 감독, 각본가
데뷔
19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
활동
1962년 - 2015년
종교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훈장
금관문화훈장 (2002년 수훈)
보관문화훈장 (1989년 수훈)
체육훈장 맹호장 (2016년 수훈)

1. 개요
2. 생애
3. 작품 특징
4. 필모그래피
5. 수상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6.2. 미성년자 강제 전라노출 및 사전 합의 없는 노출신
7.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


2. 생애[편집]


1934년[7]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現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소지주였으며 부친 임종영은 교사로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삼촌의 영향으로 8.15 광복 이후 좌익 활동에 입문하여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고, 고모부와 고종사촌들도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삼촌은 토벌대에 잡혀 8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후 6.25 전쟁 때 총살당했고, 부친은 건강이 나빠져 하산 후 자수했다.

반면 임권택 자신과 남동생은 남면의 할아버지 집으로 맡겨져 광주숭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위와 같은 일들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빨치산 가족'이라는 낙인을 이기지 못한 탓에 18세 때 가출한 후 부산으로 가서 부두 및 시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군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휴전 후 군화 중개사들이 '신생영화사'를 차렸고, 1955년 임권택은 신생영화사 측의 제안에 따라 상경하여 <장화홍련전(감독 정창화)>의 스탭으로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소품부, 연출부를 거쳐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시초로 조감독에 올랐고, 해당 영화를 만든 한흥영화사 사장 최관두가 임권택이 조감독으로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의 예고편을 보면서 임권택에게 연출 제안을 했고, 그 길로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했다.

초기에는 멜로, 액션, 무협, 스릴러,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다 1973년 <잡초>를 시초로 진지한 장르를 처음 구사했고,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단체인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의 감독 지부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3. 작품 특징[편집]


전술하듯 1962년에 데뷔한 이후 초기 10여년 동안 멜로, 뮤지컬, 무협, 액션, 코미디, 스릴러 등 잡다한 장르를 총망라하며 미국, 홍콩 영화들을 모사/초월하고자 했으며, 70년대까지는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그렇게 저예산 반공, 반일 영화를 다작하다가 노하우가 쌓인 1980년대부터 임권택 감독의 눈은 한국의 전통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해외 시상식에 나갔다가 해외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을 돌아본 임권택 감독은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전통을 돌아보는 문예영화, 예술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대표 예술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연출하면서 만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꾸준히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로 나온 영화는 모두 이태원 제작이다. 롱테이크(서편제의 3분 롱테이크)나 플래시백(과거로 회상) 등의 기법을 잘쓰며, 굉장히 퀄리티가 뛰어나고 영상에 숙달된 모습을 보인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두 사람은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임권택 회고전이 열렸다.

정성일 평론가 오디오파일#


3.1. 흑역사[편집]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벌어먹고자 1960년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당시는 반공 영화가 국책사업이었다.).2007년도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Q: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질문자)

A: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워낙 다작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웃지 못할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Q: 정말 많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본인 작품을 다 기억하시는가?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재미없는 걸 만든 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

물론 이 발언은 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데뷔 초기인 1960~1970년대에는 양산형 반공물, 반일물만 1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1년에 몇 편씩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재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다.[8] 당시 기술력, 기획력,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9]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 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많이 만들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보면서 스스로 배운 셈이다.

이러한 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선 임권택 가족의 내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중석 저)>와 2014년 정성일 칼럼 등을 종합해 보면 전술하듯 임권택의 선친이 좌익 활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연좌제 대상에 올랐던 적 있었던 터라 임권택은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 봤으면 한다"라는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하길종 등처럼 유신 체제의 영화 통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보면 감독이 감독이니만큼 특출난 부분도 많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 연구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만 본인은 이런 재평가 자체도 꽤나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4. 필모그래피[편집]



