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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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파 초대 종주


조선 선조의 왕자
임해군 | 臨海君


임해군묘 전경
출생
1572년 9월 20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609년 6월 3일 (향년 36세)
조선 경기도 교동면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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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진국(鎭國) → 진(珒)
부모
부왕 선조
생모 공빈 김씨[1], 양모 의인왕후
형제자매
14남 11녀 중 장남
배우자
군부인 양천 허씨
자녀
슬하 1녀 (양자 1남)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요절
양자 -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 1616 ~ 1644)[1]

작호
임해군(臨海君)[2]
시호
정민공(貞愍公)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후손
5. 평가
6. 기타
7. 대중매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왕족, 선조의 서장자이며 공빈 김씨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친형이다.


2. 생애[편집]


선조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5살 어린 나이에 친모인 공빈 김씨가 사망하면서 적모 의인왕후 손에서 자랐으며, 동복동생인 광해군과는 달리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는 탓인지 의인왕후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복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막장이자 인간 말종으로 악명이 높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자 시절부터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인간쓰레기 왕자이다.

개차반 인성을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중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1]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는데 원래의 임무는 하지 않고 순화군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한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닌 사건이다.[2] 결국 참다못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기고 말았다. 즉, 왕자들을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할 정도로 빡쳤다는 말.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을 이해하고 막장 왕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3]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나지만 임해군은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성격이 포로 생활 동안 겪은 일 때문인지 더욱 막장이 되어버려서[4][5]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깽판만 치고 다녔다. 이렇게 단단히 미쳤음에도 그래도 왕자라고 정문부가 난리통 속에서 그를 구했으나, 정문부도 전쟁 중에 반란을 도모한 국경인을 척살하기 위해서였지 임해군을 위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일단 임해군은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폭행,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6],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7]를 살해[8]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임해군의 부하인 김덕윤이 지시를 받고 유희서의 살해에 가담해서 체포당했는데, 감옥에서 의문사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여 범인으로 임해군이 지목받기도 했다. 이때 한음 이덕형의 상소를 받은 선조도 임해군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조는 임해군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며, 임해군을 질책하기만 하고는 처벌은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또한 임해군을 수사한 포도대장을 파면하여 징역을 살게 했으며, 임해군을 고발한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게도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형에 처했다.[9]

무엇보다 임해군은 형제간의 우애도 나빠서 친동생인 광해군 때문에, 자기가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해군을 미워했다고 한다. 이는 적반하장보다는 광해군에게 임해군이 품은 일방적인 열등감에 가까울 듯하다. 광해군도 그런 임해군을 증오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명색이 친형이라는 작자가 왕실의 모범을 보이고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힘을 써서, 왕족에 대한 여론을 계속 깎아먹고 있으니, 어떻게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세자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친형제가 아니라 원수였을 터이다. 임해군이 올바르게 처신했다면 장자로서 유력한 세자 후보가 되었을 터이니 광해군을 질투할 이유도 없을 일이었다.

이렇게 임해군은 백성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형제마저 학을 뗄 정도로 인성과 행실이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선조도 명색이 장남인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11] 개막장이라 불러도 할 말 없는 임해군의 더러운 인성을 보면 그가 왕이 될 경우, 연산군보다 심한 암군이자 폭군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12] 다만 선조는 임해군을 세자로만 안 삼았을 뿐이지 거의 모든 조정 대신들에게서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데도, 계속 자기 아들을 감싸기만 했다. 이에 임해군도 기고만장해졌는지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당연히 광해군도 이렇게 만행 밖에 저지를 줄 모르는 동복형 임해군을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고[13],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가 끝끝내 감싸고 돌아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임해군을 거의 유일하게 비호해주던 선조가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훗날 영창대군을 지키기 위해 사실상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서인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 당파를 초월한 모든 곳에서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14]

