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식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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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왕조
| 재위기간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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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디치
| 웨식스
| 519 ~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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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리치
| 웨식스
| 534 ~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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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울린
| 웨식스
| 560 ~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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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올
| 웨식스
| 592 ~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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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올울프
| 웨식스
| 597년경 ~ 61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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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네길스
| 웨식스
| 611 ~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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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첼름
| 웨식스
| 626 ~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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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왈흐
| 웨식스
| 643 ~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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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다
| 머시아
| 645 ~ 648
| 첸왈흐를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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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왈흐
| 웨식스
| 648 ~ 672
|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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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스부르흐
| 웨식스
| 672 ~ 674
| 계보 불명, 첸왈흐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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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위네
| 웨식스
| 674 ~ 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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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트위네
| 웨식스
| 676 ~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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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왈라
| 웨식스
| 685 ~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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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
| 웨식스
| 688 ~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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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델헤르드
| 웨식스
| 726 ~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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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드레드
| 웨식스
| 740 ~ 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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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베르흐트
| 웨식스
| 756 ~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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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네울프
| 웨식스
| 757 ~ 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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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르트리치
| 웨식스?
| 786 ~ 802
| 계보 불명,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웨식스 왕가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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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버트
| 웨식스
| 802 ~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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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울프
| 웨식스
| 839 ~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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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볼드
| 웨식스
| 858 ~ 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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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버트
| 웨식스
| 860 ~ 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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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레드 1세
| 웨식스
| 865 ~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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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대왕
| 웨식스
| 871 ~ 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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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에드워드
| 웨식스
| 899 ~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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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워드
| 웨식스
| 924
| 16일 동안만 재위, 정식 왕으로 볼 것인지는 논란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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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스탠
| 웨식스
| 924 ~ 927
| 잉글랜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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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왕조
| 재위기간
| 권리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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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
| 노르만
| 1066 ~ 1087
| -
| '정복왕', '사생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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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 노르만
| 1087 ~ 1100
| 윌리엄 1세의 3남[1] 두 형이 살아 있었으나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나 윌리엄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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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 노르만
| 1100 ~ 1135
| 윌리엄 1세의 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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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왕
| 블루아
| 1135 ~ 1141
| 윌리엄 1세의 외손자
| 마틸다와 왕위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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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 앙주/플랜태저넷
| 1141년
| 헨리 1세의 딸
| Lady of England로 통칭. 즉위식을 못치뤄서 논란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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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왕
| 블루아
| 1141 ~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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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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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 앙주/플랜태저넷
| 1154 ~ 1189
| 마틸다의 아들[2] 앞서 언급했다시피 마틸다는 즉위식을 치르지 못해 영국의 왕인지 논란이 있다. 헨리 1세의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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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왕
| 앙주/플랜태저넷
| 1170 ~ 1183
| 헨리 2세의 후계자
| '청년왕'. 아버지 헨리 2세와 공동 통치(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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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 앙주/플랜태저넷
| 1189 ~ 1199
| 헨리 2세의 아들
| '사자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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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 앙주/플랜태저넷
| 1199 ~ 1216
| 헨리 2세의 아들
| 영지 없는 왕(흔히 '실지왕'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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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
| 플랜태저넷
| 1216 ~ 1272
| 존 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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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
| 플랜태저넷
| 1272 ~ 1307
| 헨리 3세의 아들
| '롱생크'로 불림. 우리말로는 '장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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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 플랜태저넷
| 1307 ~ 1327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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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 플랜태저넷
| 1327 ~ 1377
| 에드워드 2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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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 플랜태저넷
| 1377 ~ 1399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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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 랭커스터
| 1399 ~ 1413
|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의 장남[3]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계 계승을 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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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 랭커스터
| 1413 ~ 1422
| 헨리 4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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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6세
| 랭커스터
| 1422 ~ 1461
| 헨리 5세의 장남
| '광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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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4세
| 요크
| 1461 ~ 1470
| 에드워드 3세의 3남 라이오넬의 5대손[4] 에드워드 4세의 증조부인 에드먼드 계열은 곤트의 존 계열보다 부계로 서열이 낮기 때문에 자신이 라이오넬의 진외증손녀가 자신의 할머니라는 것을 이용해 아버지 대부터 왕위 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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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6세
| 랭커스터
| 1470 ~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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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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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4세
| 요크
| 1471 ~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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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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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5세
| 요크
| 1483
| 에드워드 4세의 아들[5]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폐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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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
| 요크
| 1483 ~ 1485
| 에드워드 3세의 3남 라이오넬의 5대손(에드워드 4세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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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
| 튜더
| 1485 ~ 1509
|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의 외현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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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 튜더
| 1509 ~ 1547
| 헨리 7세의 차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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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
| 튜더
| 1547 ~ 1553
| 헨리 8세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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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그레이
| 그레이
| 1553
| 헨리 7세의 외외증손녀[7] 메리, 엘리자베스, 메리 1세(스코틀랜드)에게 왕위 계승 순위가 밀렸으나 귀족들이 옹립하여 즉위하였다.
| '9일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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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 튜더
| 1553 ~ 1558
| 헨리 8세의 장녀
| '피의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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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 튜더
| 1558 ~ 1603
| 헨리 8세의 차녀
| 잉글랜드의 전성기를 개막하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왕, 처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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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 스튜어트
| 1603 ~ 1625
| 헨리 7세의 외증외현손자[8]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마거릿의 아들 제임스 5세-제임스 5세의 딸 메리 1세
| 이하 스코틀랜드의 군주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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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 스튜어트
| 1625 ~ 1649
| 제임스 1세의 차남[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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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이 세워진 곳은 잉글랜드인데, 언약도 성립에 따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도 흡수해 모두 호국경을 국가지도자로 옹립하고 국호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 되었다.
아일랜드 왕국 문장1171년 노르만 왕조 헨리 2세의 정복 이래, 1177년 (후에 왕이 되는) 존 왕자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영국 왕의 영지로서, 지배자는 잉글랜드 왕과 동일.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영주들과
켈트 토착 세력이 남아있어 있어 "귀족령"으로 여겨졌고, 실질적 정복, 즉 "아일랜드 왕국"이 선포 된 것은 1542년
헨리 8세의 정복부터였다. 이후
동군연합의 형태로 사실상 잉글랜드 속령에 속하게 되었으며,
올리버 크롬웰의 1625년 원정 이후 1660년 이후로는
잉글랜드 연방의 일원으로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윌리엄 3세의 1694년 원정으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는 확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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