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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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만강아잘있거라.png
파일:전쟁과노인.png
파일:망부석(임권택).png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
전쟁과 노인 (1962)
망부석 (1963)
파일:남자는 안 팔려.png
파일:신문고.png
파일:욕망의결산.png
남자는 안 팔려 (1963)
신문고 (1963)
욕망의 결산 (1964)
파일:십자매선생.png
파일:십년세도.png
파일:영화마마.png
십자매 선생 (1964)
십년세도 (1964)
영화마마 (1964)
파일:단골지각생.png
파일:단장록.png
파일:전장과여교사.png
단골지각생 (1964)
단장록 (1964)
전장 여교사 (1965)
파일:비속에지다.png
파일:왕과상노.png
파일:닐니리.png
비속에 지다 (1965)
왕과 상노 (1965)
닐니리 (1966)
파일:법창을울린옥이.png
파일:나는왕이다.png
파일:망향천리.png
법창을 울린 옥이 (1966)
나는 왕이다 (1966)
망향천리 (1967)
파일:청사초롱.png
파일:풍운의검객.png
파일:요화장희빈.png
청사초롱 (1967)
풍운의 검객 (1967)
요화 장희빈 (1968)
파일:바람같은사나이.png
파일:돌아온왼손잡이.png
파일:몽녀.png
바람같은 사나이 (1968)
돌아온 왼손잡이 (1968)
몽녀 (1968)
파일:십오야의복수.png
파일:황야의독수리.png
파일:비나리는고모령.png
십오야의 복수 (1969)
황야의 독수리 (1969)
비나리는 고모령 (1969)
파일:사나이삼대.png
파일:상해탈출.png
파일:신세좀지자구요.png
사나이 삼대 (1969)
상해탈출 (1969)
신세 좀 지자구요 (1969)
파일:뇌검번개칼.png
파일:월하의검.png
파일:애꾸눈박.png
뇌검 번개칼 (1969)
월하의 검 (1969)
애꾸눈 박 (1970)
파일:이슬맞은백일홍.png
파일:비나리는선창가.png
파일:그여자를쫓아라.png
이슬맞은 백일홍 (1970)
비나리는 선창가 (1970)
그 여자를 쫓아라 (1970)
파일:속눈섭이긴여자.png
파일:밤차로온사나이.png
파일:비검.png
속눈섭이 긴 여자 (1970)
밤차로 온 사나이 (1970)
비검 (1970)
파일:원한의거리에눈이나린다.png
파일:나를더이상괴롭히지마라.png
파일:둘째어머니.png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마라 (1971)
둘째 어머니 (1971)
파일:요검.png
파일:30년만의대결.png
파일:원한의두꼽추.png
요검 (1971)
30년만의 대결 (1971)
원한의 두 꼽추 (1971)
파일:명동삼국지.png
파일:돌아온자와떠나야할자.png
파일:명동잔혹사.png
명동삼국지 (1971)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1972)
명동잔혹사 (1972)
파일:삼국대협.png
파일:장안명기오백화.png
파일:잡초(임권택).png
삼국대협 (1972)
장안명기 오백화 (1973)
잡초 (1973)
파일:증언.png
파일:대추격.png
파일:연화(임권택).png
증언 (1973)
대추격 (1973)
연화 (1974)
파일:울지않으리.png
파일:연화(임권택).png
파일:아내들의행진.png
울지 않으리 (1974)
연화(속) (1974)
아내들의 행진 (1974)
파일:어제오늘그리고내일.png
파일:왜그랬던가!.png
파일:낙동강은흐르는가.png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75)
왜 그랬던가! (1975)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6)
파일:아내(임권택).png
파일:왕십리(임권택).png
파일:맨발의눈길.png
아내 (1976)
왕십리 (1976)
맨발의 눈길 (1976)
파일:옥례기.png
파일:임진왜란과계월향.png
파일:저파도위에엄마얼굴이.png
옥례기 (1977)
임진왜란과 계월향 (1977)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1978)
파일:가깝고도먼길.png
파일:상록수.png
파일:족보(임권택).png
가깝고도 먼 길 (1978)
상록수 (1978)
족보 (1978)
파일:신궁.png
파일:내일또내일.png
파일:깃발없는기수.png
신궁 (1979)
내일 또 내일 (1979)
깃발 없는 기수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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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제작




