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민(남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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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배우.
1980~1990년대 미남 배우로 잘 알려졌으며, 잘 생긴 얼굴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물론 용모만이 아니라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도 좋은 평가를 받아 왔다.
2. 일생[편집]
1956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 선인중학교와 서울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체육학과에 다녔다. 특히 숭실고 시절에는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고3 때 영화 빠삐용을 보면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에 반해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여, 대학생 신분으로 청년 영화집단 '영상시대'의 신인배우 응모에 당선되어[2] 1976년 이성구 감독의 영화 <마지막 밤의 탱고>에서 출연해 연기 인생을 시작했으나,[3] 아쉽게도 개봉관엔 못 걸렸다.
1977년 TBC 18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데뷔 초기 시절 '미스터 태평양'으로 뽑힐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노주현과 한진희를 이을 차세대 주연급 연기자 후보로 제작진들에게 주목받았으며 연수가 끝난 1978년 TBC 주말연속극 <시집갈때까지는>에서 당대 인기 여배우 정소녀의 상대역으로 캐스팅되어 처음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 시기부터 '임성민'이란 예명을 처음 썼다. 후속작 <그리워>에서 서승희 상대역으로 열연했으나 도중에 군 입대를 했다.[4] 입대 당시 홍두표 상무로부터 금일봉을 받을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듯했다.
1981년 4월에 제대했으나 이미 TBC는 언론통폐합으로 폐국됐고, KBS 탤런트로 재등록하는 데 4개월이나 걸렸다. 이후 여러 단막드라마에 나오면서 적응해 오다 1982년 KBS1 TV 문학관 '바라암'에서 삭발을 한 채 주연으로 나와 처음 주목받았다. 다만 이 단막극을 찍으면서 삭발한 탓에 한동안 섭외가 뜸해지다 1983년 2TV 아침드라마 은하의 꿈과 1TV 일일드라마 <사통팔달>에 겹치기 출연했지만 전부 짧게 끝났다. 그렇지만 2TV 일일연속극 금남의 집에도 차화연의 상대역으로 열연하여 주가를 더욱 올렸고, 1985년부터 반도패션의 전속 모델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활약과 더불어 당대 남배우 기근에 시달리던 영화계에선 그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1983년 이황림 감독의 영화 <달빛 멜로디>[5] 에 캐스팅되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후, 1984년 한 해 동안 무릎과 무릎사이, <탄드라의 불>, <바람난 도시> 등 에로영화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로는 "색깔있는 남자"와 "무릎과 무릎사이"를 들 수 있다. 이후 에로영화는 1989년 "애란"[6] 을 끝으로 이후엔 노출도가 없는 영화만 찍었다.
얼굴이 아주 멋지고 키까지 큰 데다 연기도 곧잘하는 배우라 월등한 비주얼로 많은 여심을 사로잡았다. 다만, 벗어서 유명해진(?) 배우라는 프레임만 씌우는 것도 부당한 게, 1986년 '장사의 꿈'으로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 1991년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이 있는 편이었다.
드라마에서도 한때는 선역보다 악역을 자주 맡아서 한동안은 비호감이었다.[7] 1986년 영화 <몸 전체로 사랑을>에 출연한 후 반도패션 광고를 뺀 연기 활동을 중단한 채 이미지 중심에서 탈피하기 위해 창을 배우며 수영과 골프로 체력 단련을 했고, 금주/금연에 매진하며 도예 및 낚시를 하기도 했다.
1987년 초 KBS 대하드라마 노다지를 통해 김도흡(김진태 분)의 아들 김수인 역으로 컴백하여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고, 1989년 주말연속극 사랑의 굴레에서 젠틀하고 유능한 데다 발군의 비주얼 "고영국 실장" 역할을 맡아 주인공 김미숙과 같이 열연하며 급호감으로 대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극중 의부증 쩌는 고두심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전국 주부들의 지지도 No.1으로 급상승 하며 이후 서브남주에서 메인남주로 격상되었다.[8] 1992년 억새 바람을 시초로 MBC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2.1. 사망[편집]
그러나 그는 1990년 만성간염 판정을 받았고, 당시 인기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다작출연을 했다. 1993년 MBC 폭풍의 계절 출연 도중에 간질환으로 쓰러져 입원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는 등 자기관리에 힘쓰는 듯 했으나, 조금 회복되자 다시 격무를 스스로 자초하여 1995년 5월 드라마 출연하던 중 또다시 쓰러졌다. 쓰러질 당시에도 SBS 고백, MBC 사랑과 결혼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었고, 김호선 감독, 장미희 등과 함께 멕시코 올 로케로 찍고 있었던 영화 '애니깽'[9] 도 촬영 중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건강 악화로 하차하면서 사랑과 결혼은 손창민이 그의 대타로 출연하였으며 결국 이 드라마는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전속모델로 활동하던 신원에벤에셀의 남성복 "모두스 비벤디"의 광고모델은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정보석으로 교체됐다.
