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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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애
林春愛 | Lim Chunae


파일:임춘애.jpg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3관왕 달성 당시

파일:external/www.xportsnews.com/1396022036846.jpg

현재
출생
1969년 7월 1일 (54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現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나주 임씨[1]
학력
성남상원초등학교 (졸업)
성남여자중학교 (졸업)
성보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 / 학사)
신체
170cm[2]
종목
육상
주종목
중장거리(800m, 1500m, 3000m)
가족
남편 이상용, 장녀 이지수
장남 이현우, 차남 이지우[3]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수상 기록
5. 기타
5.1. 라면 이야기의 진실



1. 소개[편집]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한 대한민국의 前 육상 선수다. 한때 라면 소녀로 알려진 육상계의 아이돌로 알려졌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라면만 먹고 뛴 것처럼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1986 서울 아시안 게임[편집]


원래는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서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선발전 이후에 치러진 전국체육대회 3000m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임춘애를 국가대표로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뒤늦게나마 국가대표에 합류했다.

국가대표로 깜짝 발탁된 임춘애는 1986 아시안게임에서 '신데렐라'로 거듭났다. 여자 육상 800m, 1500m, 3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다.

3000m는 중국 선수에게 개인 최고 기록에서 10초 이상 뒤진 기록이었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이 열릴 당시에는 중국 선수의 기록에 기복이 있었고, 임춘애는 포텐이 터지면서 금메달을 땄다. 800m는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앞서 들어온 인도 선수가 파울로 실격당해 임춘애가 우승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 게임 3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2.2. 1988 서울 올림픽[편집]


많은 활약을 했던 아시안 게임과는 달리 올림픽에서는 부진하였다. 사실 기록이 딸려서 출전권조차 못 따냈다. 올림픽에 아예 출전을 안한 건 아니었는데[4], 세계의 벽을 실감하며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와중에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따고 포상금 받으니 배가 불렀다는 웃지 못할 비난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점은 잘못된 비난이다. 육상에서의 세계의 벽은 정말 에베레스트만큼 높은 벽이다. 2015년 현재에도 육상의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기록경기 어느 종목을 봐도 한국 기록은 세계 기록과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난다. 우리나라는 마라톤에서 성과를 낸 것 말고는 육상에서 상위권에 들어 간 것을 찾기도 힘든 수준이다. 이는 헝그리 정신으로 극복할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메달이나 순위 문제가 아니라 기록 자체가 부진한 진짜 이유가 있었는데 학대에 불과한 비과학적 훈련에 시달린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임춘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떡잎을 알아보고 전담 코치를 자처한 김번일[5]은 사람을 보는 눈이나 열정은 있었어도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시시때때로 구타로써 근성을 강요하였고, 급기야는 기록이 오르지 않는다고 감정적으로 뺨을 후려쳐서 고막을 파열시키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성인도 아닌 '소녀'에 불과했던 임춘애는 아시안 게임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후 올림픽 대비 훈련을 하면서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성장기에 무리한 운동을 한 때문에 골반에 금이 갔고, 더 이상 운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다만 선수로써 서울 올림픽에 크게 활약하진 못했으나, 성화 봉송 주자로써 개막식에 등장하게 되었다. 임춘애는 직전 성화 봉송 주자로 들어온 손기정 옹에게 성화를 이어받아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에게 성화를 넘겨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결국 서울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 은퇴하여 완전히 육상계를 떠나게 된다.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었던 임춘애는 축구선수 출신의 '이상용'씨와 결혼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그를 소개해준 사람이 김주성이라고 한다.

3. 은퇴 이후[편집]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육상과는 담을 쌓은 채 살았다. 하지만, 육상계에 후배 양성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2010년에 성남시 소속의 학교 전문코치로 다시 육상계에 복귀했다. 현재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 수상 기록[편집]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6 서울
800m
금메달
1986 서울
1500m
금메달
1986 서울
3000m
아시아선수권
동메달
1987 홍콩
800m

5. 기타[편집]


  • 육상계에서 체육연금을 받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임춘애를 포함해서 마라토너 이봉주와 투포환의 백옥자 선수 정도가 전부라고한다. 황영조는 연금 대신 일시금으로 받았다고 한다.[6]