물론 옥사 과정이 한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해군이 고변을 들었을 때야 "내 형이 그럴 리 없다." 했지만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15]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부터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황당한 과정을 거친 것.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도귀양 보내버렸고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제기될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16] 훗날 인조 때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는데 이 독살설도 '반정 세력의 권력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임해군도 자기가 살 길을 모르는지 맨날 무사들과 어울리고[17] 자신이 잡힐 것 같자 여장을 하고 도망쳤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마당에 도망까지 쳐서 아예 역적 인증을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3. 가족 관계[편집]



  • 부인 : 군부인 양천 허씨(陽川 陽川 許氏, 1571 ~ 1644) - 부제학 허명(副提學 許銘)의 딸
    • 장녀 : 요절
    • 양자 :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 1616 ~ 1644) - 경창군의 차남
    • 며느리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도정 홍여익(都正 洪汝翼)의 딸
      • 손자 : 익풍군 이속(益豐君 李涑) - 김창업(金昌業)의 장인
      • 손녀 : 무과 이정창(武科 李鼎昌)의 처

4. 후손[편집]


군부인 양천 허씨 사이에서 딸 한 명을 두었으나 딸은 요절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친아들은 없다. 그런데 KBS 〈역사스페셜〉에서 '임해군의 아들이 일본의 어떤 영주(다이묘) 밑에서 자라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도한 에도 시대의 저명한 일연(日延) 스님이 되었다고 하며 딸은 도가와 다츠야스의 (측실)으로 살다 죽었다'는 내용의 방송을 한 적이 있다. 해당 방송은 임해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과연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처럼 생포된 사람들의 이름이나 직책도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지만 임해군의 자식들의 이야기는 없다. 왕릉 도굴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임해군 자녀들의 이야기는 일종의 야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에는 가쿠린지(覚林寺)라는 일연이 창건했다는 일련종의 이 있다. 이 절에서 모시는 신은 세이쇼(清正) 공이라는 신으로 바로 가토 기요마사를 신격화한 것이다.[18] 주지하다시피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을 납치한 사람이며 해당 절의 자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 번의[19]에도 저택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경창군의 차남 양녕군이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현재 전주 이씨 계파 중에 임해군파가 존재한다.

양녕군은 독자 익풍군을 낳았고, 익풍군은 아들 임원군과 임흥부수, 딸 1명(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업의 부인)을 낳았다. 임원군과 임흥부수는 각각 아들 2명을 두었으나, 이들도 아들이 1명 내지 2명인데다, 이들의 자손들마저도 대부분 아들을 1명 내지 2명 낳아서[20][21] 그나마 명목상으로 남아 있는 후손들의 수도 굉장히 적다.


5. 평가[편집]


장남이면서도 일찌감치 세자 경쟁에서 배제되었고, 명색이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그 누구도 임해군을 배제한 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을 보면 불량하고 추악한 인성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장남도 우수하고 차남도 우수한데 차남이 더 우수하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있겠지만 임해군은 비길 데 없는 인간 쓰레기였다. 거기다가 임해군도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서자였기 때문에, 광해군은 임해군에 비해서 입지상에서 뒤떨어질 것이 없었으므로 임해군이 세자에서 밀려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서도 당대의 사관이 평한 글을 보면 온통 악평 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역대급 막장 왕족이다. 저지른 악행이 많다보니 임해군이 살아있을 때 무뢰배들과 종실의 망나니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해서 대신의 집을 습격해 강도질을 저지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특히 사관이 "자업자득이다" 식으로 평해놓을 정도. 실록의 기사. 오죽하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과 인조도 임해군을 죽인 일은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을 정도다. 폐위 명분으로 잘 알려진 폐모살제라는 표현에 '살형'은 포함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보다시피 여러 면에서 개막장인 인물이지만 선조인조반정 주도 세력들의 광해군 견제, 깎아내리기 및 후대의 인지도 부족 및 동정심 등으로 인해 상당히 충공깽스러울 정도로 미화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양녕대군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


6. 기타[편집]