간경화로 결국 8월 20일 저녁 서울 서초구 강남성모병원[10] 에서 향년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충청남도 예산군 선영에 묻혔다. 당시 간 이식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고 하였지만, 간 이식을 받지 못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간치료 권위자였던 주치의 김부성 교수가 당시 막 방영된 SBS 한밤의 TV연예 1995년 8월 3일 단독 취재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입원중에도 항상 일에 몰두해 있었을 정도로 일 중독이었다고 회고했다.
월간 영화잡지이던 <스크린> 1986년 3월호 기사 중 "2000년대에 대한 미래는?" 이라는 기사의 인터뷰에서 "...난 중후하게 늙고 싶으며 ....외모보단 연기력으로 평가받고 싶다. 미래에 독자들이 컴퓨터 버튼 하나로 영화를 볼 시대가 올지 모르지만, 넓은 화면에서 영화를 보는 게 매력이다." 라는 말을 했다.
슬하에 1녀를 두고 있었는데, 승무원 출신인 일본인 부인과는 1981년에 결혼했다가 1984년에 이혼했다. 딸은 임성민이 키우고 있었고, 전처는 미국에서 생활했다.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딸에 대한 애뜻한 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3. 출연작 목록[편집]
3.1. 드라마[편집]
3.2. 영화[편집]
3.3. 방송[편집]
3.4. 광고[편집]
4. 수상경력[편집]
5. 참고 자료[편집]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항목
- TV가이드 1984년 3월 3일자(제135호) <금남의 집>서 인기끄는 임성민 p44~45.
- TV가이드 1987년 1월 31일자(제284호) <노다지>로 새출발한 임성민 p44~45.
- 배우‧탤런트가 되려면 - 정중헌 저. 태광문화사. 1987. p175~176.
- 유튜브 채널 'TV탤런트' 영상
[1] 음력 1956년 1월 14일[2] 해당 단체 출신 배우로는 임성민 외에 이영하가 있고, 감독으로는 정지영, 장길수, 신승수 등이 있다.[3] 다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본명인 임관배와 예명인 임성민의 필모그래피가 각각 나뉘어져 있으며, 네이버 영화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KMDb에선 2022년경에 프로필이 통합되었다.[4] 이에 따라 그가 맡던 배역은 이덕화로 교체.[5] 제작은 1984년, 개봉은 1985년 3월 1일.[6] 박영규, 김구미자, 진희진 등과 함께 출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로 나와 일본인 자매인 김구미자, 진희진과 정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7] '푸른 해바라기'에선 절친의 여친을 탐하는 역할, '황금의 탑'에선 크게 도약해서 절친을 죽이고 약혼녀를 빼앗는 무자비한 역할을 맡았다. 두 드라마 모두 메인 남주인공은 홍요섭.[8] 당시 드라마 한편으로 떠서 아줌마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배우로는 '내일은 잊으리'의 박영규(배우)와 '엄마의 바다'에 나온 독고영재가 있었다.[9] 미완성 상태에서 대종상을 받아 논란이 된 그 작품 맞다. 1997년 12월에 지각 개봉했다.[10] 현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부상자들도 이 병원에서 수용되어 있었다.[11] 급성 간염 악화로 입원이 장기화되어 중도 하차하면서 극중 해외출장 도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됨.[12] 급성 간염 악화로 입원한 관계로 중도 하차하면서 극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됨. 이세현의 포지션은 사촌동생 이강현(손창민 분)이 물려받았다.[13]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14]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15] 개봉 기준. 제작은 1996년에 마쳤다.[16] 현 MBC 연기대상.[17] 현 SBS 연기대상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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