  •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주자가 되었다. 경기장에 마지막 도입 주자였던 손기정에게 성화를 받아서 경기장을 한 바퀴 돈 다음 3명의 최종 점화자[7]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 1988년 7월 16일, KBS 1TV로 방영한 애니메이션 아리수변 꿈나무가 바로 임춘애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재방송을 지겹게 하던 다른 KBS 당시 애니메이션이랑 다르게 재방영도 없었기에 본 사람이 적다. 심지어 비디오조차 제목이 영광의 트랙이고, 임춘애의 이름도 개명되었다.[8] 이미지 구하기조차 어렵다. 참고로 이는 KBS와 C&D의 합작이다. 유럽에서 상까지 탈 정도로 작품성 자체는 괜찮았지만 정석적인 작품으로 제작되었고, 결정적으로 올림픽 시즌을 노린 홍보용 작품으로 제작되다보니 임춘애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홍보용 애니메이션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고 결국 방영은 했지만, 묻혀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 듯하다.[9] 어찌나 묻혀있는지 방송된 채널이 KBS1이 아니라 MBC로 와전되기도 할 정도이다. 비슷한 소재의 달려라 하니가 계속 재방영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 라면 루머에서 '우유를 더 마시고 싶다', 더 나아가 우유 마시고 키컸다라는 루머가 나왔는데[10] 임춘애는 정작 우유 마시면 탈이 나서 우유를 못 마시는 체질이었다고 한다. 사실, 라면 이미지의 원조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병근이다. '배가 하도 고파서 라면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먹었다'는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무명시절의 안병근이 가난했던 것이 사실이긴 해도 저런 인터뷰 내용은 과장된 것이라고 직접 증언하였다. 게다가, 격투기나 체조 종목 선수들은 체급을 유지하기 위한 식이요법과 체중 감량 문제로 인해 언제나 먹는 것을 조절해야 되기 때문에 늘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기계체조 선수 양학선도 금메달을 따내자 유사한 라면 논란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닐하우스에 사는 부모님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라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라면 업체에서 라면을 협찬하고, 건설 업체에서 아파트를 후원하는 등 광고 효과를 노리는 대기업들에게 본의아니게 엮어버렸다. 그래도 임춘애의 경우와 차이점이 있다면, 양학선은 실제로 라면을 정말 좋아해서 운동이 끝나고 많이 먹는다는 점이다. 사실, 양학선 선수는 라면을 먹어도 살이 찌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운동량이 워낙에 많기 때문에 온몸이 근육질을 유지하는데다 체중 조절도 잘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체조 특유의 엄청난 운동량으로 인해 라면 2~3개 이상을 먹어도 칼로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한다. 왠지 맥너겟을 즐겨먹는 우사인 볼트와 비슷하다.

  • 고등학생 때는 가난해서 음식을 못 먹어서 키가 150cm대로 작았지만, 대학 진학 이후 영양 상태가 좋아져 부쩍부쩍 커서 160cm로 올랐다고 한다. 결국, 라면 루머가 말이 안 되는 것도 성장기때 뭐든지 잘 먹으면서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신장은 170cm가 되었는데, 대한민국 여성으로서는 평균 신장보다 훨씬 큰 편이다.


  • 2014년 8월 27일 후배 김성은 선수에게 조언해준 내용이 기사로 올라왔다.

  • 걸그룹 식스밤이 '2016 동아일보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10km 코스를 완주하였는데, 기사에 의하면 임춘애의 특별 지도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5.1. 라면 이야기의 진실[편집]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들이 부러웠고요."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기사가 나왔었는데 사실이 아니며 이는 임춘애가 직접 발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난하게 살았던 건 사실이다.

임춘애 학교의 육상부 코치였던 김번일이 육상부의 열악한 환경을 이야기하며 나온 이야기였다.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간식으로 라면만 먹는다는 식으로 기자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기자가 이를 왜곡해서 임춘애를 비롯한 육상부 선수들이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고 기사를 쓴 것이 사실처럼 전달된 것이다.

후에 그 기자가 왜 그런 왜곡 기사를 작성 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도 열악한 육상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좀 더 후원을 많이 받게 해주려고 인터뷰 내용을 심하게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당시 큰 대회를 앞두고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것이 가난을 극복한 스토리는 그런 영웅이 탄생하기에 적합한 이야기였기에 사람들은 라면 소녀에 열광했다. 실제로 이 기사가 나간 이후로 상당한 후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각인효과가 너무 커서, 그녀는 영영 라면 소녀로 각인되어 버렸다. 게다가 넘버 3같은 영화에서 이렇게 나오면서 각인 효과는 풀리지 않는다.

"이게 다 라면 먹고 이룬 거야. 뭐 복싱 뿐만이 아니야. 그 누구야. 현정화, 현정화 걔두 라면만 먹고, 음? 금메달 3개씩 따버렸어."
“임춘애입니다. 형님”
“나가 있어.”
(저 말을 한 부하를 두들겨 팬다.)
- 영화 넘버 3 중에서.[11]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당사자는 '라면 소녀'라는 타이틀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가능한 것 같지가 않다. 최근의 인터뷰를 보면 그냥 포기한 듯 싶긴 하다. 당사자가 아무리 해명하려 하여도 씨알도 안 먹힌다고 한다.