  • 임해군과 비슷한 사례로 과거 태종이 죽은 후에도 양녕대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치기는 했으나[22] 세종은 그런 의견을 다 묵살하고 끝까지 못난 형을 지켜줬던 것과 종종 비교된다. 다만, 양녕대군은 그런 동생 세종의 노고에 보은하기는커녕 세종 재위기에도 내내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닌 것은 물론 세종이 죽은 후에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을 대놓고 지지하고, 이후 왕실 여론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막장 짓거리를 하고 다녔다.[23]

7. 대중매체[편집]


사극에서는 입체성이 필요해서인지 마냥 미화하거나 사이코로 묘사되지는 않고 음모에 휘말린다거나 양녕대군처럼 위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7.1. 드라마[편집]


  • 1982년 MBC 드라마 〈여인열전〉 - 서궁마마 편[24]에서는 배우 김무생[25]이 연기했다.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편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순화군과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다가 국경인과 국세필의 밀고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위치가 노출되고 온성구조사 이수가 직접 가토 기요마사에게 임해군과 순화군을 넘겨준다.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김유석이 연기했다. 상당히 미화되어 나오는데 패악 행각은 나오지 않으면서 무인 기질의 인물로 광해군과 왕위를 두고 대립하는 라이벌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심지어 임진왜란 때도 의병활동을 하다 왜군에게 잡힌것으로 나온다. 선조 독살 소문을 듣고 명나라와 손잡으려다 광해군이 자기를 보호한 걸 알고 명나라 사신 앞에서 미친 척 연기하는데 이걸 보고 이항복 등의 온건파 대신들은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왕자"라고 감탄하고 이이첨 등 대북도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대북의 결론은 "그래서 더욱 죽어야 한다"라서 살해당한다.

  • 2013년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는 어린 시절은 배우 이인성이, 성인 시절은 배우 이광수가 연기했다. 실제 역사 속 임해군에 비해 포악함보다는 찌질함과 푼수 같은 면모가 강하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박주형이 연기했다. 막장이었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서인지 실제 역사의 임해군과 매우 가깝게 묘사되었다는 평을 받았고 역사대로 성격을 빌미로 세자가 되지 못했으며 시종일관 막장 짓을 벌였다.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윤홍빈이 연기했다. 임진왜란기가 중심인지라 등장이 잦지는 않은데 포악하고 거친 면모보다는 왕자랍시고 기세만 등등하며 정말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최종환이 연기했다. 광해군과 대립 모드가 아닌 조력자 역할로 나오나 매번 무리수를 두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포지션이다. 결국 광해군의 즉위 후 반역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제거되는 것으로 나온다.



7.2. 영화[편집]


  • 1962년 개봉한 영화 〈인목대비〉에서는 배우 김승호가 연기했다.



7.3. 만화[편집]



  • 네이버 웹툰 《오성X한음》에서도 패악은 어디 가지 않아서 오성 이항복이 추노꾼 최오십동과 함께 임해군의 귀양지로 가서 임해군을 죽이려 한다. 차마 임해군을 죽일 수 없었던 이항복과 최오십동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도망을 치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네이버 웹툰 《녹두전》에서는 어린 이혼을 괴롭히는 형 '이진'으로 나오는데 결국 왕이 된 이혼에게 죽는다.

  • Why? 한국사 - 왕자와 공주》 편에서 임해군을 다루면서 위에 나온 자식들이 일본으로 잡혀갔다는 야사를 서술하고 임해군이 원래부터 막장끼가 있었지만 자식들과 생이별한 후 더욱 막장이 되었다고 묘사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 말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만력제황태자주상순을 두고 일으킨 후계자 교체 문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입장을 바꿔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이 상황에서 서자라고는 하나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이 정신을 차리고 얌전하게 행동하면, 다들 임해군이 세자 자리를 노리고 점수를 따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이에 박시백은 임해군이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망나니짓을 한 건, 목숨을 보전하려는 임해군 나름대로의 처세가 아니냐는 설을 제시했다.[26] 하지만 문제는 광해군에게 자신의 충정 의사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서술한다.[27]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한들 상상 이상의 막장 행각을 저지른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권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존재로 찍혀버려 스스로 자기 명을 재촉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28]


7.4. 소설[편집]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의 반정으로 함흥으로 파천하다 왕실 가족들과 함께 혜산으로 또 파천하게 된다. 현실의 개같은 인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여진족들이 조선에 와서 깽판을 벌이는 것에 찬동하고 파천길에도 타령을 하여 주변인들이 혀를 찬다. 결국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여진족들이 왕실 가족들을 살해하는 와중에 살해된다.