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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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짝코.png
파일:복부인임권택.png
파일:만다라.png
짝코 (1980)
복부인 (1980)
만다라 (1981)
파일:우상의눈물.png
파일:아벤고공수군단.png
파일:안개마을.png
우상의 눈물 (1981)
아벤고 공수군단 (1982)
안개마을 (1982)
파일:오염된자식들.png
파일:나비품에서울었다.png
파일:불의딸.png
오염된 자식들 (1982)
나비품에서 울었다 (1983)
불의 딸 (1983)
파일:흐르는강물을어찌막으랴.png
파일:길소뜸.png
파일:티켓(임권택).png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
길소뜸 (1985)
티켓 (1986)
파일:씨받이.png
파일:연산일기.png
파일:아다다.png
씨받이 (1986)
연산일기 (1987)
아다다 (1987)
파일:아제아제바라아제.png
파일:장군의아들.png
파일:장군의아들2.png
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장군의 아들 (1990)
장군의 아들 2 (1991)
파일:개벽.png
파일:장군의아들3.png
파일:서편제.png
개벽 (1991)
장군의 아들 3 (1992)
서편제 (1993)
파일:태백산맥(임권택).png
파일:축제(임권택).png
파일:노는계집창.png
태백산맥 (1994)
축제 (1996)
(노는계집 창) (1997)
파일:춘향뎐.png
파일:취화선(임권택).png
파일:하류인생.png
춘향뎐 (2000)
취화선 (2002)
하류인생 (2004)
파일:천년학.png
파일:달빛길어올리기.png
파일:화장(임권택).png
천년학 (2006)
달빛 길어올리기 (2010)
화장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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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전 제작



여기 소개된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부다.

만주 웨스턴으로,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놀랍게도 독립군과 일본군이 스키 타면서 총격전을 하는 장면 때문에 인기를 몰았다(...). 훗날 개봉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키 총격전이 연상되는 부분.[10] 왠지 훗날 회고에 의하면 늘 부끄러웠다며 후회했다고 하신다.

반공 영화. 전쟁이 일어나 연인인 신일룡과 김창숙은 서로 헤어져야 하는데, 둘 다 전쟁의 참혹함[11]을 알게 되고 결말부에 서로 만난다. 1970년대 국군 현용장비들이 대거 출연한다.
까메오로 문오장최불암이 나오는 게 포인트. 아벤고 공수군단낙동강은 흐르는가와 함께 일본 전쟁 영화 매니아들에게 숨겨진 걸작으로 평가돼서 일본에서 해적판 DVD가 3부작으로 묶여서 나왔다.

조흔파고교얄개 주연인 이승현이 나오는 반공 영화로, 놀랍게도 어린이가 사람들을 죽인다(...). 수류탄 던져서 죽이거나, 권총으로 쏘는 장면 등. 당시 신문에는 증언에 이은 스펙터클한 영화라고 한다. 하긴 어린이가 사람을 총질하거나, 수류탄 던져서 죽이는 건 확실히 스펙터클하긴 하다(...). 그런데 인민군 앞잡이 아들을 주인공(이승현)이 받아들이는 건 감독 자신의 과거가 반영되어서 이랬으면 어떨까?가 반영된 것 같다. 마치 미국에서 나중에 나온 레드 던이 생각나게 되는 대목이다. 실제 레드던 리메이크에서는 북한군이 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레드 던은 고등학생이 북한군을 상대하고, 여기서는 초등학생이 살인을 하는 거라서 당연히 문제가 된다.



어린이들이 휴전선을 넘다가 피격당해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내용. 어린이가 총에 맞아 살해된다는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짤려서 방영되기도 했다. 로드 무비로 작품 내의 다른 공간(집이라든가)은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주인공들의 회상이다.

하명중 주연의 영화. 선우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시대상 반공 영화다. 원작은 미완인데, 여기는 어찌저찌 끝을 냈다.

김희라, 최윤석 주연의 영화. 1950년대 경찰 송기열은 짝코라는 공비 대장을 생포했다가 이송 중 놓치고 온갖 비난과 좌절 끝에 짝코를 찾으러 다니다 결국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파멸한다. 나이먹어서 1980년대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어제의 원수 짝코를 찾아서 고향으로 이송하는 로드 무비. 결국 이념의 허무성을 고발하는 진정한 현시창 영화.

베를린 영화제 본선 초청작 1호로, 임권택을 예술 영화 감독으로 본격적으로 해외에 알린 작품. 해외 평론가들의 호평과 같이 해외에선 DVD로도 나왔다.

이문열익명의 섬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당시 최고의 미녀 배우였던 정윤희가 나왔다. 여기서 깨철이로 나오는 배우는 황당하게도 안성기다.


