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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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규
林亨圭 | Hyung Gyu Rim


파일:임형규.jpg

출생
1953년 2월 4일 (71세)
경상남도 거제시
학력
경남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 학사)
한국과학기술원 (전자공학 / 석사)
플로리다 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 / 박사)
가족
배우자, 1남 1녀
소속 정당


경력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삼성전자 신사업팀장 사장
SK텔레콤 부회장
SK하이닉스 사내이사

1. 개요
2. 생애
2.1. 삼성전자 시절
2.2. SK 시절
3. 정계 입문 후
4.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삼성전자 사장 및 SK텔레콤 부회장을 역임한 기업인.


2. 생애[편집]


1953년 2월 4일 경상남도 거제군 신현면 고현리(現 거제시 고현동) 157번지에서 신현서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임수근(? ~ 2004)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계룡초등학교거제고현중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부산시로 이사해 경남고등학교(26회)를 졸업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1976년 졸업했다.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적성이나 흥미, 미래 계획이 아니라 그냥 '최고 학과에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점수 맞춰 들어갔다. 당시 전자공학과가 가장 점수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물리를 좋아했는데 반도체는 물리에 가깝고 논리적이어서 적성에 맞는 반면 전자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반도체로 진로를 정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반도체 회사는 '삼성반도체'였기 때문에 거기 지원했다. 공채 1기였다.

입사 후 삼성전자 KAIS (현 KAIST) 학술연수로 반도체 쪽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기회를 2명에게만 주었는데 임형규가 그 기회를 잡았다. 당시 연구실에 실험장비가 한참 설치되던 중이라 그는 photo room을 담당해서 실험실을 직접 꾸몄다. 그 당시 해 봤던 일들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때 이론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KAIS에서는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켜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6개월만에 졸도하는 학생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1978년 초 전기전자공학 석사 학위[1]를 취득했다.


2.1. 삼성전자 시절[편집]


석사 받고 첫 근무지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삼성반도체 연구소였다. 삼성전자 기술개발실에 1978년 2월 입사해 1981년 여름까지 근무했다. 이후 삼성그룹이 사내인재들을 대상으로 해외 박사학위까지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삼성 지역연수제도'를 만들면서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다. 이 제도를 통해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전자공학과 박사과정에 1981년 입학해서 1984년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 서류상으로는 82년 9월까지 삼성전자 기술개발실 근무, 82.10 ~ 84.08에는 삼성반도체통신 MOS개발 담당 과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귀국 후 84.09 ~ 85.11에는 삼성반도체통신 SSI공정 담당차장 (수석연구원 직급)으로 근무했다. 85.11 ~ 89.02에 삼성반도체 NV메모리설계팀장을 맡았다. 이 시기 고졸 신입 여직원이었던 양향자를 성장시켜 장래 임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는 비휘발성 메모리의 일종인 EEPROM을 개발하고 있었다. 기술 개발은 잘 진행되었으나 산업적 가치는 미미했다.

89.03에 삼성반도체 메모리개발 2담당을 맡았다. 1991년 상무급 연구위원으로 승진했다. 1993년 초 삼성반도체가 삼성전자 메모리본부로 소속이 다시 바뀌면서 93년 12월까지 같은 일을 맡았다. 94.01 ~ 95.12에 삼성전자 MEMORY본부 MEMORY설계를 맡았다.

90년대 초에는 MASK ROM을 만들었다. 당시 MASK ROM은 일본의 어느 회사가 독점해서 닌텐도 게임기에만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대만 기업들이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삼성전자가 개발하자 대만 매출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EEPROM 시절보다 개발은 쉬우면서도 승진은 빠르게 했다. 이 때부터 그는 시장에서 경쟁력있는 산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경영자적인 마인드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96.01 ~ 97.01에는 삼성전자 MEMORY본부 설계실장 (전무)을 맡았다. 97년 2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MEMORY개발사업본부장 (전무)을 맡았다. 99년 메모리 개발사업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해 99년 12월까지 근무했다.

2000년 1월에는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 (부사장)에 선임됐다. 2001년에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 (사장)으로 승진해서 2004년 1월까지 근무했다. 참고로 같은 시기 LSI사업부 LSI 개발실장 (부사장)을 역임한 권오현은 LSI사업부가 적자 부서여서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그 적자 부서를 흑자로 전환시켜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04.01 ~ 05.01에는 삼성전자 기술총괄(전사CTO)을 맡았다. CTO는 최고기술책임자다.

05.01 ~ 07.09에는 삼성종합기술원 기술원장을 맡았다. 07.10 ~ 08.05에는 삼성종합기술원 기술원장을 겸래서 전략기획실 신사업팀장도 맡았다.

2008.05부터 2009년까지 삼성전자 신사업팀장으로 재직했다.

2010년 삼성전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2013년까지 삼성전자의 고문으로 있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모교인 KAIST 동문회장을 맡았다.


2.2. SK 시절[편집]


2014년 SK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SK텔레콤 부회장으로 재직했다. 이와 함께 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ICT기술성장위원장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최태원 SK 회장이 ICT 기술을 통해 그룹 성장을 주도할 수 있는 인재로 임 부회장을 영입할 것을 최고경영진이 지시,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SK는 임 부회장 영입을 위해 삼성측에 양해를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3월 SK하이닉스의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2016년 SK에서 사임했다. 2017~2018에는 SK텔레콤 고문 및 KAIST 총동문회 동문학술장학재단의 이사장을 맡았다.


3. 정계 입문 후[편집]


삼성전자 시절 자신의 부하였던 양향자가 창당한 진보 성향의 한국의희망에 합류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양향자 또한 본인과 마찬가지로 삼성전자 임원 출신이다. 원래 경상도충청도 출신들은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2], 정계에 입문할 때도 보수 정당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데 본인은 경상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진보 성향의 정당에 입당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2023 - 현재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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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사 학위 논문 : PMOS 집적회로 제작 기법을 사용한 seven segment decoder / driver 의 설계 및 제작(1978).[2] 특히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전광역시는 정치 성향이 상당히 보수적인 곳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