  •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아버지 하성군 대신 가공 인물인 경성군이 왕이 되어서 왕자가 아닌 종친이다. 역사처럼 각종 악행을 저지르는데 무리를 모아 조폭짓을 하며 지내다가 일본의 차차가 조선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자 차차의 미모와 재산에 반해 차차를 강간하여 아내로 삼으려다가 오히려 차차가 놓은 덫에 걸려 차차의 남편이 되기는 하되 분노한 왕(현대인인 소설 주인공이 빙의한 상태임)에게 곤장을 쳐맞고 차차에게 잡혀 산다. 차차는 평강공주온달을 장군으로 길러냈듯 임해군을 장군으로 길러내 후일 조선의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으로 임해군에게 무술 훈련을 빡세게 시킨다. 그러나 임해군은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북방 여진족과의 대전쟁에서도 민간인 학살과 강간이나 저지르고 이 사실을 눈치챈 이순신과 이항복에 의해 경계 근무로 돌려지는데 사실상 적군의 손에 죽으라고 보낸 것. 이를 모르고 술판을 벌이다 수하들은 적군의 기습에 의해 몰살되고 임해군 본인은 때마침 배탈이 나 술을 안 마시고 따로 있다가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돌아오지만 경계 근무에 실패한 책임으로 장창병으로 강등되어 굴려지고 돌아와서도 차차에게 갈굼당한다. 결국 나비 효과로 죽지 않고 일본을 통일오다 노부나가에게 설득되어 오다 노부나가의 막내딸 아이히메를 둘째 부인으로 맞는다. 오다 노부나가의 괴뢰가 되고 조선 왕을 하겠다면서 왜군과 함께 조선에 침공하며 자신의 노비들을 왜군의 첩자(순왜)로 협조하게 하는 반역질을 저지르지만 주인공이 왕이니 패망은 확정이고 어떻게 죽을지가 문제. 신립을 회유하다가 신립에게 를 물어뜯겨 짝귀가 된데다가 오다 노부나가도 학을 떼고 주인공과 평화 협상만 타결되면 선물로 줘버리겠다(=주인공 손에 참수되든 말든 신경끄겠다.)고 생각 중이며 주인공은 친히 백각형 기술자를 중국에서 초청해올 계획이다. 차라리 전쟁에서 죽는 게 편하고 이제는 어느 쪽이 이기든 편히 죽기는 힘들 팔자. 조선군에게 참패한 오다 노부나가가 있지도 않은 반역자 탓을 하며 반역자를 색출하라고 해서 조선인 순왜들이 타깃이 되었을 때 부하인 국경인이 자신을 구하러 온줄 알고 따라나서나 국경인은 임해군을 바쳐야 자기 죄가 덜어진다는 꼼수로 임해군을 조선군에게 바친다(그러나 국경인도 참수당한다). 주인공에게 친국을 당하는데 사형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서비스를 베풀어줬다. 바로 명나라식 능지형인데 명나라에서 집행인을 데려온 다음 칼질 1천 번을 집행하게 하여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고 머리는 효수, 회떠진 살은 젓갈로 담궈져 전국에 조리돌림하는 처벌을 내린 것. 그의 살점은 강에 던졌고 와 머리는 모조리 태워버렸다고 한다.[29] 이후에도 가끔식 언급되는데 항상 '역도 이진'이라 불리며 주인공은 생각날 때마다 지거리를 한다.

  • 대체역사소설 《임해군》에서는 현대인이 빙의하여 동서 붕당을 조정하고 왕위에 올라 개혁을 진행한다.