  • 비구니/1984년
김지미 주연으로 제작되던 영화였는데, 영화 내용에 실제 불교에 종사하는 비구니들이 집단 항의를 한데다가 촬영하던 필름 원본까지 소실되어서 미완성작이 되어버렸다. 네이버 뉴스 아카이브에서 "김지미 비구니 제작금지"로 검색하면 당시 관련 기사가 3건이 있다. 이 영화를 위해 김지미가 삭발까지 했으나, 영화가 엎어졌으니(...)... 제작된지 33년 뒤인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필름복원분을 CGV 전주고사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베를린 영화제 본선 초청작 2호로, 이산가족에 대한 이야기.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소재로 쓰기도 했다. 헤어진 아들을 찾으려는 어머니가 주제로, 그러나 해피 엔딩이 아닌, 눈물을 짜내는 마무리가 아닌 현실적인 마무리가 더더욱 돋보인다.

베니스 영화제 본선 초청작 1호로, 조선시대판 대리모 문제를 다룬 영화. 강수연에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1992년에 남기남씨내리라는 영화로 베꼈다. 극장 개봉도 했고 DVD로도 나왔다. 참고로 씨내리에는 변희봉 옹이 나온다.

모스크바 영화제 본선 초청작으로, 1981년에 개봉한 만다라와 함께 임권택 감독이 만든 불교적 배경의 영화. 강수연이 주연을 맡았고, 그 외에 유인촌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씨받이로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은 이 작품으로 1990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두 번째로 해외 영화제를 수상하였다.

김두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간 예술 영화, 작가주의 영화 제작만 고집했던 임권택에게 이태원 사장이 쉬어가라는 의미로 메가폰을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기성 배우들을 캐스팅 하려고 하였으나, 모험삼아 새 얼굴로 캐스팅 해보자고 했는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을 줄이야... 당시 단성사에 개봉하여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거두면서 흥행으론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던 임권택 영화나 단골 제작자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을 놀라게 했다. 30년이 된 지금도 '대표적인 배우 오디션'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이며,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걸출한 뉴페이스들을 많이 탄생시켰는데, 주인공 김두한 역할을 맡은 박상민과 악역 하야시 역할의 신현준을 포함하여 김승우, 이일재, 김해곤(감독 겸 배우) 등등. 이 배우들은 199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배우 세대교체를 이뤄내기도 했고, 3편까지 만들어졌다. 서편제의 100만 기록에 기폭제가 되었다.

동학혁명 당시 최시형과 당시 이야기를 그린 영화. 최시형이덕화, 전봉준김명곤, 최시형 부인에 이혜영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과격파로 묘사되었다고 비판받은 적이 있다. 도올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덕화의 사극 연기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며 작품적으론 꽤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은 참패했다. 제작사 중 하나인 춘우영화사는 문을 닫아버렸고, 공동 제작을 맡던 임권택 영화를 많이 만들던 태흥영화사도 타격을 꽤 받았다.

소설가 이청준이 5부 구성으로 쓴 단편 연작 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 송화의 예술혼과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룬 영화. 임권택 감독의 수많은 대표작들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영화 중 하나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100만 관객 돌파라는 희대의 대기록도 세웠다.[12]
제작 당시 이태원 사장이 장군의 아들 2(1992)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개벽의 대참패로 인한 부담도 씻으면서 "어디 흥행은 개의치 않고 마음껏 만들고 싶은 걸로 만들어보세요!"라며 부담을 안 주고 제작비[13]를 대주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 사상 최고 대박을 거두면서 감독 본인과 사장을 놀라게 했었다. 물론 당시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목적의 단체관람 유행도 한 몫을 했다.
상해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이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온 올리버 스톤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무시당한 일이 있었다.
소설가 조정래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145분(2시간 25분)짜리 영화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냈으나... 당시 극심했던 레드 컴플렉스로 인해 우파 단체들이 영화를 상영중지하라는 소동을 벌이는 등 개봉 전후로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서울 관객 25만 관객을 동원했고, 연극판에서 실력을 쌓고 있었던 김갑수가 이 영화로 대종상 남우주연상과 청룡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청준의 원작을 바탕으로 팔순의 노모의 장례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를 담은 영화다. 그 동안 임권택 감독의 영화의 단골 주연들이었던 안성기, 오정해, 정경순이 출연했고, 그 동안 고전적인 여인상을 연기한 오정해가 이 영화에서는 술집 작부 역할로 파격 변신한 영화였다.

