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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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410호

1411호

1412호
금동 당간 용두
임신서기석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권15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411호
임신서기석
壬申誓記石


파일:임신서기석.png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명문류
수량/면적
1점
지정연도
2004년 6월 26일
건축시기
신라시대(552 또는 612년)

파일:임신서기석 전후면 사진.png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임신서기석의 전후면 사진.

1. 개요
2. 비문 작성 연도
3. 내용
4. 외부 링크
5. 보물 제1411호
6. 여담



1. 개요[편집]


임신서기석()은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곡리 석장사 터 일대(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소재)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비석으로, 돌의 재질은 점판암이다. 2004년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임신서기석은 임신년에 서약하여 기록한 돌이라는 뜻으로, 비문의 첫머리에 '임신(壬申)'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쓰여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비문 내용은 신라 청소년들이 착한 일(충효 실천)을 하고 공부(유교경전 학습)를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2. 비문 작성 연도[편집]


비문의 임신년이 정확히 어떤 연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문 내에 신라 국학(國學)의 주요 교과목이 등장하는 점 및 화랑의 정신을 강조한 점을 들어, 화랑도가 가장 전성기를 맞았던 때인 552년 또는 612년으로 추정한다.[1]

학계에서는 이중 612년설이 다수인데, 국립경주박물관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신라문물연구 9집(2017.01. 국립경주박물관)에 실린 논문을 통해 (앞에서 언급한) 특이한 문장 구조와 동사가 반복되는 문체가 6세기 비문과 목간에서만 등장하는 점을 근거로 서기석의 임신년이 552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임신서기석이 그보다 훨씬 늦은 8세기 혹은 9세기의 비석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경상대학교 사학과의 윤경진 교수는 비문에서 나라가 불안하거나 대란인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전쟁으로 신라가 혼란한 상황인 552년이나 612년이 될 수는 없고 나라가 안정된 삼국통일 이후의 비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무열왕 시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수가 배웠던 책보다 수준 높은 책들을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들이 공부하기로 맹세했다는 점도 6~7세기 비문으로 볼 수 없다는 근거로 보았다. 윤경진 교수는 비문 작성 연대를 신라의 오경 교육이 정립된 시기인 독서삼품과 시행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보고 792년 또는 852년의 비석이라고 판단했다.#

이 비문을 통해 늦어도 9세기 무렵에는 신라의 지배계층 청년들이 오경을 읽고 이해하기를 숙제처럼 여겼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552년설이 입증된다면 신라 사람들이 적어도 6세기부터는 이두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3. 내용[편집]


임신서기석의 비문 탁본.
원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乱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하였기에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는 충의 도를 잡아 지속하여 잘못과 실수가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이 실패하면 하늘의 큰 화를 받으리라 맹세한다.

만약, (그 안에) 나라가 불안해지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 오면 (나라를 위해 중단도)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로 맹세한 것이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상서·예기·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신미년은 임신년의 전해이다. 임신서기석을 쓴 사람들이 신미년에 먼저 맹세하고, 이듬해(임신년)에 다시 맹세한 것이다.

위 비문을 잘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문의 주어-서술어-빈어(목적어, 보어 등) 순서를 따르지 않고, 한자를 우리말 어순대로 주어-빈어-서술어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한글 전 한국어 표기의 일종으로 서기체라고 한다.

조사나 용언 어미 같은 형식 형태소(문법 형태소, 허사)는 빈약고며, 실질 형태소(어휘 형태소, 실사)를 정통 중국식 한문, 즉 정격한문(正格漢文)이 아니라 우리말의 형태를 따라 나열한 문체이다. 임신서기석만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 신라의 다른 금석문에도 이처럼 우리말 어순으로 한문을 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울주 천전리 암각화의 원명과 추명도 그렇다.

비문을 보면 "天(하늘)前(앞에)誓(맹세한다) 今(지금)自(으로부터)三年以後(3년 이후에) 忠道(충도를)執持(집지하고) 過失(허물이)无(없기를)誓(맹세한다)"와 같이 우리말 순서에 맞아떨어지도록 배열하였다. 해당 부분을 정격한문의 어순대로 고친다면 "二人幷誓記 誓(於)天前 自今以後三年 誓執持忠道 无過失之 ..."가 된다.

임신서기석 문장의 어순을 두고 '실제로는 우리말이 아니라 정격한문식 표기가 맞는다.'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반론에는 허점이 있다. 이 주장대로 '誓'의 어순을 달리 본다 해도 여전히 중국의 한문 표기로는 읽어내기 힘든 부분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당 글의 저자의 입장대로 '誓 若此事失 天大罪得'라고 본다 해도, '若此事失'에서 '失'이 목적어 '此事'의 앞으로 오지 않고 가장 뒤에 배치된 것이나, '天大罪得'의 '得'이 목적어 '大罪'의 앞에 오지 않고 역시 가장 뒤에 배치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반론을 제기한 이의 글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중국의 문헌 사례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여기의 불안이나 가용은 중국식 표기이나 이는 우리말처럼 사용된 한자어로, 오늘날의 '불안한 마음', '살생하지 말라'와도 같다.


4. 외부 링크[편집]




5. 보물 제1411호[편집]



임신서기석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의 점판암제(粘板巖製)로,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라 호칭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한자·한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금석문 유물로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젊은이들의 신서(信誓) 관념의 표상물(表象物)이고,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명문의 임신년(壬申年)은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이며 서예사적(書藝史的) 측면에서도 자형과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金石文)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6. 여담[편집]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축제 이름이 이 문화재 이름을 따서 '임석대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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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경주박물관 해설 참조(공공누리 제1유형: 출처 표시에 따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