8. 둘러보기[편집]


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임해군파의 종주
임해군가 역사 시작

1대 임해군 이진

2대 양녕군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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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순화군은 강원도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지만 강원도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가면서 함경도로 피해 임해군과 합류했다.[2] 함경도는 세조 이후로 조선 조정에서 천대받은 북방 지역 중 하나이자 거의 방치하던 지역이었다.[3] 다만, 함경도에서도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4]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던 가토 기요마사 측의 기록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포로로 잡은 조선 왕자들을 잘 대접했다는 것. 다만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잘 대접받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굴욕을 느껴서 성격이 망가졌을 수는 있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장남인 임해군이 있는데 왜 차남인 광해군이 즉위했냐'고 딴지를 걸자 '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미쳐버렸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차마 '타고난 미친 놈이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핑계로 둘러댄 명분일 공산도 있다.[5] 사실 왜군 입장에서야 적국의 왕자라면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으니 잘 대해주는게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를 붙잡아 왜군에게 넘긴 백성들이다. 온갖 갑질과 횡포를 당하다가 이판사판식으로 왕자를 적군에게 넘기는, 대놓고 반란을 한 셈인데 당연히 뒷일을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나라가 이대로 희망이 없다고 여기거나 저질로 놓고 도망칠 작정으로 한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원수같은 '왕자놈'을 과연 곱게 대했을까? 백성들에게 대놓고 갑질할 정도로 포악한 임해군 입장에선 백성들이 '감히' 자신을 붙잡아 적에게 넘긴 행위 자체가 엄청난 굴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 당시 공물은 조정으로 가는 중요한 물품인터라 멋대로 강탈한 것 자체가 당시에도 큰 범죄였다.[7] 영의정 유전의 아들로 한음 이덕형과 외종지간인데 형제보다도 더 친해서 이덕형이 사건 당시 특히 분개했다. 다만 유희서도 당시에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등 평판이 좋지 못했다.[8] 도승지는 현재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요 신하로서 왕의 최측근이자 심복에 속한다. 승정원의 승지 6명은 서로 품계는 같지만 도승지를 가장 높게 쳤다.[9] 이것도 처음엔 괘씸죄로 사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유희서의 어머니가 손자만은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해서 특별히 선처해준 것이다. 한 마디로 피해자들과 수사관을 처벌해버린 것. 이 사건과 처리가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기록하는 사관도 아예 기가 막혀서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악을 모르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라며 선조를 비판했을 정도.[10] 근데 막상 왕이 되고 딱히 재평가할것도 없이 부친 선조만큼 후진 왕이라, 주기적으로 서인쪽 사람들 등 마음에 안드는 신하들을 핑계대서 죽여대고 당파싸움을 나쁜 쪽으로 끌고가게 만들었다.[11] 사실 선조 자체도 임진왜란때 무능을 반복하던 막장왕이었기 때문에 임해군이 인간쓰레기짓하는 것이 잘 제한되지 못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가족 중 임진왜란때 극찬받을만큼 똑바로 살았던 사람은 광해군 밖에 없다. 선조가 양위 후 명나라까지 도망가려던 시도가 신하들의 강한 반발로 실패하자, 양위도 안하고 상세한 국정지시도 없이 광해군에게 실질적인 국정을 맡겨버리고 국경지역인 정주(신의주)로 도망가서 눈치만 보고 있을때, 광해군은 왜군들의 위세를 헤치고 용감히 강원도로 가서 국정과 민심을 열심히 살폈다. 심지어 임진왜란 시작할때 고작 17살, 요즘의 고등학생 나이였음을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10][12] 사실 연산군도 세자 때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고 왕이 된 이후 10년 동안 정치는 나쁘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의 사사를 명분으로 살인마가 되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을 고통받게 한 것이 문제.[13] 임해군이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열심히 살아도 모자른 판에 범죄만 저지르고 다닐때, 광해군은 정반대로 살았다. 조선의 피해현장들을 목숨걸고 찾아다니며 문제들을 수습하는 행정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세자(광해군)를 칭송하는 조선 백성들이 많았고, 선비들도 광해군에 대한 신뢰가 갑자기 높아졌다. 