1970년대 산업화의 뒷전에 밀린 소외 계층의 삶을 그린 영화로,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 생활을 해야 했던 한 여인의 삶을 그렸다. 추석연휴 중에 개봉하여 한석규접속신현준마리아와 여인숙과 함께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14] 1996년 음주운전 혐의로 배우로써의 위신이 크게 떨어진 신은경이 이 영화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면서 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칸 경쟁부문 초청작 1호로, 서편제를 찍으면서 판소리 영화라도 한편 찍어볼까 하고 농담처럼 얘기했던 게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제목은 춘향전이지만, 실제로는 판소리 춘향가뮤직비디오에 가까운 코미디스런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최초로 실제 설정과 맞는 나이의 신인 배우 이효정조승우가 각각 춘향/몽룡 역을 맡아서 화제가 되었다.[15] 조승우는 오디션을 거쳐 몽룡 역으로 데뷔했고, 이후 스타가 되었다. 반면 춘향 역으로 데뷔한 이효정은 별다른 후속작 없이 완전히 묻혔고... 현재는 일반인으로 지낸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영화다.

칸 경쟁부문 초청작 2호로, 임권택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16]을 안긴 작품. 흥행은 아쉬웠으나,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던 샤론 스톤이 무척 좋아하는 영화라고 한다. 더불어 장승업 역할을 한 최민식의 모습은 아햏햏 열풍에 연루되어 패러디되기도 했다.
덤으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각본을 도올 김용옥이 썼다는 점.[17]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 2호로, 4년 전에 춘향뎐으로 데뷔했던 조승우를 다시 불러들여서 함께 호흡을 맞춘 조폭 영화지만, 당시 시대의 변화나 시대상을 잘 읽어내는 등 뛰어난 작품성으로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임권택의 평생의 파트너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자전적인 내용과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적절히 섞었다. 다만 10부작 미니시리즈에 해당할 이야기들을 한번에 넣어서 이야기가 방방 뜨는 게 문제. 참고로 자신의 영화 증언의 포스터가 나오기도 한다.

칸 비경쟁부문 작품으로, 오정해, 조재현 주연. 서편제의 페러럴 월드 겸 후속편 격의 영화이자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서편제의 뒷이야기인 이청준의 "남도사람" 3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다. 작품성 있는 영화라는 평가였지만, 흥행은 하지 못했다. 김규철 대신 조재현이 남주인공으로 나왔고, 서편제에 비해서 남주인공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갔다.[18]

  • 달빛 길어올리기/2011년
박중훈, 강수연 주연. 한지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10년에 개봉된다고 알려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 뒤인 2011년으로 미뤄졌다. 결국 2011년 어찌어찌 개봉했지만, 소리소문없이 개봉한데다 흥행도 실패해서 개봉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개봉은 둘째치고 영화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舊 김민선) 주연. 김훈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아내와 젊은 여자, 그 사이에 놓인 한 남자 이야기로, 본래는 2014년에 제작되고 개봉 예정이었지만, 2015년으로 미뤄져 2015년 4월 9일에 뒤늦게 개봉하였다. 일단 임권택 감독 본인 피셜로는 마지막 영화라고 한다. #


5. 수상[편집]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총 13회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감독 중 최다 기록으로, 2위 기록인 6회 수상과는 무려 더블스코어 이상의 차이. 또한 2000년에는 대한민국 감독 중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또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19]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상을 주면서 만약 팔거라면 우리한테 되팔라고 농담을 했었다고.. 현재 이 황금곰상은 임권택이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해서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 (아카이브)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1년 10월 6일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6.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6.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편집]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으나, 그간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망작을 연출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본인은 예산(200억 원)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들여다보면 돈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6.2. 미성년자 강제 전라노출 및 사전 합의 없는 노출신[편집]