“몇해 전에도 해명을 했는데… 라면 이야기는 제가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저를 발굴하고 길러주신 김번일 코치 선생님이 하신 인터뷰에서 열악한 학교 육상부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선수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 조금 환경이 좋은 학교는 우유도 지원된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임춘애가 17년 간 라면만 먹고 뛰었다','우유 먹는 아이들이 부러웠어요'라고 쓰는 바람에 이후 제가 '라면 소녀'로 불리고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죠. 당시 체력보강을 위해서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는데 라면만 먹고 어떻게 뛰겠어요.”
2010년 4월 16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상식적으로, 운동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니 뭐니 그딴 거 전혀 없고 뭐든지 잘 먹어야 운동을 할 수 있다. 하다 못해, 그 찢어지게 가난한 윗동네 북한에서 조차 운동 선수들만큼은 절대로 굶기지 않고 영양 섭취를 잘할 수 있도록 잘 먹여서 운동을 시킨다. 그만큼, 뭐든지 잘 먹어야만 몸도 건강해지고 체력도 붙어서 운동을 잘 할 수 있다. 당연히 나트륨이 잔뜩 들어간 라면만 먹으면서 운동하면 영양섭취도 올바르게 되지 않는데다 체력도 쉽게 안 붙을 것이 분명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언플 자체가 흑역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임춘애의 키가 170cm 정도인데 여성의 신장의 변화가 거의 멈춘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1980년대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성장기 때 운동도 열심히 잘 하고 뭐든지 잘 먹어서 키가 큰 것이다. 결국, 본인이 한 말도 아닌데 본인이 한 말로 아직까지도 오해받고 있다.

참고로 70년대에는 라면이 부자들이나 자주 먹을 수 있는 비싼 가공 음식[12]이어서 헝그리 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음식이었지만, 80년대 초중반에서는 값이 싸지기 시작하여 배고픈 사람들이 애용하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응답하라 1988 1화에서 김정봉이 임춘애의 이력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위의 라면 발언을 전면 부정하는 멘션을 하기도 했다.
[1] 장수공파 31세이며, 아버지 임을택(林乙澤)은 30세 택(澤) 항렬이다.[2]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62cm에 불과했다.[3] 쌍둥이다.[4] 주최국 자격으로 4x400m 계주에 출전했다.[5] 이 사람은 육상 선수 출신이고 학교에서 일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다녔지만, 지도자 교육을 따로 받지 않고 코치를 맡다보니 체육학 지식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무리수가 작렬할 수 밖에 없었다. 당대에 나름대로 가방끈이 길었다는 김동엽이나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써낸 박종환도 선수들을 빡세게 구른것을 생각하면 당대 스포츠 지도에 있어서 그런식의 빡세게 구르는 방식이 정석으로 여겨졌던 때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장기간 코치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 있기에 당시 어린 임춘애를 보고 기록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날렵한 체형과 뛰고 나서도 별로 숨을 차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야! 물건이다!"라 했다고 한다.[6] 아시안 게임 금메달 점수는 10점이고, 연금 점수는 30점부터 지급된다. 아시안 게임 3관왕을 차지해서 최소 요건을 충족한 사례다.[7] 남자 마라톤 선수 김원탁, 전남 신안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체육교사 정선만, 여고생 무용학도 손미정 등 3명이 성화대에 성화를 점화했다. 참고로 3명의 점화자가 성화대에 성화를 동시에 점화한 것은 이 때가 올림픽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8] 물론 줄거리도 실제와는 다르게 영양실조 얘기까지 나오는 등 적절히 각색되었다.[9] 비슷하게 홍보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달려라 호돌이'는 아리수변의 나무와는 정반대로 어느정도 인기는 있었지만 올림픽 헌장에 따라서 올림픽 시즌이 끝나자마자 MBC 아카이브실에서 잠들고 있다.[10] 탤런트 이의정이 출연한 예능프로에서 우유 마시고 이와 관련해 임춘애와 통화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도 위의 라면루머와 우유루머를 부정했다. 라면은 선생님이 간식으로 가끔 준 거고 우유는 아예 마시질 못한다고 밝혔다.[11] 이 대사는 대화가 필요해에서도 패러디가 된다.[12] 현대처럼 대량생산이 안되었던 시절이고, 밀가루 곡물 공급 부족시기인데다가 인기 끌 지 안 끌지도 몰랐어서 싸게 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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