현대 학계에는 임진왜란 초기 세자(광해군)의 훌륭한 태도와 노력이 당시 자발적 의병 지원자들을 확 늘리는 전사회적 동기였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 [14] 다만 북인, 서인, 남인 등 모든 당파가 임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남인 내에서는 이원익, 이덕형, 정구, 홍가신, 서인 내에서는 심희수, 이항복, 북인 내에서는 정온 등이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제가 뭘 잘 몰라서 역적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라고 납작 낮춰야 했다. 남인 내에서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른 당파보다 많았기에 《하담파적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은 남인이 역적을 비호하였다며 공격해 남인들 중에 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안방준의 《혼정편록》의 기록에서 나온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대북파가 소북은 유영경의 당, 서인은 김제남의 당, 남인은 임해군의 당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파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15] 사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수순이다. 조선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가 역모 사건에서 형식적인 말조차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16] 사실 원래 계승 경쟁에서 밀려서 왕족을 죽인 경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게다가 암살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들은 '사망자들이 불행히 혹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식으로까지 기록되어 있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자기가 찝찝해서 죽였다고 그대로 대놓고 보여지기 식으로 기록되었다가는 자신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이다.[17] 이 때문에 초반에 임해군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18] '清正'는 훈독으로 "기요마사"인데 훈독으로 읽을 이름을 음독으로 읽으면 해당 인물을 좀 더 공경하여 부르는 것이었다. '기요마사'를 음독으로 읽어 '세이쇼'다.[19] 가토 기요마사가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改易)당하여 호소카와 가문이 구마모토 번의 영지로 들어온 것은 1632년의 일이고 해당 절의 창건 연도는 1631년이다.[20] 오죽하면 임원군의 아들 대 이후로 아들 3명 이상 낳은 경우를 찾으려면 헌종, 철종 시기까지 가야 한다. 임흥부수 계열에서는 고종 때까지도 독자 아니면 2남을 유지했다. 출처: 《선원속보 - 선조대왕자손록 권1: 임해군파보》[21] 임흥부수의 자손들은 그마저도 대한제국 멸망 이후로 후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22] 심지어 태종은 양녕대군이 나라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23] 다만 양녕대군은 임해군처럼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이거나 남의 집과 전답을 부수고 애먼 백성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싸이코스러운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며느리를 ntr 해서 아들을 미쳐죽게 만들기는 했지.양녕대군이 아무리 개판이였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면서 살았다는 걸 감안하면 임해군은 더더욱 쉴드가 불가능한 인간이다[24] MBC 〈여인열전〉 2번째 시리즈.[25]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추동궁마마 편에서는 이성계 역.[26] 임해군의 입을 빌려 "들어보라구. 말썽만 피우던 내가 갑자기 얌전해졌다고 쳐. 안 그래도 중국에서는 장자를 세자로 삼아라 하는데 다들 내가 세자 자리 노리고 점수 따려고 하는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라고 했다.[27] 대사에서 누군가가 임해군에게 "무사들과 어울린다며?"라고 묻자 임해군이 "아니... 그럼 내가 문신들이랑 어울리는게 맞다고 생각해?"라고 하는데 대답은 "아무랑도 사귀지 말아야지."였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문신이든 무신이든 조정 대신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지 않고 자신은 커녕, 집안의 노비들조차 말썽을 부리지 않았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해서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 예우받을 수 있던 것과 대조적이다. 임해군의 개망나니 성격을 감안해도 무사들과 어울리는건 왕을 시해하려는 의도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28] 물론 적당히 사고를 쳤다면 광해군도 옹호할 건덕지가 있었을 테지만, 당시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왕실의 권위는 추락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임해군은 옛날부터 심각한 말썽을 부렸으니 이쯤되면 처벌을 안 하는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이전부터 광해군과의 관계는 나빴고, 양녕대군 뺨치는 말썽을 상습적으로 저질렀다.[29] 이 때 주인공이 한 말이 걸작인데 주인공 왈 "그따위 개같은 쓰레기를 묻을 땅은 1평이라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