엄연한 범죄 행위라 할 수 있는 강제 전라노출신 촬영 사건이 존재한다. 영화 《길소뜸》 촬영 당시 13~14세, 즉 중학교 2학년였던 이상아에게 강제로 전라노출신(뒷모습)을 촬영하게 한 사실이 세바퀴를 통해 밝혀졌다. 처음에는 그런 걸 촬영할 리가 있겠느냐며 이상아 배우와 배우의 어머니를 속이며 촬영에 들어갔으나 이후 촬영이 진행되어 이상아의 보호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 남성 스태프들이 그녀를 둘러싸며 전라노출신을 찍는다고 놀렸고, 이에 사실을 알게 된 이상아가 이를 거부하자 전라 베드신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하여 미성년자 베드신누드 노출씬을 찍었다. 관련기사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은 물론 네티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춘향뎐에 출연했던 이효정도 당시 영화 촬영 당시 16세 미성년자였는데 영화 상에서 베드신과 노출신 분량이 있어서 논란이 있었다. 해당 씬을 촬영 당시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이효정은 이때의 여파로 은퇴하였다. 티켓에 출연했던 배우 안소영애마부인 등 에로영화 출연 이후 힘든 시기를 겪다 임권택이 자신을 예뻐해주자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 좋았다고 회고 했다. 그러나 티켓에서 역시 임권택이 베드씬을 위해 벗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임권택 앞에서 엉엉 울었다며 "어떻게 감독님마저 날 벗기려고 하냐"고 해 배우 김지미가 해당 씬을 대신하며 베드씬을 면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사건은 처참한 당시의 성인지 감수성을 물론 임권택과 영화계의 여성, 미성년자를 향한 부도덕성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데 만약 이러한 일이 최소 2000년대 이후에 일어났다면 임권택은 최소 성범죄, 사기죄에 대한 처벌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2014년에 촬영된 화장에서 마저 배우 김호정의 성기 노출 장면이 사전 합의 없이 현장 결정으로 촬영되었던 것이 드러나며 다시끔 논란이 되었다. 김호정 본인은 당황했지만 요청에 따라 담담히 촬영했다며 회고했으나 임권택이 대본, 사전고지 없이 노출씬을 촬영하는 행태를 이어간 바가 있기에 이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20]

이러한 영향으로 현재는 임권택의 이름값이 많이 줄어들었다. 구글 검색에도 임권택 논란이 바로 뜰 정도이며 SNS, 커뮤니티는 물론 TV 매체의 증가로, 특히 현세대 영화인들은 물론 영화 애호가들 까지도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취화선 등 영화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서는 그를 직접적으로 존경한다는 언급도 다소 꺼리고 있다.

7. 참고 자료[편집]


  • 저서
    • 나의 선택, 나의 길(공저) - 산하. 1998.

  • 도서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전 2권) - 현실문화연구. 2003.

[1] 호적상으로는 1936년 5월 2일생(87세)이다.[2]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3] 장수공파 30세 택(澤) 순(淳) 항렬.[4] 1951년생 배우. 임권택과는 1973년 혼인 신고를 한 후 197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5] 영화 프로듀서다.[6] 본명은 임동재이며 배우로 활동중이다.[7] 네이버 프로필상 호적상 생년인 1936년생으로 기재되었다.[8] 출처 -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2004년 인터뷰.[9] 이때의 전쟁영화는 말그대로 진짜 전쟁통인 것처럼 찍었다. 특수기술 따위가 있을리 없어 전쟁 영화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 대부분은 진짜 실탄과 폭탄을 썼고,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치는 것은 예사일이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독고영재의 사례#.[10] 후에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패러디(...)되었다.[11] 다만 근본적으로 반공 영화이기 때문에 인민군나쁘고,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건 일절 나오지 않는다.[12] 당시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는 1979년 작인 성룡 주연의 홍콩 무협영화 취권이었다. 당시 서울 98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참고로 1990년 엄청난 대박이던 영화인 서울 92만 관객이 본 사랑과 영혼 같은 영화와 견줘도 얼마나 대박인지 알 수 있을 듯. 다만 사랑과 영혼은 전국 350만 관객이 보면서 전국 관객 2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서편제가 좀 더 낮다.[13] 그래서 임권택도 제작비를 그리 많이 들지 않게 찍었다고 한다.[14] 하지만 상영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고, 접속은 롱런하고 호평이 많았던 반면, 이 영화는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지 않았다.[15] 당시에 이효정은 16세로 미성년자였는데, 길소뜸과 달리 짧지만 이건 직접 노출하고 나름 베드신도 소화했다.[16] 펀치 드렁크 러브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공동수상했다.[17] 김용옥은 위에 언급한 개벽과 장군의 아들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여기에 얽힌 비화도 꽤 있다.[18] 서편제에서는 오정해의 한 관련 이야기에 치중해서 김규철의 고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서는 완전히 현시창.[19] 구로사와는 임권택 영화에서 베스트 3을 꼽으면서 만다라,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20] 다만 배우 김호정은 성인이고 본인이 수락하고 촬영을 했다 밝혀 다른 영화에 비해 논란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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